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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불교

「육조단경의 반야․중관 사상」을 읽고

 

 

「육조단경의 반야․중관 사상」을 읽고

각 묵(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이중표 교수님의 내공이 가득 담긴 글을 잘 읽었다. 전체적으로 이 교수님(이하 발제자라 칭함)은 육조단경은 반야사상을 표방하고 그것을 천명하고 있으며(1) 이러한 반야의 가르침은 초기불교→반야/중관→육조단경으로 잘 전승되고 있음을 정혜일체, 定慧卽等이라는 육조단경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개해나가고 있다.

이런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발제자는 장부(긴 니까야)의「계분별경」의 가르침을 길게 인용하여 bhava를 1)로 vibhava를 옮기고 na abhisamkharoti를 ‘조작하지 않다’로 na upādiyati를 ‘취착하지 않다’로 옮기고 있으며 다시 전자를 無念 배대하고 후자를 無住 배대하고 있으며 이것을『육조단경』의 無念 無住 결부시키고 있다.(5-6쪽)

다시 유와 무를 조작하지 않음을 12연기의 무명-행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 행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육입-------노사의 연기과정으로 파악하려 시도하면서 특히 육입-----유를 논리학에서 설명한다고 하는 표상-비교-추상-총괄-명명의 과정에 배대해서 이해하고 있다.(6-7)

그리고 허망한 언어를 떠나 중도에서 실상을 보아야한다고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서「가전연경」을 예를 들고 있다. 그래서 여래는 2변을 떠나 중도에서 이야기 한다고 인용하고 있다.(7-8)

그리고 아비달마가 다르마를 분리된 실체로 설명하면서 존재론적 본질로 제법을 이해한다고 모순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8-9)

그리고 이런 아비달마의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 반야경이 출현하였다고 하면서『금강경』을 인용하고 있다.(9) 그러면서 반야경의 반야공사상은 아비다르마에 의해서 실체화되고 왜곡된 불법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열반을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봄으로써 생사와 열반을 이분하였으며 생사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라고 보고 있다고 비판하며 열반은 구하여 얻어야할 그 무엇이었고 아라한은 그러한 열반을 얻은 자였다라고 비판하고 있다.(9)

그리고 나서 불교 수행은 생사의 세계를 떠나 열반의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타이르고 있으며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생사의 세계이고 진실을 바로 보며 살아가면 그것이 열반의 세계이며『육조단경』은 이러한 반야․중관 사상의 취지를 그대로 잇고 있다고 맺고 있다.(9-10)

이것이 논평자가 이해한 발제자의 주요 논지이다. 초기불교와 이비달마를 중시하는 논평자는 과연 이러한 발제자의 논지가 타당한가 몇 가지 측면에서 발제자의 글을 비판하고자한다.

첫째, 발제자는 na abhisamkharoti를 조작하지 않다로 na upādiyati를 취착하지 않다로 옮기고 있으며 전자를『육조단경』의 무념에 배대하고 후자를 무주로 배대하고 있는데(5-6) 이것은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도 지나친 억측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무념은 선종사에서 보자면 인도의 정념(sati, 마음챙김)이 중국 선종에서도 그대로 강조되어서 남종선 이전의 선사들은 정념을 아주 강조하였다. 예를 들면 5조 홍인스님의 저술로 알려진『최상승론(最上乘論)』에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제법의 성품을 깨쳐서 다 자연히 마음의 근원을 밝게 비추기 때문에 망상(妄想)은 생겨나지 않고 정념(正念)은 잃지 않는다 … 그러나 일체중생은 참된 성품에 미혹하여 마음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망상에 얽매여 정념(正念)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애증의 마음이 일어난다”라는 등으로 수차 정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정념은 그러나 신회의 주장이 가득 들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육조단경』 등에서 무념으로 중국화 되어 정착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런 것을 두고「계분별경」의 전혀 다른 단어와 결부지어 해석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라 아니 할 수 없다.『금강경 오가해』의 육조대사 구결의 첫머리에서 육조스님은『금강경』은 無相爲宗 無住爲體 妙有爲用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무주는『금강경』 산스끄리뜨 원문(4)에 나타나는 apratiṣṭhita(서지 않음, 머무르지 않음)이다. 그런데 이런 무주를 na upādiyati(취착하지 않는다)와 배대해서 보는 것 역시 너무도 큰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히려 육조의 無相 가르침을 산냐의 척파를 여러 문맥에서 강조하고 있는『숫따니빠따』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이『육조단경』과 초기경을 접목시키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발제자는 이런 유무를 조작하지 않음을 12연기의 무명-행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 행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육입-------노사의 연기과정으로 파악하려 시도하면서 특히 육입-----유를 논리학에서 설명한다고 하는 표상 비교 추상 총괄 명명의 과정에 배대해서 이해하고 있다.(6-7) 이것도 논평자는 인정할 수 없다. 12연기는 호락호락한 가르침이 아니다. 그래서『장부』 제14「대연경」에서 "희유하고 희유합니다. 실로 깊고 깊은 연기법이 저에게는 아주 명료해 보입니다."라는 아난존자의 말에 세존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참으로 깊고 깊은 것이 연기법이니,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함으로서 사람들은 마치 꼬인 실타래처럼, 엉킨 골풀처럼 3악도의 윤회를 뛰어넘지 못하는니라라”고 대답하셨다. 과연 발제자처럼 자의적으로 12연기를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 논평자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발제자는 무명-행을 잠시 언급하다가 연기법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행-, -명색, 명색-육입의 관계는 건너뛰어 행의 구체적인 내용이라면서 육입…유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발제자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유-, -노사우비고뇌의 관계는 도대체 발제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셋째, 발제자는 허망한 언어를 떠나 중도에서 실상을 보아야한다고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서「가전연경」을 예로 들고 있으며, 그래서 여래는 2변을 떠나 중도에서 이야기 한다고 인용하고 있다.(7-8) 그러나「가전연경」은 결코 중도(majjhimā paipadā)를 설하지 않는다.2)

