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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금강경 강해 2/도올

 

 

   금세기 歐美 반야경전학의 최고 권위라 할 수 있는 에드와드 콘체(Edward Conze)는 『금강경』을 "The Diamond Sutra"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金剛"과 "다이아몬드"를 일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誤譯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물론 콘체선생이 이것이 오역인 것을 모르고 그렇게 번역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광물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보석으로서 자리잡게 된 것은 대강 19세기 중엽이후, 즉 186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오렌지江 상류지역에서 대량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輝光(Brilliancy), 分散(Dispersion), 閃光(Scintillation) 등의 전문용어로 불리우는 다이아몬드보석의 찬란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들어간 빛이 하부로 새지 않고 상면으로 다시 나오게 고안된 58면의 브릴리안트 커트(Brilliant Cut)라고 하는 특수 연마방식이 개발된 후의 사건이므로, 그것도 17세기말 이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에는 원석의 형태로만 존재했을 것이고, 그 원석의 아름다움은 오늘 우리가 보석에서 느끼는 그러한 느낌을 발할 수가 없다.

 

원래 다이아몬드는 성분으로 말하면 흑연(graphite)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단지 양자에 공통된 성분인 카본(carbon)의 원자가 공유결합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흑연은 벌집모양의 6면체 평면결합이 중첩되어 있는 방식인데, 다이아몬드는 정삼각형 4개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정삼각 뿔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원자가 등거리의 4개의 원자와 결합하고 있는 입체적 방식이다. 따라서 흑연이 쉽게 마멸되는 반면, 다이아몬드는 놀라운, 아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체로서는 가장 강도가 높은, 경성(hardness)를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이아몬드가 형성되는 일차적 조건은 고도의 압력이다. 1955년 제너랄 엘렉트릭에서 1평방인치에 60萬~150萬파운드의 압력과, 750 의 고온의 조건을 만들어 다이아몬드를 합성해 내는데 성공하였고, 오늘날은 약 1억카라트量의 인조다이아몬드가 제조되어 공업용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연 상태에서 킴벌라이트 암석속에 들어있는 다이아몬드는 최소한 지하 120㎞ 이상의 깊이의 압력과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대개는 화산 폭발시에 地上으로 밀려나와 형성된 1차 床(파이프 광상)이나 2차 床(沖積광상, 漂砂광상)에서 채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희귀한 광물이 역사적으로 印度에서만이 채취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現在하는 最古의 다이아몬드로서 알려진 코이누르(Koh-i-noor)의 역사는 14세기초로 소급된다. 무갈제국등의 파란만장의 역사를 타고 흘러내려오다가 1849년 영국이 푼잡지방을 병합하면서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코이누르는 191카라트의 분상광택이 없는 투박한 것이었다. 1852년 그것은 109카라트의 브릴리언트 커트로 다듬어졌고, 1937년 퀸 엘리자베드의 대관식 왕관에 박히게 되었다. 인도에는 역사적으로 골콘다(Golconda)지방의 堆積砂土에서 다이아몬드가 채취되었다. 그러나 서구문헌에 나오는 다이아몬드가 정확하게 이 인도산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출애굽기」 28장 18절에, 대사제의 法依인 에봇에 걸치는 가슴받이에 박히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이야기가 나오는데, 둘째줄에 박히는 보석이름에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다.(우리나라 개역판 성경은 "紅瑪瑙"로 번역하였고 "金剛石"이라 주를 달아 놓았다.) 물론 이것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색깔을 중시하여 선정된 어떤 여타 보석류일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가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이름은 "admas"라는, "정복할 수 없는 것"(the invincible)이라는 뜻의 희랍어에서 왔다. 하여튼 더 이상 없는 강도의 어떤 광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고대로부터 희미하게 있었던 것은 우리가 상정할 수 있고, 그 근원에는 인도산 다이아몬드가 있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으나, 인류의 古代세계에 있어서 다이아몬드가 보편적 개념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상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다이아몬드는 기껏 커봐야 어린애 주먹이상의 크기는 없고 대강은 아주 좁쌀 같은 작은 것임으로 그것이 어떤 무기나 큰 물체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기는 어렵다.

