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음성학적 뿌리는 인도에서 왔다
― 브라흐미 음성학에서 발음기호 훈민정음까지 ―
목차
1.들어가는 말
2.세종 단독 창제설과 외래 문자 영향설
① 세종 단독 창제설
② 외래 문자 영향설
3.브라흐미(범어) 문자의 특징
4. 반자(半字)와 만자(滿字)
① 반자(자음)와 반자(모음)가 만나야 만자(滿字) 가된다
② 훈민정음에서 설명하는 모음(반자)
③ 자음(반자)과 모음(반자)의 결합
5.운서와 반절(反切)
① 중국 운서들의 자모 비교
② ㄱᄂᆞᆫ 이라고 쓰는 이유는?
6.신숙주가 이해한 조선어 발음
7.훈민정음해례와 언해본의 차이
8.훈민정음과 한글의 차이
9. 중국사상을 따르는 훈민정음
10.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사람들
① 문종 -공동창제
② 집현전 학자들
③ 신미스님과 승려들
11. 범어 발음체계를 따르는 세계의 문자들
① 태국 문자 자음과 미얀마 문자 자음
② 스리랑카 문자 자음과 티베트 문자 자음
③ 브라흐미와 싯담과 파스파와 훈민정음
12.브라흐미-홍무정운-훈민정음의 공통점 8가지
13.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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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의 음성학적 뿌리는 인도에서 왔다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2019년에 '나랏말싸미(조철현감독)' 라는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훈민정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영화에서는 훈민정음이 범어의 발음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원리를 소개하는 것이 자세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오히려 신미스님이 세종에게 맞서고 반발하는 모습이 부각되어 '나랏말싸미' 라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극장에서 일찍 내려져야 했다. 그후 '훈민정음 해례'를 읽던 중 자음이 ㄱ·ㅋ·ㄲ·ㆁ 의 순서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내가 아는 빨리어(Pāli)의 자음체계와 똑 같았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왜 혀뿌리소리(牙音,ㄱ)에서 시작되는가? 한글은 왜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라고 말하는가? 라는 질문에 비로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해인 1444년, 최만리(崔萬理) 등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세종은 그들에게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반문하였다. 세종이 언급한 ‘칠음(七音)’은 牙·舌·脣·齒·喉·半舌·半齒이고 사성(四聲)’은 全淸·次淸·全濁·不淸不濁이다. 해례본 제자해는 자음을 아음·설음·순음·치음·후음(조음 위치)으로 나누고, 같은 위치 안에서 전청·차청·전탁·불청불탁(조음 방법)의 순서로 배열한다. 세로축(조음 위치)과 가로축(조음 방법)이 만나는 격자구조(格子構造)라는 것은 훈민정음이 왜 과학적인 문자인지를 설명해준다.
훈민정음 해례의 「제자해(制字解)」는 “지금 이 ‘정음(正音)’의 제작도 처음부터 지혜를 굴리고 힘들여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소리(聲)와 음(音)에 근거하여 그 이치(其理)를 철저히 탐구한 것일 뿐이다."(今正音之作, 初非智營而力索,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라고 말한다.이때의 ‘성(聲)’은 사성(四聲)을, ‘음(音)’은 칠음(七音)을 가리킨다. '훈민정음이 과학적이다'라고 표현할때 그 과학적인 내용도 바로 사성칠음(四聲七音)의 원리에서 기인한다.본 연구에서는 범어의 조음위치가 중국에서 칠음(七音)으로 정리되고, 조음방법이 사성(四聲)으로 정리된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브라흐미 문자 𑀓 (ka) 𑀔 (kha) 𑀕 (ga) 𑀖 (gha) 𑀗 (ṅa) 가 중국으로 전해져 초기에는 迦(ka), 呿(kha), 伽(ga), 重音伽(gha), 我(ṅa)로 음차되었다가, 더 정확하게 그 소리를 적기 위해서 見 溪 群 疑라는 반절(反切)로 표기하였고, 조선에서는 그 반절이 君 快 虯 業이라고 표기하고, 마지막으로 그 반절을 바탕으로 ㄱ·ㅋ·ㄲ·ㆁ 라는 기호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조음체계만 같은 것이 아니라 훈민정음과 브라흐미 문자(Brahmi)가 정사각형 안에 모아쓰는 구조라는 것을 설명하고, 왜 훈민정음이 태국,스리랑카,미얀마,라오스,티벳어 등과 조음체계가 같은 지도 살펴볼 것이다.
2.세종 단독 창제설과 외래 문자 영향설
①세종 단독 창제설
훈민정음의 기원과 음운 구조에 관한 기존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시각으로 나뉘어 발전해 왔다. 국내 자생설 및 독자 창제론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해(制字解) 기록에 근거하여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떴다는 생리학적·음성학적 독창성에 주목해 왔다.이 연구들은 훈민정음의 상형(象形) 및 가획(加劃) 원리를 밝혀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세종 단독 창제설(親制說)을 뒷받침하는 문헌 근거는 《세종실록》 25년(1443) 12월 30일조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스물여덟 자를 지으셨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고 기록과 《세종실록》 28년(1446) 9월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 해례본 후서에서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히 예와 뜻을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였다."(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는 서술하고 있다. 신숙주는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서문(1455년)에서도 " 우리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운학(韻學)에 뜻을 두시어 그 깊은 이치를 궁구하시고, 훈민정음(訓民正音) 몇 글자를 창제하시니, 사방 만물의 소리를 전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我世宗莊憲大王 留意韻學。窮硏底蘊。創制訓民正音若干字 四方萬物之聲,無不可傳)고 서술하여, 일관되게 창제의 주체를 세종 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 밖에 《세종실록》 26년(1444) 2월 20일 최만리(崔萬理) 등의 반대 상소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 과정에 사전 참여하지 못하고 완성된 결과를 통보받은 정황이 드러나고, 최만리 등의 상소에 대해 세종이 직접 신하들을 불러 반박하고 심문한 기록에서도 세종이 스스로 문자를 창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② 외래 문자 영향론
외래 문자 영향론(파스파·몽골·범어 기원론)은 훈민정음의 자형이나 초성 체계가 당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전래된 파스파 문자, 몽골 문자, 범자 표기법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해 왔다. 정초(鄭樵)가 편찬한《통지(通志, 1161)》의 〈칠음략(七音略)〉에서는 "칠음이라는 소리 분류법은 원래 서역(인도)에서 생겨나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인도의 승려들이 자기네 불교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려고 이 책(운서)을 지었다. 아무리 여러 번 통역을 거쳐야 하는 머나먼 나라라도,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이라도, 소리와 그 뜻만큼은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이것을 중국의 승려들이 이어받아 36 자음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소리가 무거운지 가벼운지(유기무기), 맑은지 흐린지(무성유성) 하는 구분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틀이 완성되었다. 이 방법을 쓰면 학이 우는 소리든, 바람이 스치는 소리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든, 우레가 하늘을 뒤흔드는 소리든, 모기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아주 작은 소리든 다 받아 적을 수 있다.(七音之韻起自西域, 流入諸夏, 梵僧欲以其教傳之天下, 故爲此書. 雖重百譯之遠, 一字不通之處, 而音義可傳. 華僧從而定之, 以三十六爲之母, 重輕淸濁不失其倫, 天地萬物之音備於此矣. 雖鶴唳風聲, 雞鳴狗吠, 雷霆驚天, 蚊虻過耳, 皆可譯也.)라고 말하고 있다.
칠음략의 이 문장은 칠음의 출처를 알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고,특히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표현은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 해례본 후서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고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으며, 가는 곳마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비록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 닭 울음과 개 짖는 소리라 할지라도 모두 옮겨 적을 수 있다."(無所用而不備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唳雞鳴狗吠, 皆可得而書矣)는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직접 참여했던 신숙주는 1455년 『홍무정운역훈』 서문에서 "칠음은 서역에서 기원하였는데, 송대 선비가 운보를 만들자 씨줄과 날줄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七音起於西域至于宋儒作譜而經緯始合爲一 )라는 증언하고 있다. 신숙주는 세종 단독 창제설을 강력하게 증언하는 사람이면서 칠음이 인도에서 왔다는 증언을 한다는 점에서 그의 증언이 결코 가볍지 않다.
성현은 1525년 『용재총화』에서 "종성을 겸하는 초성 8자, 초성 전용 8자, 중성 12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글자체는 범자에 의거하여 만들었다."(初終聲八字, 初聲八字, 中聲十二字, 其字體依梵字爲之)고 적고 있다. 이수광은 1614년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의 글자 모양은 온전히 범자를 모방하였으니, 세종조에 시작되어 관청을 설치해 편찬하였고, 글자를 만든 정교함은 실로 임금의 예지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무릇 언서가 나오자 온 세상 어디의 말소리든 통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이른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我國諺書字樣, 全倣梵字, 始於世宗朝, 設局撰出, 而制字之巧, 實自睿算云. 夫諺書出而萬方語音, 無不可通者, 所謂非聖人不能也)고 적었다. 소설 『 구운몽(九雲夢) 』 의 저자인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그의 저서 『서포만필』에서 "서역의 범자(梵字)는 초성·중성·종성을 합하여 글자를 이루니, 생성이 무궁하다. 원 세조 때 서역 승려 파스파(八思巴)가 그 글자체를 변형하여 몽골 글자(蒙書)를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그것을 바탕으로 언문(諺文)을 만들었다. 청나라에도 이른바 청서(淸書, 만주어 문자)라는 것이 있는데, 글자체는 다르지만 법칙은 이와 같다. 이것으로도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의 이치가 통하지 않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西域梵字, 以初聲中聲終聲, 合而爲字, 生生無窮. 元世祖時, 西僧八思巴變其體, 而爲蒙書. 我國因之, 而爲諺文. 淸國亦有所謂淸書者, 其體雖別, 其法則同此. 亦可見東海西海理無不通也) 김만중은 "조선은 그 범자를 바탕으로 언문을 만들었다."(我國因之, 而爲諺文)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익도 18세기 중엽 『성호사설』에서 파스파가 사성의 운을 칠음 체계 안에 빠짐없이 담아 몽고 글자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언문의 기원이라는 견해를 남겼다.18세기 이후에도 황윤석은 『운학본원』과 『이수신편』(1774년) 두 저작 모두에서 훈민정음의 연원이 결국 범자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유희는 1824년 『언문지』에서 언문이 몽고에서 비롯되었으나 조선에서 완성되었다는 절충적 시각을 제시하며, 계통은 인정하되 독자적 완성을 함께 강조했다. 근대에 들어서 이능화는 1916년 『조선불교통사』에서 "언문 자법의 근원은 범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세종이 불교 서적을 언해하고 범자 진언과 다라니주 등을 접하는 과정에서 범어의 자모 표기 원리를 깊이 활용했을 것이라는 문화사적 설명을 덧붙였다. 일본의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郎) 역시 한글이 범자를 모방해 만들어졌다는 견해를 밝혔고, 조선에 머물던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글의 기원이 산스크리트어에 근거한 문자라는 의견을 남겼다.
이렇게 4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러 학자가 이 문제를 반복해서 언급했다. 그러나 외래 문자 영향론은 주로 표면적인 '자형의 유사성'이나 일부 음가의 대치에 치중한 나머지, 브라흐미 체계로부터 시작된 정교한 음성학적 분류 구조와 체계성의 전수 과정을 정밀하게 입증하지 못했다. 심지어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으로 '발음기관 상형'이라는 제자 원리가 밝혀졌음에도, 가장 핵심인 조음위치(아·설·순·치·후)와 조음방법(전청·차청·전탁·불청불탁)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그 과학적인 원리를 설명하지 못하였다. "글자체가 범자를 닮았다"는 관찰에 머물렀을 뿐, 어떤 글자가 어떤 범자의 어떤 요소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논증하지 않았다. '칠음 체계가 서역에서 기원했다'는 사실과 '훈민정음 글자 모양이 범자를 본떴다'는 주장은 층위가 다른 문제인데, 후대에 이 둘이 종종 뒤섞여 다뤄졌다.
칠음(아·설·순·치·후·반설·반치)이라는 조음위치 분류 체계가 범어 음운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훈민정음 글자 모양 자체가 범자를 본떴다는 주장은 성격이 다르다. 정인지 서문에서 '글자체는 옛 전서(古篆)를 모방하였다'고 설명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제까지 '훈민정음이 외래 문자 체계의 영향을 받았다'는 논지는 자칫 한글의 독창성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오해되어 학계는 창제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쪽에 무게를 실어 왔다. 범자 연관설이 학문적으로 완전히 부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런 시대적 맥락 속에서 우선순위가 밀려난 측면이 크다.
그 가운데 강상원(姜相源) 박사(1938~2022)는 오랫동안 훈민정음과 범어의 관계를 연구해왔다. 그는《조선 고어 실담어 주석 사전 》, 《천축실담 상형문자 주석》,《우리말은 신의 언어 실담어다》와 같은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주장은 주류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훈민정음뿐만이 아니라 한국어(특히 경상도 사투리)가 산스크리트어의 뿌리이며, 훈민정음을 포함한 세계 여러 문자와 언어가 궁극적으로 여기서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 하였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언어와 문명이 한국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일반학계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의 저서들이 국내외 여러 대학 도서관에 기증되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소장이 곧 학문적 인증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3. 브라흐미(범어) 문자의 특징
범어(Sanskrit),빨리어(Pāli)는 인도-유럽어계에 속하는 언어로, 정교한 음운 체계와 문법 구조를 갖춘 언어이다. 범어의 자음에는 기본적으로 내재된 모음 /ə/ 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가(ga)”와 같은 형태는 자음에 내재 모음이 결합된 기본형, 즉 만자(滿字)로 간주된다.명사는 8격(주격·대격·조격 등), 3수(단수·쌍수·복수), 3성(남성·여성·중성)으로 나누어지며, 동사는 시제,인칭,수에 따라 어형 변화가 일어난다.조음 위치는 연구개음(velar), 경구개음(palatal), 권설음(retroflex), 치음(dental), 순음(labial)등으로 나뉘며, 조음 방법은 ① 성대의 진동이 없고 숨이 약한 무성무기음(無聲無氣,ka), ② 성대의 진동이 없고 숨이 강한 무성유기음(無聲有氣,kha), ③ 성대의 진동이 있고 숨이 약한 유성무기음(有聲無氣,ga), ④ 성대의 진동이 있고 숨이 강한 유성유기음(有聲有氣,gha),⑤ 코로 울리며 내는 비음(鼻音,ṅa)으로 나누어진다.
