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部派佛敎)의 이해
(eighteen schools)
The cause even of a single eye in the feather of peacock cannot be understood in all its aspects by non-omniscient ones. For it is the knowledge which might be the power of the omnicient (the Buddha).
- Rahura -
공작 깃털 속 작은 눈동자 하나 조차도 [깨달아] 완전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원인들을 두루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앎이 아마도 부처님의 힘이기 때문이다.
- 라후라 (구사론 파아품) -
머 리 말
초기불교가 태동하던 시대는 석가세존에 의하여 직접 가르침을 전수 받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가르침이 더욱 다양해지고 교화 영역이 넓어지게 되므로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가섭존자 등 부처님의 제자에 의한 가르침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의 전파는 주로 중인도 일대로 확산되어졌다. 석존 입멸 후에도 전도 사업은 왕성하게 이루어져 불교는 중인도 전체에 퍼져 나갔고 특히 서·남방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불교를 신봉하는 교단들이 여러 곳에 형성되고 교화목적으로 인도의 윤회사상이 채용되어 석존의 전생이야기인 자타카[本生譚]가 만들어졌다. 한편으로 석존과 그 제자들의 유골과 유품을 모시는 스투파 즉, 탑(塔) 숭배가 일어나 아름다운 불교조각 예술을 꽃피우는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불교가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의 평등주의와 자비사상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인도의 성왕(聖王)이라 일컫는 아쇼카왕이 불교사상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이 불교가 널리 확산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교세의 확충과 함께 불교교단 역시 큰 변천을 거듭하고 있었다. 석존 입멸 후 계율 문제로 의견을 달리해 오던 장로들과 젊은 비구들의 이견이 제2차 결집 이후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갈등을 빚던 두 계층은 보수적인 장로 중심의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비구 중심의 대중부(大衆部) 두 부파로 나누어졌다. 이것을 근본 2부 분열이라고 일컫는데 근본불교가 두 파로 분열된 이후 100여년이 지나자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에서 각각 말파(末派)가 생겨나고 곧 이어 20개 부파로 교단이 급속히 분열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결집에 의한 근본 불교에서 다양한 논(論)이 대두되는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부파불교 시대의 특징은 각 부파마다 교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활발하여 수많은 논(論)이 만들어졌다. 논이란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주석(註釋)인 셈이다. 이로써 근본불교의 경과 율에 각 부파들의 논이 포함되어 불교의 삼장(三藏)이 성립되었다. 교법에 대한 연구는 근본불교 시대에도 부분적으로 있었지만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특색있는 진전이 있었다. 장로중심의 상좌부와 젊은 비구 중심의 대중부로 나누어진 근본 2부의 분열은 계율의 해석과 수용에 관한 교단 내의 의견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부파분열은 시대와 지역을 잘 고려한 특성 있는 교법연구를 탄생시킨 셈이다.
불교의 전통 안에서 성장한 모든 사상들이 그러하지만, 아비달마불교(부파불교)도 공허한 이론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정치한 이론일지라도 그것은 실천을 위한 바탕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따름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비달마교학이 대개 사제(四諦)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사제는 현실의 확인(苦)과 그 원인의 분석(集), 그리고 이상의 달성(滅)과 그 방법의 모색(道)에 관한 진리이다.
여기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현실의 확인, 즉 개인이 실존적 반성일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그 원인의 분석이라는 일도, 고통으로서의 현실이 극복된 상태의 이상도, 이에 이르는 길의 모색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실천 또는 수행은 부정적인 현실을 전제하여서만 가능하다. 아비달마논사들은 이러한 점에 누구보다도 철저하였던 것 같다. 아비달마불교에서 정밀하게 발달한 달마(法)의 이론, 업의 이론도 이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 이 곳에 인용된 자료들은 한 학기동안 아비달마불교(부파불교)를 공부하면서 체계적으로 이해를 위하여 참고한 서적이나 자료들을 편집한 것이다.
Ⅰ. 부파불교(部派佛敎) 연구의 목적 : 최봉수 교수의 『부파불교원전의 이해』
Ⅱ. 아비달마불교의 전개 :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Ⅲ. 아비달마의 철학 : 上山春平,櫻部建 『아비달마의 哲學』
Ⅳ. 衆賢(Sa ghabhadra)의 {俱舍論本頌}의 개작과 삭제에 대하여 - 권오민
Ⅴ. 구사론 강독 : 한글대장경 『아비달마구사론』(권오민)
이들 자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첨가하거나 부가하고, 빼버린 부분도 있다.
목 차
Ⅰ. 부파불교(部派佛敎) 연구의 목적 (6 Page)
1. 부파불교(部派佛敎)란?
2.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관계
1) 여설수행(如說修行)
2) 對法論書에 대한 批評적 접근
3) 조론(造論)의 자세
Ⅱ.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의 전개 (20 Page)
1. 발달의 개관
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
3.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교학
Ⅲ. 아비달마의 철학 (43 Page)
서장
1장 우주
2장 인간
3장 달마의 체계
4장 물질
5장 마음
6장 선과 악
7장 번뇌
8장 도(道)
9장 아라한과 부처
10장 아가마에서 아비달마로
11장 세친의 전기
12장 구사론 이후
Ⅳ. 衆賢(Sa ghabhadra)의 {俱舍論本頌}의 개작과 삭제에 대하여 - 권오민 (118 Page)
Ⅴ. 阿毘達磨의 敎學的 意義 - 허경구 (139 Page)
Ⅵ. 구사론(俱舍論) 강독(講讀)
구사론 해제
分別界品第一之一
分別界品第一之二
分別根品第二之一
分別根品第二之二
分別根品第二之三
分別根品第二之四
分別根品第二之五
Ⅰ. 부파불교(部派佛敎) 연구의 목적
1. 부파불교(部派佛敎)란?
2.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관계
1) 여설수행(如說修行)
2) 對法論書에 대한 批評적 접근
3) 조론(造論)의 자세
1. 부파불교(部派佛敎)란?
부파불교란 초기교단이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한 이후의 전통적인 교단의 불교를 말한다. 불멸(佛滅) 100년 경에 초기교단은 붓다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려고 하는 보수파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上座部)와 승단의 규율에 있어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 대중부(大衆部)로 나뉘었는데 이를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이 근본분열의 원인에 대해서 남방불교의 전통에 의하면 십사(十事)를 둘러싼 계율해석을 위해 바이샬리에서 모인 제2차 결집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며, 북방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아쇼카왕 때 마하데바라는 사람이 오사(五事) 즉 아라한의 권위를 격하시키는 다섯 가지 항목을 주창한 것을 계기로 하여 분열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상좌부와 대중부 각각에서 다시 분열을 되풀이한 것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고 한다. 상좌부는 7회의 분열에 의해 11부로 나뉘었고, 대중부는 본말을 합해 9부이기 때문에 상좌부와 합해서 20부가 된다. 그래서 근본의 2부를 제외하고 18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부파 교단의 불교는 붓다의 직계제자인 대가섭과 아난 등에 의해 전해진 불교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계승되어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부파 교단의 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불교’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교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대승교도들로부터 성문승(聲聞乘)이라고 불렸다. 성문이란 불타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뜻이다.
부파불교 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하여 비구나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한다.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자는 국왕이나 장자들의 지원 아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서 교리연구와 수행생활을 해 나갔다.
다음으로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사원(寺院)불교이다. 승가(僧伽)가 점차 조직화되고 안정된 경계적 기반을 갖춤에 따라 출가자들은 재가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화하고 걸식하는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사원에 안주하며 명상과 열반의 적정(寂精)만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였다.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저 자기의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고 불리고 천시되었다.
이처럼 국왕이나 장자들의 경제적 지원에 의해 승단은 유행걸식하지 않으면서 출세간주의(出世間主義)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를 완성시켰다. 이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법에 대한 연구) 불교이다.
+- 2. 一說部 -+
| 3. 說出世部 | (200年中)
| 4. 鷄胤部 -+
+- 1. 根本大衆部 | 5. 多聞部 (200年中)
| (100餘年) | 6. 說假部 (200年中)
| | 7. 制多山部 -+
| | 8. 西山住部 | (200年滿)
| +- 9. 北山住部 -+
| +- 4. 法上部 -+
| +- 3. 犢子部 +- 5. 賢胄部 |(300年中)
| +- 2. 說一切有部 | (300年中) +- 6. 正量部 |
| | (300年初) | +- 7. 密林山部 -+
| | |
| | +- 8. 化地部 - 9. 法藏部(300年中)
+- 1. 根本上座部 | | (300年中)
(100餘年) | +-10. 飮光部(300年末)
| +-11. 經量部(400年初)
|
|
|
+- 雪山部
2.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관계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의 대법논서들 중 유부와 남방상좌부의 것들이 유명하고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구사론(俱舍論)과 청정도론(淸淨道論)이다. 이들에 대해서 각각 비평적으로 접근해 가면서 부파불교의 특징과 그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대법론(對法論)에 대한 비평적 접근의 타당성을 경전을 통하여 정립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학에서 원시불교라는 영역이 독립한 것은 현대 불교학의 공로라고 할 만하다. 특히 P li성전협회의 발족과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서구의 불교학은 원시불교의 주 자료인 Nik ya의 편찬을 진행하면서 가능한한 니카야의 경설만을 중심으로 불교 이해의 한 분야를 정립해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학문의 경향은 일본의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서구나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학자들은 대개 니카야 안에서 원시불교를 정립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원시불교의 주자료인 아함이나 니카야에 대한 이해는 對法論들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한다. 아함 등이 매우 방대하고 비교적 잡다한 분위기이므로 우선 입문이나 요약을 먼저 대한다는 뜻에서 누구나 論書부터 살피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예를들어 4아함은 모두 183권 분량이라고 할 때 구사론이라는 논서는 30권 분량이므로 구사론을 먼저 대할 경우 아함에의 접근은 외견상 매우 용이한 것이다. 그리하여 특히 한국이나 중국, 일본과 같은 경우 원시불교의 아함이나 니카야에 대한 이해가 논서 한 두 종류를 선행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함·니카야와, 그에 대한 논문인 여러 대법논서와의 관계를 살펴보게 된다. 그럴 때 3가지 정도의 관점이 자연히 제시된다.
첫째는 아함·니카야의 경설이 붓다의 뜻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아 일종의 부족분을 메꾸고 나아가 보다 자세한 설명을 베푼다는 관점이다. 이것은 아함·니카야에 대해 對法論書를 일종의 발전(敎理發達)으로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아함 등과 대법론 사이에 어떤 敎理나 思想의 발전 따위는 인정하지 않고, 대법론이란 아함 등의 단순한 정리라고 파악하는 입장이다. 사실 法蘊足論이나 集異門足論은 단순한 아함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셋째는 對法論을 오히려 아함·니카야의 수준에 비할 때 퇴보라고 보는 관점이다. 아함·니카야의 經說이 지닌 수승한 方便施設의 정신이 對法論師들의 沒理解로 오히려 훼손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論書를 전제하여 아함에 접근한다면 그는 주로 첫째의 입장이나 둘째의 입장에서 있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이미 원시불교라는 영역은 그에게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원시불교는 그 자체로 일단의 敎理의 始終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필자는 셋째의 관점에서 阿含과 對法論의 관계를 이해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과연 어떤 면에서 對法論은 阿含에 대한 일종의 편견인가를 진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부파불교라는 영역을 비로소 원시불교와 분리시켜 다시 정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즉 원시불교의 주 자료인 아함과 니카야의 가르침이 부파불교의 주자료인 대법론서의 논술과 전반적으로 서로 상이한 의미와 표현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의 분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업을 위해 본 항목에서는 먼저 대법론서에 대한 비평적인 접근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그리고 특히 원시불교의 4니카야에 나타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의미를 평가하고자 한다.
부파불교 원전 자료를 통해 부파불교의 전모의 일부라도 알려고 한다면 이러한 비평적 시각을 전제해야 한다. 그럴 때 부파불교라는 분야가 원시불교와 구별되는 것으로 비로소 의미를 지니기 때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1) 여설수행(如說修行)
對法論들이 불교인의 활동인 바에는 불교인의 활동 전반이 지녀야하는 어떤 원칙에 입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칙은 활동의 방향을 지적해주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본다. 왜냐면 모든 불교인이 붓다는 아직 아니어서 궁극적인 목표를 상세히 분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교인의 활동이 지녀야 할 원칙이나 방향은 如說修行이라는 요청 속에서 잘 나타난다고 본다.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후 최초로 다섯 비구에서 法을 설한다. 그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如來는 동등한자이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분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不死가 도달되었다. 나는 설하겠다. 法을 가르치겠다. 說한대로 修行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양가의 아들이 올바로 출가할 때 지녔던 목적인 梵行의 궁극을 現法에서 스스로 잘 알고 똑바로 보아 갖추어 지낼 것이다.
불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samma-sam-boodhi)이고 그 목표는 修行이라는 수단을 통해 성취된다. 그러한 수단과 목표가 여기서는 梵行의 窮極(brahmacariya-pariyos na)이라는 말로서 한꺼번에 표현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보다 구체적으로 說한대로 修行하는 자(yath nusi ham tath patipajjam na)'에 의해서만 성취됨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如說修行의 요청은 좀 다른 표현으로도 원시불교 자료들에 빈번히 나타난다. 즉 如法修行(dhamma-anudhamma-pa ipanna, anudhamma-carin)이라는 표현이다. 如法修行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기도 한다.
"비구들이여, 色의 싫어함·탐착을 떠남·滅함을 위하여 수행하는 자가 法에 있어 法에 따라 수행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오히려 五蘊의 滅을 강조하기 위하여, 如法修行이라는 말이 서술어적으로 채용된 것에 불과하다.
다음의 두 經說은 如法修行이 원시불교에서 대단히 강조되던 요청임을 보여준다.
"벗 사리풋타여, 이 法과 律에는 어떤 것이 행하기 어려운 것이오? 벗이여, 이 法과 律에는 出家하는 것이 행하기 어렵소.
다시 벗이여, 出家한 자에게는 어떤 것이 행하기 어렵소?
벗이여, 出家한 자에게는 즐거워하는 것이 행하기 어렵소?
