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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여행|인도에서 본 팔상록 11 (쌍림열반상)

명상여행|인도에서 본 팔상록 11(쌍림열반상)

‘소설가 정찬주와 떠나는 <인도에서 본 팔상록>’을 연재합니다. 인도를 찾아 붓다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요약한 팔상록(八相綠)의 현장을 직접 순례하며 쓰게 될 이번 연재는 단순한 기행문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여행,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






쿠시나가라의 석양이 나를 명상케 하다

쿠시나가라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붓다가 인간 세상에 태어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여주고 눈을 감으셨던 땅이 바로 쿠시나가라다.
망고처럼 생긴 석양을 보고 눈물을 흘려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석양이 아버지의 인생인 듯 감사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버지를 다시 뵙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지난해 마지막 날 나는 아버지를 선산에 안장시켜 드린 후, 49재 중 초재와 2재까지만 참석하고는 가방 하나만 들고 훌쩍 인도로 떠났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두 가지의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산 날이 많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당신 얼굴이 명경지수처럼 아주 평화로우셨다는 것이다.
애연가였던 아버지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내 산방(山房)으로 거처를 옮기어 두 달을 나와 함께 사셨는데, 가끔 몸을 뒤척거리며 고통을 호소했을 뿐 돌아가시는 순간 온전한 입적을 보여주시었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맑고 선한 모습 그대로셨다. 무릇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숨을 거두는 순간 그의 온 생애가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5년 전 쿠시나가라에 들러 적어 두었던 예전의 노트를 꺼내본다.

붓다의 열반상을 봉안한 열반당이 짙은 안개에 가려 있다.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대지는 늘 안개를 토해낸다. 열반당은 석회암에 새겨진 고대인의 암각화처럼 흐릿하다. 그래도 나그네는 2천5백 년 전의 붓다를 만나러 안개 속으로 천천히 잠입해 들어가본다.
8세기 초 신라승 혜초는 중국의 돈황석굴에 남긴 저서 『왕오천축국전』에 동인도(현 콜카타)로 들어와 한 달을 걸어 붓다가 열반한 구시나국(拘尸那國)에 도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초보다 먼저 5세기 초에 다녀간 중국 승려 법현도 『불국기』 구이나갈성(拘夷那竭城) 편에 이곳의 정황을 본 대로 느낀 대로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른바 『왕오천축국전』, 『불국기』, 『대당서역기』 등 3대 천축국 순례기에 쿠시나가라의 풍경이 세월의 시차를 두고 전해지고 있다.
세 사람의 구법승이 남긴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아쇼카 대왕 때 열반의 성지로 번성하였던 쿠시나가라는 기원후부터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오지가 되어버렸음이 분명하다. 혜초는 자신이 본 쿠시나가라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구시나국에 도착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이다. 성은 황폐해져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곳에 탑이 있는데, 한 스님이 그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다. 매년 8월 8일이 되면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도인과 속인들이 모여들어 큰 불공을 드린다. 그때 공중에 깃발이 휘날리게 되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 광경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이 불교를 믿으려고 신심을 낸다.’



붓다의 마지막 길, 혹은 설법

마가국의 수도 라자그리하를 떠난 붓다는 인생의 마지막 길에 오른다. 그리하여 붓다는 라자그리하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나란다에서 머무신다. 3개월 동안 나란다 망고동산에 머무셨던 것이다.

