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
1)초의선사의 생애(生涯)
2)초의선사의 사상(思想)
ⓛ 차 사상(茶思想)
② 시 사상(詩思想)
③ 선 사상(禪思想)
3)초의선사의 저술(著述)
ⓛ일지암시고(一枝盦詩稿)
②일지암문집(一枝盦文集)
③초의선과(草衣禪課)
④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⑤동다송(東茶頌)
⑥다신전(茶神傳)
⑦진묵조사유적고(震黙祖師遺蹟攷)
⑧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
⑨초의시고(艸衣詩稿)
4)초의선사의 년보(年譜)
1)초의선사의 생애(生涯)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의 사상과 업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부분에 대해서 주목해야만 한다.
첫째는 차(茶)에 관한 것과, 둘째는 선(禪)에 관한 것과, 세째는 시(詩)에 대한 것이다. 차에 대한 이해는 한국 차문화사(茶文化史)와 차정신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고 선에 대한 이해는 곧 초의스님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진수를 파악하는 길이며, 조선시대 말 삼종선(三種禪)과 이종선(二鍾禪)의 논쟁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에 대한 이해는 조선조 말의 시풍(詩風)에 대한 이해이다. 초의스님을 가리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라고 하니 이에 대한 연구가 없이는 초의선사를 말할 수 없으리라. 우선 초의선사의 생애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선사는 1786년 조선 정조(正祖) 10년 병오(丙午) 4월 5일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務安郡 三鄕面)에서 태어났다. 속성(俗姓)은 장(張)씨이며 흥성(興城)이 본관이다. 자는 중부(中孚) 법명(法名)은 의순(意恂), 초의(艸衣)는 염화지호(拈花之號)이다. 또다른 호(號)조서는 해옹(海翁), 해양후학(海陽後學), 해상야질인(海上也耋人) 일지암(一枝庵) 우사(芋社) 자우(紫芋)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초사(艸師)라고도 했다.
스님의 출생과 생애에 관해서는 신헌(申櫶)이 편찬한 ‘사호보제존자초의대종사의순탑비명(賜號普濟尊者艸衣大宗師意洵塔碑銘)’과 이희풍(李喜豊)이 찬술한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 그리고 구계화상(九階和尙)이 저술한 「동사열전(東師列傳)」 중 ‘초의선백전(艸衣禪伯傳)’, 유경도인(留耕道人)이 저술한 ‘초의대선사운(艸衣大禪師韻)’ 등에 보이고 그 외로 진도(珍島) 사람 우당(愚堂)이 쓴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庵序)’와 허소치(許小痴)의 ‘몽연록(夢緣錄)’과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에 잘 나타나 있다.
스님의 가계(家係)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고, 어머니가 큰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다섯살(1790년)이 되는 해에 강에서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건져준 사람덕분에 살아난일이 있었고, 열다섯살이 되던 해에는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운흥사(雲興寺)로 찾아가 벽봉민성(碧蜂敏性)스님께 의지하여 출가 하였다.
이곳에서 불경(佛經)을 익히고 있다가 열아홉(1804년)이 되는 해에 영암(靈岩)의 월출산(月出山)에 혼자 올라가 산세가, 기이하고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취해 있던중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깨친 바 있어 가슴에 맺힌 것이 시원하게 풀리니 가는 곳마다 별로 꺼릴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후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와서 완호(玩虎)스님을 뵙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초의(艸衣)라는 법호(法號) 역시 이때 받은 것이다. 완호스님은 연담(蓮潭)스님의 법손(法孫)으로 조계문인(曹溪門人)이다. 그 법맥을 보면 서산청허(西山淸虛)스님에게서 편양언기(鞭羊彦機)스님이 나왔고, 편양스님에게서 풍담의심(楓潭義諶)스님이 나왔고, 풍담스님에게서 월담설재(月潭雪齋)스님이, 월담스님에게서 환성지안(喚惺志安)스님이, 환성스님에게서 호암체정(虎岩體淨)스님이, 호암스님에게서 연담유일(蓮潭有一)스님이, 연담스님에게서 백련도연(白蓮禱演)스님이, 백련스님에게서 완호윤우(玩虎倫佑)스님이, 완호스님에게서 초의의순(艸衣意洵)스님이 나온것이다.
