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00년 한국불교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떠하며, 앞으로 어떠해야 할까? 『우리역사 최전선』,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등을 통해 한국인의 대외관을 비롯해 친미와 반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대와 전근대 등 한국 근대 100년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토론했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와 허동현 경희대 교수가 이번에는 불교를 주제로 다시 지상격론을 벌였다.
이들 두 교수는 최근 공동으로 펴낸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푸른역사)에서 한국 불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다.
먼저 자신을 “불교사에 대해 학술논문 등 형태로 글 몇 편 쓰는 일개 불자”라고 밝힌 박노자 교수는 한국불교의 역사에 대해 ‘치사(恥史)’, 즉 ‘부끄러운 역사’로 규정했다. 생사를 훨훨 벗어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초월의 상태, 즉 열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인도해야 하는 것이 불교이지만 한국불교사를 통째로 놓고 보면 사부대중이 불은(佛恩)에 보답한 일보다 불은을 배반한 일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박 교수가 한국불교에 대해 주로 비판하고 있는 점은 ‘비불교적’이며 ‘반무소유적’인 모습들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불국사, 석굴암 등 천년고찰을 보며 ‘우리 문화로서의 불교’에 대해 일종의 민족주의적인 긍지를 느끼겠지만 박 교수 자신에겐 “종교의 진실한 얼굴은 가면으로 가린 한 편의 가면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불교계의 권력다툼, 대입기도, 사후에 관련된 온갖 재(齋)나 기도들이 끝이질 않는 등 실제 불교를 인식하는 우리의 수준은 극히 일천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러한 불교계 모습이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지속돼 왔음을 주장한다. 사찰의 노비 소유는 계율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5~6세기부터 억불정책을 펼쳤던 15세기 초까지 이어졌고, 신라시대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 스님을 제외하면 신라말 고승 중 왕궁출입을 삼간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또 이러한 현상은 고려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뿐더러 당시 사찰에선 고리대금업까지 성행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개화기·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불교계의 대일종속적인 근대화가 남긴 짐 또한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어서 호국불교가 단순히 전근대적인 국가와의 유착이 아닌 훨씬 더 무자비한 근대적인 군국주의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부처님이 계획하셨던 승가공동체는 탈국가적이며 친민중적인 일종의 ‘원시 공산주의적’ 공동체였다”며 “한국불교가 나아가야할 길은 무소유의 실천으로 지금 여기에 계급(차별) 없는 사회를 일구어가는 사회주의 실현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박 교수의 이같은 견해와 달리 불교의 명과 암을 함께 봐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정당한 자긍마저 배제한 성찰 과잉은 균형을 잃은 역사 이해”라며 “자긍 과잉이나 성찰 결여 모두 건강한 인식의 적으로 성찰과 자긍이라는 두 날개가 함께 펼쳐질 때 미래를 위한 바른 거울로서의 역사가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으로 불교의 역사를 들여다 본 허 교수는 “우리 불교가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불교계의 타락과 현실순응을 경계하고 개혁하려는 작지만 큰 목소리와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해서도 민족적 긍지의 표상으로 보기보다는 김상현 교수의 말처럼 ‘험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고 이상세계 불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 창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허 교수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백성을 괴롭혔던 문무왕에 대한 의상의 질책, 고려 천태종 무기 스님을 비롯해 조선시대에도 대중을 교화하는 데 몸과 마음을 바친 자비승과 선심승(善心僧)들이 한국불교사에도 많았다”며 “이들 덕분에 한국불교가 오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근대불교와 관련해 “일본의 침략성과 개화파, 불교계 인사들이 몰주체성만을 규탄하거나 주체적 노력만을 애써 높이는 것으로는 한 세기 전 참담한 실패의 역사에서 우리가 져야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혀 박 교수와의 견해차이를 분명히 했다.
이들 두 학자의 말처럼 모든 역사가 현재의 역사이자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라면 역사는 오늘 우리의 지향이 썩지 않게 하는 자양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불교사를 성찰하려는 박노자·허동현 교수의 이러한 격론은 전문성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그 자체로서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992호 [2009년 03월 31일 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