 

『금강경』의 梵本題名은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인데 "금강"에 해당하는 말은 "바즈라"(vajra)이다. 跋折羅, 跋 羅, 跋日羅, 代折羅, 日 등의 음역 표기가 한역불전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바즈라"의 원래 의미는 "벼락"(thunderbolt)이다. 벼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기중에 음전하체와 양전하체 사이에 방전이 생겨 발생한 막대한 에너지가 절연파괴(dielectric breakdown)현상에 의하여 대기를 타고 땅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 "바즈라"의 일차적 의미는 "쩨디까"(cchedika) 즉, "能斷"(자른다)이다. 사실 『금강경』의 올바른 번역은 『벼락경』즉 『霹靂經』이 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청천 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인 것이다. 인도인들의 신화적 상상력속에서는 "벼락"은 인드라신이 휘두르는 원판모양의, 혹은 엑스자 모양(X)의 어떤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실 콘체가 "금강"을 "다이아몬드"로 번역한 것은, "다이아몬드"의 현실적 기능이 그 최고도의 경성으로 인하여, 여타의 모든 물체를 자를 수 있다고 하는 이미지, 여타 석물은 다이아몬드를 자를 수 없어도, 다이아몬드는 여타 석물을 자를 수 있다고 하는 성격이 "벼락"에 상응한다고 하는 전제하에서 그렇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중국인들이 "바즈라"를 "金剛"으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신들이 휘두르는 武器의 이미지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다이아몬드"가 아닌, "가장 강한 쇠"(金中最剛)라는 의미로 쓴 것이며, 대강 鐵製, 銅製의 방망이었다. 그것이 바로 "金剛杵"(금강저)였고, 이 金剛杵의 위력은 특히 密敎에서 중시되었던 것이다.

 

玄 이나 義淨은 "能斷金剛般若"라는 표현을 썼고, 多는 "金剛能斷般若"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무엇이든지 능히 자를 수 있는 금강과도 같은 지혜"라는 뜻이지만, 敦煌의 東南의 千佛洞사원에서 발견된 코오탄語의 『금강경』은 "금강과도 같이 단단한 業과 障 를 자를 수 있는 자혜"라는 의미로 題名을 해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렇게 되면 "能斷金剛"은 "금강과도 같이 자르는"의 의미가 아니라 "금강조차 자를 수 있는"의 의미가 되어버린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본문의 내용에 그 기준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자른다는 것인가? 우리는 보통 불교의 敎義를 苦·集·滅·道라는 四聖諦로 要約해서 이해한다. 인생의 모든 것, 우주의 모든 것, 산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다(苦). 그런데 이런 고통은 온갖 집착을 일으키는 인연의 집적에서 오는 것이다(集).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집착을 끊어 버려야 하고(滅), 그 끊는데는 방법이 있다(道). 苦는 吾人의 所知요, 集은 吾人의 所斷이며, 滅은 吾人의 所證이요, 道는 吾人의 所修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의 원인으로서 발생하는 모든 집착을 끊어 버리면 과연 나는 열반에 드는 것일까? 내가 산다고 하는 것! 우선 잘 먹어야 하고(食), 色의 욕망도 충족되어야 하고, 학교도 좋은 학교에 가야 하고, 좋은 회사도 취직해야 하겠고, 사장도 되어야겠고, 교수가 되어 훌륭한 학문도 이루어야겠고, 결혼도 잘해야겠고, 자식도 훌륭하게 키워야겠고, 자선사업도 해야겠고, 죽을 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죽어 후세에 이름도 남겨야겠고……! 인생의 集緣을 들기로 한다면 끝이 없는 품목이 나열될 것이다. 자아! 이제부터 하나 둘씩 끊어보자!

『금강경』을 공부했으니, 자아! "반소사음수"(飯疏食飮水)로 만족하고, 색골같은 환상도 다 끊어버리고, 좋은 학교갈 욕심도 끊고, 회사 취직 할 생각도 말고, 사장 따위 외형적 자리에 연연치 않고, 학문의 욕심도 버리고, 결혼할 생각도 아니하고 정남정녀로 늙고, …… 다 벼락을 치듯 끊어버리자! 이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인가? 벼락은 과연 어디에 내려쳐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불교의 교의를 "집착을 끊는다"(滅執)는 것을 핵심으로 알고 云云하는 것은 참으로 좁은 소견에서 나온 妄見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을 초연히 사는 척, 개량한복이나 입고 거드럼피우며 초야에서 어슬렁거리는 미직직한 인간들을 世間 佛子의 眞面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기만적인 妄動이 없는 것이다. 벼락은 나의 존재를 둘러싼 대상 세계에 대한 집착의 고리에 내리쳐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금강의 벽력은 곧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제1도, 보통사람들의 멸집에 대한 생각>