2)의 인용문에서 보듯이「가전연경」에서 가전연 존자는 세존께 정견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고 세존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세상의 일어남(samudaya)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sammappaññāya) 보는 자는(passato) 세상들이 없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세상의 소멸(nirodha)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는 세상들이 있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 ‘모든 것은 있다(sabbam atthi)’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ayam eko anto). 모든 것은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ete te ubho ante) 따르지 않고(anupagamma) 중간에 의해서(majjhena) (dhamma)을 설한다”라고 하신다. 어디에도 유무를 여읜 중도를 설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일어남과 소멸을 통찰함을 통해서 유무의 극단을 여읜 것이야 말로 정견이며 이처럼 여래는 중간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고 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가전연 경은 정견(혹은 正中 見解)을 밝히신 경이지 중도를 천명하신 경이 아니다.

중도는 초기경에서 보면 맛지마 빠띠빠다 혹은 맛지마 빠띠빳띠(majjhimā paipatti)인데 이것은 분명히 실천적인 용어이다. 빠띠빳띠란 길을 가는 것이란 뜻이고 그래서 중국에서도 行道라고 옮겼고 논평자는 도닦음으로 옮긴다. 이러한 중도는「초전법륜경」 등에서 분명히 8정도라고 못밖고 있다. 이런 8정도의 중도를 대승에서는 유무를 여읜 정견으로 잘 못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경과 반야․중관과『육조단경』을 연결짓고 있는 발제자의 논지에는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넷째, 발제자는 아비달마는 다르마를 분리된 실체로 설명하면서 존재론적 본질로 제법을 이해한다고 모순점을 강도 높게 지적하고 있다.(8-9) 그러나 논평자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비달마는 결코 실체론을 설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더군다나 정통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부처님은 분명히 제법을 설하셨다. 그것은 등으로 이미 초기경의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제법을 아비담마는 더욱더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제법의 고유성질을 부정해버리면 이런 부처님이 설하신 제법을 부정하는 꼴이 되고 이것은 부처님 법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남북방의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는 공히 고유성질(sabhāva-lakkhaa, 自相)과 보편적 성질(sāmañña-lakkhaa, 共相)을 함께 강조한다. 예를 들면 탐욕은 거머쥐는 특징을 성냄은 밀쳐내는 특징을 가지므로 이것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탐욕과 성냄을 구분지을 기준이 없다. 탐진치가 본래공하다고 아무리 주장해봐야 거기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3) 이런 것을 설명하는 아비담마가 존재론을 설하는가?

그러나 어쨋든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모든 법은 무상․고․무아라는 보편적인 성질을 가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꿰뚫어 봄으로 해서 해탈열반을 성취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래서 무상과 고와 무아는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제법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인가? 오히려 아비담마는 존재론을 척파하기 위해서 제법을 분석적으로 제시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이 설하신 제법을 고유성질과 보편적인 성질로 동시에 관찰하려는 태도야말로 원융한 가르침이 아닌가.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 가운데서 유독 무아라는 하나의 특징만을 공이라는 명칭으로 강조하는 반야/중관의 가르침이야말로 독선적이고 편협하고 바르지 못한 태도가 아닌가? 만일 반야․중관의 가르침이 최상의 가르침이라 한다면 왜 다시 유식이 등장하며 여래장, 밀교 등은 왜 대승불교에 등장하는가? 자파의 입장만을 별스럽게 집착하여 아비달마를 실체론적인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이런 태도야말로 저열하고 비열하고 편협한 것 즉 히나(hīna, )가 아닌가.

