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禪一味, 한국의 차 .13] 율사 차인 성우스님 |
"茶禪이 뭐냐고? 마음에 낀 때 씻는거지"
題字 : 一思 石龍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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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남진 대구대 교수(한국화)가 성우 스님 방 툇마루에서 그려낸 파계사 전경. 마당에 쌓인 흰눈이 차의 깨끗한 품성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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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말 효당 스님과 응송 스님이 초의 다맥을 알리고 잇는 작업에 몰두할 즈음, 절집에서는 한국차문화사(史)에서 건너뛸 수 없는 인물이 차문화 보급에 열중하고 있었다.
81년 '다도(茶道)'를 펴내 국내 차인들에게 '교과서'를 제공한 성우 스님(현 팔공산 파계사 주지)이 바로 그다. '다도'는 출판되기도 전에 700여권의 예약이 몰려 당시 출판계에 화제가 된 책으로, 차에 관한 모든 것을 담아냈다. 현재 우후죽순으로 발간되는 시중의 개론서들은 아직도 당시 스님이 제시한 목록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님은 63년 즈음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峰) 스님 (1892∼1982)을 접하면서 차와 인연을 맺었다. 응송 스님과 효당 스님을 직접 찾아가 차모습을 캐낸 것은 그의 치열한 구도(求道)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구도를 염원하면서 연비(손가락을 태움)를 감행, 국내 첫손 꼽는 율승의 사표(師表)가 됐다.
차인으로서의 성우 스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79년경 그가 주축이 돼 성사시킨 예지원 주최의 차 세미나를 아직도 거론한다. 이은상 시인과 문학평론가이자 출가 승려인 김운학·성우 스님 이렇게 세 명이 토론자로 나선 세미나는 한국차문화정신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세미나가 이뤄진 것은 문화방송 아나운서 출신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후광을 업고 예지원을 만들어 장·차관 부인들에게 한국문화를 교육하던 강모씨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스님은 수행처소인 서울 조계사를 찾은 강씨에게 "한국차인 맞소? 한국인이면 한국차를 가르쳐야지"라며 나무랐다. 당시 강씨가 가르친 다법은 일본풍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 부산에서 차인들을 모아 그룹 지도하던 때 스님은 국회의원을 지낸 뒤 잠깐 휴지기를 가지고 있던 정상구씨에게 "국민들에게 민족정신을 가르치려거든 한국차정신을 연구하라"고 조언해 정씨가 차인으로서의 새 삶을 갖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씨는 그뒤 부산여대에 국내 처음으로 차학과를 개설하고 차박물관을 짓는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
당시 스님에게서 차를 배운 부산의 차인 중 3명은 대학교수가 돼 차문화보급에 일조했다. 일부는 지금도 한국차인조직에서 실세 역할을 하고 있다.
70년대 말 당시 척박한 문화풍토에서 차 전문잡지 '다담(茶談)'을 발간한 것도 성우 스님이었다. 비슷한 성격의 잡지가 발간된 적이 있으나 잠시 명맥을 잇다가 사라진 뒤 전문지가 없던 때였다.
인물발굴과 차문화현장 이야기가 당시 차인들에게 화제를 제공했다. 스님은 81년부터 94년까지 14년 동안 대만과 홍콩에서 조계종 해외포교사찰 홍법원에 주석하면서 현지인들의 차문화 확산에도 기여했다. 대만 타이베이에서의 일이다. 한 국내 차 잡지가 스님의 글을 연재하는 것을 보고는 대만 차인들이 충격받아 차 전문잡지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도 차 잡지를 낸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해외 포교활동 기간에 성우 스님이 끼친 한국차문화계에의 영향 중 하나는 일간신문들의 청탁을 받아 당시로선 생소하던 중국차를 체계적으로 알린 일이다. 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차문화는 우물 안 개구리 같았고, 스님은 '바깥을 알아야 우리 것이 지닌 장단점이 뭔지를 안다'는 생각을 가졌다.
차인으로서의 성우 스님은 무엇보다 가장 많은 차시(詩)를 지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70년 시조문학지 추천시인이 된 뒤 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이름을 내민 스님은 차와 선에 관한 시작(詩作)으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어느 노파가 어느 스님에게 돈을 보내면서/ 대장경을 읽어달라고 하였더니/ 스님은 선상(禪床)에서 내려와 한 바퀴 빙 돌고/ 대장경을 다 읽었노라 하였네/ 새벽에 마신 차 향기가/ 유다르게 좋구나.'