조음 방법은 인간의 발성 과정에서 가장 쉽게 낼 수 있는 소리에서 점차 어려운 소리로 나아가는 배열이다. 즉, ka → kha → ga → gha로 갈수록 발성에 필요한 호흡과 울림이 커진다. 이 자음 배열은 인간 발음기관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 「성불품」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숨을 들이쉴 때 혀뿌리에서 나는 소리, 코를 따라 울려 나오는 소리, 길고 짧으며 높낮이가 다른 소리, 그 소리를 따라 의미가 해석되는데, 이는 모두 혀와 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吸氣舌根, 隨鼻之聲, 長短超聲, 隨音解義, 皆因舌齒而有差別).이 구절은 발음기관의 작용을 정밀하게 구분한 범어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조음방법중에서 성대가 진동하지 않는 무성음(ka, kha, ca, cha, ta, tha, pa, pha)은 성대가 진동하는 유성음(ga, gha, ja, jha, da, dha, ba, bha)보다 발음이 쉽고 맑다. 무성음중에서도 숨이 약한 무성무기음(無聲無氣)은 가장 발음하기 쉽고 그 다음이 무성유기음(無聲有氣)이다. 이러한 조음방법은 아동의 음운 발달 과정과 일치한다. 아동은 혀와 성대의 미세 조절이 필요 없는 무성무기음 → 무성유기음 → 유성음 → 비음의 순서로 발음하게된다.
실제로 아동이 흉내 내는 소리는 대부분 무성무기 파열음(p, t, k) 중심이다. 아빠를 지칭하는 빠빠 / 빠바,엄마를 지칭하는 마마 / 맘마, 과자를 지칭하는 까까,까자, 더러운 것을 지칭하는 찌찌 / 치치,자동차소리를 지칭하는 빠방 / 빵빵,동물 울음소리를 지칭하는 꼬꼬 / 까깍 등 이러한 발음의 공통점은 모두 단순한 조음 구조를 가진 무성 파열음이다.이는 범어 자음 배열의 첫 구조와 완전히 일치한다. 범어의 체계적 구조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문자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태국(Thai), 미얀마(Burmese), 라오스(Lao), 캄보디아(Khmer), 스리랑카(Sinhala) 등은 범어와 같은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범어의 이러한 구조와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제4권 「시서품(示書品)」에는 부처가 어린 시절 배운 64가지 문자가 소개되어 있으며, 그 중 첫 번째가 브라흐미(梵寐書,brāhmī), 두 번째가 카로스티(佉盧虱底書, kharoṣṭī)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브라흐미 문자가 인도 문자체계의 근원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부처가 열반한 후,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리함에는 “석가족의 형제·자매·친족들이 부처의 사리를 모셨다”라는 내용이 브라흐미 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 기록과 아소까 석주의 브라흐미 문자를 비교하면, 부처 당시부터 수세기 동안 인도인들이 빨리어(Pāli)를 브라흐미 문자로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범어 문자는 소리의 최소 단위인 자음(반자)과 모음(반자)이 만나 하나의 음절인 '만자(滿字)'를 이루는 체계가 완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글자를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는 전통은 중국에서 반절(反切)로 이어졌다. 세종과 문종이 한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소리글자를 만들고자 할 때, 이러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 원리, 즉 '반자 + 반자 = 만자'라는 음운학적 메커니즘을 진작부터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은 자연스럽다. 한자의 초성과 음을 쪼개어 읽던 반절의 논리는, 결국 조선에서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진화하였다.자음과 모음의 분리라는 범어의 특징이 중국에서 반절로 피어나고 마침내 과학적으로 조립하는 '초성·중성·종성'이라는 독창적인 훈민정음 발음 기호 체계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은 모음의 기원을 천지인(三才) 사상과 음양오행으로 설명한다.해례본은 ㆍ, ㅡ, ㅣ를 각각 하늘, 땅, 사람의 자리에 대응시키고, ㅗ·ㅏ·ㅜ·ㅓ의 초출과 ㅛ·ㅑ·ㅠ·ㅕ의 재출 과정에 음양과 오행의 사상을 담아내었다. 예컨대 ㅗ와 ㅜ는 음과 양이 서로 어우르는 기운의 초기에 해당하여 입이 오그라드는 '합(闔)'의 원리로 설명하고, ㅏ와 ㅓ는 음양이 고정된 바탕이어서 입이 펴지는 '벽(闢)'의 원리로 설명하는 식이다. 이러한 작업은 중국의 성리학적 우주관으로 문자를 해설하고 정당화하려는 작업이었다.

4. 반자(半字)와 만자(滿字)
① 반자(자음)와 반자(모음)가 만나야 만자(滿字) 가된다
불멸 후 약 400~500년이 지나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 이 시기의 인도 불교는 이미 범어(Saṃskṛta)와 빨리어(pali)로 문자화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대승경전도 성립되었다. 불교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자연스럽게 범어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일부 대승경전에는 범어의 구조나 의미를 직접 해석하는 부분이 삽입되었다. 범어에서 모음은 ‘마다(摩多)’라고 하고 자음은 ‘체문(體文)’이라고 한다. ‘마다(摩多, mātṛkā)’는 ‘어머니’라는 뜻으로 모음이 모든 소리의 근원임을 상징하며, ‘체문(體文,vyañjana)’은 ‘형태’ 또는 ‘표현’을 의미하여 자음을 가리킨다. 모음에는 12개의 기본 모음(摩多)과 4개의 별모음(別摩多)이 있어 모두 16자가 되며, 자음은 34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을 합하면 총 50자의 체계가 이루어지며, 이를 오십자모(五十字母)라고 한다. 이러한 오십자모의 구성을 언급한 경전으로는 《유가금강정경(瑜伽金剛頂經)》 〈석자모품(釋字母品)〉,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 상권, 《남본열반경(南本涅槃經)》 제8권, 《대반열반경(大般泥洹經)》 제5권, 《북본열반경(北本涅槃經)》 제8권, 《대일경(大日經)》 제2권,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제4권, 《실담자기(悉曇字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 제4권 등이 있다.
초기 한역 경전의 번역은 주로 천축국의 승려나 재가 학자들이 중국어를 배워 진행하였다. 5세기 초 천축삼장(天竺三藏) 담무참(曇無讖, 385~433)은 인도 마가다국의 브라흐만 출신으로, 서역과 중국 서북부를 거쳐 오늘날 간쑤성 구장(姑臧)에서 왕실의 후원을 받아 활발히 번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8권 「문자품(文字品)」에서는 범어 자음과 모음을 각각 '반자(半字)'라 하고, 자음과 모음이 결합된 형태를 '만자(滿字)'라 하며, 그 반자 하나하나에도 깊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반자(半字)' 는 모음이나 자음이 단독으로 있는 형태를 뜻하고, 만자(滿字)는 자음에 모음이 더해진 완전한 음절 형태를 뜻한다. 열반경에서는 범어의 12개 기본 모음을 음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阿, a):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소리, 장음아(阿, ā):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소리,
이( 伊, i): 모든 근본이 넓고 크다는 소리,장음이(伊, ī): 세상의 중생이 많은 병과 고통을 앓는다는 소리,
우(憂, u): 세간의 번뇌와 혼란이 일어나는 소리,장음우(憂, ū): 세상의 중생의 지혜가 좁고 어리석다는 소리,
에(咽, e): 구하려는 모든 바가 결국 허물이 된다는 소리,아이(野, ai): 고귀하고 단정한 위의(威儀)의 소리,
오(烏, o): 죽음의 급류를 건너 저 언덕(彼岸)에 이르는 소리,아우(炮, au): 모든 존재가 변화하여 태어나는 화생(化生)의 소리,
암(菴, aṁ): 모든 존재에는 ‘나’도 ‘내 것’도 없다는 무아(無我)의 소리,아(阿, aḥ): 모든 법이 사라지고 고요히 멸하는 열반의 소리.
이러한 브라흐미문자의 모음 체계는 티베트문자, 미얀마문자, 캄보디아의 크메르문자, 태국문자, 라오스문자, 스리랑카의 싱할라문자에 공통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들 문자는 모두 브라흐미의 독립 모음과 모음부호 체계를 바탕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음에 기본 모음 a가 내재되어 있고 다른 모음은 자음에 모음부호를 결합하여 표시하는 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브라흐미 문자에서 시작된 모음부호를 자음의 앞·뒤·위·아래에 붙여 표기하는 방식은 데바나가리, 벵골, 싯담, 티베트, 싱할라,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에 공통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들 문자는 모두 자음에 기본 모음 a가 내재되어 있으며, 다른 모음은 자음의 앞·뒤·위·아래에 모음부호를 결합하여 표시하는 브라흐미의 기본 원리를 유지하고 있다.브라흐미문자는 a·i·u를 중심으로 모음 체계를 전개하고, 훈민정음은 ㆍ·ㅡ·ㅣ를 중심으로 모음 체계를 전개한다. 두 문자 모두 세 개의 기본 모음을 중심으로 전체 모음 체계를 조직했다는 점에서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 자음과 뜻 | 자음과 뜻 | 자음과 뜻 | 자음과 뜻 | 자음과 뜻 |
| 迦(ka) 업과 과보의 인과 | 佉(kha)제법이 허공과 같다 | 伽(ga) 깊은 연기의 법 | 呵(gha) 무명의 어둠 소멸 | 哦(ṅa) 열두 연기의 소멸 |
| 者(ca) 사성제 관함 | 車(cha) 탐욕을 끊음 | 社(ja) 피안에 이름 | 闍(jha) 마군 항복 | 壤(ña) 중생 깨움 |
| 咤(ṭa) 그릇된 길 끊음 | 咤(ṭha) 문답의 지혜 | 荼(ḍa) 마의 혼란 끊음 | 荼(ḍha) 경계의 부정 | 拏(ṇa) 번뇌 제거 |
| 多(ta) 진여의 평등 | 他(tha) 두려움 없음 | 陁(da) 보시와 계율 | 陁(dha) 성자의 덕 | 那(na) 명색을 앎 |
| 波(pa) 진리 증득 | 頗(pha) 과위 현증 | 婆(ba) 속박 해탈 | 婆(bha) 존재 끊음 | 摩(ma) 교만 소멸 |
| 也(ya) 법 통달 | 羅(ra) 진리 즐김 | 羅(la) 생사 단절 | 婆(va) 대승의 수승함 | 捨(śa) 사마타·위빠사나 |
| 沙(ṣa) 여섯 신통 | 娑(sa) 일체지 현증 | 呵(ha) 업·번뇌 영멸 | 差(kṣa) 말로 표현 못할 법 | — |
| 도표:1. 범어 자음이 한자로 음차된 것과 자음이 가진 의미 | ||||
범어의 자음 34개중에서 연구개음 ka, kha, ga, gha, ṅa는 각각 가(迦,ka), 카(呿,kha), 가(伽,ga), 가(重音伽, gha), 아(我, ṅa)로 음사되었고, 경구개음 ca, cha, ja, jha, ña는 차(遮, ca), 차(車, cha), 자(闍, ja), 자(重音闍, jha), 야(若, ña)로 음차되었다. 이러한 음차(音借)는 표의문자인 한문으로 표음문자인 범어의 음가를 최대한 재현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다. 자음은 발음 위치(조음 위치)와 성대의 진동 여부에 따라 발음값이 달라진다. 성대가 울리지 않는 무성음과 울리는 유성음의 차이,숨의 세기에 따라 유기음,무기음으로 나눈다. 이런 음운 체계를 가진 표음문자를 표의문자인 한문으로 정확히 표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예를 들어, 무성음 가(迦, ka)와 유성음 가(伽, ga)는 소리의 질감이 완전히 다르지만, 한자 표기만으로는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당시의 번역가들은 발음의 세기나 음성적 특성을 구분하기 위해 한자 앞에 ‘경음(輕音)’ 또는 ‘중음(重音)’과 같은 주석적 표현을 붙였다. 유성유기음 gha는 ‘무거운 가(重音伽)’로, 유성유기음 jha는 ‘무거운 자(重音闍)’로 표기하여 그 음가의 강세를 드러내려 한 것이다.범어의 또 다른 어려움은 모음의 장단(長短) 구별이었다. 범어의 기본 모음군 a, ā, i, ī, u, ū를 한문으로 옮기기 위해 번역가들은 아(阿, a), 아(阿, ā), 이(伊, i), 이(伊, ī), 우(憂, u), 우(憂, ū) 등을 사용하였지만, 한자 표기만으로는 장음(長音)과 단음(短音)을 구별할 수 없었다.이와 같은 이유로, 범어의 음가를 한자 하나로 1:1 대응하여 표기하는 단순 음차법은 점차 그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고, 보다 정밀한 발음 표기법이 고안 되었다. 그것이 바로 ‘반절(反切)’이다.