다시 벗이여,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것이 행하기 어렵소?
벗이여,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如法修行이 행하기 어렵소.
다시 벗이여, 如法修行하는 비구는 얼마만에 아라한이 될 수 있소?
벗이여, 오래 걸리지 않소."
"리차비들아 다섯가지 보물은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어떤 것이 다섯인가?
여래·아라한·정등각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여래가 설한 法과 律을 가르치는 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여래가 설한 法과 律이 가르쳐지는 대로 이해하는 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여래가 설한 法과 律을, 가르쳐지고 이해한대로 如法修行하는 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은혜를 아는 자는 세상에서 얻기 어렵다."
먼저 사리풋다의 대화에서는 修行은 결국 如法修行이어야함이 규정되고 있으며, 리차비들에 대하여 고타마 붓다는 원시불교의 이상적인 다섯가지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그중 하나로 如法修行을 들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如法修行(dhamma-anudhamma-pa ipatti)의 개념이 如說修行(yath nusi hamtath pa ipatti)의 그것과 동일한 것임은, 그 둘이 모두 梵行의 궁극이나 아라한을 이루는데 오래 걸리게 하지 않는 조건임이 선언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說한대로 修行해야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說한 바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규명해야할 것이다. 설한 바는 형식적으로 본다면 經說이 될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안계신 오늘날 우리가 의존할 佛說은 經說을 떠나서는 그 어디에서도 그만한 권위를 발견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如來가 말씀하신 經은 깊은 뜻을 지니고 出世間의 것이고 空性에 상응하는 것" 이다 한다. 그러한 經들이 아직 우리에게 충분한 質과 量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바로 이 經의 말씀인 經說에 일단 의지하고 그에 따라 수행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經說이, '설한 바' 형식적인 것이라면 그 내용적인 것은 무엇일까. 앞서 如法修行이라는 표현도 보았듯이 역시 法이라는 표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法이라는 술어를 떠올리면 먼저 法 중에서도 어떤 法에 초점을 둘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法(dhamma)과 義(attha)의 관계 속에서 이 술어를 생각해야하고, 또 法門(dhamma-pariy ya)이라는 개념 속에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 法은 고타마 붓다가 얻은 法이어야 하고 그에 의해 施設된 法이어야 한다. 고타마 붓다가 얻은 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적정하고 고매하고 思索과 思量을 떠났고 고상하고 賢者들이 알만한 法 이라 한다. 이러한 수식을 받는 法은 구체적으로 十二緣起 등 다양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法 하나 하나보다도, 위의 표현에 들어 있는 思索 思量을 떠났다(atakka-avac ra)라는 대목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비평하고 연구할 論書들은 결국 思索과 思量의 영역 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말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색하고 사량한 뒤에 口行(v c -sa khara)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제로 삼는 法은 그것을 떠난 것이므로 묘한 관계를 직감할 수 있다. 그런데 붓다의 法도 일단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初ㆍ中ㆍ後가 善하고 뜻과 문장을 지니고 완전·청정한 梵行을 밝히는 法 "이다. 그리고 붓다의 法은 말로 표현되더라도 사색·사량을 떠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고타마 붓다의 독특한 方便施設(up ya-pa atti)에 말미암는다. "이것을 苦聖諦이다 라고 나(세존)에 의해 施設되었다. 그것에는 무량한 字(va a)와 무량한 文(bya jana)과 무량한 辯(sank sana)이 있다." 붓다가 시설한 法을 흔히 우리들이 하는 언어로 풀어쓸 경우 무량한 양이 될 것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붓다가 시설한 法이 단순한 個物의 설명이나 心적상태의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잘 인지해야할 것이다. 그러한 사색·사량이 있는 字·文·辯으로는 결코 닿지 않는 곳에 있음을 먼저 주의해야 한다.
둘째, 義(attha)와의 관계 속에서 法을 살펴보자. 義는, 설해진 法이 지니는 의미 내용을 뜻하기도 한다.
비구가 契經·應頌·記別·偈頌·自說·如是語·本生·未曾有法·廣說 등(九分敎)의 "法을 알아내기에 法을 아는 자(dhamma u)라고 한다..." 이것이 설한 바의 뜻이다. 저것이 설한 바의 뜻이다라고 하며 비구가(九分敎에) 설해진 바의 뜻을 알아내기에 "義를 아는 자(attha- )라고 한다."
여기서 볼 때 義라는 개념은 확실히 설해진 法의 意味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義에는 利益되는 것의 의미도 있다.
"非法과 法을 알고 非義와 義를 안 뒤 法과 義에 따라 수행해야만 한다.... 邪見이 非法이고 正見이 法이다. 邪見을 緣하여 여러가지 惡·不善法이 발생하거니와 이것이 非義이다. 正見을 연하여 여러가지 善法이 충분히 닦이게 되거니와 이것이 義이다."
즉 法을 통하여 일어나는 利益되는 바가 여기서는 義라는 술어로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붓다의 法은 사색과 사량을 떠난 것이라고 했거니와, 그것은 法의 이론적 意味가 곧 바로 수행자에게 실천적 '利益'으로 연결되는 성질을 지닌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法의 義는 利益을 동반하는 의미이기에 이미 法은 論議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셋째, 法은 궁극적으로 法門이라는 범주적 개념 속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 같다. 우다인(ud yin)존자와 판차캉가라는 신자가 受(vedan )의 종류가 몇이냐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한쪽은 三受를 다른쪽은 二受만을 붓다가 설했노라고 다툰 것이다. 이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우다인의 좋은 (法)門(pariyaya)을 판차캉가가 기뻐하지 않았고 판차캉가의 좋은 (法)門을 우다인이 기뻐하지 않았구나, 나는 (法)門에 입각해 二受를 설하고 (法)門에 입각해 三受를 설하고 ...(法)門에 입각해 108受를 설한다. 이와같이 나의 法이란 門에 입각해 설해진 것이다. 門에 입각해 설해진 나의 法은 상호간에(도) 잘 설해진 것이다."
이외에도
"이와 같이 이 다섯 根(indriya)은 다섯이었다가 셋이 되기도 하고 셋이었다가 다섯이 되기도 하니 (法)門에 입각한 것이다."
"어떤 (法)門이 있으니 그 門에 입각하여 有學비구는 有學地에 서서 나는 有學이다라고 알아내고, 無學비구는 無學地에 서서 나는 無學이다라고 알아낸다."
등 法門이, 諸法의 미묘한 최종적 관계를 決擇하는데 가장 중요한 입각지로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門이란, 말 그대로 敎法의 어느 한 體系를 뜻한다. 개개의 法들이 모여 짜여진 한 무리의 法들로 성립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원시불교 내에 이러한 한 체계를 이루는 法의 무리인 法門을 몇 단계나 상정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또다시 그야말로 새로운 體系 및 목표를 동반하는 門 속에서나 그 규정이 가능하겠지만, 難解度에 바탕을 둔 여러 단계의 法門이 존재함은 당연하다. 결국 法門은 어떤 法의 직접적인 外延(extension)이 되는 셈이다.
간단히 정리해보면, 經說이라는 형식은 法이라는 내용물을 담고 있고 다시 法은 利益을 갖춘 意味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法門이라는 범주와 체계속에서 개개의 法은 보다 진정한 意味內容을 우리에게 전달하게 될 것임을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法의 경설에 따라 우리는 修行해야 하는 것이다.
열반에 즈음하여 고타마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계하신다.
"아난다야, 비구승단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더 원하는가? 나에 의해 法은 안팎이 없이 이미 설해졌다. 如來의 法에는 師拳(acariya-mutthi)이 없다. 내가 비구승단을 보살핀다(pariharati)' 또는 비구승단은 나의 所關이다(uddesika)'라고 如來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비구승단에 대해 무언가 더 이야기할 것은 없다."
고타마 붓다는 분명 진리의 세계와 그에 이르는 과정을 낱낱이 상세히 풀어 설명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 양은 무한할 것이다. 하지만 진리의 세계와 그에 이르는 길을 方便施設의 정신에 입각해 설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설하였음에 틀림없다. 설할 수 있는 法을 숨긴 것은 없다라고(師拳이란 없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붓다에 의해 필요한 法은 모두 제시되었으니 우리는 오직 그 法만을 분명히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修行해야 하는 것이다. 如說修行, 이것은 불교인의 좌우명이어야 한다.
2) 對法論書에 대한 批評적 접근
對法論은 佛法에 대한 論議이지만 붓다의 直說이라고는 아무래도 볼 수 없다. 佛法과 佛意를 선양하려 하지만 결국 佛敎學者들의 논술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학자들의 논술은 결코 완전무결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對法論에 대해서도 비평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량을 갖추고, 他心智를 갖춘 비구에 의해서, 如來가 正等覺者인지 아닌지가 마땅히 조사되어야만 한다....(以下 대략적인 뜻을 취함)....탐착이 제거되어 애욕에 빠진 것이 아닌지를 조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흠이 如來에게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된다. 여기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실과 근거는 如來야말로 좋고·나쁘고·善이고·惡인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승에게 가서 法을 듣는 것은 온당하다. 法을 듣고 잘 알아서 여러 法가운데 어떤 法에서 완전히 도달하여 믿음을 일으킨다. '세존은 正等覺者이다. 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승단은 훌륭한 修行에 전념한다'라고.
위와 같은 사실과 문구에 의하여 如來에게 믿음을 확실히 한 자는 뿌리로부터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이 잘 확립된 것이다. 사실을 갖춘 믿음은 見(dassana)의 뿌리이며, 견고하여 세간의 무엇에 의해서도 파괴될 리 없다. 이상과 같은 것이 如來를 法性에 입각해 잘 조사한 것이다(dhammat -susamanni ha)"
如來에 대한 信仰도 如來가 진정한 覺者인가를 조사해본 뒤에 가능하다. 아직 붓다를 이루기 전에는 아직 붓다를 모르는 것이고 붓다를 모르는 자는 마땅히 붓다의 경계가 참다운 종교적 이익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가를 비평해봐야 한다는 취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붓다라고 하더라도 法性에 입각한 조사가 요청됨을 보고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붓다에 대해서도 비평적 조사가 요청되는 것이 원시불교의 정신이라면 對法論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長尼柯耶에서는 다음의 두 경우에 걸쳐 對法論 비평의 전제가 될만한 입장이 설해진다.
먼저 四大指示(cattaro mahapadesa)로 알려진 입장을 보자.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벗들이여,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한 것이 있소.-이것이 法이고 이것이 律이고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이요-라고.' 비구들이여 그 비구의 주장을 너희들은 기뻐해서도 안되고 꾸짖어서도 안 된다. 기뻐하지도 꾸짖지도 않은 채 그 귀절과 문장을 잘 가져와서 經에 맞지 않고 律에서 찾아지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가 한 말은 진정 세존의 말씀이 아니다. 이 비구는 잘못 파악했다 라고 비구들이여, 이렇게 그의 말을 파기해야 한다. 그리고 經에 맞추어 보고 律에서 찾아보았는데 經에 맞고 律에서 찾아진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가 한 말은 진정 세존의 말씀이다. 이 비구는 잘 파악했다 라고 비구들이여, 이러한 첫 번째 큰 지시를 받아들여라."
첫번째 指示는 위에서 보듯이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했다는 法과 律과 가르침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두번째는 앞장선 장로 비구가 있는 어떤 곳의 승단(amukasmim v se sa gho viharati sathero sap mokkho)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했다는 法과 律과 가르침에 대한 것이고, 세번째는 '多聞이고 阿含을 전하고 法을 지니고 律을 지니고 論母를 지닌 수많은 장로 비구들'(sambahula ther bhikkhu bahussuta g tagam dhammadhar vinayadhar m tik dhar )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法과 律과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네번째는 '多聞이고 阿含을 전하고 法을 지니고 律을 지니고 論母를 지닌 단 한명의 장로 비구'의 면전에서 듣고 파악했노라고 주장하는 法과 律과 가르침에 대하여 검토하는 것으로 모두들 그 검토의 방법은 동일하다.
이상의 四大指示는 한마디로 모든 佛敎人의 주장은 經과 律을 바탕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취지이다. 좀더 부연하면 검토의 대상은, 세존의 면전에서 들었다고 해도 검토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닌 정도이다. 그리고 검토의 방법은 철저히 經에다 맞추어 보고 律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그럴때 對法論은 물론 검토의 대상에 들어가며, 또한 對法論 검토의 방법은 經과 律에다 일단 맞추어 보고 찾아보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四大指示가 經과 律을 근거로 한 검토·비평에 주안점이 두어진데 비해, 다음의 經說은 검토 후 참·거짓에 따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
"화합하고 우애있고 싸우지 않는 너희들에게 승단의 어떤 俱足梵行者(sabrahmacarin)가 배워야할 法을 설할 것이다. 그때 너희들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이 존자는 의미를 잘못 파악했고, 문장을 잘못 일렀다'라고, 그때 너희들은 그의 말을 기뻐하지도 꾸짖지도 말고 그에게 이와같이 말해야한다. '벗이여 이 의미에는 이 문장과 저 문장 중 어느 것이 더 합당하오? 그리고 이 문장에는 이 의미와 저 의미 중 어느 것이 더 합당하오?'라고. 그가 만약 '벗들이여, 이 의미에는 이 문장이 합당하니 이 문장이 곧 저 문장이오. 그리고 이 문장에는 이 의미가 합당하니 이 의미가 곧 저 의미이오.'라고 (틀리게) 답한다면, 그를 칭찬하지도 무시하지도 말고, 그가 그 의미와 그 문장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두번째 구족범행자는 '의미를 잘못 파악했으나 문장은 바르게 일러주는 경우'(aya yasm attha micch ga hati, vya jan ni samm ropeti)이고, 세번째 구족범행자는 '의미는 바르게 파악했으나, 문장을 틀리게 일러주는 경우'이거니와 그 대처 요령은 틀린 것에 한하여 위에 준한다.