스님은 이러한 바탕을 모아
89년에는 '차(茶)와 선(禪)' '차(茶)와 시(詩)와 그림'이란 책을 연이어 발간해 차선(茶禪)의 의미를 세상에 확인시켰다.
취재 도중 스님에게 물었다. "차선이 뭡니까?"
"우리는 어느 순간 마음에 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독(毒)으로 인해 본래 성품자리를 잃었다. 선(禪)은 마음의 때를 씻는 도구다. 차로써 때자국을 씻어야지."
한국 차인 사이에 가장 존경받는 차인으로 이론없이 거명되는 스님은 또한 태교(胎敎)시인이자 전도사다. 그가 이 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생명존중사상이 그의 정신 맥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차를 통해 선을 추구하는 것이 깨달음의 방편이듯, 태교는 생명의 강이 푸르게 넘치도록 하는 방편이다. 그가 있어서 차의 정화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 한국차계의 행운이라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열반사상' '선문답' 등을 펴낸 스님은 출가자로서의 본분사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파계사에 율원(律院)을 세워 내로라하는 율승을 모아 저술작업을 지휘, 꺼져가는 한국 불가의 종풍을 바로잡는 시작을 알렸다. 불교TV 경영을 맡은 것도 이 시대 화두인 불교포교의 반상 최대 포석이란 판단에서다. 스님 주변엔 늘 난다 하는 사람과 보살들이 들끓지만 한번도 동함이 없는 것은 차를 하면서도 선을 잊지 않고, 선을 하면서도 그 너머 궁극의 지향을 잃지 않음일 것이다.
◇내가 본 茶人 성우스님
언제나 변함없는 禪茶의 향기, 굳건한 '율사의 길' 존경받아
산머리에 걸린 달은 운문(雲門)의 떡이요/문 밖에 흐르는 물은 조주(趙州) 의 茶로다/이 가운데 어떤 것이 진삼매(眞三昧)인가/구월 국화는 구월에 핀다네./라고 노래하는 석성우 스님은 시인이자 차인이다. 그의 시는 쉽고 정겨운, 그러나 선어(禪語)의 기품을 뿜어 낸다. 스님의 다완에 관한 예술적 소양은 알만한 사람은 안다. 도예가 이복규, 길성의 다완이 명품이 된 것도 스님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한국차인연합회 명강사로는 영남권에선 토우 김정희, 아인 박종한과 함께 성우 스님을 꼽는다. 특히 청소년 수련 교육 '태교와 茶강의'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어 왔다.
불교TV 회장이 되자마자 방송사를 흑자 경영수준으로 되돌려 CEO적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스님은 율사로서의 길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많은 불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스님이 차인이면서도 세속차인들과 모습을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파계사의 선방은 선차(禪茶)의 다실이다. 누가 찾아도 편하게, 소박하게, 너그럽게 감싸주는 선차를 접할 수 있다. 성우 스님과의 인연은 30여년에 이르지만 그의 차는 한결같다. 수행에 정진할 때의 차나 손꼽는 율승이 된 지금의 차나 변함없는 향기를 지니고 있다. 변화만이 생존의 관건인 양 풍미하는 세태에 한결같다는 것은 차선의 화두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오명(禪불교대학 학장)
◇취재기
성우 스님과의 인연이 꽤 됐지만 그동안 차인으로서보다는 계율을 가르치는 율승의 면모에 익숙했던 것이 사실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한국차사(史)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을 미처 몰랐던 것은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는 당신의 소박한 품성 탓일게다. "왜 차마시는 지를 깜박잊은 날 스님의 차상을 마주하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는 어느 차인의 고백은 성우 스님이 한국차문화에서 어떤 위치에 있음을 알게하는 대목이다. 눈온 다음날인 지난 18일 불교TV일로 자리를 비운 스님방에서 구남진 대구대 교수와 스케치작업을 했다. 구 교수는 실기입시 일정의 한 와중에 기꺼이 동행에 응했다. 한국화의 독특한 설치예술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변미영씨가 다리를 놓았다. 구교수에게 달리 사례할 것도 없는 미안함을 건네자 "얻을 게 있었다면 후배나 다른 사람에게 미뤘겠지요"라며 힐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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