 

 

<제2도, 『금강경』이 말하는 멸집>

 

제1도에서는 벼락이 집착의 고리를 끊어도 "나"가 여전히 존재하며 또 대상이란 실체가 엄존한다. 단지 그 고리가 끊겼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고리는 항상 다시 이어짐을 반복할 뿐이다. 제1도에서는 벼락은 집착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떨어진다. "나"가 無化되고 空化된다. 나가 없어지면, 곧 대상도 사라지고, 집착이라는 고리도 존재할 자리를 잃는다. 바로 여기에 소위 소승과 대승이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 이해의 기준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 너무 번쇄한 학구적 논의를 떠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을 분석해보자! 도대체 소승(小乘, hinayana)이란 무엇이냐? 작은 수레다! 그럼 대승(大乘, mahayana)이란 무엇이냐? 큰 수레다! 그럼 소승이 좋은거냐 대승이 좋은거냐? 요즈음 아파트도 모두 작은 아파트보다 큰 아파트 못 얻어서 야단인데 아무렴 큰게 좋지 작은게 좋을까보냐? 큰 수레가 넉넉하고 좋을게 아니냐? 작은 길 가는데는 작은 수레가 좋지, 뭔 거추장스런 큰 수레냐?

 

사실 "히나"라는 의미에는 단수히 싸이즈가 작다는 물리적 사실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용렬하고 옹졸하다"는 가치판단의 의미가 들어 있다. "마하"의 의미에는 상대적으로 "크고 훌륭하고 장엄하다")(magnificent)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그 누가 "히나"로 불리기를 좋아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상적인 불교이해, 교과서적인 불교이해를 잠깐 들여다보면, 누구든지 이런 말을 서슴치 않는다. 남방불교는 소승불교고, 북방불교는 대승불교다. 그럼 버마·타이 등지에서 보는 불교는 소승이고, 중국·한국·일본의 불교는 대승이란 말인가? 마치 소승·대승이라는 말이 규정되는 어떤 고정적 대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어휘속에서는 소승과 대승이 실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불교와 같이 추상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구원의 정신세계를 더듬는 종교적 세계에 소승과 대승이라는 확연한 구분의 기준이 가능할까? 누런 까샤야를 걸친 미얀마의 스님들은 모두 소승불교인이고, 회색의 가사를 걸친 조선의 스님들은 모두 대승불교인인가? 우리가 흔히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나, 모두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소승·대승"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실로 불교를 이해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一大편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소승·대승의 이해가 철저히 "실체화"되어 있는 오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敎相判釋"도 중국불교의 교리체계화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그러한 아전인수격의 서열적 가치판단은 오히려 근원적으로 불교의 이해를 그르치게 만드는 도식성을 조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전해석학의 방편으로 수용할 수는 있으나, 불교의 근본교의를 이해하는 열쇠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승"이란 말은 물론 "대승"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들이 그들의 "대승"됨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적으로 "소승"이라는 말을 지어냄으로써 역으로 대승의 존재이유를 확립하려한데서 생겨난 말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소·대승의 구분개념은 실제로 "소승"과는 무관한 개념이다. 즉, 대승에게는 소승이 존재하지만, 소승에게는 소·대승의 구분근거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남방에 가서 그들에게 우리가 규정하는 의미맥락에서 당신은 소승이냐고 물으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유태인들에게 가서 "구약"을 운운하는 것과 똑같은 바보짓이다.

 

불교사적으로 "소승"이란 주로 "부파불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이란 이 부파불교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나온 어떤 혁신적 그룹의 운동을 규정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대승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에서 규정된 원래의 의미만을 정확히 맥락적으로 파악하고, 그 파악된 의미를 상황적으로, 유동적으로, 방편적으로 적용해야할 뿐인 것이다. 우선 우리의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압축시킨 도식을 하나 제시해보자!