"승단의 또 다른 구족범행자가 法을 설할 것이다. 그때 너희들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이 존자는 의미도 바르게 파악했고 문장도 바르게 일렀다'라고. 그때 너희들은 훌륭하다라고 말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저희들이 존자와 같이 의미를 갖추고 문장을 갖춘 구족범행자를 뵙는다는 것은 저희들에게 매우 큰 이익이옵니다'라고"
이상의 經說로부터 우리는 우선 의미(attha)와 문장(vya jana)의 두가지 측면에서 검토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내용과 형식 두가지 면이 모두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의미도 모른 채 經文만 지니고 있는 것도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이지만, 정확한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경계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반드시 잘못된 의미나 문장은 시정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향력이 큰 존재일수록 잘못된 경우 그 악영향도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향력이 큰 對法論書일수록 더욱 면밀한 비평·검토가 필요한 것이고 개선이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논술들을 통하여 우리는 어떠한 對法論도 비평할 수 있고 또 비평해야 하며, 비평의 근거는 經과 律이며, 비평의 측면은 의미와 문장임을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좀더 자세히 비평의 방법론을 살펴보자.
우선 對法論을 비평하게 되는 目的을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그것은 길(magga)과 道(patipada)에 대한 是非를 寂靜시키기 위한 것이다.
"生活가 戒本(p timokkha)에 관한 是非는 작은 것이다. 그런데 길과 道에 관하여 是非가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 시비는 많은 生類의 이익을 막고 행복을 막으며, 天人의 이익과 도움됨을 막으며 괴로움만이 될 것이다...
①화냄과 적개심, ②위선과 심술, ③시기와 인색, ④교활함과 기만, ⑤악한 원함과 잘못된 견해, 그리고 ⑥보이는 것만 붙잡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파악하여 포기하지 못하는 것, 이들이 여섯가지 시비의 뿌리이다....
法과 律에 대해 시비가 일어나면 비구들이 모두 화합하게 모여 主된 法(dhamma - netti)을 철저하게 검토한 뒤(samanumajjitva) 일치하는 데서(semeti) 비로소 諍事를 적정 시켜야 한다"
우리는 비평을 위한 비평,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대중 속에 일어난 길과 도에 대한 異見대립, 法과 律에 관한 是非 거리를 적정 시킴으로서 모든 대중의 이익과 행복과 도움됨을 막지 않고 增長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다음 어떠한 對法論 또는 對法論의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비평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자.
"凡夫는 涅槃을 열반이라고 생각한다(sa j n ti) ; 열반을 열반이라고 생각한 뒤 내가 열반이라고 사유한다(ma ati) 내가 열반 속에 있다고 사유한다. 열반을 나라고 사유한다. 그리고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한다. 이어 열반을 기뻐한다. 그것은 왜냐? '범부는 그것을 완전히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나(世尊)는 설한다.
...有學 비구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잘 안다.(abhij n ti) : ... 그리고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 '유학 비구는 그것을 완전히 알기 때문이다....
...無學비구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잘 안다....그리고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 '무학 비구는 그것을 완전히 알고,...탐착을 제거했고...화냄을 제거했고...愚痴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如來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잘 안다.... 그리고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 '여래는 그것을 완전히 알고...잘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涅槃이라는 술어가 어느 對法論에 사용된다고 해서, 그 對法論이 진정 열반을 참되게 전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凡夫의 경우처럼 열반에 대한 이해가 완전치 못하여 단순한 생각과 사유에 그쳐있다면 이는 비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생각과 사유 차원의 논술을 지양하고 이들을 비평 비판해야 함은 이외에도,
"名目(adhivacana)과 名目의 길, 表現(nirutti)과 표현의 길, 施設과 시설의 길, 지혜(pa a)와 지혜의 사량(avac ra), 도는 일(va a)과 돌아감(va ati) 등을 비구는 잘 알고 해탈한다"
"보이고 들리고 사유되고 식별된 것에서 보이고 들리고 사유되고 식별된 것을 말하는 자가 있으나... 漏盡解說 비구는 이 보이고 들리고 사유되고 식별된 것에서 멀리도 가까이도 않고 의지하지도 매이지도 않은 뒤 벗어나고 결박을 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지낸다"
등의 經說에서 암시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생각이나 사유는 넘어섰다 하더라도 믿음(saddha), 性向(ruci), 傳統(anussava), 樣相에 대한 사색( k ra-parivitakka), 見에 입각해 禪속에 들어 지속함(di hi-nijjhana-khanti)등에 바탕을 두고 논술한 對法論도 또한 비평·비판되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는 대개 초기불교 경전 같은 경우는 외도의 사상을 비판할 때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교 내에서도 대법론서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매우 유익한 면이 또한 있습니다. 외도사상가만큼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 대법론사들도 자신의 논문을 쓸 적에 이 아비달마 문헌을 작업할 적에 자신의 성향, 자신이 속한 종파, 또는 자기 종파의 전통 이런 것에 대단히 경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성향에 따라 종파를 찾게 되고 자기 종파의 전통에 따라 믿음을 갖게 되고 자기 종파의 견해에 입각해 결국 수행한 뒤에 그걸 바탕으로 논술할 것을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한 그 5가지 측면을 이 부파불교와 같은 경우에 적용한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 않느냐 우린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대법론서들을 보게 되면 그 수가 상당하고 또 대개 서로 차이나는 견해들을 각각 지니고 있는데 그렇게 된 이유를 살피는 것도 비평의 한 방법론이 될 것이다. 세상에 숱한 사상이 난무하는 것을 고타마 붓다는 각 사상가들이 견해(見解)가 서로 다르고 성향(性向)이 서로 다르고 수행(修行)이 서로 다르고 스승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으로 보는 듯하다. 이 다섯가지는 사실 앞 단락의 다섯가지와 유사하다. 앞의 것이 실제 사상이 창출되는 근거를 제시하는데 초점이 주어졌다면, 뒤의 것은 단순히 각 사상의 횡적인 요소를 언급하는데 중점이 두어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견해는 어느 대법론이 속해 있는 종파의 이론체계로 대치할 수 있고 정인과 수행은 실천 체계로 대치해 볼만하다. 그리고 성향은 적절한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지만, 스승은 자종의 통시적 공시적 지도자들로 충분히 대치할만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스승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직 한 분, 고타마 붓다 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다음의 經說은 論書 상호간의 異見 대립에 대하여 좀더 근원적인 답변이 될 듯하다.
"모든 사문·바라문이 말(vada), 계율(sila), 욕심(chanda), 고집함(ajjhosana)이 서로 다른 이유는...世間에는 界(dhatu)가 많고 또 서로 다른 界가 있는데 각자가 관계하고 있는 界에만 완고하게 부딪치듯이 들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 對法論 비평의 궁극적인 근거는 역시 그 論書의 論述대로 행할 경우 利益되는 바가 있는가 어떤가에 달려있다. 여기서 利益되는 바는 최소한 不死의 法의 證得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종교적 이익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래는 어떤 말이 참되고 사실이고 다른 사람에게 뜻에 맞고 사랑스럽다해도 그 말이 利益을 갖추지 못한(an-attha-sa hita) 경우에는 말하지 않는다. 여래는 참되고 사실이고 남에게도 뜻에 맞고 사랑스러운 말이 利益을 갖추었을 경우 때(k la)를 알아 그 말(을 하고)대답도 한다. 여래는 중생을 동정하기 때문이다"
佛說이 佛說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까닭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진정 중생에게 실질적인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는 말씀만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리풋타는 四念處 七覺支 등을 통해 붓다의 수승함을 알게 된 것인지 붓다에 대하여 他心通을 지닌 까닭에 붓다의 수승함을 알아낸 것은 아니라고 표백한다. 四念處 등은 실천도이다. 실천도는 실질적인 과보를 예상케 한다. 즉 사리풋타는 四念處 등의 실천도를 바탕으로 한 修行의 과보가 있었기에 그 수승함을 안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결국 對法論의 어떤 論述이 맞느냐 틀리냐는 行者에게 실질적인 과보를 안겨주느냐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항목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對法論이라도 비평의 대상이 됨을 살폈고, 그 비평의 일반적인 방법은 經과 律에 입각하여 의미와 문장의 양면을 살피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비평의 목적은 길과 道 및 法과 律에 대한 是非를 적정시키는데 두었고, 그 비평의 구체적인 방법은 단순한 사유에 입각한 논술 또는 믿음·성향·전통 등에 입각한 논술을 특히 비평하는데 주안점을 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對法論書가 다양한 것에 대한 이유의 일단을 살폈고, 비평을 통해 결국 내려야 하는 眞·假의 결정은 利益되는 果報의 有·無에 달려있음을 또한 살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 중 다시 한번 강조하기 싶은 것은 對法論을 비평할 때, "傳統(anussava)을 진리로 보는 입장에 서있는 자가, 소문(itihitiha)과 傳說(parampar )과 갖추어진 藏經(pi akasampad )을 통하여" 論述한 부분을 반드시 찾아서 비평해야 하며, 아울러 "사색하고 사량하는 자(takkin v mar sin)가 사색과 사량에 잡히어 스스로에게 해명되는 바를" 論述한 부분을 반드시 검토하여 비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평의 근거는 물론 經說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원시불교의 자료로써 일례를 들어 俱舍論이라는 論書를 비평한다면 이는 역으로 원시불교 그 자체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결과도 기대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한 外道가 '당신은 제자들에게 어떤 法을 가르치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하지 않고 오히려 外道의 所說을 주제로 삼아 그에 대한 비판을 해나감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시키는 때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俱舍論의 논술에 잘못이 있을 경우 그것을 비판하면서 원시불교의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음을 가능케 한다.
3) 조론(造論)의 자세
대법론을 비평. 비판하는 논술도 결국 일종의 대법론이 되는 셈이다. 실제 현존하는 숱한 대법론서들은 모두 기존의 논서들에 대한 비평의 결과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기존 논서들을 비평한 후에 우리는 새로운 논문을 작성할 수밖에 없다. 비평만으로서 그친다면 그것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작업일 뿐이다. 즉 비평을 위한 비평에 그치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새로운 조론(造論)의 작업이 필요하거니와 그 새로운 조론(造論)은 가급적이면 경설(經說)에서 시사하는 방법론에 입각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對法論에 나타난 法과 律에 대한 시비를 經說에 입각하여 止息하고, 붓다의 설법이 지니는 목적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論述을 시도해야 한다. 단 가급적이면 그 새로운 논술도 철저히 經說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그리고 또 다른 쟁론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향으로 취해야 할 것이다.
결국 부파불교의 주자료인 대법론서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고타마 붓다에 의해, 건전한 방법론을 견지하는 한, 충분히 허용되고 또한 장려되는 것으로 결론할 수 있다.
Ⅱ.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의 전개
1. 발달의 개관
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敎學)
3.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교학(敎學)
1. 발달의 개관
⑴ 총설(總說)
세가지 단계
일반적으로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서(論書)에는 세 가지 발전단계가 있다. 그 첫째 단계에서는 경장(經藏) 가운데에서 이미 교법을 정리. 조직하기도 하고 해설이나 주석을 하기도 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비달마는 아니며 경장 가운데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할 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발달하여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아비달마 장(藏, abhidharma pi aka) 즉 논장(論藏)으로서 경장에서 독립하는데, 거기에서는 교법의 조직이나 해석이 더욱 더 촉진되었다. 다름 세 번째 단계에서는 그것이 촉진된 결과 아비달마는 단순한 아함경설(阿含經說)의 해석이나 조직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그러한 기초 위에서 장대한 교의체계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아함경전의 내용은 즉흥적. 우연적인 요소가 많았던 석존의 교설을 그가 입멸한 후 정리하여 전승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짧고도 단편적인 제경(諸經)의 집성이다. 그러한 비체계적인 아함의 경설이 점차 정리되고 조직화되어 흔히 학자들이 말하는 '불교철학의 최초의 전개'와 같은 교의체계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阿含속의 아비달마
아함 가운데 나타나는 아비달마적 요소로서는 대개 두 가지 종류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교설 속의 어구(語句)에 대한 주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하고 배열. 조직하는 것이다.
석존의 교법은 일반적으로 쉬운 말로 이야기되며 특이한 용어나 난해한 어구가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석존 자신이 청중을 위하여 그가 사용한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떤 때에는 석존이 설법을 마친 후 청중 가운데 선배가 후배에게 스승의 말씀에 대하여 해설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석존이 입멸한 후 시대가 지남에 따라, 또 불교가 전파된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교설 속의 어떤 語句에 대해 주석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더욱 더 많아지게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아함경전에서는 석존 자신이 그러한 주석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설법을 마친 후 제자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를테면 사리풋타나 목갈라나)이 그것을 해설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두 사람의 유력한 제자가 서로 대론(對論)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그렇게 이루어진 설명. 해석을 옆에서 듣고 있던 자(전설적으론는 석존의 시자였던 아난다)가 훗날 그 상황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함경전의 원칙이다. 그러나 형식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설명. 해석 모두가 석존 재세 시대에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중 상당 부분은 석존 재세시대에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중 상당부분은 석존이 입멸한 후 승단 내부에서 점차로 발전한 아비달마적 연구에 의해 부가되어진 해석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가된 부분이 점점 더 증대하여 마침내 아함경전 속에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아함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었으며, 여기서 아비달마라고 하는 불교성전의 새로운 장르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교설이 정리. 조직되었다고 한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방식으로서 두드러진 것은, 숫자와 관계 있는 교설을 그 수(數)대로 정리하여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교설을 내용에 따라 분류. 구별하여 동일한 주제를 가진 것들을 모아 한곳에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를 '법수(法數)'에 의한 정리라 하고 후자를 '상응(相應)'에 의한 정리라고 한다. 각각의 단경(單經) 가운데에는 법수에 의해 정리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몇 개의 단경을 모은 경군(經群)에다 그러한 방법을 적용시킨 것도 있다. 또 다수의 경군(經群)을 모아 동일한 방법으로 전체를 정리한 것이 증지부(增支部). 증일아함(增一阿含)이다. 상응(相應)에 의해 정리하는 방법은 단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경군(經群)상에서 그것을 적용시킨 예는 많은데, 다수의 경군(經群)을 그 같은 방법으로 정리한 것이 상응부(相應部). 잡아함(雜阿含)이다.
