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일 새벽 4시, 어둠이 내려앉은 괴산 다보사 다보수련원의 수행 풍경. 침묵이 내려앉은 고요한 법당에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로 30여 명의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자들이 좌선을 하거나 행선(行禪)을 하는 등 수행 삼매에 들어 있었다. 수행은 수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찾는 여정임을 말하듯이, 수행자들의 표정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 말씀하신 위빠사나 수행을 바르게 배우고 실제로 수행하여 바른 법을 봄으로써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참 불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번 행사는 특히 매일 저녁, 우 빤디따 스님의 감로 법문으로 말미암아 수행 참가자들에게 더 특별한 기회가 되었다. 이날 저녁 법문에서 스님은 “몸과 마음의 평화와 행복의 길을 열어주는 법(法, Dhamma)을 가르쳐주신 부처님이야말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가장 현명한 의학자”이며, 모든 고통은 번뇌를 뿌리로 하므로, 탐진치(貪瞋痴) 번뇌를 끊어내기 위해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본지는 법문이 끝난 후 스님을 뵙고 인터뷰를 청해 수행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다음 호(2008년 6월호)에서는 4월 1일 있었던 우 빤디따 스님의 ‘부처님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위대한 의학자’라는 법문 내용을 녹취해서 실을 예정이다.
● 위빠사나란, 『대념처경』에 나타나 있는 신(身, 몸의 움직임), 수(受, 감각), 심(心, 마음의 움직임), 법(法, 생각의 대상) 등 사념처(四念處)를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관(觀)’, ‘정견(正見)’ 등으로 번역되며, ‘무상·고·무아 등의 다양한 상황으로 특별히 본다’는 뜻이다. 위빠사나는 온갖 대상의 변화를 통찰하면서 일체의 속박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몸과 마음의 자유를 얻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둔다. 한국에 근본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이 전해진 것은 1988년 우 빤디따 스님에 의해서다.
우 빤디따(U. Pandita) 스님__1921년 7월 28일, 현재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에서 태어난 스님은 7세에 처음으로 사원교육을 받기 시작해, 초급과 중급 과정의 빨리경전 구술시험을 통과했다.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된 후, 여러 스승 아래서 본격적인 교리연구를 시작, 1951년에 실시된 법사(法師, Dhammacariya) 시험에 합격한다. 1950년, 드디어 마하시 스님(1904~1982)의 지도로 위빠사나 수행을 닦게 되었고, 1959년, 마하시 스님과 함께 스리랑카로 건너가 위빠사나 센터에서 3년 동안 위빠사나 지도를 한 후, 1962년에 귀국했다. 1982년 8월 마하시 스님의 입적 후, 마하시 스님의 뒤를 이어 제2대 마하시 수행센터 원장에 취임했다. 그 후 1990년 10월 마하시 센터를 떠나 새로이 세워진 수행센터 빤디따라마의 원장을 맡아 수행자를 지도하고 있다. 특히 스님은 미얀마 내의 수행센터뿐 아니라 미국, 영국, 호주, 말레이시아, 한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순례하며 전법 활동을 하고 있다.
스승께서 뿌려놓으신 씨앗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큰스님께서는 한국에 상좌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을 처음 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8년 이래 이번이 6번째의 한국 방문으로 알고 있는데, 방문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매번 기쁜 마음으로 한국에 옵니다. 점점 법(法)에 관심을 가진 한국 불자들이 많아지고 있고 예전보다 법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마음으로부터 감동을 받았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연만하신데도 불구하고 전 세계를 순례하며 전법을 하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또 특별히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법의 미덕을 전 세계인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미국에는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전법 순례를 갔습니다. 첫째는 스승이신 마하시 큰스님이 외국 수행자들의 요청에 의해 전법 여행을 다녔듯이, 저 역시 스승께서 뿌려놓으신 씨앗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외 전법에 나서고 있습니다. 법을 알고자 하는 이, 공덕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 스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세계 곳곳에 사는 미얀마 민족이 미얀마의 불교문화를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일깨우는 법을 설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건강 비결은 없지만, 가는 곳마다 법으로 맺어진 가족들이 있어 그분들이 필요한 것을 뒷받침해주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밝고 상쾌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을 하였고, 그 수행의 힘으로 마음속의 만족한 마음(삐띠)이 생겨나 혈액순환이 잘되어 건강하다고 믿습니다.
좌선과 행선을 같은 비중으로 행하는 마하시 수행법
마하시 계통의 센터에서는 어떤 가르침으로 수행을 하게 되는지요?