 

 

小乘(Hinayana)

 阿羅漢(Arhat)

 八正道

 

大乘(Mahayana)

 菩薩(Bodhisattva)

 六波羅蜜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도식적 이해 자체가 불교의 근본교의의 이해를 그르치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는데 있다. 지금 내가 이 강의를 하고 있는 곳은 도올서원 제12림이다. 매림마다 우리나라 전국의 각대학에서 약 150명의 우수한 선발된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내 강의를 직접 듣고 있다. 벌써 12림이 되었으니까, 이것을 나의 12번째 대설법이라고 한번 비유적으로 상정해 보자! 우리 도올서원에서는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由戶禮"로부터 "升堂禮"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 과정을 다 거치면 "齋生"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리고 齋生생활을 모범적으로 수차에 걸쳐 완수하면 대중의 추천에 의하여 "齋秀"라는 존칭을 얻는다. 현재 2천여명 정도의 재생이 있으며, 40여명 정도의 존경스러운 재수들이 있다. 물론 도올서원은 순수한 학술기관이며,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허락되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깨달음"을 던져준다는데서는 별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아마도 불타의 최초의 승가의 모습도 이와 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싣달타라고 하는 어떤 실존인물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나 도올 김용옥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평상적인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대 또한 인간이라면 여기에 異意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싣달타라는 인간은 그의 삶의 어느 시점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無上正等覺을 얻었고, 그로 인해 주변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감화를 던지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깨달은 자" 즉 "붓다"라고 부르고 그에게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 몰려든 사람들이 싣달타 주변을 떠나지를 않고 살게 됨에 따라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콤뮤니티 즉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을 僧伽(sam gha)라고 불렀다. 아예 집을 떠나(出家) 전문적으로 승가에 상주하는 사람들을 남·녀 구분하여 比丘(bhiksu)·比丘尼(bhiksuni)라고 불렀고, 그냥 가정을 유지하면서 집에서(在家) 승가에 다니는 사람들을 優婆塞(upasaka, 信士), 優婆夷(upasika, 信女)라고 불렀다. 이 出家二衆과 在家二衆을 합쳐 우리가 초기 승단을 구성한 四部大衆(四衆, 四部衆)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세에는 항상 이러한 집단이 발생하면 집단의식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이 집단 의식은 항상 그 집단을 성립하게 만든 본래정신과는 무관하게 발전해 나가는 상황은 人之常情에 속하는 것이요, 역사의 정칙이다.

 

도올서원에 모여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자기들은 "재생"이라하고, 나는 일반 대학생들과 다르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나는 도올선생의 강의소리(聲)를 직접 들었다(聞)는 강한 프라이드를 갖는다고 생각해 보자!(불교초기집단에서 불타의 소리를 직접 들은 자들은 "聲聞"[ ravaka]이라 불렀다). 이러한 프라이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에게 권위를 주고 디시플린을 주고 더 열심히 공부하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가 지나치고 고착화되고 장기화되면, 그것은 역으로 권위주의(suthoritarianism)와 형식주의(formalism)와 차별주의(distinctionism)를 낳게 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누가 생각해도 바람직하지 않다. 초기의 도올서원의 생동하는 원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될 것이며, 그것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상황이지만, 기득권자들의 권위의 타성과 관성체계에 의하여 눈덩이처럼 굴러가는 역사가 전개될 수도 있다. 바로 초기 불교승단의 상황은 이와같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올서원의 권위주의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으로 "도올선생"의 위치를 평범한 교수가 아닌 극존(極尊)의, 범인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권위의 상징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렇게 도올을 절대의 자리로 높여놓아야만, 그의 소리를 직접 들은 자기들만의 특수성의 권위가 확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의 상황은 정확히 이런 상황이었다. 싣달타의 사후, 불교는 아쇼까(A oka, 阿育王, 治世 268~232 BC)라는 마우리아왕조 제3대의 名君, 轉輪聖王을 만나 크게 그 세를 떨쳤지만, 이러한 세의 확대가 불교승단 내부에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게 된 것은 쉽게 생각할 수가 있다. 포만은 부패를 낳게 마련이다. 아쇼까 治世기간에 이미 보수적인 上座部(Therav··da)와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大衆部(Mah··s·· ghika)의 분열이 생겼고, 이후 이 양대파의 세부적인 분열이 가속화되어 우리가 통칭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부르는 시대가 연출되게 되는 것이다. 이 부파불교시대를 대변하는, 소위 "小乘"으로 규정되는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說一切有部"(Sarv··stiv··din)라고 하는 아비달마 교학불교인 것이다.