경장(經藏)은 그것이 승단 안에서 전승되는 동안 거기서 아비달마적 연구가 고조됨에 따라 점차 이 같은 부가. 증광이나 정리. 안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경장을 보면 그 중에는 원초적이고도 간결한 교설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비달마적 경향이 진전되어 이제 거의 하나의 아비달마 논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내용이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부분 있다. 이를테면 팔리 어 경장 중 '소부(小部, Khuddhaka nik ya)'에 속하는 《닛데사, Niddesa》는 같은 소부에 수록된 《숫타니파타 Suttanip ta》의 일부분에 비해 매우 아비달마적인 주석이다. 또한 역시 '소부'에 속하는 《파티삼비다맛가 Pa isa bhid magga》는 실천수행의 덕목을 정리하여 해설한 것으로서, 이것도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내용을 지녀 실제로 때에 따라서는 논장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될 경우가 있을 정도이다.
아비달마 논서의 성립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경장(經藏) 안에서 점차 아비달마적 경향이 발달하여 마침내 독립된 아비달마 논서가 형성되었다. 즉 아비달마 발전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즉 아비달마 발전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립한 최초기의 아비달마는 아함 속의 아비달마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과 비교할 때 질적으로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주로 아함에 타나난 그러한 경향은 각 부파에서 그대로 연장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각 파 사이의 공통된 점이 많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미 각 부파의 독특한 교의 학설을 반영한 특수한 용어나 특수한 해석이 적지 않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일단 독립한 아비달마 장(藏)은 순조롭게 발달하여 마침내 아함경전의 연장적인 입장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 서서히 새로운 형태의 논서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부파적 색채는 점차 농후해지고 술어를 독특하게 해석. 정의하였으며, 여러 가지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극단적일 정도의 자세한 분석적 고찰이나 개개의 문제에 대한 전문적 연구 등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아비달마 발전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그러한 교설을 조직적으로 논술하는, 웅장한 구성을 지닌 논서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체계적인 논서의 출현
설일체유부에서는 뒤에서 설명할 《발지론(發智論)》(완전한 명칭은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서 교의 학설의 거의 모든 전모를 밝히고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에 이르면 그 학설을 정연하게 조직하는데, 체계적인 논서로서의 완성된 형태는 역시 《구사론(俱舍論)》(완전한 명칭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의 등장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한편 남방 상좌부에 있어서 그것에 상당하는 논서로서는 《비숫디맛가, Visuddhimagga(淸淨道論)》를 들 수 있다. 전자는 북전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학승 가운데 한 사람인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또는 天親) 의 저작이고 후자는 남전 팔리어 경론의 대 주석가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저술이다. 양자가 서로 전후하여 세상에 나타난 것은 5세기 굽타 왕조의 중기 무렵이다. 물론 이 시대 인도불교의 주류는 이미 대승불교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미달마가 완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⑵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논서(論書)의 발달
현존하는 설일체유부의 논서
한역(漢譯) 대장경 가운데 전해지고 있는 아비달마 논서는 매우 많아 크고 작은 신구(新舊)의 논서가 28부, 그 페이지 수로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의 간본(刊本)으로 실로 3,500 페이지를 넘는데, 그 대부분이 설일체유부에 속한 것이다(그리고 또한 그 반수 이상이 7세기 玄 에 의해 번역된 것임). 그러나 그 가운데 산스크리트어 원문이 남아 있는 것은 최근에 간행된 《구사론(俱舍論)》즉《아미다르마코싸, Abhidharmako a》를 제외한다면 약간의 단편만이 알려질 뿐 거의 말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다만 한역에서는 전하고 있지 않은 상세한 《구사론주(俱舍論注)》(야쏘미트라 Ya omitra 지음) 하나와 《구사론(俱舍論)》보다 나중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아비다르마디파, Abhidharmadipa》라고 하는 제법 많은 분량의 논서(저자불명) 하나 (그렇지만 전체의 반밖에 남아있지 않음)가 원문 그대로 남아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티베트어 역 대장경 가운데에는 《구사론(俱舍論)》과 그것에 대한 크고 작은 주석류 몇 부(部)가 수록되어 있는 것 이외에 한역에서도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는 《시설론(施設論)》이 완본으로 남아 있다. 또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과 그것의 주석 하나도 남아 있다. 티베트어 역 아비달마는 양으로 말한다면 거의 한역에 필적할 만한 방대한 것이지만 주로 구사론과 관계하는 논서에 두드러지게 편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논서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초기의 논서는 경장(經藏) 가운데 이미 존재하고 있던 아비달마적 경향의 직접적인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 중기의 논서는 그 뒤를 이어 이 부파의 독특한 교설을 점차 발전시킨 것, 후기의 논서는 그렇게 발전된 교설을 조직적이고도 일관된 체계로 논술한 것이다.
초기의 논서
초기의 논서로서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완전한 명칭은 《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 이하 品類足論까지 6論 모두 阿毘達磨란 말이 생략되었음)과 『법온족론(法蘊足論)』이 있다.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은 장아함(長部)에 속하는 經의 하나인 《상기티숫탄타, suttanta(衆集經, 大集法門經)》의 내용을 부연. 해석한 것이다. 《상기티숫탄타》는 여러 가지 불교술어를 1에서부터 10까지의 數에 따라 열거한 경전으로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색채가 농후한 경운데, 《論》에서는 그 경에 열거되고 있는 술어 하나하나에 주석적인 설명을 부가하고 있다. 이것은 아함 가운데 특정한 一經을 채택하여 그것에 釋義를 부가한 것이기 때문에 아함의 직접적인 연장으로 볼 수 있으며, 論藏이 經藏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하나의원초적인 형태를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법온족론(法蘊足論)』은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처럼 특정한 한 經에 대해 주석하는 형태가 아니라 아함에서 21가지 주요한 교설을 선정하여 교설 하나마다 하나의 章을 할애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그 교설을 담은 經文을 첫머리에 게재하고 난 다음 이에 대해 자세히 釋義하는 방법은 요컨대 최초기의 아비달마 논서의 특징적인 것이다. 각 장 첫머리에 게재되어 있는 경문에는 지극히 아비달마화한 것을 엿보인다. 이를테면 '雜事品" 첫머리에 등장하는78가지 번뇌를 열거한 경문이나 '根品' 첫머리에 게재된 二十二根을 언급한 경문 등은 현존하는 아함경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설일체유부가 전승한 經藏 중에 그 같은 經文이 있었겠지만 그것은 아함으로서는 최후기 즉 아비달마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에 부가되고 증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78가지 번뇌나 二十二根을 종합. 정리하여 하나의 교설로 시설하는 방법을 일반적인 아함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번뇌나 根에 대한 각각의 교설은 모두 經藏 속의 여러 곳에서 散說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論은 아비달마 논서로서 성립하였지만 아직 經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經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論'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는 이미 설일체유부 특유의 용어나 사상도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여러 부파와 공통되는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법온족론(法蘊足論)』의 경우 남방 상좌부에 속한 『비방가, Vibbha ga』나 소속부파가 확인되지 않은 『舍利弗阿毘曇論』등의 논서와 비교할 때 그 내용에 있어서나 전체의 구성에 있어서 서로 공통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論은 전통적으로 석존의 直弟子를 작자로 내세우고 있다.
중기의 논서
그 다음에 성립한 것으로 생각되는 『施設足論』에서부터 아함경전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스타일에 있어 아비달마 논서 특유의 색채가 짙게 나타난다. 『識身足論』이나 『界身足論』에 이르면 法數에 의해 종합. 정리된 술어(아함의 法數 이외에 이 부파 특유의 법수도 나타남)는 매우 복잡하게 해석되고, 각 술어간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극단적일 정도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져 아비달마적 논의는 현저하게 정치해지고 번쇄해졌다. 『施設足論』은 아비달마적인 우주론. 세계론을, 『식신족론』은 마음(心)의 작용에 대한 분석을, 《계신족론》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心. 心所)에 대한 해석을 각각 크게 발전시켜 설일체유부 교학의 기초를 확고히 하였다.
바수미트라(Vasumitra, 世友라고 한역)가 지었다는 《품류족론》은 원래 몇 개의 작품을 한데 모아 하나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며, 혹은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거기에서는 술어에 대한 분석적 고찰이 더욱더 발전되어 있으며, 동시에 '五位' 설이나 '九十八隨眠' 설 등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이론이 확실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논서이다.
카트야야니푸트라(K ty yan putra, 迦 延子 또는 迦多衍尼子라고 한역)가 저술한 《發智論》(《八 度論》은 別譯)의 출현은 설일체유부 아비달마 역사상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시설족론》에서부터 《품류족론》에 이르는 동안 여러 논들이 주로 각기 특정한 문제를 분담하여 고찰하고 있는데 반해 이 論에 이르면 비로소 설일체유부의 학설 전반에 걸쳐 조직적인 논술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이 論 이전의 立論(集異門足. 法蘊足. 施設足, 識身足, 界身足, 品類足)을 六足論이라 하고 이 論을 發智身論이라고도 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 부파의 대표적 논서로서 존중되었다. 다만 조직적인 논술이라 해도 8章으로 이루어진 이 論의 구성이 반드시 완전하고도 정연한 순서로 작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고작해야 관련이 있는 문제를 가능한 한 한곳에서 모아 논술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또한 이 論보다 훨씬 적은 분량이고 설일체유부의 학통상 차지하는 위치도 물론 비교가 되지 않지만, 이 論과 비슷하게 구성되고 같은 발전단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으로는 《尊婆須蜜菩薩所集論》을 들 수 있다.
《발지론》에 대한 매우 방대한 주석서(玄 의 한역으로 200권)가 《대비파사론》(완전한 명칭은 《阿毘達磨大毘婆沙論》)이다. 이 논서가 나타남으로써 문제의 세분화는 한층 촉진되었고, 고찰 역시 더욱 더 정밀해졌다. 실제로 이것은 단순히 발지론의 주석일 뿐만 아니라, 만약 어떤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면 발지론에서 언급되지 않은 문제까지도 새롭게 채택하여 논의하고 있다. 또한 自派 내의 여러 가지 異論이나 다른 학파의 학설을 수없이 인용하고 있어서 실로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가능한 한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주석 방법에 있어서도 반드시 발지론의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충실하게 해설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라고 인정되는 부분에서는 특별히 충분한 분량을 할애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극히 간략하게 취급하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이 釋論은 실질적으로 發智本論의 한계를 뛰어넘어 분명히 독자적인 커다란 발전을 보이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모두 발지론의 조직에 따라, 그 文意에 근거하여 주석하는 태도를 지키고 있다. 이 論은 전설에 의하면 카니시카 왕 치하 케시미르에서 파르스바(P r va, 脇尊者라고 한역)를 비롯한 500명의 논사가 모여 전후 20년에 걸쳐 편집하였다고 하는데, 기원후 100~150년 무렵 케시미르에서 편집되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尸陀槃尼가 지은 《毘婆沙論》은 未完의 漢譯 한 권만 남아 있다. 이것은 완역되었다고 할지라도 양적으로는 《大毘婆沙論》과 비교할 수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그것과 매우 가깝다.
《阿毘曇甘露味論》은 현존하는 논서 중 가장 먼저 漢譯(역자는 전하지 않지만 3세기 무렵 번역됨)된 것이다. 비록 小論이지만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발지론에서 다음의 《阿毘曇心論》으로 발전하는 중간단계의 논서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중기논서에서 후기 논서로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논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入阿毘達磨論》은 성립 연대로 말하자면 오히려 후기의 《구사론》과 같은 시대이든지 그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지어졌으나 독특한 구성을 지닌 要綱的 입문서로서, 역시 중기논서에서 후기논서로 이행해 가는 형태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역에서는 그것을 塞建陀羅가 지었다고 하지만 티베트 어 역에서는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작자 불명이다. 대부분 술어의 정의만을 열거한, 간단한 내용의 論이지만 설일체유부 가운데 하나의 특이한 유파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節이 있으며 대승불교 唯識학파의 논서와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후기의 논서
《阿毘曇心論》(法勝 지음, 僧伽提婆 역 4권) 역시 小論이지만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조직화하는데 특이할 만한 공헌을 하였다. 이 論은 모두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7장(뒤의 3장 중 2장은 補遺, 1장은 부록)에서는 복잡하게 발달한 설일체유부의 사상을 정연하게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발지론》에서 이루어진 8장의 조직에 비해 훨씬 진보한 것이다. 제1, 2장에서는 이 학파의 근본입장으로서 '法'의 이론(뒤에 설함)을 설하고 제3, 제4장에서는 미혹한 세계의 실상을 밝혔으며, 제5, 6, 7장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와 그것에 도달하는 길(道)을 논하였다. 이 같은 論의 구성방법은 이후 거의 모든 설일체유부 논서가 답습하는 바가 되었다(앞에서 설명한 《입아비달마론》만은 예외). 운문으로 학설을 간결하게 설하고 산문으로 그것을 주석하는 형식도 아비달마 논서로서는 이 論이 처음으로 채용한 것이며, 역시 이후 거의 모든 설일체유부 논서가 이를 답습한다(《입아비달마론》만은 예외). 그러한 이유로 이 논서 이후를 '후기의 논서'라고 한다.
《阿毘曇心論經》과 《雜阿毘曇心論》은 《아비담심론》을 다소 개량. 증보(《잡아비담심론》의 증보는 상당히 大部임)한 것으로, 대체로 그것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俱舍論》 역시 그것의 연장. 발전이지만 《아비담심론》 등에서 맨 마지막 3장에 포함된 보유나 부록을 정리하여 앞의 7장 가운데 적당한 곳에 수록하고, 다른 새로운 1장을 더하여 미혹한 세계의 현실을 밝히는 부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한층 더 정연한 조직이 되었다. 거기다 다시 論의 말미에 특별히 독립된 1장을 부가하여 無我의 문제를 노하고 있다. 《集異門足論》.《法蘊足論》에서 시작하여 《發智論》에서 학설의 대강의 전모를 드러내고 《阿毘曇心論》에서 그 조직적 논술의 정형을 갖춘 설일체유부 아비달마는 이 《구사론》에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체계적 논서의 완성태라고 할 수 있는데, 분량에 있어서도 《발지론》의 한 배 반, 《아비담심론》의 두 배나 되는 大著이다.