반절(反切) 은 한 글자의 발음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한자를 조합하는 방법으로, 한자의 발음을 초성(聲)과 운모(韻)로 나누어 표기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東(동)의 반절(反切) 표기는 “德紅切”이라 하여, 德(덕)의 초성 ‘ㄷ’과 紅(홍)의 종성 ‘옹’을 합쳐 ‘동’으로 읽는다는 의미이다. 즉, “東,德紅切”은 ‘덕’의 첫소리(초성)와 ‘홍’의 끝소리(운모)를 결합해 ‘동’이라는 발음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단일 한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복잡한 음운 정보를 보다 정확히 표기할 수 있게 하였으며, 나아가 중국의 음운학이 체계화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반절(反切) 은 범어의 음운적 복잡성을 한자 발음 체계 안에서 최대한 재현하려는 지적 노력의 산물로서, 후대의 운서(韻書) 체계 형성과 훈민정음의 음운 이론에도 영향을 미친 중요한 발음 표기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두개의 한자로 다른 한자의 음가를 표현하는 반절(反切) 은 반복하여 한자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순환의 오류에 빠진다.한자들의 음가는 시대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변화하기에 한자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순환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발음기호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② 훈민정음에서 설명하는 모음(반자)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는 모음 11자의 기원을 천지인(三才) 사상과 음양오행의 정교한 이치로 설명한다.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소리 ‘ㆍ’, 땅을 상징하는 평평한 ‘ㅡ’, 사람을 상징하는 수직의 ‘ㅣ’를 기본 삼재로 삼고, 이를 조합하여 초출자(ㅗ·ㅏ·ㅜ·ㅓ)와 재출자(ㅛ·ㅑ·ㅠ·ㅕ)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설명은 문자가 단순히 소리를 적는 기호를 넘어 우주의 섭리를 담고 있음을 선언하는 위대한 지적 성취다. 그러나 당대 동아시아의 음운학적·사상적 환경을 진지하게 돌아볼 때, 이 철학적 체계만으로 모음이 백지 상태에서 순수하게 발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음의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이 인도 범어의 음성학에서 중국 운서를 거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면, 모음만 갑자기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범어에서 모음 12자와 자음 34자를 합쳐 오십자모(五十字母) 체계를 이루었으며, 이 체계는 《대반열반경》 「문자품」, 《방광대장엄경》, 《대일경》, 《실담자기》 등 여러 경전과 문헌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대반열반경》 제8권 「문자품」에서는 자음과 모음을 각각 ‘반자(半字)’라 하고, 둘이 결합된 형태를 ‘만자(滿字)’라 부른다. 자음과 모음의 결합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문자를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ㆍ’가 ㅏ도 ㅗ도 아닌, 가장 기본적이고 중성적인 모음으로 설정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범어에서 자음에 내재된 기본 모음 /a/는 현대 한국어의 ㅏ처럼 앞쪽·낮은 소리도 아니고, ㅗ처럼 둥글고 뒤쪽인 소리도 아니다. 짧고 중설적·저중설적인 소리로, 가장 기본적이고 중립적인 모음이다. 중세 한국어의 아래아(ㆍ) 역시 대부분의 학자들이 [ʌ] 또는 그에 가까운 중설적 모음으로 재구하며, ㅏ보다 뒤쪽이고 ㅗ처럼 입술을 둥글리지 않는 기본적이고 중성적인 성격을 지닌다.단순히 소리가 비슷한 수준을 넘어, 체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까지 “기본·중심·내재적”이라는 점에서 둘은 대응한다. 범어에서는 모든 자음의 기본값으로 /a/가 내재되어 있고, 훈민정음에서는 아래아(ㆍ) 가 가장 기본 모음으로 설정되어 모든 파생 모음에 관여한다. 자음의 조음 위치·방법 격자 구조가 인도에서 왔고, 자음과 모음을 분리·결합하는 발상과 모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통도 인도에서 왔다. 훈민정음에서 아래아(ㆍ) 를 만든 것은 범어 내재 모음 개념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반자(半字)와 만자(滿字) 의 구분, 즉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인식하고 다시 결합하는 방식은 한자 문화권에는 원래 없던 것이었다. 승려들에 의해서 불교경전이 번역되고 그 번역하는 과정에서 칠음·사성 체계가 전해질 때, 반자(半字)와 만자(滿字)의 분리와 결합 방식도 같이 전해졌다. 세종과 문종은 문자 창제 과정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인도 범어의 신성한 언어관과 정밀한 음성학—자음과 모음을 반자로 나누고 만자로 결합하는 구조, 모음을 소리의 근원으로 여기는 인식, 모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통, 그리고 자음에 내재된 기본 모음 /a/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이 기반 위에 중국 성리학의 천지인·음양오행이라는 철학적 옷을 입히고, 조선어의 실제 모음 체계에 맞게 ㆍ·ㅡ·ㅣ를 중심으로 한 11자 체계를 새롭게 설계해 낸 것이다.자음이 인도 음성학의 격을 조선어에 맞게 다시 짠 것이라면, 모음 역시 인도에서 온 모음 인식의 격을 조선의 철학과 음운에 맞게 다시 짠 것이다. 그 증거는 다시 훈민정음의 초성,중성,종성을 모아쓰는 방식이 브라흐미 문자의 모아쓰기 방식과 같은 것으로 나아간다.
③ 자음(반자)과 모음(반자)의 결합
브라흐미 문자(Brahmi script)는 인도에서 사용된 가장 오래된 문자 체계 가운데 하나로, 인류 문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세기경 아소까 대왕(Asoka)의 석주 비문에서 발견된다. 이 석주들은 인도 전역뿐 아니라 네팔, 아프가니스탄, 스리랑카 등지에서도 확인되며, 이를 통해 브라흐미 문자가 이미 당시 인도 전역의 공용 문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브라흐미 문자는 음소문자의 분석적 구조와 음절문자의 종합적 표기를 모두 갖춘 아부기다형 문자(Abugida) 이다. 즉, 한 글자는 하나의 음절로 읽히지만, 그 내부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브라흐미 문자가 인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문자와 한글 자모체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핵심적인 이유이다. 각 자음에는 기본 모음 ‘a’가 내재되어 있으며, 다른 모음을 표현할 때는 자음에 별도의 모음 부호(diacritic)를 부가한다. 예를 들어 𑀮(la)에 모음 기호 𑀼(u)를 결합하면 𑀮𑀼(lu)가 된다. 이처럼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하나의 음절을 이루는 것이 브라흐미의 특징이다.
『훈민정음 합자해(合字解)』에서는 다음과 같이 문자 배열 원리를 설명한다. “초성은 중성의 위에 놓이거나 왼쪽에 놓인다(初聲或在中聲之上, 或在中聲之左).” “중성의 ‘둥근 것’과 ‘가로로 된 것’은 초성의 아래에 놓이는데, ㆍ, ㅡ, ㅗ, ㅛ, ㅜ, ㅠ가 그것이다(中聲則圓者橫者在初聲之下, ㆍㅡㅗㅛㅜㅠ是也).” “‘세로로 된 것’은 초성의 오른쪽에 놓이는데, ㅣ, ㅏ, ㅑ, ㅓ, ㅕ가 그것이다(縱者在初聲之右, ㅣㅏㅑㅓㅕ是也).”이 원리는 브라흐미 문자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음절을 형성하는 구조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브라흐미 문자에서 데바나가리(Devanāgarī) 문자에 이르기까지 문자 형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하였으나, 음운 체계는 270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브라흐미계 문자는 불교 문화를 중심으로 인류 문명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친 문자이다. 특히 조음 위치에 따라 문자를 배열한 원리는 훈민정음의 자모 체계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브라흐미 문자의 모음과 자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브라흐미 문자 모음 | 브라흐미 문자 모음(로만) | 이름 | |
| 단모음 | 𑀅 𑀇 𑀉 𑀋 𑀍 | a i u ṛ ḷ | 기본 단모음 |
| 장모음 | 𑀆 𑀈 𑀊 𑀌 | ā ī ū ṝ | 기본 장음 |
| 복모음 | 𑀏 𑀐 𑀑 𑀒 | e ai o au | 결합 모음 |
| 기호 | 𑀒 𑀓 | ṃ ḥ | 비음화·기식 기호 |
| 도표:2 브라흐미 문자의 모음과 기호 | |||
| 브라흐미 문자 자음 | |||||
| 牙音 (Velar) | 齶音 (Palatal) | 舌音 (Retroflex) | 齒音 (Dental) | 脣音 (Labial) | 비고 |
| 𑀓 (ka) | 𑀘 (ca) | 𑀝 (ṭa) | 𑀢 (ta) | 𑀧 (pa) | 무성무기음 |
| 𑀔 (kha) | 𑀙 (cha) | 𑀞 (ṭha) | 𑀣 (tha) | 𑀨 (pha) | 무성유기음 |
| 𑀕 (ga) | 𑀚 (ja) | 𑀟 (ḍa) | 𑀤 (da) | 𑀩 (ba) | 유성무기음 |
| 𑀖 (gha) | 𑀛 (jha) | 𑀠 (ḍha) | 𑀥 (dha) | 𑀪 (bha) | 유성유기음 |
| 𑀗 (ṅa) | 𑀜 (ña) | 𑀡 (ṇa) | 𑀦 (na) | 𑀫 (ma) | 비음 (nasal) |
| 𑀬 (ya) | 𑀮 (la) | 𑀰 (śa) | 𑀱 (ṣa) | 𑀲 (sa) | 반자음·마찰음 |
| 𑀭 (ra) | 𑀯 (va) | 𑀳 (ha) | 𑀓𑀰 (kṣa) | — | 활음·합음 |
| 도표:3 브라흐미 문자 자음 | |||||
브라흐미 문자의 반자(半字)와 반자(半字)의 결합과정에서 자음 𑀓(ka), 𑀔(kha), 𑀕(ga), 𑀖(gha), 𑀗(ṅa)에 모음 𑀅 (a), 𑀇 (i) , 𑀉(u), 𑀏(e), 𑀑(o) 과 결합한다. 모음 𑀅 (a), 𑀇 (i) , 𑀉(u), 𑀏(e), 𑀑(o) 는 𑀸(ā), 𑀺(i), 𑀼(u), 𑁂(e), 𑁄(o) 와 같은 형태로 변한다. 브라흐미문자도 모음 a 는 오른쪽에 쓰고 모음 u 는 아래쪽에 붙이는데 훈민정음과 같은 방식이다. 𑀓(ka)의 오른쪽에 아래아(ㆍ) 를 붙이면 ‘까( 𑀓𑀸,kā)’가 되며, 같은 방식으로 𑀔(kha)의 오른쪽에 아래아(ㆍ)를 붙이면 는 ‘카(khā,𑀔𑀸)가된다. 𑀕(ga)의 오른쪽에 아래아(ㆍ)를 붙이면 𑀕𑀸(gā)’, 𑀖(gha) 의 오른쪽에 아래아(ㆍ)를 붙이면 𑀖𑀸(ghā)’, 비음 𑀗(ṅa)의 오른쪽에 아래아(ㆍ)를 붙이면 𑀗𑀸(ṅā)’가 된다. 자음 𑀓(ka)의 오른쪽에 모음 𑀺(i) 를 붙여면 (ki,𑀓𑀺)’가 된다. 𑀓(ka)의 아래에 아래아(ㆍ)를 붙이면 ‘(kū,𑀓𑀼)’가 되고, 𑀔(kha)의 아래에 아래아(ㆍ)를 붙이면 ‘(khū,𑀔𑀼)기된다.
| 브라흐미 문자의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방법 | ||||||||
| 모음 부호 | 모음 위치 | 음가 | 𑀓 (ka) | 𑀔 (kha) | 𑀕 (ga) | 𑀖 (gha) | 𑀗 (ṅa) | 한글 대응 |
| 𑀸 (ā) | 오른쪽 | 장모음 ‘아’ | 𑀓𑀸 (kā) | 𑀔𑀸 (khā) | 𑀕𑀸 (gā) | 𑀖𑀸 (ghā) | 𑀗𑀸 (ṅā) | 까, 카, 가, 가하, 응아 |
| 𑀺 (i) | 오른쪽 | 단모음 ‘이’ | 𑀓𑀺 (ki) | 𑀔𑀺 (khi) | 𑀕𑀺 (gi) | 𑀖𑀺 (ghi) | 𑀗𑀺 (ṅi) | 끼, 키, 기, 기히, 응이 |
| 𑀼 (u) | 아래 | 단모음 ‘우’ | 𑀓𑀼 (ku) | 𑀔𑀼 (khu) | 𑀕𑀼 (gu) | 𑀖𑀼 (ghu) | 𑀗𑀼 (ṅu) | 꾸, 쿠, 구, 구하, 응우 |
| 𑁂 (e) | 위 | 복모음 ‘에’ | 𑀓𑁂 (ke) | 𑀔𑁂 (khe) | 𑀕𑁂 (ge) | 𑀖𑁂 (ghe) | 𑀗𑁂 (ṅe) | 께, 케, 게, 게헤, 응에 |
| 𑁄 (o) | 오른쪽+위 | 복모음 ‘오’ | 𑀓𑁄 (ko) | 𑀔𑁄 (kho) | 𑀕𑁄 (go) | 𑀖𑁄 (gho) | 𑀗𑁄 (ṅo) | 꼬, 코, 고, 고호, 응오 |
| 도표:4 브라흐미 문자의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방법 | ||||||||
또한 비음기호 ṁ(아누스와라)은 ㅇ ㄴ ㅁ으로 변하여 종성 역활을 한다. 예를 들어 아소까 석주에 새겨진 브라흐미 문자 'lummini', 'buddha'등의 결합구조를 살펴보자. 브라흐미 문자 𑀮𑀼𑀁 𑀫𑀺 𑀦𑀺(lummini) 와 한글 '룸미니'의 결합 구조는 기본 원리에서 매우 유사하다. 브라흐미의 첫 음절 𑀮𑀼𑀁(lum,룸) 은 자음 𑀮(l,라) 에 모음 𑀼(u,ㅜ) 가 결합하고, 비음 기호 𑀁(ṃ) 이 붙어 만들어진다. 이는 한글의 룸이 초성 ㄹ, 중성 ㅜ, 종성 ㅁ 으로 결합된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두 번째 음절 𑀫𑀺(mi,미) 는 자음 𑀫(m,마) 에 모음 𑀺(i,이) 가 붙어 이루어지는데, 이는 한글의 ㅁ+ㅣ= '미'가 되는 것과 같은 형태다. 세 번째 음절 𑀦𑀺(ni) 역시 자음 𑀦(n,나) 에 모음 𑀺(i,이) 가 결합한 것으로, 한글의 니(ㄴ+ㅣ) 와 일치한다. 따라서 브라흐미 문자 lummini 와 한글 룸미니는 각 음절이 “자음 + 모음( + 종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모두 음절 단위의 결합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브라흐미 문자는 자음에 모음 부호를 오른쪽·아래·위·오른쪽+위의 위치에 부착하여 음절을 형성한다. 범어의 비음 기호(aṃ)는 뒤에 오는 자음에 따라 (ㅇ,ṅ), (ㄴ,n), (ㅁ,m)으로 동화된다.
예) Lumbinī (룸비니): 𑀮 + 𑀁(anusvāra, ṃ) → 𑀩 + 𑀺 → 𑀦 + 𑀻 → 𑀮𑀼𑀁 𑀩𑀺 𑀦𑀻(룸비니).