나란다는 붓다의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가 가장 뛰어난 사리불의 고향이기도 했다. 붓다가 나란다에 머문 까닭은 사리불이 자신의 고향사람에게도 가르침을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리불은 붓다가 나란다를 떠난 이후 붓다보다 먼저 입멸에 든다. 그때로 되돌아가보면 이렇다.
사리불은 쿠시나가라를 향해 가는 붓다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목련이 외도의 무리에게 박해를 받아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붓다 곁을 잠시 떠난다. 목련에게 간 사리불이 말했다.
“벗이여, 그대는 우리들 중에 신통 제일로 불리면서도 왜 외도의 무리들에게 몽둥이를 맞아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갔는가.”
“전생의 업을 받은 것일 뿐이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전생에 나는 부모님을 괴롭힌 적이 있어 지금 과보를 받고 있다네.”
사리불은 목련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입멸에 들 것을 예감하고는 말했다.
“함께 출가하고, 또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서로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제 같이 입멸하는 것이 어떤가.”
사리불은 붓다에게 돌아와 간청했다. 붓다는 그들 두 사람을 먼저 보낸다는 것이 안타깝긴 했으나 세상의 인연이 다했음을 지혜의 눈으로 보고는 허락했다. 그리하여 나란다에는 사리불의 탑이 세워지게 되었고, 기원전 250년경 아쇼카 대왕이 사리불의 탑을 참배하고 난 뒤 사원을 건립하였는데, 그것이 세계 최고의 대학이었던 나란다 대학의 기원이 된 것이다.
나란다를 떠난 붓다는 파탈리 마을에 이르러 신도들의 환대를 받았다. 파탈리는 나중에 마가다국의 수도가 되어 파탈리푸트라라고 불렸는데, 붓다는 강가 강을 건너기 전에 파탈리 마을에서 잠시 쉬었던 것이다. 붓다는 어디에서나 가르침을 멈추는 일이 없었다. 파탈리에서도 붓다는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침을 주었다.
행실이 나쁜 자에게는 다섯 가지의 손해가 따른다. 첫째는 재산이 줄어들고, 둘째는 평판이 나빠지고, 셋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넷째는 죽을 때 고통을 받고, 다섯째는 죽은 뒤 지옥에 떨어진다. 반대로 행실이 바른 자에게는 다섯 가지의 이익이 따른다. 첫째는 재산이 늘고, 둘째는 평판이 좋아지고, 셋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지고, 넷째는 죽을 때 고통이 없고, 다섯째는 죽은 뒤 천상에 태어난다.
붓다는 파탈리 마을에서 다시 강가 강을 건너 밧지족이 사는 마을들을 지나쳤다. 특히 나디카 마을에서는 아난에게 인간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가를 설법했다. 어리석은 중생은 죽은 뒤 끝없이 윤회를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자는 일곱 번 생사를 되풀이하는 동안에 반드시 해탈할 수 있다는 설법을 했다. 여기서 다시 더 정진하면 단 한 번의 생사로 해탈한다고 했다.
붓다는 다시 밧지족의 수도인 바이샬리로 갔다. 붓다는 유녀 암라팔리의 초대를 받아 공양을 받았다. 그녀는 청년 귀족들이 “얼마든지 돈을 줄 테니 부처님의 초대를 우리에게 양보하시오” 하고 말하자, “바이샬리 거리를 다 준다 해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했다.
그런데 그때 비가 계속 내리는 우안거가 다가와 붓다는 동행하는 많은 비구 수행승들을 흩어지게 한 다음, 아난만 데리고 벨루바(竹林)로 들어갔다. 붓다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열반을 생각했다. 육신을 무너뜨릴 만큼의 심한 고통이 갑자기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곧 선정으로 몸을 회복하였다. 기력을 되찾은 붓다가 대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붓다의 소식을 들은 아난이 달려와 말했다.
“무사하시니 안심입니다. 부처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교단에 아무 말씀도 없이 열반에 드실 리가 없다, 이렇게 믿었으므로 한편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붓다가 아난에게 말했다.
“아난이여, 아직도 교단이 나를 의지하고 있단 말이냐. 나는 지금까지 교단 안팎을 가리지 않고 진리를 설해왔지 않느냐. 힘써 법을 가르쳐오지 않았더냐. 나는 교단을 통솔한 적도 없고 교단이 내게 의지한 적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교단에 지시를 했을 것이지만 그런 일이 없지 않느냐.
아난이여, 나는 늙었다. 벌써 여든 살이다. 낡은 수레같이 겨우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선정에 든 나는 평안하다. 아난이여,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아 의지해야 한다.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아난이여, 현재도 내가 입적한 뒤에도 자신을 등불 삼고 의지처로 삼아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진리를 등불 삼고 의지처로 삼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만이 참 수행승으로서 내 뜻에 가장 맞는 사람이니라.”
아난은 붓다의 이와 같은 말씀을 유언으로 들었다. 아난의 예감은 곧 적중했다. 붓다가 바이샬리 부근에 머물고 있는 수행승들을 모두 모이게 한 다음 이렇게 선언했던 것이다.
“여래는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몸소 탁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아난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바이샬리의 거리를 보는구나.”
우안거가 끝나자 붓다는 다시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에 금세공인 춘다의 공양을 받았다. 그런데 붓다는 춘다의 공양을 받고 나서는 심하게 배탈이 나 아난과 함께 길을 걷다가 가사를 깔고 주저앉았다.
“아난이여, 목이 타는구나. 물을 좀 떠오너라.”
“부낫纛決첼? 방금 5백 대의 마차가 강을 건너가면서 강물을 흐려놓았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맑은 카쿳타 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신통력에 의해 강물은 이미 맑아져 있었다. 붓다는 아난이 떠다준 강물을 마시고 다시 걸었다. 아난이 말한 카쿳타 강에 이르러 붓다는 목욕도 하고 물도 마셨다. 그러고는 강가 숲 속에서 누워 휴식을 취했다. 누운 채 아난에게 말했다.
“춘다에게 아침 공양을 받고 오늘 밤 열반에 들게 되지만 춘다가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붓다, 사라나무 사이에 지친 몸을 눕히다