이때부터 대흥사를 떠나지 않고 경전을 배우면서 틈틈이 범자(梵字)를 익혀 범어의 뜻을 통하고 또한 탱화(幀畵)를 잘 그려서 당나라 오도자(吳道子)의 경지에 이르렀다. 스님께서 남기신 신상(神像)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현재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는 영정신상(影幀神像)은 거의 대부분이 스님께서 손수 금어(金魚)가 되어 그리셨거나 증사(證師)가 되었던 작품이다. 유독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과 준제보살상(準提菩薩像)을 좋아하여 그리셨다. 지금도 대흥사 유물관에는 사십이수십일면관세음보살상(四十二手十一面觀世音菩薩像)이 두 점이나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단청(丹靑)도 잘 해서 조사(祖師)스님들을 모신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짓고 손수 단청을 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여(禪餘)에 익힌 글씨는 일가를 이루어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쓰셨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일생의 지음(知音)이 되었으나 추사체에 영향을 받지 않은 별개의 글씨를 썼다.
24세(1809년)에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와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과 만나 깊이 사귀면서, 다산에게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워 유학에도 정통하였고, 선경(禪境)에 들어 운유(雲游)의 멋도 누렸다. 2년 후 26살(1811년) 되던 해에는 대흥사 천불전에 불이 나서 가람 아홉동이 하룻밤새에 다 타버렸다. 그래서 스승을 따라 불사에 진력하였으며, 더구나 가까이 지내던 도반 아암혜장(兒菴惠藏)스님이 입적하시니 스님의 쓸쓸한 마음은 다산 선생과 더욱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이듬해(1812년) 가을 9월 12일에는 다산선생과 그의 제자 윤동(尹峒)과 함께 월출산 백운동(白雲洞)에 들어가 놀면서 백운동 외경을 그렸다. 백운동에는 십이승경이 있는데, 옥판봉(玉版峰), 산다경(山茶徑), 정유강(貞蕤岡), 모란체(牧丹砌), 취미선방(翠微禪房), 백매오(白梅塢), 창하벽(蒼霞壁),유상곡수(流觴曲水), 홍옥폭(紅玉瀑), 풍선(風墠), 정선대(停仙臺), 운당원(篔簹園)이다. 이때 그린 그림이 백운도(白雲圖)이다. 그 다음장에 십이승경(十二勝景) 마다 다산선생과 초의선사가 시(詩)을 번갈아 지었으며 맨끝장에는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도(茶山圖)를 붙이고, 다시 윤동이 발문을 지어 한폭의 시축도(詩軸圖)를 만들었다. 이 백운첩(白雲帖)은 최근까지 강진 사람이 소장하고 있다가 서울 인사동의 통문관(通文館) 주인 이겸노(李謙魯)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그 뒤 다시 인천으로 팔려갔다.
30세(1815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갔는데, 가는 도중 전주(全州)에 들러 명필 이삼만(李三晩) 등과 사귀어 한벽당(寒碧堂)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즐겼으며 서울에 올라가 두릉(杜陵)에 사는 다선선생의 아들 유산(酉山:丁學淵), 운포(耘浦:丁學遊)와 자하(紫霞:申緯), 해거(海居:洪顯周)등과 만나서 같이 두해 동안을 놀았다. 이때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산천 김명희(山泉 金命喜), 금미 김상희(琴糜:金相喜)와도 사귀었다.
2년 후 32세(1817년) 봄에는 추사와 동로 김재원(東老 金在元) 등과 함께 시회를 하고 헤어져 경주로 내려가 불국사(佛國寺)를 구경하고 기림사(祇林寺)에 가서 천불(千佛)을 점안(點眼)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천불을 모실 천불전상량문(千佛澱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千佛記)를 지어서 모시었다.