Buddha (붓다): 𑀩 + 𑀼(ㅜ) → 𑀥 → 𑀩𑀼𑀥(부다)
sangha(상가): 𑀲 (sa) + 𑀁(anusvāra, ṃ) → 𑀖 (gha) → 𑀲𑀁𑀖 (상가)
anta(안따): 𑀅(a) + 𑀁(anusvāra, ṃ) → 𑀢(ta) → 𑀅𑀁𑀢 (안따)
예) Lumbinī (룸비니) 𑖩 + 𑖲(ㅜ) + 𑖽 → 𑖨 + 𑖱 → 𑖡 + 𑖳 → 𑖩𑖲𑖽 𑖨𑖱 𑖡𑖳 (룸비니)
Saṅgha (상가) 𑖭 (sa) + 𑖽 → 𑖒 (gha) → 𑖭𑖽𑖒 (상가)
Anta (안따) 𑖀 (a) + 𑖽 → 𑖝 (ta) → 𑖀𑖽𑖝 (안따)
브라흐미 문자와 싯담문자는 자음을 중심으로 모음부호와 비음기호 또는 연자(連字)를 결합하여 음절을 구성하며, 한글도 초성·중성·종성을 하나의 음절로 결합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인다. 다만 브라흐미와 싯담은 자음에 모음부호를 덧붙이는 아부기다(abugida)이고, 한글은 초성·중성·종성을 독립된 글자로 조합하는 음소문자라는 점에서 문자 체계 자체는 서로 다르다.아부다기 문자처럼 훈민정음도 君 快 虯 業 라는 반절(反切) 에서 ㄱ·ㅋ·ㄲ·ㆁ 라는 기호가 만들어 졌지만 발음기호 ㄱ·ㅋ·ㄲ·ㆁ 를 읽을 때 ka → kha → ga → gha → ṅa 로 발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음은 인도에서 ka → kha → ga → gha → ṅa 로 발음되었고 중국에서도 見 溪 群 疑라는 반절(反切) 을 사용하였지만 ka → kha → ga → ṅa 로 읽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에서도 발음기호 ㄱ을 만들어 놓고 ka 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증거가 언해본에서 “ㄱᄂᆞᆫ 엄쏘리니 군(君)ㄷᄍᆞᆼ(字)처ᅀᅥᆷ 펴아나ᄂᆞᆫ 소리"라고 적은 것처럼 'ㄱ은'이 아니라 'ㄱ는' 이라고 읽고 있기 때문이다. ㄱ 다음에 '는'이라는 조사를 붙이는 것은 'ㄱ' 을 '가'라고 읽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분리된 독립 기호로 조합한다는 점에서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두 문자 모두 ‘자음·모음의 조합으로 음절을 형성한다’는 동일한 구조적 원리를 공유한다.
| 단어 | 결합 과정 설명 | |
| lummini | 𑀮(la) → 𑀮𑀼(lu: 𑀼 = u) → 𑀮𑀼𑀁(luṃ) → 𑀫𑀺(mi: 𑀺 = i) → 𑀦(na : 𑀺 = i ) → 𑀮𑀼𑀁𑀫𑀺𑀦𑀺(lummini,룸미니) | • 𑀁 anusvāra는 뒤 자음에 따라 m·n·ṅ으로 동화 |
| buddha | 𑀩(ba) → 𑀩𑀼(bu) → 𑀥(dha) = 𑀩𑀼𑀥(budha,붓다) | bu + dha |
| dhamma | 𑀥(dha) → 𑀥𑀁(dhaṃ) → 𑀥𑀁(dham) → 𑀫(ma) = 𑀥𑀁𑀫(dhamma,담마) | ṃ → m 동화, mm 중첩 |
| saṅgha | 𑀲(sa) → 𑀲𑀁(saṃ) → 𑀖(gha) =saṅgha,상가 | ṃ → ṅ (연구개음 동화) |
| tathāgata | 𑀢(ta) → 𑀣(tha) → 𑀣𑀸(thā) → 𑀕(ga) → 𑀢(ta) → 𑀢𑀣𑀸𑀕𑀢(tathāgata,여래) | ā = 장모음, 자음 순차 결합 |
| 도표:5 브라흐미 자음+모음 결합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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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운서와 반절(反切)
불교와 함께 범어(Saṃskṛta)가 중국에 전해지자,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은 언어학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도전적인 작업이었다. 범어는 장음과 단음, 유성음과 무성음, 유기음과 무기음을 정밀하게 구별하는 고도로 발달한 음운 체계를 갖추고 있어, 이러한 대비를 한문으로 완전히 대응시켜 옮기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웠다.번역 과정에서 드러난 음운 구조의 차이는 중국 내부의 전통적인 음성 분류법을 재검토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한자의 발음 체계를 정밀하게 분류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심에 바로 운서의 체계적 편찬이 있었다. 홍콩대학교 Guang Xing 교수는 그의 논문 「Buddhist Impact on Chinese Language」(Journal of Oriental Studies, Hong Kong University, 2005)에서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약 3만 5천 개의 차용어(loanwords)가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 어휘뿐 아니라 문장 구조와 문법 체계에도 변화가 일어났고, 특히 운서(韻書) 편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였다”고 주장한다.
범어는 자음을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이라는 이중 구조로 분석한다. 조음 위치는 연구개음, 경구개음, 권설음, 치음, 순음, 반설, 반치, 마찰음, 기식음의 아홉 가지이며, 조음 방법은 무성무기, 무성유기, 유성무기, 유성유기, 비음의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범어는 총 34개의 자음을 정교하게 설명한다.범어의 이 음운학적 전통이 중국에 소개되자, 중국의 전통 성운학은 이에 영향을 받아 ' 광운(廣韻,1008)'과 ' 운회(韻會,1297)'에서 ‘십이음’과 ‘사성’이라는 발음 분류 체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범어의 조음학적 분석 방식이 중국 음운 분류의 표준화와 심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브라흐미와 광운을 비교하였다. 이 비교는 범어의 조음 체계가 불교의 전래를 통해 어떻게 중국 성운학 체계 속으로 흡수되고 변용되었는지를 시각적으로 확인하게 해준다.
| 조음 위치 | Brahmi | 광운(廣韻,1008) |
| ① Velar (牙音) | 𑀓(ka) 𑀔(kha) 𑀕(ga) 𑀖(gha) 𑀗(ṅa) | 見 溪 群 疑 |
| ② Palatal (齦腭音) | 𑀘(ca) 𑀙(cha) 𑀚(ja) 𑀛(jha) 𑀜(ña) | 精 淸 從 孃 |
| ③ Retroflex (舌上音) | 𑀝(ṭa) 𑀞(ṭha) 𑀟(ḍa) 𑀠(ḍha) 𑀡(ṇa) | 知 徹 澄 孃 |
| ④ Dental (舌頭音) | 𑀢(ta) 𑀣(tha) 𑀤(da) 𑀥(dha) 𑀦(na) | 端 透 定 泥 |
| ⑤ Labial (脣音) | 𑀧(pa) 𑀨(pha) 𑀩(ba) 𑀪(bha) 𑀫(ma) | 幫 滂 並 明 |
| ⑥ Sibilants (摩擦音) | 𑀰(śa) 𑀱(ṣa) 𑀲(sa) | — (없음) |
| ⑦ Labial-fricative (輕脣音) | — (없음) | 非 敷 奉 微 |
| ⑧ Alveolar (齒頭音) | — (없음) | 精 淸 從 |
| ⑨ Alveolo-palatal (正齒音) | — (없음) | 照 穿 牀 審 常 |
| ⑩ Lateral (半舌音) | 𑀭(ra) | 來 |
| ⑪ Palatal-nasal (半齒音) | 𑀜(ña) | 日 |
| ⑫ Laryngeal (喉音) | 𑀅(a) 𑀂(ḥ) 𑀁(ṃ) 𑀬(ya) | 曉 匣 影 喩 |
| 도표:6 인도의 브라흐미와 중국의 광운, 운회에서 나타난 자음 배열의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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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미 자음의 첫째는 무성무기(無聲無氣)는 성대 진동이 없고 숨이 약한 발음소리 ka이다. 둘째, 무성유기(無聲有氣)는 성대 진동이 없고 숨이 강한 발음소리 kha이다. 셋째, 유성무기(有聲無氣)는 성대 진동이 있고 숨이 약한 발음소리 ga이다. 넷째, 유성유기(有聲有氣)는 성대 진동이 있고 숨이 강한 발음소리 gha이다. 다섯째, 비음(鼻音)은 비강 공명에 의한 발음소리 ṅa이다. 중국에서는 이 다섯 단계중에서 유성유기(有聲有氣)를 삭제하고 清(무성무기), 次清(무성유기), 濁(유성무기), 次濁(비음)의 네 가지로 단순화하였다. 범어에서는 설음을 설두음과 설상음으로 나누었지만, 중국 운서에는 순음을 순중음(脣重音)과 순경음(脣經音)으로, 치음을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으로 나누어 반절(反切) 로 표기하였다.
①중국 운서들의 자모 비교
중국의 운서 발전 과정을 시기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0자모( 守溫 ,6세기), 절운(切韻,601,陸法言), 광운(廣韻,1008, 陳彭年·邱雍), 집운(集韻,1037,丁度), 운경(韻鏡,12세기), 『통지』「칠음략」(七音略, 정초, 1161), 운회(韻會,1297), 중원음운(中原音韻,1324,周德淸), 홍무정운(洪武正韻,1375, 劉三吾)의 순서로 편찬되었다.절운 이전에도 운집(韻集,呂靜), 운략(韻略,夏侯咏), 음보(音譜,李季節) 등의 운서가 있었지만 모두 전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절운(切韻,601)은 반절(反切)을 확립하고 성모(聲母)와 운모(韻母)를 분류한 최초의 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둔황에서 발견된 수온의 자모도에는 '南梁漢比丘守溫述'이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남양(南梁)은 남북조시대 양나라를, 한비구(漢比丘)는 중국인 승려를 뜻한다. 양나라는 502~557년 사이에 존재했기에 수온(守溫)은 6세기에 생존했던 스님이다. 특히 술(述)이라는 표현은 새롭게 창작한 저술(著)이 아니라 기존의 학설이나 전통을 정리하여 전승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자모도가 수온스님 이전에 정리된 것임을 시사한다.수온은 승려였기에 대반열반경의 문자품 등을 보고 배워서 30자모도를 저술한 것이다. 그냥 자모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30자모에 귀의한다( 歸三十字母)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있는 문자를 신성하게 생각하고 있다. 수온의 자모 체계가 30자모이고, 자음 순서도 순음(脣音)부터 시작하는 것도 다른 운서보다 빠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수온의 30자모를 다른 운서들 보다 앞선 시기에 넣고 설명한다.
비구 수온(守溫)의 30자모(6세기 중반)이 지은 반절 30자모는 다음과 같다. 脣音은 幫滂竝明 이다. 舌頭音은 端透定泥 이다. 舌上音은 知徹澄娘 이다. 牙音은 見溪群疑 이다. 齒頭音은 精淸從心邪 이다. 正齒音은 照穿牀審禪 이다. 喉音은 影曉匣喩 이다. 半舌音은 來 이다.
운경(韻鏡,약 1161년), 반절 36자모는 다음과 같다. 重脣은 幫滂並明, 輕脣은 非敷奉微이다. 舌頭는 端透定泥, 舌上은 知徹澄娘이다. 牙音은 見溪群疑, 齒頭는 精淸從心邪, 正齒는 照穿牀審禪이다. 喉音은 影曉匣喩이고 半舌은 來 이고 半齒는 日이다.
광운(廣韻,1008), 반절 36자모는 다음과 같다. 牙音은 見, 溪, 群, 疑이다. 舌音은 舌頭音 端, 透, 定, 泥와 舌上音 知, 徹, 澄, 孃으로 이루어진다. 脣音은 重脣音 幫, 滂, 並, 明과 輕脣音 非, 敷, 奉, 微로 이루어진다. 齒音은 齒頭音 精, 淸, 從, 心, 邪와 正齒音 照, 穿, 床, 審, 禪으로 이루어진다. 喉音은 影, 曉, 匣, 喩이다. 半舌은 來 이고 半齒는 日이다.
운회(韻會,1297), 반절 35자모는 舌上音의 孃이 舌頭音의 泥에 통합되어 하나가 줄어든다. 牙音은 見, 溪, 群, 疑이다. 舌音은 舌頭音 端, 透, 定, 泥와 舌上音 知, 徹, 澄이다. 脣音은 重脣音 幫, 滂, 並, 明과 輕脣音 非, 敷, 奉, 微이다. 齒音은 齒頭音 精, 淸, 從, 心, 邪와 正齒音 照, 穿, 床, 審, 禪이다. 喉音은 影, 曉, 匣, 喩이다. 半舌은 來 이고 半齒는 日이다.
홍무정운(洪武正韻,1375), 반절 31자모는 舌上音 계열이 舌頭音에 완전히 흡수되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牙音은 見, 溪, 群, 疑이다. 舌音은 端, 透, 定, 泥이다. 脣音은 重脣音 幫, 滂, 並, 明과 輕脣音 非, 敷, 奉, 微이다. 齒音은 齒頭音 精, 淸, 從, 心, 邪와 正齒音 照, 穿, 床, 審, 禪이다. 喉音은 影, 曉, 匣, 喩이다. 半舌은 來 이고 半齒는 日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1443), 반절 23자는 牙音: 君, 快, 虯, 業이고, 舌音은 斗, 呑, 覃, 那이고, 脣音은 彆, 漂, 步, 彌이다. 齒音은 卽, 侵, 慈, 戌, 邪이고, 喉音은 挹, 虛, 洪, 欲이다. 半舌은 閭이고 半齒는 穰 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1443), 발음기호는 牙音: ㄱ, ㅋ, ㄲ, ㆁ 舌音: ㄷ, ㅌ, ㄸ, ㄴ 脣音: ㅂ, ㅍ, ㅃ, ㅁ 齒音: ㅈ, ㅊ, ㅉ, ㅅ, ㅆ 喉音: ㆆ, ㅎ, ㆅ, ㅇ 半舌: ㄹ 半齒: ㅿ 이다. 이것을 알기 쉽게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② 'ㄱᄂᆞᆫ'이라고 쓰는 이유는?