《구사론》의 저자는 인도 불교사상사에 있어 빛나는 별이라고도 할 만한 바수반두(Vasuvandhu)이다. 《구사론》은 설일체유부 아비달마 사상을 상세히 설하여 밝히고 있으며 특히 많은 불교술어에 대하여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후 불교사에 있어서 인도. 티베트. 중국. 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불교교의의 기초가 되는 교과서로서 활발히 학습. 연구가 이루어져 수많은 주석서. 연구서. 해설서가 작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논서는 모든 아비달마 논서 중에서 다른 것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사론》이 반드시 항상 설일체유부의 학설만을 충실히 粗述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때때로 저자 자신의 견해에 따라 전통 학설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異說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럴 경우 설일체유부의 정통설을 비판하는 저자의 입장이 경량부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구사론》을 단순히 설일체유부의 논서라고 단정짓는 데에는 실로 무리가 있으며 도리어 이것을 경량부의 논서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앞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구사론》은 전체적으로 형식과 내용의 모든 면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아비담심론》이래,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집이문족》.《법온족》 이래 설일체유부의 논서가 발전한 역사를 계승하여 작성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자 자신이 이 論을 논설하는 경우도 많지만 케시미르 毘婆沙師(Vaibh ika, 大毘婆沙論을 배우는 자의 뜻)의 교리에 따라 설명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주저 없이 설일체유부 논서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구사론》을 계승한 것으로 상가바드라(Sa ghabhadra, 衆賢이라 한역)의 《阿毘達磨順正理論》과 《阿毘達磨藏顯宗論》이 있다. 이 두 가지 논서는 운문의 부분에서는 구사론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채용하지만 산문으로 된 注解의 부분에서는 바수반두의 학설을 엄격히 비판하여 정통파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선양하려고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즉 기본골격은 구사론을 따르되 그 학설의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반박하는 것이다. 《順正理論》은 그 분량에 있어 구사론의 두 배 이상이 되며 《顯宗論》도 구사론보다 많은 분량으로 되어 있는데, 전자에서는 특히 그 예리한 비판과 상세한 반론이 두드러지며 후자에서는 비판보다 오히려 정통설의 천명에 중점을 주고 있다. 전설적으로 상가바드라는 바수반두와 동 시대 인물이다. 즉 文法學者 바수라타(Vasur ta)가 구사론의 語句에 대해 批義하다가 바수반두에게 반론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설일체유부의 학승 상가바드라를 아요댜(Ayodya, 굽타왕조의 수도, 현재 라그노 동쪽 120kg 지점)로 불러 다시 반박하기 위해 이 두 論을 짓게하였는데, 바수반두는 상가바드라와의 대결을 피하였다고 한다. 이 전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상가바드라가 바수반두와 동시대이든지, 혹은 그 시대로부터 멀지 않은 시대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작자는 알려지지 않지만 근래 그 산스크리트 원문이 간행된 《아비다르마디파, Abhidharmadipa》라고 하는 논서 역시 거의 구사론의 골격을 따르면서 구사론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고 있다. 《아비다르마디파》는 원래 운문의 텍스트에만 해당되는 명칭이고 그것에 대한 산문의 주석을 《비바샤프라바, Bibh prabh 》라고 한다. 운문의 부분이나 산문의 주석은 필시 같은 작자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편의상 두 가지를 모두 《아비다르마디파》란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논서는 오직 하나의 원문 사본만이 발견되었을 뿐 다른 어떠한 譯本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그 사본마저 반 이상이 산일 된 不完本이지만,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구사론에 필적할 만한 분량을 가진 大部의 논서이다. 연대는 대개 구사론보다도 약간 下代일 것으로 추측된다. 구사론을 비판하는 책으로서는 《순정리론》에 비해 질적으로 훨씬 뒤떨어지지만, 다만 다 같이 구사론을 비판하면서도 그 학통을 《순정리론》의 그것과는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즉 《입아비달마론》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어서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매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논서이다.
⑶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 논서(論書)의 발달
팔리어 칠론(七論)
팔리어 論藏의 七論은 그 성립 연대가 그다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그 순서조차 분명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담마상가니(Dhammasa gani, 法聚論=法集論)
2) 비방가(Vibha ga, 分別論)
3) 다투카타(Dh tukath , 界說論)
4) 풋갈라판�티(Puggalapa ati, 人施設論)
5) 카타밧투(Kath vatthu, 論事論)
6) 야마카(Yamaka, 雙對論)
7) 팟타나(Patthana, 發趣論)
⑴ 《담마상가니》 제1장에서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心. 心所)을 善. 惡. 無記(善도 아니고 惡도 아닌 것)의 三性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양하게 분석적으로 고찰한다. 이른바 八十九心이 여기서 설명되며 마음의 작용으로서 40가지 정도가 언급되고 있다. 제2장에서는 물질적 존재(色)를 한 가지 종류에서 11가지 종류로 분류하여 그것 역시 각각 다양하게 분석한다. 제3장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22가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100가지(이상 도합 122가지를 '아비달마의 論母'에 의한 분별이라고 함), 나아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또 다른 방법 42가지(이를 '經의 論母'에 의한 분별이라고 함), 도합 百六十四門의 분별을 설하며, 제4장에서는 앞장의 그것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아비달마의 논모' 百二十二門에 의한 분별을 시도하고 있다. '경의 논모'라고 하는 이유는 경장 '장부경전'의 《상기티숫탄타, Sangitisuttanta》에서 언급되고 있는 술어 가운데 일부분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점에서 볼 때 北傳의 《集異門足論》과 관계하는 것이다.
⑵ 《비방가》는 역시 북전의 《法蘊足論》과 비슷한데, 아함 가운데 주요한 교설을 뽑아 그것을 종횡으로 분석 고찰한다. 먼저 그 교설을 나타내는 定型的(그 대다수는 아함에 그대로 나타남)를 언급하고 그것에 대해 正義的인 설명(그 것을 '經分別'이라고 함)을 부가한 다음, 다시 그것을 《담마상가니》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論母에 근거하여 다양하게 분류 고찰한(그것을 '아비달마 分別' 및 '물음'이라고 함) 것이다.
⑶ 《다투카타》는 술어가 나타내는 개념의 內包. 外延을 엄격하고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것들 서로의 포섭. 彼포섭의 관계, 相伴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관계 등을 논하는, 극히 형식적이고도 번쇄한 논서이다.
⑷ 《풋갈라판�티》는 한 가지 종류의 '人'에서부터 10가지 종류의 '人'까지를 각각 몇 가지 셋트로 열거, 도합 142가지 종류의 '人'에 대해 正義的으로 설명한다. 142가지의 명칭은 모두 경전에서 언급되는데, 그 대부분은 增支部의 〈二法 章〉에서부터 〈五法 章〉까지, 또한 長部의 《상기티숫탄타》에서 채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논은 경전에 나타난 명칭을 정리. 안배하여 획일적이고도 정의적인 설명을 부가한 것으로, 七論 중 가장 초기에 성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⑸ 《카타밧투》는 七論 중 팟타나와 함께 가장 후대에 성립하였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전설적으로도 석존이 지었다고 하지 않았다. 즉 佛說에 의해 제시된 어떤 논제에 대해 장로 목라리풋타 팃사 Moggaliputtatissa가 아쇼카 왕 치하에서 단행된 제3결집에서 이것을 설하였다고 한다. 전체는 시종 문답형식으로 일관되며 주석서를 보지 않고서는 문답의 주객이 누구며 異論을 주장하는 자가 어떤 부파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상좌부의 정통설을 세워 다른 부파의 異說을 깨뜨린다고 하는 독특한 내용을 갖고 있다.
⑹ 《야마카》는 두 가지 개념을 대비하여 논의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예컨대 'A가 모두 B인가. B가 모두 A인가'라든지 'A가 일어나는 곳에는 B가 일어나는가. B가 일어나는 곳에는 A가 일어나는가'라고 하는 식으로, 주요한 교설 가운데 나타난 용어의 의미.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대비하고 검토한다.
⑺ 《팟타나》는 七論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對論'이라고도 하며, 그 내용은 二十四緣에 대한 설명. 해석이다. 여러 가지의 '緣'은 아함경전 이래 여러 곳에서 散說되고 있지만 그것을 二十四緣으로서 정리하여 설한 것은 이 論이 처음이다. 또한 諸緣의 정의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이 서로 관계하는 모든 경우를 '아비달마 論母'에 따라 고찰하고 규정하려고 하였다.
특수한 세 가지 論典
연대적으로는 대개 七論 다음의 것(혹은 七論 중 그 성립 연대가 늦은 것보다는 조금 앞선 것인지도 모른다)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⑴ 《넷티파카라나, Nettippakara a(指導論)》, ⑵ 《페타코파데사, Pe akopadesa(藏釋論)》, ⑶《밀린다팡하, Milindapa ha(彌蘭陀王問經, 밀린다의 질문》등 세 가지 논서가 있다. 이것들은 아비달마 논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용상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⑴은 서기 1세기 전후의 인물이라고 하는 캇차야나(Kacc yana)가 지은 것으로, 경전의 이해에 대한 입문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⑵는 ⑴의 補遺라고도 볼 수 있고, ⑶은 당시 서인도를 지배하던 그리이스 인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 이름은 밀린다 Milinda)와 불교의 장로 나가세나(Nagasena) 사이에 이루어진 불교교의에 관한 對論의 기록으로, 다른 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한역 대장경 안에서도 《那先比丘經》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으며, 팔리어 傳보다 오히려 더 오래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 원형은 기원전후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 일종의 교의 학습서이지만 七論처럼 번쇄하거나 형식적인 논의가 많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에 따른 풍부한 문답으로 매우 흥미 있는 문헌이다.
이상의 세 가지 논서는 經藏이나 論藏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전통적으로 남방 상좌부에서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이다. 특히 《밀린다팡하》가 거의 삼장에 속하는 正典과 같은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붓다고사의 주저 《비숫디맛가, Visuddhimagga》에서 이 문헌을 다루고 있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미얀마의 상좌부 교단에서는 이 세 가지 논서를 모두 경장 중의 '小部'에 포함시키고 있다.
七論의 주석
남방 상좌부는 三藏에 대하여 여러 가지 古注를 전하였는데, 그것을 붓다고사 계의 사람들이 집성하여 주석서로서 정리하였다.
七論에 대한 붓다고사의 주석은 현재 三部가 남아 있다. 즉 《담마상가니》에 대한 《앗타사리니 Atthasalini(義貞越論)》, 《비방가》에 대한 《삼모하비노다니 Sammohavinodani(除痴論)》, 그 밖의 五論에 대한 《판찻파카라나앗타카타 Pancappakaranatthakatha(五論注解)》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 상당한 大部로서, 論書를 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七論 이후 발달한 학설까지 담고 있다. 그리고 앞의 두 가지는 특히 다음에 설명할 《비숫디맛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청정도론(淸淨道論)
《비숫디맛가 Visuddhimagga》 즉 《淸淨道論》은 七論 이래 전개되어 온 남방 상좌부의 모든 교리를 하나로 정리하여 조직적으로 설한, 바로 이 부파를 대표하는 가장 체계적인 논서이다.
붓다고사 보다 2, 300년 앞선 인물인 우파팃사 Upatissa는 《비뭇티맛가, Vimuttimagga(解脫道論)》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붓다고사는 그것을 기초로 증보하여 이 논을 지었다. 《비뭇티맛가》의 원문은 알려지지 않지만, 다만 다소 변화를 받은 텍스트의 역본이 한역 대장경 가운데 전하고 있다.
《청정도론》은 모두 2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戒. 定. 慧 '三學'의 순서에 따라 불타의 교법을 실천의 道로서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즉 먼저 스스로 경계하여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올바르게 가다듬고('戒의 淸淨') 나아가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고요히 한곳에 집중하는 삼매의 수련을 거듭함('定의 淸淨')에 따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깨끗하고 밝은 지혜를 획득한다('慧의 淸淨')고 하는 道를 설하는 것이 이 論의 要綱이다. 그러면서 남방 상좌부 특유의 존재론이나 심리론, 인식론을 내포하여 다채로운 아비달마적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또한 經. 律. 論 三藏에서 많이 인용하는 것도 이 논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여러 가지 綱要書
《淸淨道論》이 大著이기도 하거니와 대단히 복잡. 난해하기 때문에 그 후 남방 상좌부의 전통 중에는 간명하게 정리한 여러 가지 綱要書를 짓는 경향이 나타났다. ⑴ 《아비담마 아바타라, Abhidhamm vat ra(入阿毘達磨論)》와 ⑵ 《루파 아루파 비바가 R p rupavibh ga(色非色別論)》의 작자는 붓다닷타 Buddhadatta라고 한다. 그는 붓다고사와 동 시대의 선배라고 전해지지만, 이 이론이 실제로 성립한 것은 훨씬 후세의 일로 추측된다. ⑶《삿차 산케파, Saccasankhepa(諦要略論)》는 담마팔라 Dhammap la의 저작이다. 이 작자는 주석가로서 유명한 담마팔라 ('小部'의 여러 경전에 대한 주석 《파라맛타 디파니, Paramatthadipan 》등을 지음)와는 同名異人으로 그보다는 후대의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⑷《아비담맛타 상가하, Abhidhammatthasamgaha(攝阿毘達磨義論)》의 저자 아누룻다 Anuruddha는 9세기 이후의 인물로 추측된다.
⑴은 주로 마음(心) 즉 八十九심, 마음의 작용(心所) 즉 五十二心所, 물질적 존재 즉 四大種 및 二十四所造色, 열반에 대해 그 명의와 상호관계를 운문으로 해설한 것이다. ⑵는 초보적인 입문서로서 散文으로 씌어진 小論이고 ⑶은 운문만으로 이루어진 小部로서 ⑴과 마찬가지로 色. 心. 心所. 열반에 대해 개설하였다. ⑷는 후세까지 오랫동안 이 부파의 아비달마 학습 교과서가 되었던 것으로 그 명성이 대단히 높다. 즉 散文으로 서술하고 韻文으로 정리하는 방법에 따라 八十九心, 五十二心所, 마음이 작용하는 14과정, 二十八色, 여러 가지 실천항목, 十二緣起, 二十四緣 등 남방 상좌부 아비달마의 주요 학설 전반에 걸쳐 간결하고도 정연하게 해설하고 있다. 이 논에 대해서는 그 뒤 여러 가지 주석서가 작성되어 새롭게 발전한 교리에 따른 해석도 부가되고 있다.