이때 경주에서 대흥사로 옮기던 천불 중 300분을 모신 배가 폭풍을 만나 표류해서 일본의 나가사끼(長崎)에 갔었다. 이듬해(1820년7월15일) 다시 모시고 귀국하여 돌아와 천불전에 함께 모셨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이때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만들고 그 절목(節目)을 손수 써주시고 가셨다.
38세(1823년)에는 대둔사지(大芚寺誌) 간행사업에 가담하여 사지편찬을 도왔다. 본래 대둔사지는 그 행방을 알 길이 없고 다만 죽미기(竹迷記)와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에 기록이 전하고 있었다. 이를 기초로하여 의견을 첨부해서 사지를 편찬했으니 초의, 수룡(袖龍)스님이 편집하고 호의(縞衣), 기어(騎魚)스님이 교정하고 완호(玩虎), 아암(兒菴)스님이 감정(鑑定)을 해서 대둔사지를 편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지를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필사했다.
이듬해 39살(1824년) 때에는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했다. 이 암자는 스님께서 일생동안 은거하셨던 곳으로 스님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곳이요. 차문화를 펴던 자리이기도 하다. 스님은 이곳에서 선(禪)의 논지(論旨)를 바로 세워 초의선과(艸衣禪課)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를 저술하였고, 차문화를 부흥시키고저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저술 초시(抄示)하였다. 이 밖에 많은 시(詩)와 잡문(雜文)들이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스님께서 일지암을 짓고서 읊은 시 한 수가 있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었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45세(1830년)에는 다신전(茶神傳)을 펴내서 차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도록 했다. 이는 차를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만 완독하면 차를 만들어서 끓여 마실 수 있도록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차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다신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해 가을에 스님께서 두 번째로 서울에 가서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에게 스승님(완호스님)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해거도인께서 겨울 내내 선비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즐기다가 보니 비문을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훗날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에게 부탁해서 짓고 추사 김정희의 아우 금미 김상희(金相喜)가 써서 비를 대흥사비전에 세웠다.
46세(1831년)에는 스님께서 그동안 화운(和韻)하거나 지으신 시(詩)들을 한데 모아서 초의시고(艸衣詩藁)라고 제명하여 시집 한 권을 만들었다. 이 시집의 서문은 당시 유가(儒家)의 사표(師表)라고 하는 연천거사(淵泉居士) 홍석주(洪奭周)와 조선조 시의 명인(名人)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맡아 지었다. 이때 스님은 시작법(詩作法)에도 완숙하여 생애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시를 지었다. 이듬해에도 서울에 머물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일지암으로 돌아왔다.
스님의 나이 48세(1883년) 때에는 조용히 일지암에서 지내면서 뜰에 대나무를 심었다. 이때 추사의 아버지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선생이 일지암으로 스님을 찾아오셨다. 유당 선생은 이곳에서 가까운 완도 고금도(古今島)에서 와서 4년여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때 자기의 아들 추사 김정희와 친숙하게 지내는 초의스님의 인물됨을 한 번 보고 싶어 유배지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일지암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며 초의스님을 만나보니 그 덕행이 지고(至高)함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유당 선생은 초의스님의 인격에 반해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또 초당 뒤에 있는 유천(乳泉)의 물맛이 소락(酥酪)보다도 좋다고 극구 예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일지암을 방문한 유당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 관악산 밑에 은거하다가 4년 후(1837년) 숨을 거두었다.
50세(1835년) 봄에 진도사람 허유(許維)가 일지암으로 스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치(小痴) 허유는 재주는 있으나 견문이 부족하고 스승이 없어 화법(畵法)을 몰라 망설이다가 스님을 찾아온 것이다. 이로부터 삼년 동안을 꾸준히 화법과 시학(詩學), 그리고 불경과 차(茶)를 배웠다. 훗날 스님의 소개로 추사의 제자가 되어 한국 남종화(南宗畵)의 선구자가 되었다.
