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후기불교

지눌이 쓴 글 중에 『육조단경』의 발문

<열린 공간>은 ‘불교가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불교’라는 『불교와 문화』의 지향점을 살려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불교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다. 2008년에는 예의 번뜩이는 필체로 사람들의 마음을 훑으며 읽는 재미와 생각의 여백을 던져주는 <한형조 교수의 격외불교 한담>이 독자들을 찾아간다.


한형조_서울대 철학과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졸업했다(철학박사).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한국학부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에 『왜 동양철학인가』,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화엄의 사상』, 『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 등이 있다.





“시수천변 심성불이(時雖遷變心性不移)!”
승과에 합격하고도 절집과 권력을 떠나 구도의 길을 가겠다는 지눌에게, 다들 고개를 저으며 “말법의 시대에 무슨 가당찮은 짓이냐”고 냉소할 때, 지눌이 토한 선언이다. “시대는 변하고 환경은 달라지나 그러나 인간의 조건과 목표는 여전히 그대로다.”
인간은 탄생으로 완전해지지 않는다. 학교에서의 지적 습득은 최소한일 뿐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몸을 수련하고, 정신을 도야하는, ‘전근대적 훈련’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 거기,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가 우리에게 있으니, 그저 전통에 고개 숙여 감사할 일이다.


1.
지눌이 쓴 글 중에 『육조단경』의 발문이 하나 남아 있다. 태화 7년 12월이니, 1207년 겨울, 그의 나이 오십 때 일이다. 제자 담묵이 “최근에 얻은 『법보단경(法寶壇經)』을 다시 새겨 유포하고자 하니 기념사 하나를 써주십사” 하자, 그는 “더없이 좋은 일”이라 하면서도 심각한 의문 하나를 제기했다.

“그런데 나, 이 책에 의문 하나가 있다. 남양 혜충 국사가 어느 선객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다. ‘나는 요사이 신심일여(身心一如), 심외무여(心外無餘)라, 그래서 생멸(生滅)이 없다. 그런데 저쪽 남방에서는 몸은 무상하되, 신성은 유구하다(身是無常, 神性是常)고 한다는데, 그럼 사람 안에 반쪽은 생멸하고, 반쪽은 생멸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 요사이 돌아다녀보니 이런 풍조가 더 심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단경』을 집어 들고, ‘남방의 종지에 비루한 이야기들이 얹히고 뒤섞여 성스러운 뜻을 깎고, 후인을 오도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한다. 네가 얻은 것은 아마 정본일 테지, 군더더기가 섞이지 않았으면 혜충 국사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정본에도 여전히 ‘몸은 생멸하되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는 취지가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는데, 안이비설(眼耳鼻舌)이 능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은 혜충 국사의 비난을 들을 만한 것이다. 마음을 수련하는 자 여기에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해소하고 진정한 믿음을 깊이하며, 성스러운 가르침을 유포할 수 있겠는가.”


2.
‘자성’의 제창은 대승에서, 그리고 선이 본격 가동했다. 초기 불교는 아시다시피 자성의 도저한 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어디에도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고, 네가 아는 것은 기실 환상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대승과 선의 어법은 거꾸로다. “비관하지 마라. 네 속에 이미 부처가 살고 있다! 너는 다만 그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살면 된다.” 이것이 이른바 돈교(頓敎)의 가르침이다.
침범하는 역경과 고통 속에서 너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부처라는 소리를 듣고 중생은 별빛 같은 희망을 얻었다. 지눌 역시 『육조단경』에 실린 이 말에 천 리 길의 밑천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불성이 어디 있느냐다. 분명 내 속에 있다고 말하는데, 내 속을 스스로 뒤져보니, 망상과 혼돈의 잡동사니만 그득할 뿐, 도무지 불성이나 자성을 찾지 못하겠다. 대체 그것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지눌은 『수심결』에서 친절히 일러준다.

“네 몸에 있는데, 다만 네가 못 볼 뿐이다. 너는 하루 내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알고 춥고 뜨거운 것을 알고, 기뻐하기도 하고 성질내지 않느냐. 그게 바로 ‘그것’이다.”