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敎學)
⑴ '다르마(法)'의 이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아함경 이래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은 반복하여 설해지고 있다. 무릇 현실에 있어 인간의 삶에 관계하는 일체의 존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변이한다. 어떠한 것도 시간을 초월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하거나 영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무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무상하다고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 당치않은 욕망을 품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집착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불교의 기본적 교설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한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연(緣)'하여 결과로서 '일어나고(起)'있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만들어낸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원인이 소멸하면 결과도 소멸한다. 모든 것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 여하에 따라 존재한다는 점에서 常住不變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인과의 관계 위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견해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궁극적 원인 - 이를테면 전지전능한 절대자인 神 - 에서 유래한다'라는 견해나 '모든 것은 원인이 없이 우연히 혹은 아무렇게나 생겨난다'라는 견해에 대해 불교 자신이 취한 입장이다. 불교는 존재의 기초를 절대성. 所與性으로 보려고 하거나 불확정성. 우연성으로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논리성으로만 보려고 하였다.
이처럼 무릇 현실에 있어 인간 생존에 관계하는 일체의 사실은 '緣起'한 것이지만, 그것을 또한 '有爲'라고도 한다. 유위라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연기하고 있으며, 유위이며, 무상인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 즉 涅槃.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無爲'이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무상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의 세계는 또한 '유루(有漏)'이다. 그리고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는 '무루(無漏)'이다. 유루(有漏)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이라고 하는 의미이며, 무루(無漏)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반대의 의미이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정안(靜安)의 열반.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有爲). 유루(有漏)의 세계로부터 무위(無爲). 무루(無漏)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유루의 세계는 사제(四諦)에서 볼 때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이며 무위. 무루의 열반은 즉 멸제(滅諦)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道諦)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위(有爲)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 있는 도정(道程)에 있기 때문에 무루(無漏)이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미혹한 세계(현실)-苦. 集諦=有爲. 有漏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道=道諦=有爲. 無漏
깨달음(열반)=滅諦=無爲. 無漏
'다르마'라는 말
說一切有部(sarv stiv din)라는 명칭은 '모든 것(一切)은 존재(有)한다고 說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매우 기묘한 이름이지만 이 부파의 교학이 독특한 '다르마 dharma(法)의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부파는 이 이론에 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논증하여 緣起 - 有爲 - 無常의 이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다르마'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보통 '法'이라고 번역되지만 인도 사상 일반에 있어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불교의 경우에 한정시킨다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원래 '지탱하다', '유지하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비롯되어 일반적으로 질서. 규범. 법칙 등의 뜻을 나타내며, 나아가 도덕. 정의. 진실. 습관. 습성. 성질 등의 뜻도 의미하게 되었다. 佛敎語로서는 먼저 부처가 가르친 진리를, 또한 그 진리를 설한 부처의 가르침을 '法'이라고 하였다. 佛. 法. 僧이라고 할 때의 法이 그것이며, 法師. 說法. 法悅. 法要 등에서의 法은 모두 그러한 의미이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용례가 있다. 이것 역시 불교어로서 매우 중요한데, 이를테면 '法'이 보편적인 사물이나 존재를 의미하는 경우이다. 필시 일체의 사물은 법칙. 軌範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씨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설일체유부의 '法의 이론'이라고 할 경우의 '法'도 원래 이러한 의미의 용례에서 나와, 이윽고 이 부파 교학의 독특한 술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럴 때 '法'은 더 이상 단순한 사물,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요소들이 한데 모여 존재를 구성하는 '존재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존재, 현상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서로 얽힌 무수한 '法'의 離合集散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이 같은 '法의 이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
완성된 설일체유부의 이론에 의하면 존재의 요소로서 法을 75가지로 분류하고 그것을 다시 다섯 그룹으로 나누는데, 이것을 이른바 五位七十五法이라고 한다.
五位라는 것은 色法('물질'의 요소), 心法('마음'), 心所法(마음의 작용), 心不相應行法('물질'도 '마음'도 아닌 관계. 능력. 상태 등을 나타내는 요소) 및 無爲法을 말한다. 그리고 色에 11法, 心에 1法, 心所에 46法, 心不相應行에 14法(이상 有爲法) 및 無爲法에 3法을 상정하여 모두 75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75가지의 '法'은 상호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같은 因果關係 위에서 유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세계이다. 그렇다고 할 때 그러한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기본적인 요소인 '法'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있다', 즉 존재한다는 주장은 모든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물은 무상하다고 하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이 부파가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게 하였던 문제이다. 그러나 실은 여기서 말하는 '모든'이라고 하는 것은 소박하게 사물.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존재의 기본적 요소인 '法'의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한 논란이 반드시 적용되지는 않는다. 과거의 '法'도, 현재의 '法'도, 미래의 '法'도 모두 있다고 하는 것이 '一切有'의 의미이며, 그러한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法'이 고찰은 일체의 사물이 무상하다는 견해와 모순되기는커녕 거꾸로 그와 같은 '法'의 고찰을 통해 비로소 일체의 사물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삼세실유(三世實有)와 찰나멸(刹那滅)
'法'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어디에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法은 三世에 實有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모든 有爲法은 '刹那滅'이라고도 말한다. 찰나멸이라는 것은 순간에 소멸한다는 뜻으로,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法의 '三世實有' 性과 '刹那滅' 性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이 두 문제는 실제로 모순됨이 없이 함께 성립하며, 일체 존재의 무상성은 이로써 올바로 알려지게 된다고 설일체유부의 논사들은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책상 위에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을 '法의 이론'에서 본다면 실은 순간에 생겨나 소멸해 버리는 有爲 諸 '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 어떤 순간에 하나의 컵이 여기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이 컵의 둥글고 긴 형태(그것은 하나의 '法'이다)나 단단하고 매끄러운 감촉(그것도 하나의 '法'이다)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法'이 그 순간, 거기에 함께 모여 生起함으로써 컵의 존재라고 하는 현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諸 '法'의 하나하나는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모두 소멸해 버리는 刹那滅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순간에도 그대로 컵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행한 諸法을 상속하여 그것과 同類의 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계속 생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 번째 순간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비지속적. 순간 生滅的인 諸法의 연속적. 비단절적인 生起 위에서 컵의 존재라고 하는 시간적 지속의 현상이 우리의 경험적 세계의 사실로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法이 생기한다고 해도 無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해도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기라는 것은 '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顯現하는 것이며,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난 이전의 법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진 이후의 법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한다.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나타나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동안의 한 순간의 법은 현재에 존재한다. 미래에도 존재하며 현재에도 존재하고 과거에도 존재한다. '法'은 三世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변함없는 특성을 갖고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三世에 實有한다. 이처럼 有爲의 法은 三世에 걸쳐 實有하지만, 그것이 生起하여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러한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쌓여 경험적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각의 순간에 生起하는 '法'은 처음부터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전. 후 순간을 서로 달리함으로써 경험적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화 유동하는 것이다. 즉 이 세계 모든 것은 이처럼 무상한 것이다.
인과(因果)
그렇다면 法이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현재로 生起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하는 有爲의 法은 무수하며 어떠한 순서나 차례도 없다. 그 중에서 어떤 순간에 어떠한 法이 현재에 生起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순간에 어떠한 法이 생기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因의 힘이다. 法으로 있으면서 바로 그 순간에 현재로 生起해야 할 因을 갖는 것만이 그러한 因의 결과로서 거기에 생기하는(즉 緣起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法이 생기하는 데 무엇이 因으로서 작용하는 것인가. 그것은 또 다른 法이다. 因果의 관계ㅡ 즉 緣起의 관계는 법과 법 사이에서만 성립한다. 법이 因이 되어 법을 果로 낳는 것이다. 어떠한 법이 원인이 되어 어떠한 법을 결과로 낳는 데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인과의 관계는 결코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설일체유부의 분류에서는 因을 6가지, 緣을 4가지, 果를 5가지로 나눔) 그것들은 서로 중복되기도 한다. 하나의 법은 다른 무수한 법을 원인으로 삼아 생기하며, 또한 동시에 다른 무수한 법을 결과로서 생기시킨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떠한 법과는 어떠한 종류의 인과관계를 가지며, 다른 어떤 법과는 또 다른 인과관계를 갖고 있다.
因과 果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因果關係도 있으며, 因이 선행하고 過가 뒤에 생기는 異時의 관계도 있다. 또한 서로 간에 因이 되기도 하고 果가 되기도 하는 상대적 관계도 있으며, 因이 그것과 같은 종류의 果를 낳고 그 果가 다시 因이 되고 또 같은 종류의 果를 낳기도 하는 연쇄적 관계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인과관계의 사슬은 무수한 '法'사이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 緣起 - 無常 - 有爲의 세계를 성립시킨다. 그러한 세계에는 한편으로는 번뇌로부터 그릇된 행위를 일으켜 괴로움에 빠지는 미혹의 생활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번뇌를 하나하나 끊음으로써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도의 생활이 있다.
⑵ 미혹한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
번뇌(煩惱). 업(業). 괴로움의 세계
미혹한 세계의 因. 果는 한마디로 말해 번뇌에 의해 業을 일으키고, 그로 말미암아 윤회의 괴로움에 빠지는 세계이다.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서는 무수한 생명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는 무한한 과거이래 生과 死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한 살고 죽는 것, 생명 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衆生 혹은 有情이라고 하는데,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러한 중생들이 겪는 여러 가지 생존의 방법을 三界. 五趣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三界라고 하는 것은 欲界. 色界. 無色界이다. 욕계. 색계는 물질적인 세계이고, 무색계는 물질이 아닌 세계 즉 순수한 생존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질적 세계 가운데 특히 욕망, 다시 말해 생물의 본능적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는 영역을 욕계라 하고, 욕망이 그다지 왕성하지 않은 영역을 단순히 색계라고 한다. 욕계보다는 색계가, 색계보다는 무색계가 위쪽에 위치한다. 즉 지하의 세계와 지표의 세계 그리고 공중의 세계(즉 天界) 중 하층이 욕계에 속하고, 天界의 상층이 색계에, 나아가 천계의 최상층이 무색계에 속한다.
지하의 세계에는 지옥의 생활이 있고, 지표의 세계에는 餓鬼. 畜生. 人間의 생활이, 天界에는 天(즉 하늘의 신들)의 생활이 있다. 이것이 五趣(때에 따라 여기에 阿修羅를 더하여 '六趣'라 하기도 함)이다. 그리고 지옥. 아귀. 축생은 인간에 비해 열등하고 고뇌가 많으며 좋지 않은 경계이기 때문에 三惡趣(三惡道)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 하늘(天)은 인간세계에 비하면 훨신 낫고 행복하며 좋은 경계이다. 그러나 천계도 결코 영원한 至福의 세계는 아니며, 유한한 세계이고 轉變이나 쇠망을 면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것 역시 윤회하는 경계인 것이다. 중생은 오취 어딘가에 속하여 살고 있다. 이미 죽었다면 그 어딘가에 다시 태어난다. 천계에서 살았던 자라고 할지라도 다음 생애에 아귀나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중생은 오취 중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로의 끝없는 生死의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업(業)의 이론
이같은 三界. 五趣로 설명되는 윤회적 생존의 다양한 모습은 중생이 행한 善. 惡業의 결과이다. 과거의 선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좋고도 즐거운 신분을 결과로 하고, 과거의 악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좋지 않고도 괴로운 신분을 결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業報는 엄격히 개별적인 것이다. 타인이 행한 선행의 좋은 결과를 자신이 받을 수 없으며, 자신이 행한 악행의 좋지 않은 결과를 타인에게 억지로 떠맡길 수 없다. 업의 문제는 나 한 사람의 문제이며, 하나의 행위적 주체의 문제이다.
業報의 필연과 自業自得,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중생의 생활 속에 선악의 근거가 성립하며 도덕의 근거가 성립한다. 業. 輪廻의 세계라는 것은 다시 말해 善. 惡의 세계, 세간적 도덕의 세계이다. 이 세계 안에서 인간은 악을 피하고 선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惡趣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善業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善業에 의해 善趣(즉 天界)에 태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불교가 목표로 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윤회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그것은 業報의 繫縛에서 행방됨으로써 顯現한다. 善趣에 태어나게 하는 善業은 여전히 세간적 도덕에서의 善 곧 有漏의 善이다. 따라서 번뇌를 떠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無漏의 지혜에 의한 無漏의 善業이 필요하다. 그것은 세간적 도덕을 초월한 '出世間'의 道, 곧 聖道이다.
성도(聖道)
無漏의 지혜에 의해 번뇌를 하나하나 끊고,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성도는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등 세 가지로 설명된다. 맨 마지막의 '無學道'는 道라고는 하지만 앞의 見道. 修道의 과정을 통해 모든 번뇌를 끊는 결과로써 얻어지기 때문에 道程이 아니라 그 목적이다. 無學이라는 것은 더 이상 배워야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의미이다.
따라서 三道라고 해도 사실상 번뇌를 끊는 수행의 道는 見. 修 二道뿐이다. 그러나 보통 그에 앞서 오랜 예비적 수행의 단계가 있어야 한다. 즉 戒를 지켜 그 생활을 올바르고 청정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三昧를 닦아 산란한 마음을 점차 아주 맑은 安穩의 상태로 이끄는 道程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심신의 수련에 의해 수행자가 마침내 無漏의 지혜를 일으켜 번뇌를 끊게 될 때 그는 聖道에 들어간 것이며, 이제 더 이상 凡夫(평범한 사람의 뜻)가 아닌 聖者(존귀한 사람의 뜻)인 것이다.