52살(1837년) 봄에 일지암에서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 하였다. 동다송은 해거도인 홍현주가 부탁을하여 저술한 것인데, 동국(東國)에서 생산되는 차를 게송게송(偈頌)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모두 31구송(句頌)으로 되어 있는데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나라 차의 우월성 등을 말했다. 또 각 구마다 주(註)를 달아 자세한 설명을 첨가해서 알아보기 쉽도록 해놓았다.
동다송은 한국차의 성전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으며 차의 전문서로는 유일한 것으로, 다만 아쉬운 것은 스님의 친필본 동다송이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발굴 소개된 동다송은 모두 4종류로써, 신헌구가 필사한 다예관본(茶藝館本)과 석오 윤치영(石梧 尹致英)이 필사한 석오본(石梧本)과 대흥사의 법진(法眞)스님이 필사한 법진본(法眞本)과, 송광사의 금명(錦溟)스님이 필사한 금명본(錦溟本)이 있다.
이듬해 53살(1838년) 되던 해 봄에 일지암을 출발하여 서울을 거쳐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갔다. 처음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러 간 것이다. 두루 둘러본 뒤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구경하고 돌아올 때는 다시 한양(서울)에 들러서 해거도인의 시집(詩集)에 발문(跋文)을 지었다.
해거도인은 순조의 부마로서 시에 능하고 학문이 깊어 존경받아오던 분인데, 사문(沙門)의 몸으로 그의 시집에 발문을 쓰게 되었음은 참으로 고금에 드문 일이다. 더욱이 동다송 역시 해거도인의 부탁을 받고 지었다는 점에서 스님과 해거도인의 친분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조선조 사회에서 천대 받던 승려의 신분으로 유가의 빼어난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나눈 것은 오직 스님의 깊은 학문이 그들로 하여금 존경하게한 것이다.
스님이 55세(1840년) 때에는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사호(賜號)를 받았다. 스님은 호남팔고(湖南八高) 중에서 한 분으로 그 학덕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헌종이 소치(小痴)에게 묻기를 ‘호남에 초의라는 승(僧)이 있다는데 그 지행(持行)이 어떠한가?’ 하였다. 소치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고승(高僧)이라 일컫습니다. 내외전(內外典)에 정통하며 사대부와 종유(從遊)가 많습니다’ 라고 했다.
이처럼 스님의 학덕이 널리 알려져 많은 선비들과 교유했으며, 왕사나 국사제도가 폐지된 조선시대에 헌종으로부터 사호를 받았다는 것은 오로지 스님의 학덕과 지행이 널리 모든 선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왕사제도가 폐지된 조선 중기 이후에 사호를 받은 사람은 스님 외에는 없었다.
이듬해 여름에는(1841년) 두륜산 마하연에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새로 짓고, 보련각에 서산대사를 위시하여 12대 종사(十二代 宗師)스님과 12대 강사(十二代 講師)스님, 역대조사(歷代祖師) 고승대덕(高僧大德)스님 등 172분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이때 추사는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 가서 있었는데, 소치편에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다실(茶室)의 현판을 써서 보내왔다. 이 현판은 지금도 대흥사 동국선원(東國禪院)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이후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도 써서 보내왔으며,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걸작의 경문(經文)도 써보내 주었다. 이런 것들은 추사 당대의 최고의 절필로서 세상의 진귀한 보물이다. 애석하게도 그 원본은 하나도 없이 수집가들의 손에 흘러들어가 버렸다.
58세(1834년)에는 스님께서 고향에 찾아간 감회를 시로 옲었다.
‘멀리 고향을 떠난 지 사십여년 만에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네.
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 데 없고,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욱마다 수심에 차네.
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아서라 수구(首邱) 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遠別鄕關四十秋 歸來不覺雪盈頭
新基草沒家安在 古墓笞荒履跡愁
心死恨從何處起 血乾淚亦不能流
孤笻更欲髓雲去 已矣人生傀首邱
사십여 년만에 찾아간 고향. 늙은 몸으로 백발을 이고 찾은 고향, 어린 동몽의 기억으로 옛 집을 그리워하다 찾아간 고향이 이미 거덜난 쑥대밭이란다. 누가 슬프지 않으랴 돌보는 이 없어 옛 묘에는 이끼만 가득 끼었고, 소식조차 물을 사람이 없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고향 언덕쪽으로 향하고 죽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고향을 쉽게 잊으랴, 마음은 죽고 상했는데 한은 뼈 속 깊이 사무치고 눈물이 앞을 가려 먹장삼만 적신다.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수구한다는 말 하지 말라 부끄럽구나.