세종은 이 반절(反切) 의 원리를 훈민정음 창제에 응용하였다.『훈민정음 해례』에서는 “ㄱᄂᆞᆫ 엄쏘리니 군(君)ㄷᄍᆞᆼ(字)처ᅀᅥᆷ 펴아나ᄂᆞᆫ 소리 ᄀᆞᄐᆞ니 ᄀᆞᆯᄫᅡ쓰면 뀨ᇢ(虯)ㅸᄍᆞᆼ(字)처ᅀᅥᆷ 펴아나ᄂᆞᆫ 소리 ᄀᆞᄐᆞ니라."(ㄱ 牙音 如君字初發聲 竝書 如虯字初發聲 )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한자 군(君)이라는 반절(反切)을 써서 ka음을 설명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한자의 반절을 기호(ㄱ)로 시각화하였다. 그래서 훈몽자회(1527)에서는 언문 27자를 여전히 반절(反切) 이라고 부르고 있다."(言文字母俗所謂反切二十七字) 그당시 ㄱ 은 무엇으로 불렀을까? 지금 처럼 '기역'이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과연 이 기호(ㄱ)를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 ㄱᄂᆞᆫ' 이라고 부르는데 힌트가 있다. 중국 운서에 見 溪 群 疑라는 반절이 표현하고자 하는 소리, 조선에서 君 快 虯 業 라는 반절로 표현하고 있던 소리는 있었다. 이미 있던 소리(초성자음)를 표현하기 위해 한자를 사용한 것이다. 그 소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조선으로 흘러왔어도 흩트러지지 않았다. 그 소리는 인도에서 ka → kha → ga → gha → ṅa 로 발음되었고 중국에서도 ka → kha → ga → ṅa 로 발음되었고 조선에서도 ka → kha → ga → ṅa 로 발음 되었다. 그러하기에 훈민정음에서 발음기호 ㄱ을 만들어 놓고 'ㄱᄂᆞᆫ' (ka는) 으로 읽었던 것이다. 이것이 ㄱ 다음에 '는'이라는 조사를 붙이고 있는 이유다.
우리가 지금 'ㄱ은'이라고 'ㄱ'다음에 '은'이라는 조사를 붙이는 것은 '기역'이라는 이름에 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언해본에서 모든 자음에 '는'이라는 조사를 붙어있는 것은 이미 조선인들도 ka(ㄱ)의 좌표와 소리값(음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에서 “ㅗ는 아래아(ㆍ) 와 같되 입을 오므린 것이다. ㅏ는 ㆍ와 같되 입을 벌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아래아가 ‘아’와 ‘어’의 중간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기본 모음이었음을 보여준다. 세종이 아래아(ㆍ) 를 별도로 설정한 이유는 이 소리가 다른 모음과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음가였기 때문이다. 범어의 자음에 기본 모음(a)이 내재되어 있어 자음을 모음을 붙여 ka, kha, ga, gha, ṅa 라고 읽는다. 훈민정음에서 아래아(ㆍ) 는 범어에서 자음에 붙어있는 기본 모음이었을 것이다. ‘아’와 ‘어’의 중간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기본 모음인 아래아(ㆍ)를 따로 설정한 것은 범어 전문가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6. 신숙주가 이해한 조선어 발음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1447)에서 조선 한자음이 중국 운서의 이론과 구체적으로 어디서, 왜 어긋나는지를 층위별로 나누어 짚는다. 조선인이 한자를 읽는 방법이 이렇게 변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아음(牙音)으로 말하자면 계모(溪母, kʰ-)의 글자가 태반이나 견모(見母, k-)로 들어갔으니, 이는 자모(조음방법)의 변화이다."(若以牙音言之, 溪母之字, 太半入於見母, 此字母之變也) 이말은 牙音(연구개음) 자리에는 見(k,全淸)·溪(kʰ, 次淸)·群(g, 全濁)·疑(ŋ, 不淸不濁) 네 자음이 있는데 溪母(ㅋ)로 분류되는 글자들(起키, 器킈, 康캉)이 조선 한자음에서는 "기, 긔, 강" 처럼 무기음 見母(ㄱ)로 발음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次淸(ㅋ)으로 발음해야하는 한자를 全淸(ㄱ)으로 발음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溪母의 글자가 혹 曉母(x-)로 들어가기도 하니, 이는 七音의 변화이다"(溪母之字, 或入於曉母, 此七音之變也) 이말은 溪母(ㅋ)에 속한 글자 중 일부는 아예 다른 조음위치인 曉母(ㅎ)로 발음된다는 말이다. 아음 계열이던 글자가 마치 후음처럼 읽히는 경우다.
"우리나라 말소리는 청탁의 분변이 중국과 다름이 없는데, 유독 한자음에는 탁성(濁聲)이 없으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이는 청탁의 변화이다."( 我國語音, 其淸濁之辨, 與中國無異, 而於字音獨無濁聲, 豈有此理! 此淸濁之變也) 이말은 조선어(고유어) 자체에는 예사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라는 세밀한 음의 구별 능력이 있는데 정작 중국 한자음을 옮겨 보면, 전탁(유성음: 群·定·並·從·澄·匣 등)에 해당하는 소리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다. 신숙주는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있다. 중국 운서의 全淸(ka)·次淸(kha)· 全濁(ga)·不淸不濁(ṅa)의 배열이 조선에서는 全淸(ㄱ)·次淸(ㅋ)· 全淸(ㄲ)·不淸不濁(ㆁ)의 배열로 변화되어, 전탁음이 전청음이 된 것을 것을 말한다.
"말소리에는 사성이 매우 분명한데 한자음에는 상성(上聲)과 거성(去聲)의 구별이 없다. 질(質)ㆍ물(勿) 등 여러 운(韻)은 마땅히 단모(端母, t-)로 종성을 삼아야 하는데 속되게 내모(來母, l-)를 써서 그 소리가 느려져 입성(入聲)에 마땅하지 않으니, 이는 사성의 변화이다. 단(端, t-)이 내(來, l-)로 변하는 것은 종성뿐만 아니라, 차제(次第)의 제(第)나 목단(牧丹)의 단(丹) 같은 경우처럼 초성이 변한 것도 많다. 우리말에는 계모(溪母, kʰ-)를 많이 쓰는데 한자음에는 오직 쾌(夬) 한 음뿐이니, 이는 더욱 우스운 일이다."(語音則四聲甚明, 字音則上去無別,質勿諸韻, 宜以端母爲終聲, 而俗用來母, 其聲徐緩, 不宜入聲, 此四聲之變也,端之爲來, 不唯終聲, 如次第之第,牧丹之丹之類, 初聲之變者亦衆) 중국어의 사성(平上去入) 가운데, 조선 한자음에서는 上聲과 去聲의 성조 구별이 사라져 버렸다는 첫 번째 지적이다. 두 번째 지적은 入聲 종성 문제다 — 質(질)·勿(물) 같은 入聲字는 원래 -t 라는 짧고 촉급하게 끊어지는 파열음 종성(ㄷ받침)을 가져야 하는데, 조선 한자음에서는 이것이 來母(ㄹ받침)로 바뀌어 소리가 늘어지게 읽힌다. -t는 순간적으로 막혔다 터지는 소리라 入聲 특유의 촉급한 느낌을 주지만, -l은 혀를 대고 흘려보내는 소리이므로, 入聲이 가져야 할 급박한 리듬 자체가 무너져 버린다. 이를 사성의 변화라 부른 것이다.
"우리말에는 溪母(kʰ-)를 많이 쓰는데 한자음에는 오직 夬(쾌) 한 음뿐이니, 이는 더욱 우스운 일이다"( 國語多用溪母, 而字音則獨夬之一音而已, 此尤可笑者也 ) 조선어(고유어) 자체에는 ㅋ 소리가 흔하게 쓰이는데, 정작 중국 한자음 중 溪母(kʰ)의 소리를 원래대로 간직한 글자는 조선 한자음 전체를 통틀어 夬(쾌) 딱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溪母 글자 태반이 見母로 흡수되었다"는 지적을 극단적인 사례로 다시 확인시켜 주는 문장이며, "이렇게까지 심할 수가 있는가", "더욱 우스운 일이다"라고 어이없어 하는 표현이다.신숙주는 조선 한자음(東音)이 중국 운서(韻書)의 이론적 체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왜 어긋나 있는지를 조목조목 짚었다. 신숙주는 누구 보다도 명나라의 발음과 조선의 발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홍무정운에서 사용하던 見溪群疑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사용하던 반절이다. 그 반절은 범어 자음을 적으려고 사용된 것이지만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사용하지 않는 '유성유기음(gha)'을 과감히 생략하고 자기들만의 발음하는 발음 즉, 순경음(脣輕音) 非 敷 奉 微( ㅸ ㆄ ㅹ ㅱ ), 치두음(齒頭音) 精 清 從 心 邪( ᄼ ᄽ ᅎ ᅔ ᅏ), 정치음(正齒音) 照 穿 床 審 禪( ᄾ ᄿ ᅐ ᅕ ᅑ)을 새로 만들어 표기하였다. 중국인의 발음을 적은 것이기에 조선에서는 이 것을 그대로 따를수 없어서 홍무정운의 자음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조선인들을 위한 새로운 자음표를 만들었다. 그래서 見溪群疑가 君快虯業로 변경되었고, 홍무정운의 31자모가 훈민정음에서는 23자모로 축소된 것이다.

홍무정운역훈 서문(1455)에 훨씬 세밀하고 전문적인 언어학적 분석이 나타난다. 신숙주는 반절(反切) 의 어려움과 훈민정음의 편리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이제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한자를 번역하니, 성(聲, 초성)과 운(韻, 운모)이 서로 잘 어울려, 음화(音和)·유격(類隔)·정절(正切)·회절(回切)과 같이 번거롭고 수고로운 [반절법]에 의지하지 않고도, 입을 열어 소리를 내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또한 어찌 풍토(지방)가 다름을 근심하겠는가."(今以訓民正音譯之聲與韻諧 不待音和類隔正切回切之繁且勞 而擧口得音 不差毫釐 亦何患乎風土之不同哉) 음화(音和)·유격(類隔)·정절(正切)·회절(回切)은 모두 한자의 발음을 다른 두 한자의 조합(반절)으로 표시하던 전통적 방식의 세부 유형들이다. 음화(音和)는 반절상자(초성)와 반절하자(운모)가 서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하고, 유격(類隔)은 반절상자가 실제 표시하려는 자음과 서로 다른 부류(예컨대 경순음/중순음, 설두음/설상음 계열)여서 정확한 초성을 알기 어려운 반절을 말하고. 정절은(正切)은 정상적인 순서(반절상자+반절하자)로 이루어진 반절이고, 회절(回切)은 반절 표기를 거꾸로 읽거나 되짚어 확인하는 방식의 반절법이다.이 구절은 훈민정음이라는 새 표음 문자가 기존 반절(反切) 의 근본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선언하는 대목이다.
한자를 빌려 다른 한자의 음을 표시하던 반절은 음화·유격·정절·회절처럼 여러 복잡한 세부 규칙과 예외를 익혀야만 겨우 정확한 발음을 짐작할 수 있었던 반면, 훈민정음은 소리 그 자체를 문자로 직접 나타내므로, 이런 번거로운 절차 없이도 입으로 소리를 내는 순간 정확한 음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발명이 반절이라는 구시대적 표음 수단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훨씬 정밀하고 보편적인 도구임을 자부하는 대목이다.신숙주는 정확한 한자의 발음을 알아내고자 여덟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고, 8년동안 원고를 열 번 넘게 베껴 쓰며 기록했다. 그는 “옛 운서의 반절에 맞추고, 자모의 칠음과 청탁,사성에 이르기까지,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여 바르게 회복하였다(協之古韻之切, 字母七音淸濁四聲, 靡不究其源委以復乎正)”라고 밝혔다. 見溪群疑는 애초에 중국 중고음(中古音) 체계 안에서 k-, kʰ-, g-, ŋ- 네 단계를 구분하기 위해 선택된 한자이다. 그런데 이 한자들을 조선인이 읽으면 "견, 계, 군, 의"가 되어, 정작 구분해야 할 조음 방식(전청·차청·전탁·불청불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유기음 溪(kha,ㅋ)가 조선인에게는 무기음 '계(ka,ㄱ)'라고 발음되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 한자의 초성처럼 소리내라"고 반절로 지시해도, 조선인은 원래 발음을 내지 못하여 혼란이 생겼다. 그는 설두와 설상, 순중과 순경, 치두와 정치 같은 것들은 우리나라 한자음에서는 분변할 수 없으니 어찌 반드시 36자모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는가라며, 중국 성운학 체계를 기계적으로 답습하지 않았다.
