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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불교

불교역사상에 삼학의 수행법이 어떻게 변화해 왔습니까?

 

 

[질문]

불교역사상에 삼학의 수행법이 어떻게 변화해 왔습니까?

안녕하세요?

삼학의 수행법이 초기불교,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밀교, 그리고 조사선까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떻게 골격을 잡아가야하는지와 참고해야할 책들도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많이 알고 싶습니다.

 

 

 

[대답]

┃┃책을 한 권 써보라는 것과 같은 무리한 부탁이지만,

┃┃

┃┃초기불교에서 선불교, 심지어 밀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모든 수행이

┃┃

┃┃'한 맛(一味)'임을 얘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되어 답을 해 봅니다.

┃┃

┃┃

┃┃불교의 가르침 전체를 요약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간단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사성제(四聖諦)입니다.

┃┃

┃┃사성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생로병사하는 생명체(衆生)의 삶은 모두 괴로움일 뿐이라는 고(苦)성제.

┃┃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과 같은 번뇌를 의미하는 집(集)성제.

┃┃

┃┃번뇌에서 벗어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인 열반을 의미하는 멸(滅)성제.

┃┃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써 제시되는 팔정도의 수행을 의미하는 도(道)성제.

┃┃

┃┃이런 사성제, 즉 네 가지 진리 가운데

┃┃

┃┃고성제는 이해해야 하고, 집성제인 번뇌는 끊어야 하며, 멸성제는 체득해야 하는데,

┃┃

┃┃이를 위해서는 도성제인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

┃┃그리고 정견(正見), 정사(思), 정어(語), 정업(業), 정명(命), 정정진(精進), 정념(念), 정정(定)인 팔정도의 수행을

┃┃

┃┃간단히 요약하면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이 됩니다.

┃┃

┃┃악(惡)을 그치고 선(善)을 행하는 것이 계이며

┃┃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 정이고

┃┃

┃┃이를 통해 얻어진 연기(緣起)의 지혜, 공(空)과 무아(無我)의 지혜가 혜입니다.

┃┃

┃┃삼학 수행, 팔정도 수행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러한 공과 무아의 지혜의 체득에 있습니다.

┃┃

┃┃왜냐하면, 공과 무아를 체득해야 모든 번뇌를 완전히 뿌리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계만을 잘 지킬 경우, 내생에 욕계의 하늘나라인 육욕천까지 태어날 수는 있어도 색계의 하늘나라에는 태어나지 못합니다.

┃┃

┃┃계를 잘 지키면서 정을 닦아 초선 이상의 경지를 체득할 경우 비로소 색계나 무색계의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계를 잘 지키면서 정을 닦은 후 혜가 열려야 번뇌가 완전히 제거된 열반을 증득하여 아라한이 됩니다.

┃┃

┃┃계와 정은 번뇌를 누를 뿐이지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

┃┃무아와 공의 지혜가 열려야 번뇌의 뿌리가 뽑힙니다.

┃┃

┃┃나로부터 밖으로 밀치는 마음이 분노라는 번뇌이고

┃┃

┃┃나를 향해 안으로 당기는 마음이 탐욕이라는 번뇌이며

┃┃

┃┃나를 위로 높이는 마음이 교만이라는 번뇌인데

┃┃

┃┃이들 번뇌의 구심점인 '나'가 사라지면, 더 이상 밖으로 밀치거나 안으로 당기거나 위로 높이는 작용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삼학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혜'인데

┃┃

┃┃이런 혜를 얻기 위한 기초수행으로 계와 정을 닦아야 하지만

┃┃

┃┃생이지지(生已知之)라는 말이 있듯이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착하여 戒가 완성된 사람

┃┃

┃┃항상 골똘하게 집중할 수 있어서 定이 완성된 사람의 경우

┃┃

┃┃慧만 닦아 일순간에 아라한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초기불전을 보면, 부처님의 몇 마디 말씀만 듣고 아라한이 된 분들의 예화가 많은데,

┃┃

┃┃그런 분들의 경우 생이지지한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또 선어록을 보면 스승의 몇 마디 말씀에 깨달음을 얻는 분들이 많은데

┃┃

┃┃이 역시 생이지지한 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내가 생이지지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내가 잘 압니다.