성도의 첫 번째는 見道이다. '見'이라는 것은 四諦를 관한다는 의미이다. 見道는 苦. 集. 滅. 道인 四諦의 도리를 觀知함으로써 無漏의 道를 일으켜 바로 88가지 번뇌를 단절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번뇌는 수행자가 무지하고 도리에 어둡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가 일단 사제의 진리성을 인식한다면 망치로 돌을 깰 때 돌이 딱 갈라지는 것처럼 단번에 단절된다. 여기서 아는 것이 바로 끊는 것이다.
계속해서 수행자는 修道의 과정으로 향한다. 수도에 있어서 단절해야 할 번뇌는 10가지인데, 모두 情. 意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見道에서 끊어진 이지적 번뇌와는 달리 단순히 이성상의 了解만으로는 끊을 수 없다. 즉 여기서는 아는 것이 바로 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알아도 여전히 끊어지지 않는 것이 愛欲이라든지 증오와 같은 정의적인 번뇌의 공통된 성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도의 과정에서는 三昧의 수련을 거듭하고 四諦의 관찰을 반복함으로써, 또한 싫증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마음을 고양함으로써 끊기 어려운 번뇌가 점차 단절되는 것이다.
성자(聖者)의 단계
성자(聖者)가 견도. 수도의 과정을 거쳐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렸을 때의 그를 阿羅漢(또는 줄여서 '羅漢', arahan)이라고 한다. 아라한은 원래 '[공양을 받는데]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의미의 말로서 깨달음에 이른 불타를 그렇게 부르며, 또한 불타의 제자로서 모든 번뇌로부터 이탈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비달마에서 설해진 성자의 단계 중 가장 높은 계위를 가리킨다. 곧 아비달마에서는 아라한과 다시 말해 아라한의 계위를 얻는 것이 모든 출가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수행자가 수행 道의 예비적 단계를 마치고 난 후 비로소 見道에 들어와 88가지 번뇌를 단절하여 수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預流向이라 하고, 바야흐로 이 수도에 들어간 단계를 豫流果라고 한다. 예류과로부터 阿羅漢果 사이에 一來果. 不還果의 두 단계를 두며 예류과에서 일래과에 이르는 과정을 一來向, 일래과에서 불환과에 이르는 과정을 不還向, 불환과에서 아라한과에 이르는 과정을 阿羅漢向이라고 한다. 이러한 모든 계위를 합해 四向四果라고 하는데, 聖道에 있어서 번뇌를 단멸하는 정도에 따라 그 단계를 설정하였다. 預流(또는 須陀恒 srota- panna)라는 것은 '[佛法의] 흐름에 들어간 자'의 뜻이고 一來(또는 斯陀含 sak d- gamin)는 '이제 [인간과 하늘 사이를] 오직 한 번만 왕래하는 자'의 뜻이며, 不還(또는 阿那含 an- gamin)은 '[이제 더 이상 욕계에] 돌아옴이 없는 자'의 뜻이다.
우리는 이로써 佛法의 '흐름에 들어가' 면서부터 공양을 받기에 '어울리는' 깨달음의 인간이 되기까지에는 길고도 긴 정신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 수행자는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감으로써 그 정신적 경지는 점점 견고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타와 아라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아라한은 원래 불타를 의미하였다. 이 말(漢譯에서는 '阿羅漢'이라는 형태보다 오히려 '應供'이라고 하는 譯語의 형태로 쓰임)은 경전에서 불타의 다른 이름의 하나로서 잘 쓰이고 있어서 실제로 如來라든가 세존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그러나 아비달마 논서에 있어서 수행자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로서의 아라한과 불타의 경지는 분명히 구별되고 있다. 無漏의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끊고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모두 불타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범부로부터 성자로, 그리고 아라한으로의 道는 菩薩(곧 佛陀가 될 사람)로부터 불타로의 道와 동일하지 않다. 대개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의 道는 오로지 번뇌의 단절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자의 道이지만 보살로부터 불타로의 道는 그 밖에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커다란 과제를 안고 있다. 즉 자비로써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法을 설하여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을 내용으로 함)는 利他行이 바로 그것이다. 범부로부터 아라한으로의 道는 사람들에게 널리 개방되어 있지만 보살로부터 불타로의 道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보살로서 불타로의 道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은 과거의 무수한 생애에서 한량없는 德을 쌓고, 사람들을 위하여 '無給의 사용인'이 되며 자비를 베푸는 데 소홀함이 없는, 무한한 利他性과 자기 연마성을 갖춘 존재뿐이다. 이렇게 선택된 희유한 인간이 그 도를 성취하여 불타로서 출현하는 것은 실로 십억의 세계를 그 속에 포함한다는 전 우주를 통해 보더라도 동시에 두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비달마의 論師들은 師主 석존을 숭앙하는 깊은 마음에서 불타의 위대함을 극구 찬탄하면서 스스로 목적하는 바를 아라한과에 두어 아라한과 불타의 거리를 엄격히 유지함으로써 佛果를 엿보는 불손함을 결코 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3.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교학(敎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의 비교
개설(槪說)
이상 설일체유부 학설의 전반을 개략적으로 설명하였다. 남방 상좌부의 아비달마도 아함경전 중의 교설을 조직하여 체계적인 학설로서 논술한다고 하는 점에서 설일체유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이 부파에는 처음부터 이 부파 특유의 이론을 발전시킨 면도 없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러한 특징적인 부분만을 간추려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이 부파의 논서 중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나타내는 《비숫디맛가》에 근거하여 그 교의 학설을 설명하는데, 그 이유도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색법(色法)
아함경전 이래 色法(물질적 존재)은 '四大種 및 大種所造'로 정의되고 있다. 四大種이란 地. 修. 火. 風 네 가지 원소를 의미하고, 大種所造란 이러한 네가지 원소에 의해 합성된 諸물질을 의미한다. 大種所造의 色으로서 남전 아비달마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여근(如根). 남근(男根). 명근(命根). 심사(心事). 단식(段食). 신표(身表). 어표(語表). 허공계(虛空界). 색(色)의 가벼움. 색(色)이 부드러움. 색(色)의 적응성. 색(色)의 적집. 색(色)의 지속. 색(色)의 노성(老性). 색(色)의 무상성 등 24가지를 들고 있다.
처음 다섯 가지는 시각기관. 청각기관. 후각기관. 미각기관. 촉각기관('身'은 그것의 뜻(意), 단순한 '신체'의 의미는 아님)의 五官('五根'이라고도 함)이며 色(색채, 형태). 聲('목소리' 뿐만 아니라 '소리' 일반). 香. 味는 오관 중 앞의 네 가지의 대상이다. 남. 여근은 성적 기능의 근본이 되는 것이고 명근은 생명적 기능의 근본이 되는 것, 심사는 마음의 자리로 생각되는 심장이다. 단식이란 입으로 섭취하는 食物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 육체를 지탱. 유지하는 작용을 말한다. 신. 어표는 內心의 業(그것은 心. 心所의 작용)이 신체의 동작과 말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허공계란 공간을 의미한다. 다음의 세 가지는 色法이 공통적으로 갖는 變應性이며 마지막 네 가지는 '有爲'이고 '無常'인 色法이 공통적으로 갖는 성질(有爲四相이라고 함)로서, 즉 생기. 지속. 변화. 소멸의 성질이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색법의 속성이지만 그 자체를 바로 '色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설일체유부의 견해와 비교하면 매우 흥미롭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여. 남근을 '身'根(五根의 하나)에 포함시켜 따로 언급하지 않으며 명근이나 有爲四相 등은 '心不相應行法'에 속한다고 하였다. 또 신표. 어표를 身表業. 語表業이라 하여, 그것을 업이 나타내는 相이라 하지 않고 업 그 자체로 생각하였다.(남방 상좌부에서는 업 그 자체는 모두 心. 心所상에서만 나타난다고 함). 허공은 설일체유부에서 無爲法의 하나로 간주된다.
地. 水. 火. 風 四大에 대해서도 설일체유부에서는 그 본질을 각각 경(硬). 습(濕). 열(熱). 동(動)이라 하고 그 특징적인 작용을 각각 보지(保持). 포섭(包攝). 숙성(熟成), 증광(增廣)이라고(다만 風大의 경우 그 본질을 輕이라 하고 그 특징적인 작용을 流動이라고 하는 학설도 있음) 한 데 반해 , 남방 상좌부의 정의는 이보다 더욱 면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만큼 정연하지 않은 부분도 있으며 그 명확성도 약간 결여되어 있다. 상좌부에서는 앞에서 든 여러 가지 성질뿐만 아니라 地大에는 建立이라고 하는 작용이, 水大에는 漏適이라고 하는 특성이나 확산 혹은 결합이라고 하는 작용이, 風大에서는 硬貨라고 하는 특성이 더 있다고 설한다. 설일체유부는 사대의 본질을 硬. 濕. 熱. 動으로 보기 때문에 사대는 모두 觸('만져지는 것' 의 뜻, 촉각 즉 身根의 대상) 즉 觸處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지만 상좌부에서는 水大를 法(여기서 法을 인식. 사고하는 감각기관인 '意'의 대상을 의미함), 즉 法處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것은 아마 水大의 濕潤性을 중시하지 않고 그 작용을 중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에서는 오직 觸處만이 四大와 所造色을 포함하고 다른 九色處(眼. 耳. 鼻. 舌. 身. 色. 聲. 香. 味)는 모두 所造로만 존재한다고 하였으며, 남방 상좌부에서는 觸處는 三大와 그 속성에 존재하고(所造를 포함하지 않음) 水大는 法處 일부에 포함되며 다른 九色處는 모두 所造色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大毘婆沙論》이후 설일체유부에서 설하고 있는 極微說(일종의 원자론)은 남방 상좌부의 아비달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교설이다.
89가지 마음과 心作用의 14과정
마음(心)을 89가지로 분류하는 것은 완전히 남방 상좌부의 독자적인 교설방법이다. 먼저 마음을 善과 不善(즉 惡)과 無記(善도 惡도 아닌)로 나누어 보면 善心 21, 不善心 12, 無記心 56 가지이다. 또 善心으로서 欲界 善心 8, 色界 善心 5, 無色界 善心 4, 出世間 즉 三界를 떠난 無漏의 善心 4가지를 들고 있다. 不善心은 모두 欲界에 속하지만(色. 無色界에는 不善心이 존재하지 않음) 그것을 다시 貪心(탐욕스러움 마음) 8, 瞋心(증오하는 마음) 2, 癡心(어리석은 마음) 2가지로 나눈다. 無記心은 업의 결과인 '異熟'과 오직 작용일 뿐인 '唯作'등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異熟의 無記心은 욕계의 善異熟 16, 욕계의 不善異熟 7, 色界의 異熟 5, 無色界의 異熟 4, 出世間의 異熟 4 가지 등 모두 36가지이다. 그리고 唯作의 무기심은 욕계 11, 색계 5, 무색계 4 가지 등 모두 20 가지이다.
마음이 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하여 14가지 단계로 나누는 것 역시 이 부파의 독특한 교설이다. 14가지 단계에 대해서는 각기 특유의 술어로써 표현하고 있는데, 일단 그 譯語를 적어보면 ⑴ 결생(結生) ⑵ 유분(有分) ⑶ 전(轉) ⑷~⑻ 안식(眼識) 내지는 신식(身識) ⑼ 령수(領受) ⑽ 추도(推度) ⑾ 결정(決定) ⑿ 속행(速行) ⒀ 피소연(彼所緣) ⒁사(死)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⑴은 어떤 생애에 生을 받는 순간의 마음을 말하며 ⒁는 生을 마치고 죽을 때의 마음을 말한다. ⑴에서 시작하여 ⒁로 끝마치는 한 생애 동안 ⑵ 내지 ⒀의 순서로써 중생의 정신생활이 전개된다. ⒁에서 한 생애가 끝나면 계속해서 다음 생애의 ⑴이 일어나 끝없이 윤회가 되풀이된다.
⑵는 정신활동의 기반이 되는 잠재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작용도 갖고 있지 않지만 모든 정신작용은 여기에서 나와 여기로 돌아간다. ⑶ 은 안팎으로 자극을 주어 마음을 일으켜,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상태로부터 표면에 나타나는 상태로 향하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眼識 내지 身識의 五識 가운데 어떤 하나를 일으키는 경우와 意識(第六識)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⑷~⑻은 眼識(시각작용). 耳識(청각작용). 鼻識(후각작용). 舌識(미각작용) 身識(촉각작용) 등 다섯 가지로 여섯 번째 意識(판단. 사고작용)에 대하여 前五識이라 한다. 이것들은 ⑶에 의해 일어나 ⑼로 이어진다.
⑼는 前五識을 통해 파악된 대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快 혹은 不快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이다. ⑽은 ⑼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을 감각적으로 판단하여 기뻐하고 혹은 슬퍼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⑾에 이르러 비로소 감각이 아닌 지각인식의 작용이 일어난다. 감각작용으로부터 지각작용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⑾이며, ⑿는 지각. 인식. 판단. 의지 등이 정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⑾이며, ⑿는 지각. 인식. 판단. 의지 등의 정신작용이 완전히 발휘된 단계이다. 앞의 ⑶에서 의식(第六識)이 일어날 경우에는 ⑷~⑾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⑿로 들어간다. ⑶은 두 순간, ⑷~⑾은 모두 한 순간으로 이루어진 마음의 작용이지만, ⑿는 가장 길 경우 7순간에 걸쳐 일어난다고 한다.
만약 ⑿의 대상이 강대하여 명확한 것일 경우 그것이 마음에 인상을 남겨 마음속에 保持하게 된다. 그러한 인상을 모아 保持하는 마음의 작용이 ⒀이다. 이렇게 하여 일련의 활동을 끝낸 마음은 다시 돌아와 ⑵ 有分識에 침잠한다.