| 시대 | 운서 종류 | 저자 | 자모 | 주요 내용 | 음운학과의 관계 |
| 5~6세기 (전기) | 《韻集》, 《韻略》, 《音譜》 등 | 呂靜, 夏侯咏 등 | (미상) | 한자 발음 정리의 초기 시도 — 현존하지 않음 | 불교 경전 번역 과정에서 범어 음운학을 접하며 기초 형성 |
| 601 (수대) | 《切韻 》 | 陸法言 | -- | 반절(反切) 확립, 성모·운모 분류 체계 정립 | 범어의 자음+모음 결합 원리에서 착안 — 한자를 음소 단위로 분석한 첫 체계 |
| 794 (당대) | 《悉曇字記》 | 智廣 (승려) | 36자모 | 범음식 반절(反切) 제시 — 한자의 초성+종성 결합으로 범어 표기 | 범어 자음(ka)을 居下·去下 등 반절식으로 설명 — “의사 반절(反切) ” |
| 1037 (송대) | 《集韻》 | 丁度 | 36자모 | 《절운》 확대판 — 반절(反切) 정교화, 성운 분화 | 범어 영향 지속, 조음 위치(牙舌脣齒喉) 구분 강화 |
| 12세기 (송대) | 《韻鏡》 | 미상 | 36자모 | 조음 위치를 “脣·舌·牙·齒·喉”로 구분 — 칠음(七音) 구조 완성 | 범어의 조음 위치(연구개·경구개·치·순·후)를 직접 반영한 구조 |
| 1161 (송대) | 《七音略》 | 정초(鄭樵) | 36자모 | “七音” 개념 정립, 조음 위치를 7분류함 (牙舌脣齒喉半舌半齒) | 범어의 10음(연구개~유활음)을 단순화한 불교식 음운 체계 |
| 1324 (원대) | 《中原音韻》 | 周德淸 | 32자모 | 북방어 중심의 운율서, 반절(反切) 약화 | 불교적 요소 약화, 반절(反切) 은 유지하나 조음 이론 단순화 |
| 1375 (명대) | 《洪武正韻》 | 劉三吾 | 31자모 | 조음 순서를 “牙·舌·脣·齒·喉”로 변경, 표준어 정립 목적 | 구강 조음 이론의 잔존, 범어적 어원 흔적 소멸 직전 |
| 도표:7 중국에서 나타난 운서들의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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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의 아음(牙音) 자모 ㄱ·ㅋ·ㄲ·ㆁ은 全淸·次淸·全濁·不淸不濁이라는 네 단계를 밟고 있다. 이 네 단계라는 틀 자체는 궁극적으로 범어의 다섯 단계 조음방법―무성무기(ka)·무성유기(kha)·유성무기(ga)·유성유기(gha)·비음(ṅa)―에서 유성유기음 한 칸을 덜어내고 물려받은 것이다. 이 틀의 3번째 자리, 곧 全濁 자리에는 원래 범어와 중국 중고음에서 진짜 유성음(ga, 群母 g-)이 들어간다. 그런데 훈민정음에서는 바로 이 자리에 유성음이 아니라 경음(된소리) ㄲ이 들어갔다. 見(견)이 君(군)으로, 群(군)이 虯(뀨)로 바뀌면서 왜 하필 경음으로 대체된 것일까. 신숙주는 《동국정운》 서문에서 이 문제를 직접 짚었다. "우리나라 말소리는 청탁의 분변이 중국과 다름이 없는데, 유독 한자음에는 탁성(濁聲)이 없으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한자음에는 탁성이 없으니, 그 자리를 대신 채울 후보를 조선어 안에서 찾아야 했다.
명나라쪽 사정도 마찬가지다. 전탁(全濁)이라는 범주는 편찬 당시 이미 중국어 안에서도 단일한 소리가 아니었다. 신숙주는《홍무정운역훈》서문에서 이렇게 짚었다."사성을 평성·상성·거성·입성이라 하는데, 전탁음(유성음)은 평성일 때는 차청(무성유기음)에 가깝고 상성·거성·입성일 때는 전청(무성무기음)에 가까워, 세상에 쓰이는 바가 이와 같다."(四聲爲平上去入, 而全濁之字, 平聲近於次淸, 上去入近於全淸, 世之所用如此) 실제로 명나라 시대에 전탁음(유성음)은 성조에 따라 무성무기음(전청)과 무성유기음(차청) 둘로 갈라져 있었다는 의미다. 전탁(全濁)이라는 이름은 운서에서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 그 이름 아래 담긴 실제 중국어 발음은 중국내에서도 이미 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홍무정운의 見溪群疑가 全淸(ka)·次淸(kha)·全濁(ga)·不淸不濁(ṅa)의 순서이지만 실상은 全淸(ka)·次淸(kha)· 全淸(ka)·不淸不濁(ṅa)으로 변하거나, 全淸(ka)·次淸(kha)· 次淸(kha)·不淸不濁(ṅa)의 순서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세종은 見溪群疑 이라는 한자 대신에 君快虯業이라는 새로운 한자를 사용하여 "君자를 읽을 때 나는 첫소리"를 그대로 발음하면 ㄱ의 소리에 정확히 도달하고, "快자를 읽을 때 나는 첫소리"를 발음하면 ㅋ의 소리에 정확히 도달하게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전탁음(유성음) 자리에 배치된 虯(뀨)는 실제 발음이 전청음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어는 평음·격음·경음이라는 삼지적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전청(全淸)자리에는 이미 평음(ㄱ)이, 차청(次淸)자리에는 이미 격음(ㅋ)이 배정되어 3번째 전탁음 자리에 들어갈 것은 경음뿐이었다. 조선에서는 실제 발음이 全淸(ㄱ)·次淸(ㅋ)· 全淸(ㄲ)·不淸不濁(ㆁ)의 순서가 된 것이다. 조선에서 전청·차청·전탁·불청불탁이라는 사분 체계 자체는 유지하려다 보니, 실제 음가와는 다른 경음(ㄲㄸㅃㅉㅆ)이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명나라에서나 조선에서나 유성음은 이미 무성음화 되고 있었던 셈이다.
7. '훈민정음 해례' 와 언해본의 차이
'훈민정음 해례' 에는 운경(韻鏡)이나 칠음략(七音略)에만 나오는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훈민정음 언해(1461,세조7년)는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후 300년후에 나타난 훈민정음 운해(1750,신경준)에서도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이 등장한다. 이것은 후세 사람들이 세종의 훈민정음이 중국의 운서를 참조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에서는 17자음이 '훈민정음 해례'(1446,세종28년)에서는 23자음으로 설명된다. 훈민정음 해례에서 23자모(字母)를 아음 ‘ㄱㅋㄲㆁ’, 설음 ‘ㄷㅌㄸㄴ’, 순음 ‘ㅂㅍㅃㅁ’, 치음 ‘ㅈㅊㅉㅅㅆ’, 후음 ‘ㆆㅎㆅㅇ’, 반설음(ㄹ), 반치음(ㅿ)의 순서로 설명한다.
이렇게 '훈민정음 해례' 의 자음이 중국운서에서 나타나는 자음수 보다 축소된 것을 동국정운 서문에서 신숙주는 "설두(舌頭)·설상(舌上)과 순중(唇重)·순경(唇經)과 치두(齒頭)·정치(正齒)는 우리나라의 발음으로는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如舌頭舌上 唇重唇輕、齒頭正齒之類, 於我國字音, 未可分辨)라고 설명하고있다. 중국에서는 범어에도 없는 설두(舌頭)·설상(舌上)과 순중(唇重)·순경(唇經)과 치두(齒頭)·정치(正齒)음을 만들어냈다. 그런 발음은 조선에서 사용하지 않았기에 세종은 자음을 23자로 대폭 줄였다. 중국에서는 순음(唇音)·순경음(唇經音)과 치두음(齒頭音)·정치음(正齒音)이 구분되어 운회(韻會)는 35자음, 홍무정운은 31자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할때 중국의 자음에 해당하는 발음기호가 필요하였다. 운회번역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2달뒤인 1444년(세종 26년 2월 16일)에 시작된다. 세종은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등에게 번역하게하고, 동궁(東宮)과 진양 대군,안평 대군에게 감독하게 하였다.그들이 언문 창제에 관여하지 않고서야 어찌 창제된지 두 달만에 번역을 시키고 감독을 시킬수 있었겠는가?
1455(세조1년)에는 홍무정운역훈이 언문으로 번역된다.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였기에 홍무정운을 번역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 언해본(1459년)에는 순중음(唇重音)·순경음(唇經音)의 발음기호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할 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언해본등에 남아있는 치두음은 치음의 왼쪽을 늘여서 ᄼ, ᄽ, ᅎ, ᅏ, ᅔ으로 표기하고, 정치음은 치음의 오른쪽을 늘여서 ᄾ, ᄿ, ᅐ, ᅑ, ᅕ으로 표현되어있다.순경음( ㅸ·ㆄ· ㅹ·ㅱ )도 표기되어있다. 해례본에 자음은 23자이나 뒤에 순경음 4자( ㅸ·ㆄ· ㅹ·ㅱ )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음을 27자(23+4)로 보는 것도 타당하다. 이 27자에 언해본에 소개된 치두음과 정치음을 더하면 37자(23+4+10:ㄱㅋㄲㆁ,ㄷㅌㄸㄴ,ㅂㅍㅃㅁ, ㅸ·ㆄ· ㅹ·ㅱ,ㅈㅊㅉㅅㅆ,ㆆㅎ ㆅㅇ,ㄹ,ㅿ,ᄼᄽᅎᅏᅔ,ᄾᄿᅐ ᅑ ᅕ)의 발음기호를 만든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음 23개 중에서 다시 4개( ㆍ, ㆁ, ㅸ, ㆆ)를 잃어버려 겨우 17자음만 남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 구분 | 중국 운서 체계 | 훈민정음 체계 | 차이점 및 의미 |
| 철학적 배경 | 불교 경전 번역을 위해 브라흐미(싯담) 체계 수용 | 중국 운서와 오행등의 사상을 수용 | 동일한 범어 이론을 토대로 각각 발전 |
| 기본 원리 | 반절(反切): 초성(聲) + 운모(韻) | 초성(初聲) + 중성(中聲) + 종성(終聲) | 반절을 음절 분해로 확장한 체계 |
| 조음 위치 분류(음) | 牙·舌·齒·脣·喉 (+反舌·反齒) → 7음(七音) | 아·설·순·치·후·반설·반치 → 7음(七音) | 용어만 다르고 구조 동일 |
| 조음 방법 분류(성) | 무성무기·무성유기·유성무기·비음 → 4성(四聲) | 전청·차청·전탁·차탁 → 4성(四聲) | 용어만 다르고 구조 동일 |
| 기원 자음(牙音) | 見·溪·群·疑 (ka, kha, ga, ṅa) | 君·快·虯·業 (군, 쾌, 뀌, 업) | 조선인의 발음에 맞춘 반절 표기 |
| 자음 수 비교 | 광운(廣韻): 36자모 → 홍무정운: 31자 | 훈민정음: 17자 → 23자(해례) | 한국어 음운 실현에 맞춰 자음 축소 |
| 자음 순서 | 見 溪 群 疑 → ka kha ga ṅa | 君 快 虯 業 → ㄱ ㅋ ㄲ ㆁ | 순서 동일, 표기 방식만 조선식으로 |
| 음운학적 기반 | 범어의 ka·kha·ga·gha·ṅa 체계 | 같은 원리를 한글 음소로 창제 | 훈민정음의 제자원리 = 범어+중국 운서의 체계 수용 |
| 제작 목적 | 범어 발음 음차, 한자음 반절 | 조선어의 음운 자립, 언문 창제 | ‘중국과 다른 조선의 소리’를 표기하려는 독자성 |
| 청탁 이해 차이 | 청(淸) = 무성 / 탁(濁) = 유성 | 청(淸) = 유성 / 탁(濁) = 무성으로 오해 | 훈민정음의 청탁 개념이 반전됨 |
| 소리 철학 | 반절(聲+韻)으로 소리 규정 | 초·중·종성으로 소리 구성 | 범어의 “반자(半字)–만자(滿字)” 사고 계승 |
| 문자 철학 | “反切之學出於西域”(서역에서 옴) | “但因其聲音而極其理”(성음의 이치를 탐구하여 만듦) | 동일한 근원: 범어의 음운이론 |
| 표음성 | 한자 반절로 간접 표음 | 문자기호로 직접 표음 | 언문은 반절 표현의 종결점 |
| 도표:8 중국 운서와 훈민정음의 차이 | |||

8. 훈민정음과 한글의 차이
범어 자음은 34자인데,중국에서는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발음을 첨가하여 36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도 조선인의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23자음을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1443년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언문이 28자(자음17자 ㄱㅋㆁ,ㄷㅌㄴ,ㅂㅍㅁ,ㅈㅊㅅ,ㆆㅎㅇ,ㄹ,ㅿ +모음11자)였는데, 훈민정음 해례(1446)에서는 38자(자음 27자 ㄱㅋㄲㆁ,ㄷㅌㄸㄴ,ㅂㅍㅃㅁ, ㅸ·ㆄ· ㅹ·ㅱ,ㅈㅊㅉㅅㅆ,ㆆㅎ ㆅㅇ,ㄹ,ㅿ +모음11자)가 되고, 언해본(1459)에서는 48자(자음 37자 ㄱㅋㄲㆁ,ㄷㅌㄸㄴ,ㅂㅍㅃㅁ, ㅸ·ㆄ· ㅹ·ㅱ ,ㅈㅊㅉㅅㅆ,ㆆㅎ ㆅㅇ,ㄹ,ㅿ,ᄼᄽᅎᅏᅔ,ᄾᄿᅐ ᅑ ᅕ+모음11자)가된다. 일반적으로 훈민정음 해례에서는 자음이 23자라고 알고 있지만 4가지 순경음(ㅸ·ㆄ· ㅹ·ㅱ)이 뒤에 소개되기에 27자로 본 것이다. 언해본의 자음이 크게 늘어난 것은 중국의 운서 운회, 홍무정운등에서 나타나는 순경음, 치두음,정치음에 대한 발음기호를 만들어야 했다.
