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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준만 칼럼] 비동시성의 동시성

최근 부각된 '인문학 위기론'과 관련, 실용주의에 대한 비판이 많이 쏟아졌다. '실용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실용주의의 독주가 문제'라는 의견도 나오긴 했지만,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듣기 힘들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건 인문학 사정이 우리보다 훨씬 낫다고 자주 거론된 미국과 일본은 세계에서 실용주의가 가장 극성을 부리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실용주의를 비난하면서도 미국ㆍ일본의 인문학을 비교적 긍정 평가한 지식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미국과 일본의 실용주의는 좋지만 한국의 실용주의는 나쁘다는 뜻이었을까?

 

● 인문학 실용주의 결여가 문제

 

더욱 이상한 일은 1~2년 전 열린우리당에서 일어났다. 누가 작명한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당시 언론은 열린우리당 내부 갈등 구도에 '실용주의파 대 개혁주의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개혁주의파 열혈 네티즌들은 실용주의에 대해 거의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부어댔다.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10%대로 전락하자 그 책임을 실용주의파에 돌리는 개혁주의파 지식인마저 나타났다.

 

코미디에 미안하지만, 이게 웬 코미디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실용주의라는 개념을 오ㆍ남용했다면 그걸 비판하면 되는 일이지 실용주의에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일일이 조사를 해본 건 아니지만 한국처럼 실용주의가 욕을 먹는 나라도 없을 것 같다. 그와 동시에 한국처럼 실용주의가 제대로 적용이 되지 않는 나라도 없으니, 이런 황당한 코미디가 또 있을까.

 

지금 한국에선 돈에 미쳐 돌아가면 그걸 실용주의라고 비난하는 용법이 사용되고 있다. 미친 짓이다. 실용주의가 황금만능주의란 말인가? 세간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은 반(反)실용주의의 천국이다.

 

정치적ㆍ상징적 가치가 실용적ㆍ실질적 가치를 압도하고 있다. 예컨대, 정부 산하기관과 공기업 인사는 늘 정치ㆍ정략적 고려를 앞세운 '뜯어먹기' 잔치판으로 전락해도 국민은 말이 없다.

 

인문학의 위기도 마찬가지다. 실용주의의 독주가 아니라 실용주의의 결여가 인문학의 위기에 일조했다.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미국ㆍ유럽 의존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래서 실용성이 매우 떨어진다. 인문학 위기를 선언한 학자들은 "인문학이 빈사상태에 빠지면 산업의 경쟁력도 약화된다"고 했다. 이 진술의 타당성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지금 나는 실용주의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실용주의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한국은 그 문제를 고민할 처지에 전혀 이르지 못했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건 마치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웰빙을 생각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사치를 자주 범한다. 왜 그럴까? 이른바 '비동시성의 동시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전근대ㆍ근대ㆍ탈근대적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나라다. 어느 나라에서건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나라인지라 이게 유독 심하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은 학계 내부경쟁과 인정투쟁으로 매우 높은 서양의존도를 기록한 덕분에 선진적이다. 국가주의ㆍ민족주의ㆍ실용주의 비판은 바로 그런 선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한국적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 현실과 괴리된 지식인의 비판

 

각기 다른 시대에 존재해야 할 것들이 한 시대에 어우러져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한국사회 내부의 논쟁과 토론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서양에서 직수입한 선진성으로 무장한 지식인이 한국사회의 후진성을 고민하기보다는 조롱하는 게 박수를 받는 실정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초고속성장과 높은 해외의존도가 요구하는 사회적 비용이라곤 하지만, 실용주의 마인드가 없는 자기과시적 개혁으로 민생을 어렵게 만든 노무현 정권을 겪고서도 실용주의를 비난한다는 건 과다 비용 청구다.

입력시간 : 2006/10/17 18:30

출처 : 부킹 Booking
글쓴이 : 오라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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