그런데 14단계의 마음의 작용은 각기 89心의 한 가지에서, 혹은 두가지 내지 다섯가지에서 작용하게 된다. 모든 욕계의 善. 不善心 및 唯作無記心 중 8가지, 색계. 무색계의 선심 및 유작무기심, 그리고 모든 出世間心은 '速行' 만을 갖는다. '轉'은 욕계의 유작무기심 중 두 가지에 있으며, '決定'은 그 중 하나에만 있다. '眼識' 내지 '身識'은 욕계의 善 및 不善異熟無記心 중 각각 다섯 가지에 있다. '領受'도 욕계의 선심 및 불선이숙무기심 중 각각 한 가지에 있다. '結生'과 '有分'과 '死'는 욕계의 선이숙무기심 중 9가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 색. 무색계의 이숙무기심 모두에 있다. '推度'는 욕계의 선이숙무기심 중 두 가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에 있으며, '彼所緣'은 욕계의 선이숙무기심 중 9가지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에 존재한다.
이처럼 복잡. 번쇄한 분석과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논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번삽함을 느끼게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비달마 논서의 본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십사연(二十四緣)
인(因). 과(果)의 분류로서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육인(六因). 사연(四緣). 오과(五果)를 주장하지만 남방 상좌부에서는 《팟타나》이래 이십사연(二十四緣)을 주장하고 있다. 그 명칭도 이 부파 특유의 것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번역어로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 무간연(無間緣), 등무간연(等無間緣), 구생연(俱生緣), 상호연(相互緣), 의지연(依止緣), 친의지연(親依止緣), 전생연(前生緣), 후생연(後生緣), 수습연(修習緣), 업연(業緣), 이숙연(異熟緣), 식연(食緣), 근연(根緣), 정려연(靜慮緣), 도연(道緣), 상응연(相應緣), 불상응연(不相應緣), 유연(有緣), 무유연(無有緣), 거연(去緣), 불거연(不去緣)
이것은 너무나도 번삽하게 나열한 것이어서 명칭은 다르지만 뜻이 같은 것도 있는 등(無間緣, 等無間緣), 정연한 조직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복잡 다양한 인과관계를 가능한 한 극명하게 추구하려 했던 아비달마 논사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Ⅲ. 아비달마의 철학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俱舍論』은 산스크리트어로 『Abhidharmakosabhasya』 인데, 『아비다르마藏疏』의 뜻이며, 『對法藏論』이라고 번역한다. 산스크리트本과 漢譯本, 티벳譯本이 있다. 世親 또는 天親이라고 漢譯되는 바수반두(Vasubandhu)의 저작이다. 바수반두는 5세기경 서북인도에서 활약한 아비다르마論師로서 無著의 동생이기도 하며, 소승불교의 학승일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학승으로서 瑜伽唯識學의 창도자의 한사람으로서도 이름이 높다. 한역은 玄裝이 651년에 번역한 『阿毘達磨俱舍論』 30권이 있고, 偈頌만을 모은 『阿毘達磨俱舍論本頌』 1권(玄裝 번역)이 있으며, 또 眞諦가 564년에 번역한 『阿毘達磨俱舍釋論』 22권이 있다. 『俱舍論』은 인도, 중국, 티벳, 한국, 일본에서 널리 연구되어 훌륭한 註釋들이 남아있다. 『구사론』에서 세친은 說一切有部의 교학을 표준으로 삼아, 이것을 체계화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취급하여 經量部나 大衆部 등의 교설을 소개하고, 理에 뛰어남을 宗으로 삼는 입장(理長爲宗)에서 교리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大乘 經典이나 대승의 論書는 有部의 교학을 기초로 하고 혹은 그것을 破斥하기 위하여 작성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번잡한 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구사론』은 널리 대,소승의 학도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해제
30권. K-955(27-453). T-1558(29-1). 당(唐) 시대(A.D. 651∼654) 번역. [역] 현장(玄 ). [저] 세친(世親). [범] Abhidharmako a- stra. [장] Chos m on-pa i mdsod-kyi b ad-pa. [약] 구사론(俱舍論). [별] 대법장론(對法藏論), 신역구사(新譯俱舍). [이] 아비달마구사론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
소승 부파 불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논서이다. 3세(世) 실유론(實有論)에 입각하여 다른 부파의 교설 및 외도의 주장들을 낱낱이 논파하고 있다. 전체 내용은 게송과 그에 대한 해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마지막 품인 제9 파집아품(破執我品)은 게송 없이 논술로만 이루어져 있다.
먼저 제1품과 제2품에서는 설일체유부의 대표적인 교법이라 할 수 있는 5위 75법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다.
제1 분별계품(分別界品)에서는 유루(有漏), 무루(無漏), 5온(蘊), 12처(處), 18계(界) 등을 중심으로 만유(萬有) 제법(諸法)의 체(體)를 분별하여 해석하고 있다.
제2 분별근품(分別根品)에서는 근(根)의 뜻을 비롯하여 22근, 6인(因) 4연(緣) 등 만유(萬有) 제법의 용(用)에 대해서 논의한다.
다음 여섯 품에서는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과(果), 인(因), 연(緣) 등을 각각 설명한다. 즉 제3 분별세품(分別世品), 제4 분별업품(分別業品), 제5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 등은 유루에 대해서 논의하고, 제6 분별현성품(分別賢聖品), 제7 분별지품(分別智品), 제8 분별정품(分別定品) 등은 무루에 대해 논의한다.
제3 분별세품(分別世品)은 유루의 과(果)에 대해서 유정(有情) 세간(世間), 기세간(器世間), 12인연(因緣)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제(諦)의 고(苦)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4 분별업품(分別業品)에서는 유루의 인(因)에 대해서 신(身), 구(口), 의(意), 3업(業)이 선악에 미치는 것 등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4제의 집(集)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5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에서는 유루의 연(緣)에 대해서 수면(隨眠)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4제의 집(集)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6 분별현성품(分別賢聖品)에서는 무루의 과(果)에 대해서 7현성(賢聖)의 계위(階位)와 도법(道法)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제의 멸(滅)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7 분별지품(分別智品)에서는 무루의 인(因)에 대해서 10지(智)와 18불공법(不共法)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제의 도(道)에 해당한다.
제8 분별정품(分別定品)에서는 무루의 연(緣)에 대해서 선정(禪定)의 갖가지 상(相)과 용(用)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4제의 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9 파집아품(破執我品)에서는 별도의 게송은 없이 다른 부파와 외도의 견해를 논박하고 무아(無我)의 교법을 천명하고 있다.
저자인 세친이 아비달마구사론본송(阿毘達磨俱舍論本頌, K-954)을 먼저 짓고 나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듣고 그에 대한 해석을 붙여 상세히 논술한 것이 본 논서였다고 전한다. 후대에 이르러 본 논서를 중심으로 구사종(俱舍宗)이 형성되었을 만큼 불교사상 매우 중요한 논서이다.
上山春平,櫻部建 『아비달마의 哲學』 정호영 역, 민족사
본 내용은 구사론을 上山春平,櫻部建의 『아비달마의 哲學』( 정호영 역, 민족사) 제1부의 내용의 순서로 내용을 살펴보고자 정리한다.
서장
제1장 우주 - 제3 세간품
제2장 인간 - 제3 세간품
제3장 달마의 체계 - 제1 계품, 제2 근품
제4장 물질 - 제1 계품, 제2 근품
제5장 마음 - 제1 계품, 제2 근품
제6장 선과 악 - 제4 업품
제7장 번뇌 - 제5 수면품
제8장 도(道) - 제7 지품, 제8 정품
제9장 아라한과 부처 -제6 현성품
제10장 아함에서 아비달마로
제11장 세친의 전기
제12장 구사론 이후
서 장
여기서 취급하는 것은 인도불교의 아비달마사상, 특히 사르바스티바딘(유부, Sarv stiv din) 학파의 사상으로서, 그 자료로서는 바스반두(Vasubandhu)의 명저 아비달마코샤(Abhidharmako a)이다.
아비달마(阿毘達磨)란 무엇인가? 그것은 샤키야무니 붓다의 가르침을, 붓다의 사후 300~900년 경의 학승들의 연구, 해명, 조직하여 하나의 지적 체계로 정리한 지적 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출현한 갖가지 저작 - 교의의 해설서, 강요서, 논술서 등도 마찬가지로 아비달마로 불린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은 아비달마. 샤스크라(아비달마론, 또는 아비달마 논서)로 불리워야 하지만, 줄여서 간단히 아비달마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샤키야무니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샤키야무니의 서거 후 곧 그의 제자인 승려들이 모여 그들이 기억하고 있던 붓다 생전의 교설을 정리하고, 그 후로 승단에서 전승된 것을 가리킨다. 불교도들은 이를 아가마(가르침의 전승)라고 부른다. 보통 한자로 음사되어 아함 또는 아함경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아가마에 대한 학습과 연구는 매우 오랜 옛날부터 승단 내부에서 행해졌다. 아가마의 내용은 물론 붓다가 가르친 진리에 다름 아니지만, 그 진리를 붓다 자신은 '달마' 법(法)이라는 말로 불렀다. '아비달마(對法)는 원래 달마에 대한[학습. 연구]의 의미이다. 이러한 원래의 뜻으로 말하면, 아비달마의 기원은 아마도 아가마 경전성립 이전, 샤키야무니 붓다 생전의 시대까지 소급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아비달마라고 하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보다 후대의 아가마 연구와 그 교의의 조직화를 가리킨다. 즉 불교승단의 당초의 통일을 잃고 기원전 3~1세기 경 많은 부파, 학파로 분열된 후, 이들 제학파, 적어도 그 중 유력한 몇 학파에서는 아가마경전에 대한 연구, 논의에 정열을 쏟는 경향이 현저히 높아져갔으며, 여기에 아비달마논서, 또는 단순히 아비달마로 불리는 대량의 교의학 문헌군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여러 학파 중, 아마도 가장 많은 논서를 작성하고 그리고 그 중 많은 것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는 것은 서북인도에 큰 세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르바스티바딘학파일 것이다. 그 이름은 문자 그대로는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를 의미하며, 보통 한역명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줄여서 '유부(有部)'로 알려져 있다. 이 기묘한 호칭이 유래는 다음에 이 학파의 교의학을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논서 다수가 세상에 나타난 이후, 그 업적을 계승하고 더욱 새롭게 발전시켜 아비달마논서의 하나의 완성태를 제시한 것이 바수반두의 아비달마코샤이다.
바수반두는 한역명 세친(世親) 또는 천친(天親)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불교의 중기에 서북인도에서 활약한, 불교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학자, 사상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아비달마의 학승(아비달마논사)으로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철학자로서는 유가유식학(瑜伽唯識學)의 창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히려 이 방면으로 이름이 더 높기도 하다. 그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5세기로 보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아비달마코샤는 한자로 음사하여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라고 한다. 보통은 그 약칭인 구사론(俱舍論)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세친의 여러 저작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로서, 그의 폭넓고 다채로운 사상활동의 일면을 잘 대표한다. 즉 이 곳에서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불교사상을 정연히 조직화하여 서술한 아비달마적 교의학서의 전형적인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본래 구사론은 꼭은 설일체유부 학설만을 충실히 기술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통적인 학설을 비판하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이설(異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이설부분에 나타난 세친이 사유방법은 교의해석상 오히려 설일체유부에 대립된 사우트란티카학파(S utr ntika) 보통은 경량부(經量部)로 알려진 학파의 사유방법과 통하는 바가 있으므로, 구사론을 단순히 설일체유부의 논서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따라서 이를 경량부의 논서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하였고 뒤에서도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구사론이 전체로서는 형식, 내용 모두 선행하는 설일체유부의 논서를 계승. 발전시킨 것임은 명백하다. 또한 서술이 정연한 점, 인도. 중국. 한국. 일본불교를 통하여 오랫동안 불교인의 학습 대상이 되었던 점 등은 다른 아비달마논서에서는 그 예를 찾기 어렵다.
아비달마 또는 구사론이라고 하면, 이는 종종 불교의 번쇄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확실히 여기에는 번쇄하며 복잡한 교의학이 무성하다. 뛰어난 산스크리트어 학자이며 구사론 연구자로서도 저명한 오하라 운라이(荻原雲來 1869~1937)박사는 요컨대 구사론은 '학자의 유희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다.
아무래도 구사론과 그 이외의 아비달마논서를 읽을 때,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사소한 문제에 관한 논의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무수한 난해한 술어의 나열에 접하게 되면, 아마도 승원의 깊숙이에서 세속의 고뇌를 떠나 오로지 경전의 석의와 교리의 연구에 몰두하였던 아비달마논사들의 사상적 노작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비현실적이고 한가한 갈등으로 생각되며, 본래 실천적이었던 불교의 본지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본래 논사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진지한 구도의 고투(苦鬪)가 있었다. 이는 논서의 외형을 이루고 있는 번잡함에 현혹되지 않고, 그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곧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달마를 단순히 실천. 구도와 관계없는 공론(空論)으로 단정하여 버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를 논외로 할지라도 아비달마가 갖는 가장 큰 의의는 다른 곳에 있다. 즉 역사상 처음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체계적 사상으로 조직하였다는 점에 불교사상사에서의 아비달마의 중요한 위치가 있는 것이다. 아가마는 다양한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요컨데 샤키야무니 붓다의 언행록이므로 그것은 대개 단편적이거나 짤막한 교설의 모음집이다. 집록되고 전승된 개개의 교설은 대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는 이 위대한 인류의 교사의 참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부분도 있다. 특히 간단하면서도 간절한 교훈은 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는 대개 단편적이며 삽화적이어서 필히 체계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비체계적인 아가마경전의 내용에서 불교의 기초적인 관념을 추출하고 이를 조직하여 장대한 사상적 건축물을 세운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논사의 공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이 없었다면, 후의 중관학설. 유가유식학설 등의 대승불교 철학의 출현도 불가능하였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여 물론 아비달마 사상이 샤키야무니 붓다의 가르침을 치우침이 없이 이해하고 계승. 발전시켰다고는 할 수 없다. 종종 비판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아비달마는 아가마경전의 어구에 집착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전통적, 보수적이거나 분석적, 형식적인 해석에 치우쳐 사상의 청신함과 발랄함을 잃어버린 점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점이 붓다의 말에 집착하여 붓다의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대승불교의 비판이 야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만 선입관을 버리고 아비달마사상의 장점과 결점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현대에서 아비달마사상이 갖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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