 

부파불교의 수도인들이 지향한 이상적 인간상을 우리는 "아라한"(줄여 "라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아라한이라는 말은 원래 초기불교 집단에서 인간 싣달타를 존경하여 부르던 열개의 존칭(十號) 중의 하나였다: 1) 如來(진리에서 온 사람), 2) 應供(응당 공양을 받을 사람), 3) 正遍知(두루 바르게 깨달은 사람), 4) 明行足(이론과 실천이 구비된 사람), 5) 善逝(열반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사람), 6) 世間解(세상을 잘 아는 사람), 7) 無上士(최고의 인간), 8) 調御丈夫(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 9) 天人師(시과 인간 모두가 스승), 10) 佛陀(깨달은 자, 佛), 11) 世尊(복덕을 구유한 자). (정확히 11개인데, 十號를 말할 때는 이중 하나를 뺀다).

이중 두 번째의 "應供"이라는 것이 바로 "아라한"인 것이다. 사실 나도 밖에 돌아 다닐 때, 누구와 식사를 하게 되면 대강 상대방이 식사값을 치루는 상황이 많은데, 내가 꼭 얌체라서기 보다는, 평소때 내가 많이 베풀고 살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얻어먹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應供 즉 아라한이란, 얻어먹어도 그것이 업이 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만큼 존경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다. 사실 이것은 뭐 대단히 특수한 존칭이 아니다. 경주 석굴암에도 十大제자 라한상이 삥둘러쳐 있듯이, 부처의 제자들을 라한이라고 부르기도(十六羅漢), 불전편찬을 위해 一次結集때 모였던 500인의 제자를 보통 "五白羅漢"이라고 부르듯이 그것은 특수명사라기 보다는 일반명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시대에 내려오면 이런 아라한의 의미가 변질되어 수도원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수도인이 도달하는 최고의 성스러운 경지에 해당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無學位로서 아주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有學位인 1) 預流(srota-··panna), 2) 一來(sak d-··g··min), 3) 不還(an··g··min)의 세 位를 거쳐 도달되는 四向四集의 極位로 엄격하게 설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불타시대에는 불타든 제자든 應供의 사람들 모두에게 붙여졌던 이 아라한의 명호가, 부파불교시대에는 완전히 불타에서 분리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앞서 든 예대로 도올서원 재생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도올을 넘나보지 못할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즉 부파불교시대에는 인간이 도달하는 최고의 성자의 경지가 아라한이며, 이 아라한은 절대적인 붓다의 경지의 下位개념으로서 설정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아무리 수도를 해도 붓다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부파불교시대에, 즉 서양에서는 "그노시스"(영지)를 추구하는 지혜운동이 「요한복음」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것과 동시대에, 바로 불교종단 내부로부터 이러한 아라한의 독주·독선·독재의 편협성을 타파하고 누구든지, 즉 出家者나 在家者나를 불문하고 곧바로 불타가 될 수가 있다고 하는 대중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진보세력은 아라한됨을 추구하는 자들을 聲聞, 獨覺(=緣覺)이라 불렀다. 聲聞(sravaka)이란 곧 수도원(사원)내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절차탁마 수행하는 자들이요, 獨覺(pratyeka-buddha)이란 선생이 없이 혼자 산속같은데서 도사연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들, 즉 토굴파들을 가리킨 말이었다. 바로 이들 새로운 진보세력이 이 聲聞·獨覺의 二乘에 대하여 새롭게 내걸은 一乘이 바로 "보살"(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새포도주는 새푸대에 담아야 한다! 보살이라는 개념은 곧 그들이 추구하는 새생명과도 같은 새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푸대였던 것이다. 이 새포도주를 우리가 보통 大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大乘이란 보살운동이다. 즉 보살이라는 개념 이전에 대승이 없고, 대승은 보살과 더불어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이란 무엇인가? 절깐을 신나게 나돌아 다니는 "자유부인들"인가? 새절짓는 개왓장에 큰 이름을 올리는 부잣집 "마나님들"인가? 아니면 스님들 공양을 지어올리는 절깐 부엌의 "공앙주들"인가?

 

"bodhisattva"는 "bodhi"라는 말과 "sattva" 두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bodhi"는 "菩提" 즉 "깨달음"이다. "sattva"는 "살아있는 者" 즉 "有情"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80년대 우리 대학가를 풍미한 노래가사에 "산자여 따르라!"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자!" 그들이 곧 "보살"인 것이다!