스승이신 마하시 큰스님의 가르침대로입니다. 우리 자신, 즉 몸과 마음 전체가 관찰 영역입니다. 이러한 관찰 영역에서 매 순
간 새로 나타나는 대상들을, 그 대상들이 나타나는 순간에 힘을 실어 집중하여 주시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본성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2,500년 전 인도에서 고타마 붓다께서 설하신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몸과 마음 그 자체를 알아차림(念)의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인식 기관, 즉 안, 이, 비, 설, 신에 의해서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대상 세계를 아는 마음입니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이론적, 분석적이지 않으며 왜라는 의문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괴로움, 불편함을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곧 위빠사나이고 마하시 계통의 센터에서도 그 방법을 가르칩니다. 또 마하시 수행법은 좌선과 행선을 같은 비중으로 행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왜?’라는 의문을 문제 삼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라고 가르치는데, 왜 ‘왜?’라는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는지요?
중요하게 하고 있는 알아차림, 사띠(sati)의 힘이 마음의 대상으로부터 떨어져나가 흩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손바닥만 한 넓이의 외나무다리를 건넌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천천히 제대로 보면서 건너야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거나 이야기하거나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면 산만해지고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번뇌의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띠파타나(satipatthana, 四念處觀)라는 좁은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고 궁금증을 표출하게 되면 집중된 마음이 흩어집니다. 탐욕과 관련된 생각이 들면 탐욕이 생기고, 화가 날 만한 생각이 들면 화가 납니다. 현재 일어나는 물질과 정신현상을 정확히 주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탐진치라는 번뇌가 생기지 않도록 계속해서 매 순간 대상에 집중하도록, 그래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왜라는 의문을 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에만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위빠사나 지혜의 가치가 좋아지게 되면, 스스로 지혜가 생겨나게 되고 스스로 답을 찾게 될 것입니다.
내 안의 세상이 평화로워야
모든 인류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하지만, 정작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 이념, 민족 문제 등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티베트인에게 중국의 무자비한 폭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치유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은 없는 걸까요?
세속적인 방법으로는 답이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도 사회문제, 인간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외부적인 문제이고 세상 문제입니다. 수행을 통해 일시적으로는 해결될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는 계속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부의 평화보다는 내 안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크게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싸움(전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선업(不善業)이라는 적과의 전쟁이고, 또 하나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어떤 존재로서의 전쟁을 말합니다. 두 번째 종류의 적은 멀리 있고, 언제나 만나는 적이 아닙니다. 반면 자기 안에 있는 가장 가깝고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적인 불선업이라는 적, 번뇌라는 적과는 바른 방법으로 싸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평화는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번뇌의 적을 계정혜 삼학으로써 승리를 거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안의 세상이 평화롭게 된다면 자기 주변의 세계가 불안하고 흔들리도록 그대로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전체가 평화로워질 수 있습니다. 몸과 입으로 짓는 종류의 행위들도 바른 수행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자기 안의 세계도 불안하게 흔들리게 만들고 세상도 동요하게 됩니다.
티베트 문제 역시 중국이 티베트를 부당 영입함으로써 계속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겪는 사람도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의 동요로 마음 안의 힘듦과 서로 문제들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조차도 한 사람, 한 사람이나 한 부분은 평화롭게 만들 수 있지만 온 세상 전체를 평화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사람들이 진정한 자애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한 자애를 줄 수 있으면 상대방에 대해 인내, 용서, 희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교만, 성냄에 의해 파생되는데, 자애를 둠으로써 미워하고 혐오하는 종류의 성냄이 없어지게 되고, 연민층을 두게 됨에 따라 잔인하고 극악한 종류의 성냄이 없어지고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루 중 수행 시간을 따로 만들어야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쁜 현대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수행해나가는 것이 옳은 방법일까요?
하루 중 수행을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해서 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의 작은 피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세세생생 피해를 두려워하고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짧은 찰나(이생)에 보장 없는 이익들, 즉 세속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보장된 이익을 줄 수 있는 이익을 취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00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00을 보면 100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장도 없고 작은 기회일 뿐인 것에 눈이 멀어 있으면 보장이 있는 종류의 이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간적인 작은 것에 집착을 놓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기 자신을 속이곤 합니다. 또한 남이 속이는 것은 알아도 자기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이유는 스스로 힘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세간적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힘들이 무뎌지지 않도록 스스로 힘을 꺼냄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직접 실천하고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오는 5월 12일이면 불교 최대 명절인 부처님오신날입니다. 한국에서는 부처님 탄생을 기뻐하며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립니다. 위빠사나 수행자에게 부처님오신날은 어떤 의미일까요? 또 큰스님께서 한국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탄생일을 맞아 좋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부처님께서 진정 바라신 예경, 부처님께서 칭찬하셨던 예경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이 세워두신 이 불법,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 많은 이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도록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말입니다.
바르게 수행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정혜 삼학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그분이 설하신 법으로써 다시 그분께 진정 최상의 예를 올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최상의 예를 올릴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글_고영인, 사진_박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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