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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또 의문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매번 저에게 큰 도움이 되고있습니다. ┃연기란 모든 것이 상의상자(相依相資)되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알고있습니다. ┃(상의상자란 말은 연기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인데 화엄경상의 용어로 알고있으나 ┃저의 식견 부족으로 資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반야도 연기되는 의존적 존재입니까? 아니면 독존적 존재입니까? ┃교수님께서는 전번에 현장스님의 '전식득지'를 말씀하시면서 ┃식이 변하여 반야가 된다고하셨습니다. ┃그러면 결국 반야도 식에 연기되는 의존적 존재가 아닐런지요.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불필요한 질문은 가급적 삼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資'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상의상자(相依相資)에 쓰인 '자(資)'자(字)의 경우 '돕는다'는 뜻을 갖습니다.
'서로 의존하고 서로 도움'이 상의상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현장이 소개한 신(新)유식 에서 말하는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예로 들면서
'반야도 식(識)에 연기되는 의존적 존재'이기에 "반야도 연기되는 의존적 존재가 아닌지?" 물으셨는데,
먼저 말씀드릴 것은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불교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불교의 가르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불교수행을 하면서 교학적 문제에 대한 의문을 떠올릴 때에도
"불교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 의문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불교수행이 될 수 있고, 살아있는 불교공부가 될 수 있고,
나에게 진정한 이득을 주는(自利) 공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답을 읽을 불교초심자들을 위해 기초교리에 대한 설명을 첨가합니다.)
유식학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마음은 총 8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를 굵게 구분하면,
①오감의 내용을 의미하는 안, 이, 비, 설, 신(身)의 전오식(前五識)과
②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과 분별을 의미하는 제6 의식과, ③
이기심과 자의식의 원천인 제7 마나식과,
④우리의 모든 체험을 저장하고 모든 체험을 표출하는 제8 아뢰야식의
네 묶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일반 중생의 경우 이런 총 8식이 각각의 특성에 따라 작동하는데
부처가 될 경우, 총 8식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전식득지'의 의미입니다.
전식득지란 "識을 전환하여 智를 얻는다."는 의미로, 부처가 될 경우 우리의 식은 다음과 같이 전환됩니다.
① 전오식 -> 성소작지(눈으로 듣고, 귀로 냄새 맡고, 피부로 듣는 등 오감을 서로 바꾸어 사용(五根互用)하는 부처의 신통력) ② 제6 의식 -> 묘관찰지(예를 들어, 유교에서 가르치는 仁義禮智의 四端 가운데 是非之心인 智, 매 순간 순간의 절묘한 분별력) ③ 제7 마나식 -> 평등성지(자의식과 이기심이 사라진 후 얻게 되는 자타평등의 대 자비심) ④ 제8 아뢰야식 -> 대원경지(나의 업종자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업종자를 밝게 비추어 아는 해인삼매의 신통력)
이러한 ‘전식득지’를 예로 들면서 “반야도 식에 연기되는 의존적 존재인지?” 물으셨는데,
“반야도 식에 의해 연기되는지?” 또는 “반야도 식에 의존하는 존재인지?”
또는 “반야도 식에서 연기한 의존적 존재인지?”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해야 정확한 질문이 됩니다.
질문이 애매하긴 하지만, 이 가운데 아마 마지막 의미로 물으신 것 같습니다.
'전식득지'의 지(智)가 지혜(智慧)이고 지혜는 반야의 번역어기에
“반야도 식(識)에서 연기(緣起)한 의존적 존재인지?”의 의미로 물으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존재론적 조망과 인식론적 조망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답할 수 있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조망하면, '반야'는 열반의 경지인 무위법이기에 연기한 것이 아니며
인식론적으로 조망하면, '반야'라는 개념 역시 연기한 것입니다. 비교를 통해 우리의 생각이 만든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질문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존재론적 조망’을 물으신 것 같습니다.
반야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조망할 경우 반야는 ‘연기한 것’이 아닙니다.
‘연기(緣起)한 것’을 유위법(有爲法: 조건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부르고,
‘연기한 것이 아닌 것’을 무위법(유위법이 아닌 것)이라고 부르는데,
존재론적으로 조망할 때 반야는 무위법입니다(實相般若로서의 열반인 擇滅無爲).
그렇다고 해서 ‘독존적 존재’도 아닙니다.
‘독존적 존재’라는 말에는, 무언가 실체가 있다는 생각,
마치 '땅 속의 금덩어리'와 같이 '내가 발견해야 할 마음속의 무엇'이라는 생각이 배어 있습니다.
반야는 그런 실체가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이 사라진 것’이 반야일 뿐입니다.
불교 유식학에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총 8식이 변화한 4지라고 표현하지만
유식학 흥기 이전에 유포되어 있던 <반야경>에서는 반야란 ‘공성에 대한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본 게시판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이런 공성의 반야에 대해 티벳의 쫑카빠 스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합니다.
------------ "추운 겨울 홀로 나그네 한 사람이 히말라야의 산길을 가다가 밤이 되었다. 노숙을 할 경우 얼어 죽을 것이 뻔해서 집을 찾아 헤매다가 추위를 피할 집을 발견했는데, 그 집에는 무서운 귀신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망설이다가, 얼어 죽느니 귀신에 시달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귀신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나그네는 공포에 시달리며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던 중 문이 열리면서 다른 나그네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그 집으로 들어왔다. 그 나그네에게 '이 집이 귀신이 있는 집'이라고 전하자 그 나그네가 말하기를 '귀신이 있는 집은 이 집이 아니라, 저 언덕 너머에 있는 다른 집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공포에 시달리던 사람은 갑자가 마음이 편안해 진다. 이렇듯이, 공의 가르침은 우리 마음속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던 잘못된 착각을 시정해 주는 것일 뿐이다." ------------
불교는 해체법입니다.
‘탐, 진, 치’의 삼독심을 해체하는 것이 불교수행의 요점입니다.
‘번뇌의 해체’, ‘번뇌가 사라짐’은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 조건들이 모여서 유지되는 ‘유위법’도 아닙니다.
‘삼매(定)’의 경우는 ‘유위법’입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가만히 있어야 삼매의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지혜(慧)’는 ‘착각’이 제거된 것일 뿐,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유위법’이 아닙니다.
요컨대 반야는 ‘독존적 실체’도 아니지만, ‘연기한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우개로 무언가를 지울 때, 지우개 자국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지울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과 나’,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착각을 ‘지우는 것’이 반야의 지혜입니다.
물론 범부중생인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반야’라는 ‘개념’은 ‘연기한 것’입니다(반야에 대한 인식론적 조망).
그리고 화엄학 등에서 "모든 것이 상의상자(相依相資)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러한 '인식론적 조망'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체득되는 ‘반야’는 ‘연기한 것’도 아니고, ‘독존적 실체’도 아닙니다(반야에 대한 존재론적 조망).
'잘못된 고정관념의 해체'일 뿐입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최근 바쁜 일이 많아 문답을 며칠 쉬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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