인도의 불이일원론을 주장하는 베단따 학파의『사르와 다르샤나 상그라하』(全哲學綱要)에서는 자파의 교설을 포함한 18가지 인도의 철학과 종교의 교설을 제일 저열한 것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는데 제일 저열한 것으로는 유물론을 들고 그 다음으로 저열한 것으로 불교를 들고 있다. 불교는 무에서 유가 생겼다고 하니 저열한 가르침이라는 논지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해괴망측한 망발인가? 대승에서 아비달마를 실체론에 빠진 것이라고 비하하는 것은『전철학 강요』에서 불교를 유물론쯤으로 치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니 기독교에서 불교를 우상숭배의 종교라고 매도하는 것과 같은 태도 아닌가?

다섯째, 발제자는 이런 아비달마의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 반야경이 출현하였다고 하면서 여래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등의『금강경』을 인용하고 있다.(9) 그러면『금강경』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참으로 그와 같다. 수보리여,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는 참으로 일체 법들을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하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법이라는 산냐를 일으키지 않고 알아야 하고 보아야하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31)4)라는 말씀은 어떻게 봐야하는가? 분명히『금강경』은 상을 여의고 법을 알고 보고 확신하라고 하고 있다. 오히려『금강경』은 상(산냐)을 여의고 제법(일체법)의 고유성질과 보편적 성질 둘 다를 알고 보고 확신하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초기불교다운 이해가 아닐까.

여섯째, 발제자는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열반을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봄으로써 생사와 열반을 이분하였으며 생사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라고 주장한다고 적으면서 “열반은 구하여 얻어야할 그 무엇이었고 아라한은 그러한 열반을 얻은 자였다”라고 비판하고 있다.(9) 그러면 과연 아비담마는 생사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라고 이해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발제자는 아비담마를 잘 못 이해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출세간은 욕계․색계․무색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로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열반을 실현한 성자들의 마음의 흐름들을 출세간이라고 구분짓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 안에 각각 작용만하는 마음(kiriya-citta)이라하여 여러 가지의 마음들을 구분하여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기초중의 기초이다.5) 그러므로 아비담마에서 설명하는 열반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발제자의 아비담마 비판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일곱째, 발제자는 드디어 “불교 수행은 생사의 세계를 떠나 열반의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비담마를 전개시킨 아라한 스님들을 타이르고 있는데 이것은 발제자 스스로의 아비담마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지 결코 아비담마에 적용되지 않음을 밝힌다. 아비담마의 관심이야말로 지금 여기 내 안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것(sacchikiriya)이다. 발제자는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생사의 세계이고 진실을 바로 보며 살아가면 그것이 열반의 세계이며 육조단경은 이러한 반야중관 사상의 취지를 그대로 잇고 있다(9-10)”고 맺고 있는데 이 말을 논평자는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지 못하면 그것은 중생의 세계요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꿰뚫어보면 그것은 열반의 세계이며 아비담마는 이러한 초기부처님의 고구정녕하신 말씀을 그대로 잇고 있다.”고 바꾸어서 적는 것으로 발제자의 글을 반박한다.

글을 접으면서 논평자는 반야․중관이야말로 초기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전승하고 있다는 논지를 펴는 한국의 몇몇 학자들의 글을 접하면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남방소전의 빠알리 삼장이 북방에 알려지고 서양학자들에 의해서 초기경들이 체계적으로 연구되기 이전(1900년도 초)에 북방에서는 천 몇 백 년을 줄기차게 아함경에서 전해온 초기가르침을 소승이라고 강하게 비하하면서 제분정가아함시(除糞定價 阿含時)라 하여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초기경들은 똥치우고 정해진 보수나 받는 경지를 설한 것쯤으로 치부되어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소승 중의 소승의 가르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일본학자들이 남방과 서양으로 유학하고 돌아와서 초기경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초기불교는 그 빛을 보게 되었고 일본에서는 일본에 불교가 두 번 전해졌다고 할 정도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승이라고 그 어떤 하나를 왕따시켜 이해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스스로를 대승이라 자처하는 무리들은 이제 드디어 소승이라는 타겟을 아비담마/아비달마로 옮겼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런 아비담마를 발전시켜온 부파불교를 소승이라 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초기불교는 소승의 카테고리에서 떼어내고 아비담마만을 소승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드디어 자신들이야말로 똥치우는 경지였던 그 아함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자처하고 나오니 이 얼마나 황당한가. 그들은 크고 우아하고 멋진 대승 혹은 최상승을 버리고 이제 정녕 똥꾼의 후예가 되고 싶어서 안달복달한단 말인가? 하기야 똥꾼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청한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이기는 하겠지만 …