이 말에 단박 깨닫는 사람은 탁절한 근기라 하겠다. 우리 범부들에게는 이 대답이 아직 석연치 않다. 지눌의 친절은 이어진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미 일은 글렀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제 눈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으니, 사물이 보이는 것으로, ‘내 눈이 있구나’ 하면 되지, 다시 그걸 찾아다니려 하지 마라. 찾을 생각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라. 내 마음의 신령스러운 작용은 이미 활동 중이니 어디서 다시 찾겠다고 나서는가. 찾으려고 들면 못 찾을 것이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곳이 바로 견성(見性)이다.”

이 말에 짚이는 바가 있다면 그도 또한 상상근기이다. 우리는 이 부연 설명에도 여전히 눈을 끔벅거린다.


3.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지눌의 말을 참상(參詳), 자세히 살피건대, 자성이란, 또는 본심이란 지금 보고 듣는 작용의 ‘바깥’에 있거나, 혹은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개의 종교나 형이상학이 이 함정에 빠진다. 세상이 누추하고, 자신이 한심해서 사람들은 저 너머 초월자의 인도를 기다리고, 아득한 서방세계의 축복에 기대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이 차단에 발길을 돌리면서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밖에 없다면 그렇다면 내 속 어디엔가 있단 말인데, 설마 바깥의 경계에 따라 부침하는 이 의식과 감정의 생멸이 곧 자성일 리는 없고, 그럼 그 갈피 혹은 안쪽, 또는 바닥 어디에 있다는 말이겠네. … 내 이놈을 어디에서 찾을고.”
여기가 두 번째 오해가 있는 곳이다. 지눌은 의식과 감정의 작용 현장, 그 안쪽 또는 바닥 어디에 자성이나 불성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다. “기억하라, 방 거사의 찬탄 그대로, 작용시성(作用是性), 작용, 그것이 곧 자성이다.” 여기가 화두 중의 화두다. 그동안 심신을 헤집어, 혹은 붓다 초기의 고행처럼 이 육신을 쥐어짜고, 학대해서, 혹은 그것을 정지시키고서야, 그 극치에서 스파크처럼 만나거나 혜성처럼 등장하는 것이 자성 혹은 불성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이 선언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지눌은 『육조단경』에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구절이 여전히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눌 또한 그처럼 오해를 유발할 얘기를 했다는 데 있다. 『수심결』을 보라. 자성의 거소를 몰라 여전히 눈을 끔벅이는 제자에게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그놈, 아직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나한테 묻는구나. 네 본심을 바로 가르쳐줄 테니, 깨끗한 마음으로 잘 들어라. 다시 말하마. 하루 내내 보고 듣고, 웃고 떠들며, 화도 내고, 좋아라고도 하며,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가르고, 이런저런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는데, 물어보자. 이게 대체 누가 하는 일이냐. 몸이 한다고? 시체는 냄새도 못 맡고 눈도 꿈벅거리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니 몸이 그것을 한다고는 못하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필시 너의 본심(本心)이다! 그 밝은 신령이 있어 감이수통(感而遂通), 사물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줄 안다. 그래서 방 거사가 왈, ‘신통하구나, 묘한 작용이여, 내가 물을 긷고 섶을 져 나르다니…’라고 했던 것이다.”

지눌은 『육조단경』을 따라, 몸이 이목구비의 감각이 스스로 작용과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논법은 ‘몸을 무상으로 하고, 신성을 영원으로 설정한’ 것으로 혜충 국사의 따가운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버스웰의 영역본 『The Korean Approach to Zen』에 의하면 『수심결』은 1203~05년경 수선사의 대중을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육조단경』 발은 1207년이다. 그렇다면 『수심결』을 지을 때는 이 구절이 문제가 될지 몰랐다가 2∼3년 후 『육조단경』 발을 지을 때쯤에 불현듯 각성하게 된 것인가.