1443년에 창제된 훈민정음은 자음 17자와 모음 11자, 총 28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비해 현대 한글은 자음 14자와 모음 10자, 총 24자로 구성되어 있다. 즉, 훈민정음에서 ㆁ(옛이응), ㅿ(반시옷), ㆆ(여린히읗), ㆍ(아래아)의 네 글자가 사라진 셈이다. 이 네 글자는 당시 한국어의 발음을 매우 정밀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자모였다. 예를 들어 초성 ㆁ은 ‘아가–ㆁ아가’처럼 콧소리로 시작하는 단어를 표시할 수 있었고, ㅿ은 영어의 z처럼 부드러운 유성 마찰음을 나타냈다. ㆆ는 성문을 막았다 여는 소리로, 감탄이나 끊어 읽기를 구분할 때 유용했으며, 아래아(ㆍ)는 ‘ㅏ–ㆍ–ㅓ’ 사이의 중간 모음으로 음색의 미묘한 차이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 이후 세월이 지나며 음운의 단순화가 일어나고 표기체계가 통일되면서 이러한 세밀한 자모들은 점차 사라지고, 오늘날과 같은 24자의 간결한 한글이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운회》나 《홍무정운》과 같은 중국 운서를 번역·연구하던 과정에서, 당시 학자들은 중국어의 성모(聲母)가 한국어보다 훨씬 다양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따라 15세기 후반의 언해본에서는 자음이 37자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이 확장은 주로 순경음( ㅸ·ㆄ· ㅹ·ㅱ ), 치두음(ᄼ, ᄽ, ᅎ, ᅏ, ᅔ), 정치음(ᄾ, ᄿ, ᅐ, ᅑ, ᅕ)의 추가 때문이었다.순경음은 입술과 목의 움직임이 결합된 소리로, 오늘날 영어의 b, v, p, f와 같은 유성·무성 순음을 구별하기 위한 글자였다. 현재 순경음을 영어 발음 표기에 사용한다면 ㅂ,ㅸ는 영어 b,v 발음이고,ㅍ,ㆄ는 영어 p,f 발음이다. 반치음 ㅿ은 영어 z발음이고, ㄹ 은 영어 l 발음이고, 영어 r은 'ㄹㄹ(ㄹ병서)'로 표기하면 된다. 이처럼 순경음을 살려서 사용할 때 비로서 정인지가 말한대로 "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된다."(雖風聲鶴唳,雞鳴狗吠,皆可得而書矣)
창제 당시 28자 가운데 ㆁ(옛이응)·ㅿ(반시옷)·ㆆ(여린히읗)·ㆍ(아래아) 4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낯설고,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은 조선의 학자들이 중국어와 범어의 세밀한 발음까지 옮겨 적으려고 새로 고안했다가 지금은 완전히 잊힌 14개의 글자다. 이 글자들이 왜 필요했는지, 무슨 소리를 나타내려 했는지를 하나씩 짚어보면, 훈민정음이 애초에 얼마나 야심 찬 국제 발음기호 프로젝트였는지가 드러난다.
사라진 순경음(脣輕音) 4자 — ㅸ ㆄ ㅹ ㅱ
이 네 글자는 모두 순음 계열 기본자(ㅂㅍㅃㅁ) 아래에 동그라미(ㅇ)를 하나씩 받쳐 만든 것이다. 조선어의 ㅂ은 두 입술을 완전히 붙였다가 터뜨리는 소리(순중음, 오늘날 영어의 b·p에 가까움)인데, 중국어와 범어에는 이와 달리 입술을 완전히 붙이지 않고 살짝 스치듯 마찰시켜 내는 소리 계열이 따로 있었다. 오늘날 영어의 v나 f를 발음할 때 아랫입술이 윗니에 살짝 닿는 것을 떠올리면 비슷한 느낌이다. 순경음은 바로 이 "입술을 무겁게 닫는 소리(순중음)"와 "입술을 가볍게 스치는 소리(순경음)"를 구별하기 위한 장치였다. ㅸ은 유성 마찰음(오늘날 v 에 가까운 소리) 표기에, 나머지 ㆄㅹㅱ은 각각 무성·전탁·비음 계열의 순경음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이 가운데 ㅸ은 실제로 조선어와 접점이 있었던 글자다. 그러나 ㆄㅹㅱ 셋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어 한자음을 옮기는 데만 쓰였다.
사라진 치두음(齒頭音) 5자 — ᄼ ᄽ ᅎ ᅏ ᅔ
치음 계열 기본자(ㅅㅆㅈㅉㅊ)의 획을 왼쪽으로 늘여서 만든 글자들이다. 치두음은 혀끝을 윗니 뒤쪽, 이의 앞부분(치두, 齒頭)에 가볍게 대고 내는 소리 계열을 가리킨다. 오늘날 중국어의 z·c·s(한어병음 기준, 정치음과 구별되는 계열) 같은 소리, 혹은 유럽어의 ts·dz류에 가까운 소리라고 이해하면 된다. 조선어의 ㅅㅈㅊ은 이런 세밀한 구별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구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사라진 정치음(正齒音) 5자 — ᄾ ᄿ ᅐ ᅑ ᅕ
같은 치음 계열 기본자의 획을 이번엔 오른쪽으로 늘여서 만든 글자들이다. 정치음은 치두음보다 혀를 조금 더 뒤쪽, 잇몸 쪽(정치, 正齒)으로 옮겨 내는 소리 계열이다. 오늘날 영어의 sh·ch, 혹은 산스크리트어의 권설음 계열에 가까운 소리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치두음과 정치음은 조선어에서는 구별할 필요가 없던 "혀끝이 이에 닿느냐, 잇몸 쪽으로 조금 물러나느냐"라는 미세한 조음 위치 차이를 굳이 갈라놓은 것이다.
이 14 글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이것들이 처음부터 조선어를 적기 위한 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의 기본 28자는 세종이 실제로 조선 사람들이 입으로 내는 소리를 관찰하고 상형한 결과였지만, 이 14자는 반대 방향의 작업이었다. 중국의 운서 운회,홍무정운 등에 나타난 음운 체계를 뒤쫓아 만들어진 글자였다. 중국어 발음을 정밀하게 옮기려던 목적으로 생겨난 순경음 4자( ㅸ ㆄ ㅹ ㅱ),치두음 5자( ᄼ ᄽ ᅎ ᅏ ᅔ ),정치음 5자( ᄾ ᄿ ᅐ ᅑ ᅕ ) 총 14자는 그 목적이 사라지자 남김없이 사라졌다. 조선어 자체를 위해 만든 28자 중에서는 4자(ㆁㅿㆆㆍ)도 사라졌다. 훈민정음 역사상 실제로 쓰였다가 오늘날 완전히 사라진 글자는 총 18자에 이른다. 훈민정음의 완전한 체계가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면, 우리는 세계 어느나라의 언어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체계를 가졌을 것이다.
| 구분 | 훈민정음 (1443) | 훈민정음 해례(1446) | 현대 한글 | 차이점 |
| 총 자모 수 | 28자 (자음 17 + 모음 11) | 48자(자음 23+ 4+5+5+모음 11자) | 29자 (자음 19 + 모음 10) | 4자 실종 — ㆁ, ㅿ, ㆆ, ㆍ |
| 자음 수 | ㄱㅋㆁ,ㄷㅌㄴ, ㅂㅍㅁ,ㅈㅊㅅ, ㆆㅎㅇ,ㄹ,ㅿ (17자) |
ㄱㄲㅋㆁ,ㄷㅌㄸㄴ, ㅂㅍㅃㅁ, ㅈㅉㅊㅅㅆ, ㆆ ㅎ ㆅ ㅇ,ㄹ, ㅿ(23) 순경음(4): ㅸ·ㆄ· ㅹ·ㅱ 치두음(5): ᄼᄽᅎᅏᅔ, 정치음:(5): ᄾᄿᅐᅑᅕ |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ㄸ, ㅃ, ㅆ, ㅉ (19자) | ㆁ, ㅿ, ㆆ 탈락. 소실된 순경음 외국어 발음 ㅂ–b, ㅸ–v / ㅍ–p, ㆄ–f, /ㅿ–z , ᄼ·ᄽ–th, ㄹ–l , ‘ㄹㄹ’–r |
| 모음 수 | ㆍ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기본모음 11자) |
ㆍ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기본모음 11자) |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기본모음 10자) | 아래아(ㆍ) 탈락. 아래아가 남아있다면 ‘말·몰·멀’, ‘아가·ㆁㅏ가’ 구별 가능 |
| 도표:9 훈민정음과 훈민정음해례와 한글의 비교 | ||||
9. 중국사상을 따르는 훈민정음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制字解)에서는 오음(牙·舌·脣·齒·喉)을 오행(木·火·土·金·水), 오음계(宮·商·角·徵·羽), 그리고 다섯 계절(春·夏·季夏·秋·冬)에 배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외관상 독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와 같은 전통 운서의 설명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훈민정음해례의 설명을 절운과 비교하면 그 구조적 동일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음(五音)을 오행·오음계·다섯 계절과 병렬시키는 자연철학적 구조는 절운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는 단순한 영향 관계를 넘어, ‘설명 방식’ 자체가 중국 전통 음운학의 해설틀을 모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절운: 처음의 아음(牙音)은 계절로는 봄(春)이며 음계로는 각음(角音)이고 오행으로는 나무(木)이다.(故始牙音春之象也, 其音角, 其行木)
훈민정음해례:어금니는 어긋나고 길어서, 오행의 나무(木)에 해당한다. 아음(牙音)은 목구멍 소리와 비슷해도 실하기 때문에 나무가 물에서 생겨나지만 형체가 있는 것과 같다. 계절로는 봄(春)에 속하고, 음계로는 각(角)음에 속한다.(牙錯而長 木也. 聲似喉而實 如木之生於水而有形也. 於時爲春 於音爲角)
절운: 다음의 설음(舌音)은 계절로는 여름(夏)이며 음계로는 치음(徵音)이고 오행으로는 불(火)이다.( 次曰舌音夏之象也, 其音徵, 其行火)
훈민정음해례: 혀는 날카롭고 움직여서 오행의 불(火)에 해당한다. 혀 소리가 구르고 날리는 것은 불이 이글거리며 활활 타오르는 것과 같다. 계절로는 여름(夏)에 속하고, 음계로는 치음(徵音)에 속한다.(舌銳而動 火也 聲轉而颺 如火之轉展而揚揚也. 於時爲夏 於音爲徵)
절운: 다음의 순음(脣音)은 계절로는 늦여름(季夏)이며 음계로는 궁음(宮音)이고 오행으로는 흙(土)이다.( 次曰唇音季夏之象也, 其音宮, 其行土)
훈민정음해례: 입술은 모나지만 합해지므로 오행의 흙(土)에 해당한다. 입술 소리가 머금고 넓은 것은 흙이 만물을 감싸고 넓은 것과 같다. 계절로는 늦여름(季夏)에 속하고, 음계로는 궁음(宮音)에 속한다.(脣方爲合 土也. 聲含而廣 如土之含蓄萬物而廣大也. 於時爲季夏 於音爲宮)
절운: 다음의 치음(齒音)은 계절로는 가을(秋)이며 음계로는 상음(商音)이고 오행으로는 쇠(金)이다.(次曰齒音秋之象也, 其音商, 其行金)
훈민정음해례: 이는 단단하고 끊으니 오행의 쇠(金)에 해당한다. 이 소리가 부스러지고 걸리는 것은 쇠가루가 단련되어 쇠를 이루는 것과 같다. 계절로는 가을(秋)에 속하고, 음계로는 상음(商音)에 속한다.(齒剛而斷 金也. 聲屑而滯. 如金之屑𤨏而鍛成也. 於時爲秋 於音爲商)
절운: 다음의 후음(喉音)은 계절로는 겨울(冬)이며 음계로는 우음(羽音)이고 오행으로는 물(水)이다.(次曰喉音冬之象也, 其音羽, 其行水)
훈민정음해례: 목구멍은 깊은 곳에 있고, 젖어 있으니 물(水)이다. 소리는 허하고 통하여, 물이 맑아 훤히 들여다 보이고, 두루 통하는 것과 같다. 계절로는 겨울(冬)에 속하고, 음계로는 우음(羽音)에 속한다.(喉邃而潤 水也. 聲虛而通 如水之虛明而流通也.於時爲冬 於音爲羽)
이상과같이 훈민정음해례에서는 중국의 '절운'보다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오음(牙,舌,脣,齒,喉)을 오행(木,火,土,金,水)과 오음계(宮,商,角,徵,羽)와 다섯 계절(春,夏, 季夏,秋,冬)에 배대하여 설명하는 방식은 같다.특히 계절을 오행과 맞추려다보니 네 계절을 다섯 계절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누가 보아도 어색한 시도이다. 그럼에도 훈민정음해례에서는 이 방식조차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런면에서 훈민정음의 사상적 부분은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에 의지하여 설명할 뿐 독창적인 설명은 아닌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 에서 정인지는 "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雖風聲鶴唳,雞鳴狗吠,皆可得而書矣)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이미 범어 36자모를 옮겨 적은 '칠음략'의 서문에 다음과같이 나타난다. "중국의 승려(華僧)가 이에 따라 소리를 정하여 36자를 근본으로 삼았다.그리하여 무겁고 가벼움(重輕), 맑고 탁함(淸濁) 의 구별이 그 질서를 잃지 않게 되었고,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의 소리가 여기에 갖추어졌다.학이 우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천둥이 하늘을 울리는 소리, 모기나 등에가 귓가를 스치는 소리까지도 모두 음역(音譯)할 수 있으니,하물며 사람의 말이야 어찌 표현하지 못하겠는가."(華僧従而定之以三十六為之母,重軽清濁不失其倫,天地万物之音備於此,矣雖鶴唳風声鶏鳴狗犬雷霆驚天蚊虻過耳皆可訳也,況於人言乎) 이렇게 ‘만물의 소리를 문자로 옮길 수 있다’는 수사(修辭)는 훈민정음 고유의 발상이 아니라, 범어 36자모를 해설하던 중국 음운학의 표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이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훈민정음의 문자 창제는 분명히 세계적으로 드문 독창성과 과학성을 지닌 성과다. 하지만 해례본 제자해가 취하고 있는 사상적 설명 구조는 중국의 음양오행적 음운 체계를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그 자체로 독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이러한 설명을 보기 쉽게 만들면 다음과같다.