일본학계의 영향 하에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아무런 비판 없이 이런 입장을 수용하고 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런 논평문을 적고 있는 논평자 스스로도 물론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누구보다도 초기경과 아비담마를 구분해야한다고 역설에 역설을 했던 사람이었음은 논평자를 지켜본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상좌부 아비담마를 접하면서 논평자는 달라졌다. 아비담마라는 말이 법(담마)에 대해서(아비)라는 의미이듯이 아비담마는 부처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초기경이 없이는 절대로 설 자리가 없다. 아비담마는 부처님 가르침 그 자체를 두고 철저하게 고뇌하고 규명하려 한다. 아비담마는 초기경에 대한 주석과 이해에서부터 출발하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백보 양보하여 초기경의 가르침이 아비담마가 아닌 반야․중관으로 잘 계승되고 있다고 인정하자.(사실 논평자는 초기경의 가르침은 반야중관을 위시한 대승의 여러 부파에도 바르게 전승되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대승은 불교가 아니다.) 그런데도 왜 반야행자들은 반야부의 경을 따로 결집하였는가. 초기경들만을 가지고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면 다시 경들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야행자들을 비롯한 대승행자들이 그들의 경을 무수히 만들었다는 말은 그들의 주장은 초기경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 무고집멸도를 설한 초기경이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은 분명히 5, 12, 18, 4, 12연기를 설하셨고 이들을 통해서 무상․고․무아를 설하셨다. 누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온․처․계․제․연의 가르침을 아비담마에서는 제법의 고유성질(sabhāva)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들의 무상․고․무아는 보편적 성질로 설명하고 있다. 얼마나 정확한 설명인가. 어느 것이 초기불교를 정확하게 계승하고 있는지는 조금의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명명백백하다. 그래서 법에 관한한 프로인 상좌부의 장로스님들은 대승행자들을 법을 자기들 멋대로 이해하고 지껄여대는 겁 없는 신출내기 아마추어로 봤기 때문에 가타부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요새말로 같잖아서였을 것이다. 다만 대승행자들이 그들을 향하여 온갖 독설을 퍼붓고 있을 뿐이다. 누가 진정한 대승인가? 하기야 자비심이 없이는 독설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이 진정 대승일 것이다. 그러면 논평자의 이런 거친 글도 자비심의 발로일까?

논평자는 본인이 몸담고 있는 대승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참다운 대승이 되자고 목청을 돋울 뿐이다. 그 무엇을 두고 소승이라고 왕따시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다분히 저열하고 비열하며 참으로 대승답지 못한 짓거리를 우리 이제 그만 두고 불교역사에서 전개되어온 모든 흐름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 노력하여 불교전체를 큰 흐름으로 살려내자고 간곡하게 제언을 하면서 거친 논평자의 글을 접는다.

◎ 말이 과격했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논평자의 거친 글은 이중표 교수님의 글에 대한 논평이라기보다는 한국 불교 전반의 초기와 아비담마 불교이해에 대한 소납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어본 것입니다. 거친 언어를 구사해대는 이런 불초소납을 봉은학림에서 <육조단경 논강>에 논평자로 끌어낸 것은 한국불교에 대한 쓴소리를 목청껏 해보라는 주최측의 의도가 가득 담겨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거친 글을 적었습니다. 자비로서 섭수해주소서.

 

1) 여기서 발제자가 유와 무로 옮긴 bhava와 vibhava는 발제자가 인용하고 있는「가전연경」의 atthi(유)와 natthi(무)와 아주 다른 술어이다. bhava는 유․무의 유의 개념이 결코 아니다. bhava는 오히려 되어감(becoming)의 뜻이며 그래서 서양에서는 becoming으로도 옮긴다.

2) 이하「가젼연경」(깟짜야나 고따 숫따, Kaccāyanagotta Sutta, S12:15)을 직역해본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 제따와나의 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때 깟짜야나 곳따 존자가 세존을 뵈러갔다. 뵈러가서 세존께 큰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3. 한곁에 앉아서 깟짜야나 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올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무엇이 올바른 견해입니까?