4.
천만에 그렇지 않다. 지눌은 알면서도 이 리스크를 떠안은 것이다. 여기가 지눌의 빛나는 부분이고, 그의 교육자적 기술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담묵이 “그럼 이 의혹 있는 책 『육조단경』을 어찌하오리까” 하고 묻자 지눌은 이렇게 대답했다.
“노승은 옛적 이 경전에 의지하여 수행했다. 마음으로 음미하고 늘 새김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혜능 조사가 설정한 방편의 뜻을 알게 되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조사께서는 남악회양이나 청원행사를 위해서는 밀전심인(密傳心印), 즉 마음의 본체를 입문의 방식으로 은밀히 전하셨지만, 또 한편 위거 등 도속(道俗) 1,000여 명을 위해서는 무상심지(無相心地)의 계(戒)를 설하셨다. 그런 즉, 진리만을 오로지 밀고나가 세속의 요구를 거슬러서도 안 되고, 세속만을 고려하여 진리를 거슬러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반은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반은 자신의 증험에 입각하여,’ 위와 같이 (양보된 어법으로) ‘진여는 생각을 일으키되, 눈과 귀는 능히 생각지 못한다’는 등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도속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속에 있는 견문지성(見聞之性)부터 반성하여 진여를 캐치한 후에, 비로소 조사가 전하는 심신일여(心身一如)의 밀의(密意)를 보게 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 같은 ‘방편(善權)’ 없이, 무턱대고 심신일여라고 설하면, 눈을 통해서만 몸의 생멸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랬다간 출가 수도자조차 의혹을 할 것인데, 하물며 1,000여 명 세속의 선비들이야 어떻게 믿고 받들겠는가. 조사들이 설법 대상의 근기에 따라 이끌고 가르친 바를 여기서 볼 수 있다. 혜충 국사가 남방 불법의 폐단을 깨트린 것은 무너진 기강을 다시 정리하고 성스러운 뜻을 다시금 부축하여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갚은 것이다. 우리 후대들은 그 밀전(密傳)을 직접 받들지는 못하니, 마땅히 이와 같은 ‘현전문(顯傳門)’의 성실한 말에 의지하여 ‘자심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반조하여 단상(斷常)의 견해에 떨어지지 않으면 가히 허물을 벗어날 수 있다. 만일 ‘마음은 생멸이 없다고 보고, 몸은 생멸이 있다고 한다면 법에 두 가지 견해를 내고, 성상(性相)을 융회치 못한 것이다. 그러니 이 한 권의 신령한 문자에 의지하여 제대로 이해하면 몇 겁을 거칠 것 없이 보리 깨달음을 속히 증득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가히 새겨 유통시켜 큰 이익을 보게 하지 않으리오.”


5.
여기 키워드는 방편이다. 지눌의 말 속에서 다음 세 가지 메시지를 읽는다.

배려: 진리, 그곳은 아무 말도 들이댈 수 없다. 은산에 철벽이고 언어의 길이 끊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을 그곳으로 이끌자면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방편은 그래서 초월적 진리와 중생의 열망 사이에 사다리를 놓으려는 노력이고(故不可以一往談眞而逆俗 又不可一往順俗而違眞), 자신의 이해와 중생의 근기를 동시에 조율하는(半隨他意 半稱自證) 소통과 대화이다.

다양성: 대화와 소통이므로 방편은 무한히 다양하고, 그래야 한다. 유능한 의사의 가방에는 수많은 약과 처방이 있다. 지눌 자신 하나의 방편에 국집하지 않았다. 삼문(三門)이라 불리는, 지적 이해를 통한 방법, 좌선과 직관의 연마를 통한 방법, 나아가 화두를 통해 일거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까지 열어주었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가겠지만, 나는 세 길을 함께 갖추되, 방법적으로는 순서대로 열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지눌이 걸어간 길이 이것이다. 앞의 두 길 없이 오로지 화두에 매달리는 것은 위태롭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길이 실은 가장 멀기 쉽다. 여실언교(如實言敎)에 따라 기본과 원리를 익히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특히나 현대인은 밀전(密傳)에 들어서기 전에 ‘현전문(顯傳門)’의 성실한 말에 의지해야 한다.

리스크: 혜충의 심신일여(心身一如), 심외무여(心外無餘)는 궁극에 더 가까이 가 있다. 그러나 리스크를 피하고자 한 이 언어가 실상은, 더 위험할 수가 있다. 왜냐? 그 언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금 이대로, 훈련과 각성을 거치지 않은 형태로’ 이미 완전하다는 착각에 빠뜨리기 쉽다. 목적지에 이미 도착한 듯 도취해버리면, 중생은 더 이상의 힘든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깨달음의 노래’를 함부로 부르는 것을 위태롭게 생각한다. 선의 전통이 특히 이 위험에 중독되어 있다. 방편의 언어는 불완전하고 거칠고, 이빨이 빠져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 어설픈 수레를 타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을…….

 

 

http://buddhistculture.co.kr/Vol/view.htm?topic=G&origin_id=27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