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기불교

12연기의 해석과 명색의 뜻


상응부 느낌상응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도 즐거운 느낌을 느끼며, 괴로운 느낌을 느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도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그러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으며 어떤 다른 점이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는가. ... 비구들이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 느낌만을 경험할 뿐이며 결코 정신적인 느낌은 겪지 않는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에 연이은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은 것과 같다. ...”라는 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 갈애를 통한 업지음으로 금생의 몸을 받았기에 금생에 깨달은 분들도 이를 바탕한 고수 낙수 불고불락수는 당연히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기본 상식을 가지고 생각해봐도 우리의 몸과 정신은 이전이나 전생에 지은 업이나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금생에 생겨나서 다시 금생의 여러 조건을 반연하여 생장변화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과 물질 혹은 눈 귀 코 혀 몸 마노를 장소로하고 문으로 하여 대상과 접촉하고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수)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한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범주중생은 이러한 느낌에 맛들이거나 저항하는 정신작용을 일으키기에(갈애) 이것을 바탕으로 더 큰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한 반드시 겪게 되는 느낌들에 대해서 다시 갈애와 취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은 새로운 고통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12연기 구조에 적용시켜서 보자면 고는 두 번 나타납니다. 한번은 식명색육입촉수의 수(고수 낙수 불고불낙수, 위 상응부 경전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로 나타나고 한번은 맨 마지막의 생 노사우비고뇌로 나타납니다. 사성제에서 고가 과이듯이 아비담마에서도 당연히 이 두 가지 고는 모두 과에 속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명색육입촉수는 이전의 무명과 행이라는 원인에 의해서 나타난 현재 지금여기에서의 과보이기에 지금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애취유라는 지금의 원인이 소멸되면 생노사로 표현되는 지금이후의 고는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 얼마나 명명백백한 가르침입니까?

남북의 아비담마는 12연기의 식명색육입촉수를 과보로 나타난 것이라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고 사성제에서도 고는 갈애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전생들이나 금생의 이전의 과보로 나타난 식명색육입촉수는 살아있는 한, 식이 일어나는 한 반드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고 이것은 현실에서도 당연한 것입니다. 현실에서도 식이 없고 몸과 정신이 없고 여섯 감각장소가 없고 감각접촉이 없고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돌덩이나 무정물과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12연기의 가르침에서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행연식이나 식연명색이나 명색연육입인 듯합니다. 그리고 무명과 행을 이전의 무명과 행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제 두 분의 견해를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하기에 경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설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연기의 각지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직접 하나하나 정의를 내린 장부의 대인연경(D16)에서 부처님께서는 식연명색을 이렇게 분명하게 정의하십니다.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있다[識緣名色]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지 않았는데도 정신/물질이 모태에서 발전하겠는가? ... 아난다여,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어간 뒤 잘못되어버렸는데도(들어간 뒤 잘못되어버렸는데도(okkamitvaa vokkamissatha)>라는 것은 재생연결식으로 들어가서 죽음의 마음(cuti)으로 잘못되어버렸는데도, 소멸되어버렸는데도라는 뜻이다.) 정신/물질이 [오온을 구비한] 그러한 상태를(그러한 상태로(itthattaaya)란 완전하게 된 다섯 무더기[五蘊]의 상태로라는 뜻이다.) 생기게 하겠는가? ...” (이 귀중한 경에서는 연기각지의 발생구조만을 언급하시지 연기각지의 소멸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하기에 초기경을 생명으로 하는 남북의 아비담마는 공히 12연기를 삼세에 걸친 양중인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과 행은 과거의 두 가지 원인이고(물론 아비담마에서는 이 둘에 애취유가 포함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무명과 행이 두드러진 것이기에 이 둘만을 과거의 원인으로 언급한다고 합니다.) 이 원인을 조건으로하여 현재의 다섯 가지 과보인 식명색육입촉수가 생겨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애취유는 현재의 두 가지 원인이며(물론 아비담마에서는 무명과 행이 이 셋에 포함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애취유가 두드러지기에 이 셋을 현재의 원인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조건으로 하여 미래의 생노사우비고뇌가 일어난다고 설명하며 미래의 생노사우비고뇌는 다름 아닌 식명색육입촉수라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이전의 갈애 혹은 무명과 행이라는 과거의 원인의 결과로 나타난 식명색육입촉수(이 수는 고수 낙수 불고불락수임)는 살아있는 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갈애와 취착과 업형성(유)은[집성제] 8정도의 실천[도성제]으로 소멸시킬 수 있으며[멸성제] 그렇게 되면 이러한 갈애를 원인으로 하는 다음의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학설처럼 육입과 명색을 정신과 물질 또는 몸과 마음이라고 해석하면, 최소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생존해 있는 이상에는, 정신적인 괴로움들도 해결할 수 없다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라는 주장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으며 부처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생존해 있는 이상 이전의 갈애와 업의 과보로 나타난 느낌들(수)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을 조건으로 한 갈애를 타파해버리면 이 이후에는 갈애를 조건으로 한 괴로움들이 모두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명색과 육입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런 모순이 없으며 이 사실을 직시해주시기를 거듭 당부합니다.

 

삶의 전개과정(pavatti)에서 갈애와 취착과 업형성(유)이 소멸되어버리면 그때는 업을 짓는 알음알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전부터 상속되어온 과보로 나타난 알음알이(vipaaka-citta)는 몸의 무너질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며 업을 짓는 알음알이는 아라한의 단지 작용만하는 알음알이(kiriya-citta)로 승화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아비담마의 명쾌한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갈애를 멸진한 아라한이 되어도 살아있는 한 작용만하는 알음알이는 상속됩니다.

이것은 유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식득지가 일어나서 갈애로 대표되는 모든 번뇌와 잠재성향이 소멸되면 아뢰야식이 제8정식(청정식)으로 승화가 됩니다. 이처럼 전식득지가 되어도 알음알이는 상속합니다. 그 이름이 바뀌고 그 작용이 바뀔 뿐입니다.

유식에서도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7식 6식 안식을 일으키고 대상을 사현하여 다시 이러한 8,7,6,5식은 여러 심소법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상을 인식합니다. 여기서도 대상을 수박이라고 아는 것은 인식(상)에 속하지 촉에 속하지 않습니다.

 

초기불전 연구원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