마침내 붓다가 다시 일어나 히란냐바티 강을 건너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숲으로 향했다. 많은 비구들이 붓다를 따라갔다. 이윽고 두 그루의 사라나무에 이르자 붓다가 아난에게 말했다.
“아난이여, 이 한 쌍의 사라나무 사이에 머리가 북쪽이 되도록 자리를 준비하라. 여래는 너무 지쳤으므로 누워서 쉬고 싶다.” 
그제야 아난이 붓다가 열반에 이르렀음을 알고 다급하게 열반 후의 일을 묻자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아난이여, 너희들 출가 수행승은 여래의 장래에 상관하지 말라. 너희들은 진리를 위해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여래의 장례는 독실한 재가 신도들이 치러줄 것이다.”
아난은 더 이상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누워 있는 붓다 곁을 잠시 떠나 사라나무 가지를 붙잡고 비통하게 눈물을 흘렸다.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아직도 수행하고 있는데, 가르침을 주시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려 하는구나.’
아난이 곁에 없는 것을 안 붓다는 한 제자에게 울고 있는 아난을 불러오게 한 다음 다시 당부했다.
“아난이여, 슬퍼하지 말라. 예전에 여래가 이와 같이 가르치지 않았더냐. ‘사랑하는 사람, 절친한 사람과도 반드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 있는 자는 모두 사라지지 않음이 없다.’ 아난이여, 너는 오랫동안 자애로운 행동과 말과 마음으로 여래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너는 더없는 공덕을 쌓았다. 더 정진하라. 너도 머잖아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니라.”
붓다는 숨이 꺼져가는 동안에도 아난을 위해 한마디 충고를 더했다.
“아난이여, 너는 지금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났구나.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스승은 없구나’ 생각하고 있는 듯하구나. 아난이여, 여래가 열반한 뒤에는 여래가 설했던 진리와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니라.”
 열반당 안으로 들어가자 붓다의 열반상이 모셔져 있다. 크기는 약 6.1m이고 기단부에는 머리와 중앙, 그리고 무릎 부분에 각각 세 명의 인물이 새겨져 있다.
붓다의 미소와 붓다의 맨발을 보는 순간 붓다가 누구를 위해 이 세상의 길을 걸으셨는지, 그 의미가 크게 깨달아진다.



아버지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기도

나는 순례자들이 경을 외우는 것처럼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읽는다. 인도로 오기 전 49재 중 초재를 지내고 나서 성불하지는 못할망정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을 닮고자 스스로 다짐하며 써둔 편지다.  

애절한 염불 소리가 귀에 아련합니다. 사람이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이는 것 같고, 사람이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과 같다는 염불 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니 허공일 뿐입니다.
원적(圓寂)에 드시던 아버님의 모습도 내내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새벽에 병석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는데, 편하게 숨을 쉬고 계시는 아버님의 팔을 주물러드린 뒤 저는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님은 순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누구라도 본래 자리가 허공이라면 아버님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셨으니 마냥 애통해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언뜻 듭니다만 그래도 생가지가 찢어진 듯하여 허허롭고 안타깝기는 여전합니다. 유가에서는 비통해하되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본받을 만한 상례(喪禮)라고 합니다. 지나치지 말라는 중도(中道)의 경책으로 받아들입니다.
비로소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만 사십구재의 초재를 지내고 난 오늘 뒤늦게 찾아온 조문객이 눈시울을 붉히며 “우리 문중에 별이 떨어졌다”고 슬퍼하시는 것을 보니 다시 아버님이 생각나고 평소 불효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갑니다.
병석에 계셨던 아버님께서 마지막으로 저에게 하셨던 당부는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정성을 다해 대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남에게 베푸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신 어머님께서는 너의 지갑은 늘 홀쭉한데 네 아버지 지갑은 항상 두툼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버님의 지갑은 당신보다는 남을 위한 지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아버님께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사랑하시어 손자 손녀가 아니라도 누구의 자식이건 간에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주고는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께서 사용하시던 지갑에 깨끗한 지폐를 넣은 뒤, 유택(幽宅)에 누우신 아버님의 가슴에 안겨드렸습니다. 내생에서도 남에게 베푸시고 아이들을 사랑하시려면 당신의 지갑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아버지를 닮은 자식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께서 티끌만큼의 허물도 짓지 않고 사시려고 노력하신 것처럼, 남의 기쁜 일 슬픈 일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아버님처럼 살 것을 다짐해봅니다. 

* 이번 호를 끝으로 <명상여행|인도에서 본 팔상록>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과 사진을 주신 정찬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http://buddhistculture.co.kr/Vol/view.htm?topic=F&origin_id=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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