┃┃

┃┃내 마음 속에 음욕, 명예욕, 재물욕, 권력욕 등의 탐욕이 있는지 없는지,

┃┃

┃┃화 내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잘난 체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 스스로 잘 압니다.

┃┃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 그 마음 속에 분노와 탐욕과 교만심이 가득할 겁니다.

┃┃

┃┃따라서 대부분이 사람의 경우 계, 정, 혜 삼학을 모두 닦아야 합니다.

┃┃

┃┃

┃┃이상은 삼학 수행의 기본 골격으로 초기불교든 부파불교든 대승이든 밀교든 조사선이든 공유하는 내용입니다.

┃┃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수행을 함께 묶어서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간주한 후,

┃┃

┃┃대승, 밀교, 조사선 등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

┃┃위빠사나 수행의 경우, 매 순간 명멸하는 감각에 집중하게 하는데, 그 목적은 '무상'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이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흘러간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

┃┃"자기동일성을 갖고 지속하는 자아는 없다"는 '무아'의 이치를 깨닫게 되며

┃┃

┃┃'무아'의 체득을 통해 번뇌의 구심점이 사라지기에 탐욕과 분노와 교만도 사라집니다.

┃┃

┃┃또 무아를 체득할 경우 마음 속에서는 자비심이 샘솟습니다.

┃┃

┃┃무상과 무아를 알기에 인생과 우주, 삶과 죽음에 대한 번민이 모두 사라집니다.

┃┃

┃┃존재하는 것은 찰나생멸하는 현상의 흐름일 뿐이며

┃┃

┃┃'나', '삶', '죽음' 등등의 개념들이 모두 허구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

┃┃그런 개념들을 조합하여 만든 종교적 철학적 고민 모두 허구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

┃┃감성적 번뇌와 인지적 번뇌가 모두 사라진 아라한이 되는 것입니다.

┃┃

┃┃

┃┃대승불교의 수행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은 없습니다. 위와 똑같은 방식으로 번뇌를 녹이는 수행을 합니다.

┃┃

┃┃계, 정, 혜 삼학의 수행은 소승부파와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

┃┃물론 동아시아 한문불교권에서는 대승의 지혜는 아공법공의 지혜인 반면,

┃┃

┃┃소승부파의 지혜는 아공법유의 지혜라고 가르치며 대승과 소승의 지혜를 구분하지만,

┃┃

┃┃이런 구분은 인도불교 학승 가운데 청변 계통의 학설일 뿐입니다.

┃┃

┃┃청변의 이론이 삼장법사 현장을 통해 동아시아에 소개되었고

┃┃

┃┃오늘의 우리 불교계에서도 대승과 소승을 구분하는 통설로 쓰입니다.

┃┃

┃┃그러나 월칭의 이론을 계승한 티벳에서는 대소승의 차이는 지혜의 차이가 아니라 자비심의 대소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

┃┃소승은 자비심의 양이 적기에 현생에 열반하는 아라한을 지향하고,

┃┃

┃┃대승은 자비심의 양이 크기 때문에 무한복덕을 축적하여 부처가 되기 위해 보살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

┃┃이상에서 보듯이 소승과 대승의 계정혜 삼학은 다르지 않습니다.

┃┃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소승의 삼학 수행과 함께 복덕을 쌓는 하화중생의 삶을 산다는 점이 차이일 뿐입니다.

┃┃

┃┃

┃┃계, 정, 혜 삼학 수행을 닦는다는 점에서는 밀교 역시 소승, 대승과 다를 게 없습니다.

┃┃

┃┃대승에서 3 아승기 100겁 동안 쌓아야 한다는 복덕을 1생에 모두 쌓기 위해 개발된 것이 밀교수행일 뿐입니다.

┃┃

┃┃또 보살행이라는 원인을 닦아서 성불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이 대승 보살도의 수행인 반면

┃┃

┃┃부처라는 결과를 수행의 원인으로 삼는 새로운 테크닉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밀교는 대승과 차이가 납니다.