4.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거의가다 둘을 의지하고 있나니 '있다(atthi)'거나 '없다(natthi)'는 것이다.

5. 세상의 일어남(samudaya)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sammappaññāya) 보는 자는(passato) 세상들이 없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세상의 소멸(nirodha)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는 세상들이 있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6.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끌림과 취착 때문에 독단적 해석에 계박이 되어 버린다(upāya-upādāna- abhinivesa-vinibhandha). 그리고 그런 끌림과 취착(upāyupādāna), 마음의 고집(cetaso adhiṭṭhāna), 독단적 신조(편견, abhinivesa), 잠재성향을(anusaya) ‘나의 자아이다(attā me)’라고 따라가지 않고(na upeti) 취착하지 않고 (na upādiyati), 고집하지 않는다(na adiṭṭhāti). 고()가 생겨나면 생겨나는구나(dukkham eva uppajjamānam uppajjati), 고가 멸하면 멸하는구나라고 하여 의심하지 않고(na kakhati) 혼동하지 않는다(na vicikicchati). 여기서 [이런 것이] 그가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은 지혜이다(aparapaccayā ñāam evassa ettha hoti). 이런 것이 참으로 바른 견해[正見]이다.

7.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sabbam atthi)’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ayam eko anto). 모든 것은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ubho ante) 따르지 않고(anupagamma) 중간에 의해서(majjhena) 법(dhamma)을 설한다.

8. 무명을 반연하여 [업]형성들(상카라)이 있고 [업]형성들을 반연하여 알음알이가 있고 알음알이를 반연하여 정신-물질이 있고 정신-물질을 반연하여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를 반연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느낌이 있고 느낌을 반연하여 취착이 있고 취착을 반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반연하여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반연하여 늙음과 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있다.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남이다.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면 [업]형성들이 소멸하고 …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하는 것이다.

3) 여기서 나타나는 atthi와 natthi는 발제자가 중부 계분별경에서 옮긴 bhava와 vibhava와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bhava는 유무의 유의 개념이 결코 아니다. bhava는 오히려 되어감(becoming)의 뜻이며 그래서 서양에서는 becoming으로도 옮긴다.

4) 탐진치가 본래없다거나 본자청정이라거나 본래부처라거나 본무생사라거나 하는 등의 주장명제를 인정한다하더라도 이것은 소위 말하는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이런 말을 아무 주저 없이 아직 깨닫지 못한 자들의 입에서 깨달음을 빙자하여 깨닫지 못한 자들을 대상으로 거침없이 내 뱉는 것은 본래 부처라는 등의 더 크고 더 거친 사량분별만을 안겨다주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은 열반이나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셨다. 단지 탐진치가 소멸된 경지 정도로 설명하셨다.

탐진치가 본래 없다고 하나 매순간 탐진치가 득시글거린다. 아니 자신에게 탐진치가 득시글거리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탐진치가 본래 없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그것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공허한 잠꼬대를 수천만 번 다라니처럼 외워봤자 열반은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불교는 본래부처라고 수없이 외쳐댔고 본자청정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쳐왔건만 오히려 종권다툼이라는 엄청난 탐욕과 각목을 휘두르는 엄청난 분노와 우치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지금도 본무생사, 본자청정, 본래부처라는 다라니를 목청껏 외워댄다. 이러한 주장명제들은 우리가 일으키고 있는 모든 탐진치를 합리화시켜주는 구세대비주가 되어버렸다.(발제자는 지난날 선방 다닐 때 이런 구세대비주의 맹신자 중의 맹신자였음을 고백한다) 온갖 망상 다 일으키다가 누가 물으면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야라고 소리친다. 차라리 거기에 탐진치가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탐진치가 어떻게 일어나서 어떻게 사라져가는지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서(緣起) 어떻게 전개되어가는 지를 정확하게 관찰하도록 인도해주는 것이 옳은 지도법이 아닐까.(이런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탐진치가 본래없음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 탐진치가 본래없다고 하는 것은 탐진치가 본래 없음을 믿으라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와서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고 와서 보라(ehi-passika)고 하셨다. 그리고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았다하는 것은 대망어죄로 4바라이죄에 해당하며 산문출송을 당하는 것이다.

5) 논평자의 졸역,『금강경 역해』 416.

6) 대림스님/각묵스님 역해,『아비담마 길라잡이』(상/하) 141-42; 156-157; 163; 165-179 참조.

7) 권오민,『아비달마불교』 3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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