一說에 의하면 "sattva"는 "마음"(心)의 뜻이 되기도 하고, "바램"(志願)의 뜻이 되기도 한다. 이 설을 따르면, "보살"은 곧 "깨달음을 바라는 모든 자"의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살운동"의 혁명적 성격은 바로 "보살"이 곧 佛位요 佛乘이라는 것이다. 즉 보살이 곧 부처 자신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싣달타가 곧 보살이었고(本生譚), 이 보살은 곧 붓다 즉 覺者가 된다는 것이다. 보살은 곧 아라한의 정면부정이다. 아라한이 승가라는 제도의 보호를 받는 특수한 디시플린의 出家者에 국한되었다면 보살은 出家者, 在家者,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를 가리지 않는다. 즉 보살에는 僧·俗의 二元的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종교적 세계와 세속의 세계의 근원적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차별주의(distinctionism)여! 떠나가라!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살"에 대한 교과서적 이해는 대강 이러한 것이다. 즉 "보살"이란 부처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부처가 아니되고, 衆生의 구제를 위해 사회적으로 헌신하는 者, 소승이 자기 일신만의 구원을 추구하는데 반하여 대승은 一切衆生과 더불어 구원 받기를 원하는 者, 즉 소승은 此岸에서 彼岸으로 자기 혼자만 타는 一人用보트를 타고 저어가는데, 대승은 많은 사람과 피안으로 같이 가기 위해서 큰 수레, 큰 배가 필요한 者, 그 者가 곧 대승이다!

 

나는 이러한 규정이 구체적으로 불경에 근거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소승에 대한, 즉 "보살"에 대한 이해를 아주 그르치게 만드는 妄見중의 妄見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인간의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구원의 길에는 一人用보트와 萬人用배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의 개인성과 집단성을 기준으로 小·大乘을 나누는 것은 극심한 妄想이다. 아무리 암자에 홀로 사는 미얀마의 스님이라 할지라도, 낙도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라 할지라도 나 혼자만이 해탈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어차피 해탈의 길에는 인간과의 "관계"가 절연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람 백사람 만사람의 量的 차이에 의해서 아라한과 보살의 차이가 가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부처가 될 수 있는 부처가 아니되고 보살노릇한다는 말도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설이다. 부처가 될 수 있으면 언제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야지, 어찌 부처가 되면 대중구원을 할 수 없고, 부처가 아니되고 보살이 되어야만 대중구원이 가능하다는 그따위 엉터리 없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엉터리없는 妄見이 바로 佛法을 흐리게 만드는 마장인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과 보살이 된다는 것은 2원적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부처가 곧 보살이요, 보살이 곧 부처다! 지장보살이 어찌 부처가 아닐 수 있으리요!

 

지금 이러한 보살의 사회성에 관한 논의는 원래 인도사상의 廻向(pari ··ma) 개념에서 발전된 것인데, 회향에는 두가지가 있다. 제1의 회향이란, 善根을 자기의 "행복"의 추구로부터 자기의 "깨달음"의 추구로 방향전환하는 것이다. 제2의 회향이란 곧 나의 善根을 자기의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곧 타인의 깨달음과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2의 회향은 제1의 회향의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2의 회향은 제1의 회향의 논리적 결과이다. 즉 成佛이야말로 보살행의 전제며, 보살행이야말로 成佛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제1의 회향은 무상정등각을 얻는 것이요, 제2의 회향은 그 얻은 무상 정등각을 他人의 깨달음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아라한의 八正道의 궁극에는 正定(samyak-samadhi)이라고 하는 관조적인 三昧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보살의 六波羅蜜의 궁극에는 바로 般若 즉 지혜, "브라기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제1의 회향의 완성은 바로 이 반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 반야를 휙득한 자에게만이 제2의 회향이 가능케되는 것이다. 이 반야를 최초로 명료하게 제시한 경전이 바로 이 『금강경』이라는 희대의 지혜서인 것이다.

 

소승과 대승의 궁극적 區分근거가 바로 "보살"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 보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는 一乘(ekayana)인 것이다. 一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나만이, 혹은 내가 속한 어느 집단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일체의 구분의실이나 아월의식이나 특권의식의 거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우월의식·특권의식의 거부가 곧 대승의 출발인 것이다. 이 대승정신이 바로 보살정신이요, 이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반야사상의 최초의 명료한 규정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따라서 대승의 의미는 金剛能斷의 지혜의 실천, 곧 『금강경』이 설하는 지혜를 실천하는 자에게만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승과 대승의 구분근거는 사회적 실천의 量의 多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지혜의 실천의 유무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엄청난 양의 사회적 실천을 실현했다 하더라도 금강의 지혜의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대승이 아니라 곧 소승이다.