┃┃

┃┃보살행의 원인을 통해, 성불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이 대승이기에, 대승을 因乘이라고 부르고

┃┃

┃┃부처라는 결과에 나를 그대로 합치시킴으로써 부처가 되는 수행이 밀교(금강승)이기에 금강승을 果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결과로 결과를 얻는 수행'이라는 의미입니다.

┃┃

┃┃요컨대 대승과 금강승(밀교) 모두 '성불을 위해 복덕 쌓는 수행'을 덧붙인는 점이 공통점이긴 하지만

┃┃

┃┃복덕 쌓기를 3 아승기 100겁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수행하면 대승이고,

┃┃

┃┃현생의 1생에 농축하여 수행하면 금강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

┃┃이해의 편의를 위해 소승과 대승과 금강의 차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학을 통한 지혜의 체득            부처가 갖춘 복덕 쌓기                  복덕 쌓기 기간

    ------------------------------------------------------------------------------

소승           ○                                 ×                                              ×

대승           ○                                ○                                        3 아승기 100겁

금강승        ○                                ○                                         現生의 1生

 

 

 

┃┃조사선의 경우도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현존하는 조사어록에는 계와 정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일화가

┃┃

┃┃破格의 반야지혜와 관계된 것들입니다.

┃┃

┃┃스님으로서 계와 정을 닦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

┃┃그게 아니라면 조사선에 입문한 분들이 대부분 생이지지한 분들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간화선 수행의 경우, 생각의 출구를 막고 의문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如法한 '中道의 수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四句를 막기에 중도이고, '삶 속에서 삶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는 '역설(paradox)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중도입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역설의 궁지'는 중도의 경지입니다)

초기불전에서 가르치는 사상적 중도, 중론에서 가르치는 사구비판의 중도, 법성게에서 노래하는 궁좌실제중도상의 중도를 체득하기 위한 수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책의 경우 가능하면 학술서를 보지 말고, 불전이나 불전번역서를 직접 보면서 공부,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

┃┃서구에서 시작한 현대불교학에는 '훼불의 불교학'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불교의 신앙과 수행을 해치는 내용이 많습니다.

┃┃

┃┃티벳 스님들의 법문집이나 저술의 경우, 신앙과 수행이 교학과 조화를 이루며 균형있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

┃┃www.amazon.com 등의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

┃┃Snow Lion이나 Wisdom 등의 미국 출판사에서 한 해에도 수백 권에 달하는 티벳불교서적을 출간합니다.

 

 

 

 

 

[질문]복덕이란 무엇을 가르키는 말인지요?

 

┃대승에서는 부처의 복덕을 쌓는 기간이 3 아승기 백겁이 소요된다고 하고 밀교에서는 현생에 가능하다고 하셨읍니다.

┃대승에서 복덕을 쌓는 것이 모양만 내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피땀을 흘려 하는 것일텐데 다른 쪽에서는 현생에 가능하다고 주장하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도 그 차이가 자그만치 3아승지 백겁이니 말입니다.

┃첫째, 복덕이란 무엇을 가르키는 말인지요? 6바라밀중에 보시를 가리키는 말인지요?

┃둘째, 구체적으로 대승은 어떠한 방법으로 부처의 복덕을 쌓으며 밀교승은 어떠한 방법으로 복덕을 쌓는지요?

┃복덕을 쌓는 방법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요? 그리고 3 아승지 백겁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요?

┃밀교책들을 읽어봐도 밀라래파의 전기를 봐도 구체적으로 복덕을 쌓은 이야기는 거의 없읍니다. 설사 있다하더라도 대승과 비교해서 3아승지 백겁의 차이를 가져올만한 무슨 차이가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읍니다. 물론 많은 제자를 양성은 했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남방소승이 하화중생에 소홀하고 북방대승은 하화중생에 열심이라는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체적으로 대승이 어떠한 면에서 소승보다 더 하화중생에 열심인지 설명을 듣고 싶읍니다.

 

 

 

 

 

 

[대답]

 

위에 올린 밀교에 대한 설명은 제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티벳 밀교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서는 많지 않지만, 영어 번역서 가운데 밀교의 수행이론에 대해 설명한 것이 무척 많습니다.