62세(1847년)에는 진묵조사유적고(震黙祖師遺蹟攷)를 찬술(撰述)했다. 예전에 전주에 갔을 때 진묵조사에 대한 실기를 은고(隱皐) 김기종(金箕鍾) 선생으로부터 자세히 들었는데, 전주 봉서사(鳳棲寺)의 스님이 찾아와 진묵조사의 기문(記文)을 청했다. 이에 스님께서 전에들은 바를 기록하여 상하 두권으로 묶어 진묵조사유적고를 저술 하기에 이른 것이다.
66세(1851)에는 석오 윤치영(尹致英)과 위당(威堂) 신관호(申灌浩)가 초의스님 시집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에 발문(跋文)을 썼다. 이때 석오 윤치영은 일지암을 방문하고 스님이 새로 창건한 대광명전신건기(大光明殿新建記)를 짓기도 했으며, 또 동다송 석오본을 필사하기도 했다. 이 동다송은 서울의 이일우(李一雨)씨가 소장하고 있다.
71세(1856년)에는 금란교계(金蘭交契)를 사십이년간이나 깊게 나누던 추사 김정희가 서울 관악산 아래서 숨을 거두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을 때 대정(大靜)까지 찾아가 반년 동안을 함께 유배지에서 살면서 위로하였고, 용호(蓉湖:서울)에 있을 적에는 같이 두해를 지냈다. 방외청교(方外淸交)를 나누던 이들은 항상 외롭고 한적한 곳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정담을 나누었다. 이처럼 지내다가 홀연히 추사가 먼저 떠나니 스님은 그의 영전에 제문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지어 올리고 눈물로 작별을 하고 산사 일지암(一枝庵)에 돌아온 뒤로는 쓸쓸하게 지냈다. 그토록 좋아아던 시도 짓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오직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산문 밖에는 일체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생각 밖에서만 이루어 놓았고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의 풍체는 범상(梵相)으로 위엄이 있고 뛰어나서 옛날 존자(尊者)의 모습과 같아 여든이 넘어서도 소년과 같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대교(大敎)를 간포(刊布)하는 일이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으나 곧바로 암자로 돌아오셨고,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에서 무량전(無量殿)을 짓는 모임에도 주선(主禪)의 자리에 모셨지만, 어디든 잠시 응했을 뿐 곧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리하여 줄곧 일지암에 주석(住錫)하셨는데, 하룻밤에는 몸져 누우셨다가 시자(侍者)를 불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跏趺坐)를 하시고 앉아 홀연히 입적(入寂)하시니, 그때 세수(世壽)는 81세요 법랍(法臘)은 65세로서 조선 고종(高宗) 3년 8월 2일이었다. 스님이 입적하신 지 오래되도록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며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다비(茶毘)를 마친 뒤에 제자 선기(善機) 범인(梵寅) 등이 영골(靈骨)을 받들어 대흥사 비전에 부도(浮屠)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이때가 고종 8년 신미년(辛未年) 4월로 입적하신 지 5년째 되던해 봄이다. 이때 송파거사(松坡居士) 이희풍(李喜豊) 선생이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을 찬술했다. 그후 병조판서를 지낸 의금부사(義禁府事) 신헌(申櫶)에게서 비명(碑銘)을 얻어 그 옆에 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문은 신헌이 추금(秋琴) 강위(姜瑋)에게 부탁해서 대신 지은 것이다. 이 비를 세우기는 스님이 입적하신 뒤 75년만인 1941년 4월에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泳)스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스님께서 남기신 저서로는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초의집(艸衣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 초의선과(艸衣禪課),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진묵조사유적고(震黙祖師遺蹟攷),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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