 

그렇다면, 금강의 지혜 즉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부처의 三法印중의 가장 궁극적 法印이라 할 수 있는 "諸法無我"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가장 보편적인 규정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無我"의 가장 원초적 의미를 규정한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내가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데 보살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我相의 부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四相(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의 부정에 곧 그 보살의 원초적이고도 진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금 한국의 대부분의 스님은 소승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소승불교다. 왜냐? 그들은 法堂에 앉아 있는 스님이고 절깐에 들락이는 신도들은 스님아닌 보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스님이라고 하는 我相을 버리고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밥먹을 때도 다로 먹어야 하고, 수도할 때도 따로 결제를 해야하고, 옷도 따로 입어야 하고, 방석조차도 다른 방석에 앉아야 하고, 모든 진리의 척도가 그들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다. 공양주보살은 당연히 공양을 바쳐야 할 아랫것들이고, 자기들은 당연히 공양을 받아먹어야 할 윗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스님들이 자신을 보살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들은 아라한이지 보살이 아닌 것이다. 성철스님은 성철스님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성철스님은 곧 성철보살인 것이다. 현재의 스님과 보살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부엌깐의 공양주보살이야말로 스님이요, 료사채의 자신들이야말로 보살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한국의 승려들은 모두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아무개스님이 아니라, 아무개보살로 모두 그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대승이 되는 것이다. 대승의 기준은 "큰수레"가 아니다. 대승의 기준은 "無我"일 뿐이다. 無我의 반야를 실천못하는 者, 南北을 無論하고, 東西를 莫論하고, 古今을 勿論하고 다 小乘일 뿐인 것이다! 어찌 소승·대승이 고정된 함의나 대상을 가질 수 있으리오!

 

올 봄, 초파일의 신록이 우거질 즈음의 일이었다. 나는 우연히 內雪岳의 百潭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의 會主 큰스님께서 날 알아보시고 만남을 자청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奧室로 안내되었다. 法名이 五鉉! 아무리 그것을 뜯어 보아도 法名의 냄새가 없었다. 나는 우선 그것부터 여쭈었다.

"그건 어릴적부터의 내 이름입니다. 중이라 할 것이 따로 없으니 그 속명이 바로 내 법명이 된 것이지요."

좀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도올선생을 뵙자고 한 뜻은, …… 아무리 여기 백담에 백칸짜리 가람을 짓는다 한들, 그곳에 인물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 자연만 훼손하는 일이지 뭔 소용이 있겠소?"

오현스님은 다짜고짜 나에게 이와같은 제안을 하시는 것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만한 지혜의 책을 여기 백담에 앉아 쓰시오. 백담사가 萬海이래 텅 비었소이다. 도올선생이 여기 오신다면 내가 無今禪院을 통째로 내드리리다. 여기와서 無今禪院 方丈이 되시오. 그리고 도올총림을 만드시오!"

 

스님의 거친 입담에 난 좀 소름이 끼치었다. 방장이니 총림이니 하는 말은 스님과 같이 책임있는 자리에 계신 분이 나같은 속인에게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방장이란 현 조계종 체제상으로 거의 스님의 최고의 尊崇의 지위를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이날 우리의 이야기는 하염없이 깊어만 갔다. 백담에 하염없이 졸졸 흐르는 푸르른 물소리와 함께……

 

스님이 어려서 출가한 시절, 산골의 대가람이라 해봤자 아주 극빈한 처지였다. 그리고 일제덕분에 대처스님들이 절깐을 운영하던 시절이었고, 대처스님들의 생활은 절도가 있었으나 곤궁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스님도 배가 고파 절깐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는데, 또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죽으라고 하루종일 걸식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가 주로 걸식을 하러다니는 동네에, 걸식을 하는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문둥이었다. 아마도 한하운님과 같이 학식 꽤나 있었던 문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걸인의 상당수가 문둥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현스님은 매번 그 문둥이만큼도 밥을 얻을 수 없었다. 그 문둥이는 샘나게도 밥을 곧잘 얻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스님을 바라보는 조선민중의 눈초리가 스님을 문둥이만큼도 대접을 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부하가 치밀어 견딜 수 있어야지요. 에이 빌어먹을 중 때려치고 문둥이나 될란다!"