복덕을 쌓는 수행의 경우 보시행은 물론이고, 지계행, 다라니 암송, 독경, 오체투지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또 불단에 올리는 보시물의 경우, 둥근쟁반과 같은 만다라 판에

금으로 도금한 쌀, 보석과 같은 유리, 탑 모양의 작은 조형물, '우주, 해, 달, 나무 등을 적은 종이' 등등을 쌓아서

부처님께 올리는 시늉을 하고는 다시 허물고 다시 올리는 시늉을 합니다.

한 번 방석에 앉으면 그런 공양물들을 '만다라 판(둥근 쟁반으로 만다라 그림과는 다릅니다)' 위에서

수 백번 쌓고 허물기를 되풀이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부처님께 올린다는 '의미 수행'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도 한 번 불탑 공양을 올리기 어려운데

만다라 공양 수행을 할 경우 한 번 좌복에 앉아 수 백번 공양을 올리는 꼴이 됩니다.

해와 달, 나무 등등 온 우주를 바치기까지 합니다.

그 공덕이 엄청나다고 봅니다.

또 다라니 암송의 경우,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문자를 수천 번 써 넣은 두루마리 종이를 마니보륜 통에 넣은 후

그것을 계속 돌립니다.

입으로 옴마니반메훔 암송을 할 경우 1회 하는 데 1초 정도 걸리는데,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이 수천 회 적힌 마니보륜의 경우 한 번 돌리게 되면 그것에 씌어진 것 만큼 독송한 꼴이 된다고 봅니다.

부처님 한 분을 모신 법당에서 절을 할 경우 한 번 굽혀 한 번의 절 공양을 올리게 되지만

3000불을 모신 법당에서 절을 할 경우 한 번 절을 하면 3000번 절 공양을 올린 꼴이 됩니다.

만불전에서 절을 할 경우, 공덕 축적의 속도와 정도가 더 강력하겠지요.

이런 것이 성불을 위해 공덕을 축적하는 밀교의 기도법입니다.

모두 '가상(illusion) 수행'입니다.

허무맹랑하게 보일지 몰라고, 이런 가상수행은 초기불교에서도 사용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불전에서 가르치는 자비관 수행의 경우,

직접 자비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좌 틀고 앉아서 가상으로 상상하며 하는 것입니다.

부정관 수행의 경우도,

자신의 몸이나 이성의 몸을 대상으로 해골이 된 모습, 시체가 된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 모두 가상 수행이지만 우리를 강력하게 변화시킵니다.

또, <아육왕전>이라는 불전에서도 가상의 공덕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아쇼카 대왕이 직 전생에 어린 아이일 때 흙장난을 하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 부처님께 ‘쌀’이라며 흙 공양을 올립니다.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 인도 전역을 지배한 아쇼카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교훈은 불교수행에서는 ‘가상으로 올린 공양물’도 실제의 과보를 초래한다고 본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밀교의 가상 수행을 통해 신속히 복덕이 쌓인다는 것이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닐 겁니다.

또 3아승기 100겁의 수행을 한다고 할 때, 겁의 산스끄리뜨 원어는 kalpa이며 이는 원래 시간의 단위인데

밀교에서는 이 kalpa를 번뇌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분별을 버려라’라고 할 때,

‘분별’의 범어 원어는 vikalpa인데 kalpa 역시 분별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밀교에서는 이런 추론에 근거하여

'3아승기 100 kalpa의 수행'을 3아승기 100 가지의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으로 재미있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 의견을 말씀드리면,

밀교는 ‘가상의 놀이’를 통해 불교적 심성을 키워주는 수행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티벳 불교에서는 소승불교가 하화중생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제대로 수행할 경우 자비심을 체득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비심의 대소에 차이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나라가 대승불교권이긴 하지만, 실제 대승불교인의 심성을 갖고 살아가는 분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불교TV에서 본 장면인데, 달라이라마 스님께서 한국불자들에게 <입보리행론>인가를 강의를 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나중에 이계진 아나운서(현 국회의원)가 그 이유를 여쭈니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을 하시더군요.

'나는 보살의 서원을 떠올리기만 하면 그 숭고함에 감동하여 눈물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 정도의 심성을 갖추어야 진정으로 대승 보살도를 사는 분일 겁니다.

 

 

 

츌처: 김성철교수님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http://www.kimsch.net/mettafram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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