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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을 읽고

리차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을 읽고 | 들돌의 책이야기
전체공개 2007.09.02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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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시작한 공부의 즐거움에 푹 빠져 지내던 학기 초 어느 날,

자연과학개론을 맡은 젊은 강사가 강의를 마치면서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과학을 가르치지만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다른 것이니까요.”

저는 방금 끝난 강의 내용이 우주 생성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강사의 말이 수업 도중 한 학생에게서 나온 성서의 창세기 관련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대답이자 설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중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고 피력하는 그가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과학과 달리 종교는 과학으로부터의 피난처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NOMA(nonoverlapping magisterium: 겹치지 않는 교도권)라고 한다는 것을

그때 저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저는 신()에 관한 한 불가지론자적(?) 입장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는데요.

제가 귀가 얇으면서 의심까지 많은 전형적으로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로서의 열정이나 냉정 또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볼일이 있어서 저를 찾아온 어떤 이는

책상 한쪽에 밀쳐두었던 책의 제목 《만들어진 신》만 보고서도

"누군지 참 용기 있는 사람 같다"는 한마디를 남겨두고 (책은 펼쳐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버렸는데

모순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한다는 뜻 말고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은

원제 《God Delusion》을 보는 대다수 서구인들의 반응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학이라고 해서 신의 부재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증명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설명해내는 데 있어서도 어쩔 수 없이 틈새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도킨스 역시 불가지론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의 지향은 철저하고 완벽하며 냉철하고 전투적이기까지 한 무신론에 맞춰져 있습니다.

 

*****

과학자들이 볼 때, 진짜 전쟁은 합리주의와 미신 사이에 벌어진다. 과학은 합리주의의 한 형태인 반면, 종교는 가장 흔한 형태의 미신이다. 창조론은 단지 그들이 더 큰 적이라고 여기는 종교의 한 가지 증상일 뿐이다. 종교는 창조론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창조론은 종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100쪽)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도킨스가 "신은 없다"고 말하는 도처에서 신의 존재 가능성은 사라지고 무너집니다.

경전에서 역사에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과학이 또 다른 의미의 종교인가? 그는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과학과 종교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역시 그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종교 없이 선해질 수 있는가?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의 기여와 공헌마저 부인해야 하는가? 그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종교도 자신보다 더 우월적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종교는 기본적으로 아집에 차있고 배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올바라 보입니다.

사악하고 비정하며 폭력적인 신과 온건하고 온화하며 자애로운 신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도

그런 구분조차 신의 존재를 설명하거나 증명하는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킨스는 아브라함을 공동 조상으로 하고 있는 세 가지 유일신 종교에 초점을 맞춰두고 있는데요.

그는 1만 년도 되지 않는다는 지구의 나이를 믿지 않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설계자로서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인간의 이성 발현을 용납하려 들지 않는 신의 속내를 못미더워하고

이기적이고 시기심과 질투심 가득한 신이 말하는 사랑과 용서라는 말을 신뢰하지 않으며

선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나서서 철저한 악행을 저지르게 하는 신의 섭리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는 무신론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게 도킨스의 바람이었던 모양이지만

제 즐거움과 경탄은 6백 페이지 가까운 분량을 재미있게 읽은 그것 뿐,

저는 끝내 도킨스의 추종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신들이 직접 나서서 싸운 것은 아주 오랜 전에나 있었던 일,

지금은 그 어떤 신도 모습을 드러내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믿을만한 인간을 내세워 대리전을 벌일 뿐이지요.

그러니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은 오직 인간뿐…….

 

신이 없어도 착하게 살 수 있겠느냐고 누가 물으면 그럴 수 있겠다고 답하겠지만

지옥이 무섭지 않냐고 또 누가 물으면 천국도 그다지 부러워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것이지만

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신론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책에서 읽은 매우 타당한 이론을 내세워 누군가에게 '신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별 다섯 개를 줄 수 있는 책을 만난 것만은 분명한 행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 개 주기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이가 분명 있을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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