배고픈 오현스님은 진실로 문둥이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리고 그 문둥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문둥이가 밥을 걸식하는 비법도 전수받고, 그 문둥이와 같이 한 깡통에 밥을 비벼먹고 추울때는 추운 동굴 한 거덕지속에서 껴안고 자고 뒹굴었다.

"처음에 이 문둥이는, 요놈 사미승, 맛좀봐라! 너 정말 문둥이 될래? 하고 참으로 날 문둥이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오현스님이 진실로 문둥이가 될려면 되라하고 분별심을 버렸다는 것을 그 문둥이가 깨닫게 된 어느날, 추운 동굴에서 하루를 지새우고 일어나보니 그 문둥이는 자취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먼동이 트는 새벽이슬에 젖은 한 종이쪽지가 뒹굴고 있었다.

 

"너는 훌륭한 스님이 될터이니 부디 成佛하거라!"

 

눈시울이 뜨거워진 사미승 오현은 문둥이가 사라진 허공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하! 부처님이 문둥이구나!"

이 순간이 바로 그의 생애를 지배한 득도의 순간이었다.

버드나무 밑에서

찌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이것은 한하운님의 "소록도로 가는 길"이란 시의 한구절이다. 그래! 부처님이 문둥이요, 문둥이가 부처님이다.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뭉크러지고, 발톱이 빠지고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눈썹빠지고 코가 뭉그러지고 귀가 찌그러지고, 살갗이 바위처럼 이그러지는, 날로 날로 我相이 없어져가는 바로 그 문둥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이다. 내가 문둥이라면 뭔들 못하겠나? 조선의 스님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은 과연 문둥이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이 인류의 최고의 지혜서, 『금강경』을 說하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이 話頭를 하나 던지려는 것이다. 불교는 관념의 종교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불교는 체험의 종교인 것이다.

부처는 문둥이다.

"'是什?'가 '이 뭐꼬'가 아니라 그냥 '뭐꼬'라 한 김선생님의 일갈이 썩 마음에 들었소이다."

"無今禪院을 헐어버립시다."

"그건 뭔 말이요?"

 

나는 이런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나라 불교가 "坐禪" 때문에 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스님들의 修道의 열정 또한 우리나라 수행불교를 떠바치는 힘이다. 나는 백담사만이래도 결제방식을 바꾸자고 했다. 모든 선원이 똑같은 결제방식을 취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安居란 원래 부처님시대에는 夏安居밖에 없었던 것이다. 冬安居는 불교가 티베트나 중국북방의 추운 지방에 와서 새롭게 발전한 것이다. 夏安居란 인도의 기후풍토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雨安居요, 그 3개월은 우리가 되어놔서 諸方에 行化하는 것이 심히 불편하고, 또 草木·小筮을 殺傷할 염려가 있어 불제자들을 一個所에 집합시켜 禁足시킴으로써 修學을 깊게 하자는 일거양득의 制였던 것이다. 安居라 해서 어떤 정해진 규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안거는 그냥 그대로 둔다 하더래도 동안거 3個月만이라도 스님들을 선발하여 나하고 집중적으로 불경을 공부하게 하는 새로운 制를 設합시다! 3個月동안만이라도 용맹정진 스타일로 독서하고 토론하면서 정진하면, '無'字하나 들고 있는 것보다는, 천만개의 看話가 쏟아질 것이외다."

"좋소! 거참 좋은 생각이구료!"

 

이날 나는 다음날의 일정 때문에 백담을 떠나와야 했다. 바람이 쌩쌩 스치는 칠흑같은 어둠속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뭔 또 쓸데없는 업을 지으려구. 너 같은 속인이 뭘 또 콧대높은 스님들까지 교육한다구래! 그런 네 我相이나 지우려무나!"

 

『금강경』은 禪이 아니다. 『금강경』을 禪으로 접근하는 모든 주석을 나는 취하지 않는다. 『금강경』은 오로지 大乘의 출발이다. 大乘됨의 최초의 기준이요, 최후의 기준이다. 만약 禪이『금강경』과 그 의취가 부합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禪이 "대승"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버트란드 럿셀경은 말했다: "20세기가 인류의 어느 세기보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불행하게도 그에 상응하는 지혜의 증대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21세기는 지식의 세기가 아닌 지혜의 세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구의 소피아는 연금술에 빠지고 말았다. 동양의 금강의 지혜는 연단을 부정하고 我·人·衆生·壽者를 부정했다. 이제 우리는 금강의 지혜에서 모든 종교적 편견을 회통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제 금강의 문을 두드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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