| 사상 구성요소 | 절운(切韻) | 훈민정음해례(制字解) | 관계 |
| 오음(五音) | 牙 · 舌 · 脣 · 齒 · 喉 | 牙 · 舌 · 脣 · 齒 · 喉 | 구조 동일 |
| 오행(五行) | 木 · 火 · 土 · 金 · 水 | 木 · 火 · 土 · 金 · 水 | 구조 동일 |
| 오시(五時) | 春 · 夏 · 季夏 · 秋 · 冬 | 春 · 夏 · 季夏 · 秋 · 冬 | 구조 동일 |
| 오음계(五音階) | 角 · 徵 · 宮 · 商 · 羽 | 角 · 徵 · 宮 · 商 · 羽 | 구조 동일 |
| 사상적 성격 | 중국 전통 음양오행·음계론 기반 | 중국 전통 사상을 그대로 차용 | 구조 동일 |
| 도표:10 『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와 『 훈민정음 해례』의 설명 방식의 유사성 | |||
10.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사람들
① 문종 -공동창제
세종실록은 1443년 12월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기록한다. 이 때문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문자 하나가 탄생하기까지에는 음운의 분석, 운서의 검토, 자모의 설정, 실제 표기의 시험, 새로운 문자로 기존 음운 체계를 옮기는 작업, 해례의 작성과 검증 등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훈민정음은 단순한 표음문자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정교한 음운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자였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작업에서 세종 곁에 있던 사람은 누구였는가. 바로 왕세자 문종이었다. 1442년부터 1446년까지의 기록을 따라가면 문종은 단순한 왕세자가 아니었다. 그는 세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했고, 언문 연구에 직접 관여했으며, 운서 번역사업을 감독했다. 최만리는 문종이 언문 연구에 지나치게 몰두한다고 비판했고, 세종은 그것을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훗날 성삼문은 세종과 문종을 함께 언급하며 훈민정음 창제를 기록했고, 신숙주는 문종이 세종을 도와 성운을 함께 결정했다고 증언했다. 훈민정음 창제가 이루어진 1443년에는 문종은 만 29세였다. 1442년 세종의 건강이 크게 나빠지면서 문종이 국정에 본격적으로 관여한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는 1443년과 해례가 완성되는 1446년은 바로 이 문종의 대리청정과 국정 참여가 지속되던 기간과 겹친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 문종에게 운서 번역을 맡겼다 1444년 2월 세종은 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에게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했다. 세종실록은 “동궁(문종)과 진양대군 유, 안평대군 용이 그 일을 감독하여 맡았다”라고 적고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직후 새 문자를 이용해 중국 운서를 번역하는 작업은 단순한 행정업무가 아니었다. 중국어의 성조와 자모, 청탁, 음절 구조를 분석하고 그것을 새 문자로 정확하게 표시해야 했다. 따라서 이 사업은 새 문자의 실제 음운적 기능을 검증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종은 이 중요한 사업을 문종에게 감독하게 했다. 당시 문종은 만 29세였고, 수양대군은 27세, 안평대군은 26세였다. 세 왕자가 이미 언문과 음운에 관한 사업에 상당히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종의 관여 사실은 훈민정음 창제의 반대자였던 최만리의 상소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1444년 최만리 등은 세종에게 언문 제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동궁 문종을 직접 공격했다. "지금 동궁(세자)께서는 비록 덕성이 이미 이루어지셨다 하더라도, 마땅히 성인의 학문에 마음을 가라앉히시어 아직 이르지 못한 바를 더욱 추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이는 특별히 문사(文士)의 여섯 가지 재주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하물며 정치의 도리를 다스리는 데는 전혀 이로움이 없는데도, 이에 정력을 다하고 생각을 소비하시어 하루 종일 시간을 옮겨 가며 몰두하시니, 실로 때에 맞게 힘써야 할 학문에 손해가 있습니다."(今東宮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이다. 최만리는 문종이 언문 연구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따라서 적어도 1444년 당시 문종이 언문 연구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세종은 문종의 언문 관여를 오히려 인정했다 최만리의 공격에 대한 세종의 답변은 더욱 중요하다. “내가 늙어서 나라의 여러 일을 세자에게 전적으로 맡겼으니, 작은 일이라도 마땅히 함께 결정해야 하는데 하물며 언문이겠는가”(且予年老,國家庶務,世子專掌,雖細事固當參決,況諺文乎) 여기에서 세종은 문종이 언문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종은 언문 역시 세자가 참여하여 결정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한다. 이 기록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문종의 위치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최만리는 문종의 언문 연구를 문제 삼았고, 세종은 그것을 문제 삼기는커녕 세자의 참여가 당연하다고 했다.
또한 성삼문은 세종과 문종을 함께 훈민정음 창제자로 기록했다. 성삼문은 『직해동자습』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세종과 문종께서 이를 염려하시어 훈민정음을 이미 만드셨으니, 천하의 모든 소리를 비로소 다 표기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我世宗,文宗慨念於此。旣作訓民正音。天下之聲。始無不可盡矣) 성삼문은 훈민정음 사업의 내부에 있었던 인물이다. 더욱이 이 글은 훈민정음 창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의 기록이기에 그 무게를 더한다. 신숙주의 증언도 있다. 신숙주는 『홍무정운역훈』 서문에서 "문종 공순대왕께서 동궁(세자)의 관저에 계실 적부터 성인(문종)으로서 성인(세종)을 도와 성운(聲韻) 작업에 참여하였다."(文宗恭順大王 自在東邸 以聖輔聖 參定聲韻)고 전하고있다. 여기서 참정(參定)은 단순한 ‘참여’가 아니다. ‘참여하여 함께 결정하다’는 의미다. 훈민정음은 음운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다. 따라서 문자 창제에서 음운의 결정은 부수적인 작업이 아니라 핵심적인 과정이다. 신숙주는 바로 그 음운 결정 과정에 문종이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서문의 마지막에서는 "우리 역대 성왕들께서 문자를 창제하신 그 오묘한 이치는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훌륭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보다 뛰어난 것이 없는데, 전하께서 그 유업을 이어받으신 아름다운 덕은 또 이전 선왕들의 훌륭한 공업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我列聖製作之妙盡美盡善 超出古今 而殿下繼述之懿 又有光於前烈矣)고 말한다.이때 신숙주의 입장에서 ‘我列聖’은 세종과 문종을 가리킨다. 즉 신숙주에게 훈민정음과 그 음운 체계의 정립은 세종 한 사람의 업적만이 아니라 세종과 문종으로 이어지는 두 성왕의 제작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서문은 1455년, 문종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작성되었다. 따라서 신숙주는 생존한 국왕 세조를 “殿下”라고 부르고, 그 앞선 세종·문종의 업적을 “我列聖”으로 묶어 찬양하고 있다.이렇듯 세종과 최만리의 입으로 문종이 훈민정음을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 했다고 밝히고 있고 ,성삼문과 신숙주는 신하된 입장에서 세종과 문종이 함께 훈민정음 창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국정운에는 훈민정음을 御製라고 표현한다. ‘御製’는 왕이 지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세종 단독 창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조선 왕조에서 왕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귀속되는 국가사업과 실제 연구·편찬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역할은 구별될 수 있다. 1447년에는 세종이 생존해 있었고 국왕이었다. 따라서 훈민정음과 관련된 국가적 성과를 御製라고 귀속시키는 것은 당연한 공식 표현이었다. 이것은 1455년 신숙주가 문종을 參定聲韻의 주체로 기록한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표현은 서로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御製는 왕에게 귀속되는 공식적인 명칭이고, 參定聲韻은 문종이 실제 연구·결정 과정에 참여했다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御製라는 표현이 있으니 문종은 참여하지 않았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1443년 28자가 만들어졌지만, 그 뒤에는 새 문자로 음운을 어떻게 표시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가 이어졌다. 1444년 『운회』의 언문 번역이 이루어졌고, 문종이 그 사업을 감독했다. 이후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역훈』으로 이어지는 음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에서 실제 음운을 분석하고 표기하는 정교한 체계로 발전했다. 신숙주의 기록에 따르면 문종은 바로 이 聲韻의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1442년부터 1446년까지의 전체 과정을 하나의 연속된 국가사업으로 보면 문종의 위치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1442년부터 1446년까지 문종의 행적 이 시기의 흐름은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1442년 — 문종 만 27세 세종의 건강 악화로 국정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기 시작한다.
1443년 — 문종 만 29세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친제한다.
1444년 — 문종 만 29세 『운회』 언문 번역사업을 감독한다. 최만리는 문종이 언문을 “硏精費思,竟日移時”한다고 비판한다. 세종은 “況諺文乎”라고 답하며 세자의 언문 관여를 정당화한다.
1445년 — 문종 만 30세 훈민정음과 운서 관련 사업이 계속 진행된다.
1446년 — 문종 만 31세 훈민정음 해례가 완성되고 반포된다.
이 네 해 동안 문종은 훈민정음 사업과 시간적으로 완전히 겹쳐 있었다. 문자 창제에는 문자체계의 구상뿐 아니라 그 문자가 표현해야 할 음운의 분석과 체계화, 기존 운서의 검토, 새 문자에 의한 표기 실험, 음운 체계의 검증과 정리 등이 포함된다. 그러한 넓은 의미의 창제 과정에서 문종은 상당한 역할을 했다. 특히 신숙주의 “參定聲韻”은 문종이 음운을 함께 결정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이다. 문자 창제가 세종 혼자 수행한 결과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당대의 기록들은 문종이 그 과정에 상당히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문종은 세종을 도와 그 문자의 바탕이 되는 성운을 함께 결정하고, 새 문자를 실제 운서에 적용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그 창제와 음운 정립의 과정에서는 세종과 문종이 함께 추진한 왕실의 거대한 지적 사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② 집현전 학자들
세종 26년(1444) 2월 16일 병신,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이선로·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였다. 동궁과 진양대군 유(瑈), 안평대군 용(瑢)이 그 일을 감독하였다. 그리고 정확히 나흘 뒤, 2월 20일 최만리·신석조·김문·정창손·하위지·송처검·조근 등 집현전 부제학 이하 7인의 이름으로 반대 상소가 올라온다. 그런데 상소가 올라오기 나흘 전, 세종은 이미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에게 "언문으로" 《고금운회거요》를 번역하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명을 내리고 있다. 언문으로 한자의 운(韻)을 번역한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문자 체계의 자모(字母) 구성 원리를 정확히 숙지하고 그 자모를 중국 운학(성운학)의 성모·운모 체계에 정밀하게 대응시켜 실제로 운서 한 권 분량의 표음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의 이해를 전제한다. 문자를 그날 처음 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언문의 창제원리와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감독을 맡길 수 없는 작업이다. 운회 번역에 참여한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는 뒤이어 훈민정음 해례와 동국정운 작업에도 참여하여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이들은 훈민정음 창제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다.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를 1443년 12월 30일 세종이 홀로 28자를 만들어낸 단독창제 사건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중요한 정황이다.
운회 번역 작업을 감독한 것은 다른 관서의 당상관이 아니라 동궁(문종)과 진양대군(수양대군)·안평대군이었다. 국가의 정규 편찬 사업이라면 예조나 집현전 상위 관원이 감독을 맡는 것이 통례이나, 이 사업은 왕의 직계 가족, 그것도 세자와 두 대군이 직접 감독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이 사업이 왕실이 직접 통제하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과제였음을 보여준다. 실무를 맡은 집현전 학자들이 부제학급 이상의 원로가 아니라 교리·부교리·부수찬 등 상대적으로 젊은 소장 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 역시 이 작업이 집현전 전체의 공식 사업이라기보다, 세종이 신뢰하는 소수 정예를 왕자들을 매개로 삼아 운영한 별동 조직에 가까웠음을 뒷받침한다.문종이 세종과 함께 언문을 연구한 것은 이미 밝혔다. 감독하는 명단에 진양대군(수양대군)·안평대군이 들어간 것은 이 왕자들도 문종과 더불어 언문에 대해서 공부하고 의논하였을 보여준다. 훈민정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감독하라는 권한을 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만리 등의 상소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훈민정음은 이미 단순히 세종이 새 글자를 만들어 놓은 단계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교육·연구·제작·보급하는 실질적인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아전 열여 명에게 갑자기 언문을 가르치게 하고”라고 비판한다(驟令吏輩十餘人訓習). 이어 “또 옛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운서를 함부로 고치고”라고 비판한다(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이것은 새 문자를 단순히 일상적인 표기에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의 중국 운서와 연결하여 한자음과 음운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근거 없는 언문을 억지로 운서에 끌어다 붙이고”라고 비판한다(附會無稽之諺文). 최만리 등은 새 문자인 언문이 기존의 운학 체계에 결합되는 과정 자체를 문제 삼고 있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장인 수십 명을 모아 그것을 새기고”(聚工匠數十人刻之)라는 표현과 “급히 널리 퍼뜨리려고 한다”(劇欲廣布) 는 표현이다. 여기서 수십 명의 장인을 동원하여 새긴다는 것은 언문을 실제 문헌으로 만들어 대량으로 보급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들을 한데 모으면 최만리 등의 상소가 단순히 “새 문자를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들이 실제로 비판한 것은 이미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 진행되고 있던 언문 보급 사업 전체였다. 특히 이 상소는 세종이 1444년 2월 16일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명령한지 나흘 뒤에 올라온 상소라는 것에서 당시의 상황을 알수있다.1444년 2월 20일 최만리등이 상소를 쓸 당시에 이미 사람들이 언문을 배워 기존 운서를 언문과 결합시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고, 장인 수십 명이 동원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하려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2월 16일 시점에 세 왕자들과 최항·박팽년·신숙주·이선로·이개·강희안은 이미 훈민정음의 음운 체계를 실무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만큼 숙달되어 있었다. 이는 이들이 최소한 상당 기간 전부터 세종의 언문 작업에 관여해 왔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최만리 상소는 집현전 내부에서도 일부에게만 공유되었던 프로젝트가 운회 번역이라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국가사업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목격하고 뒤늦게 터뜨린 반발로 읽을 수 있다.
최만리 등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린 7인,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정3품),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종3품), 직전(直殿) 김문(金汶, 정4품),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 정4품), 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종5품),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종6품),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 정8품) 은 그 뒤로도 훈민정음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끝까지 언문 창제에 부정정인 시각을 갖었음을 알 수 있다.훈민정음 창제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대제학(大提學) 정인지(鄭麟趾, 정2품), 응교(應敎) 최항(崔恒, 정4품),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 종5품), 부교리(副校理) 신숙주(申叔舟, 종5품),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정6품), 주부(注簿) 강희안(姜希顔, 종6품), 행 부수찬(行副修撰) 이개(李塏, 종6품), 행 부수찬(行副修撰) 이선로(李善老, 종6품) 6인은 운회 번역과,동국정운 제작과,훈민정음 해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이들은 음운학에 실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전체 집현전 학자 20여명 중에서 이렇게 반대파는 비교적 벼슬이 높고 찬성파는 정인지를 제외하면 벼슬이 낮고 젊은 학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때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몰랐다거나 전혀 도움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③ 신미스님과 승려들
신미대사를 비롯한 불교계 승려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조심 스럽다. 신숙주와 상삼문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사람으로 문종을 직접 언급하였지만 신미스님은 그러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미는 참여 가능성 차원에서 언급하겠다. 세종실록에서 신미(信眉)가 왕자들로부터 스승에 가까운 예우를 받았다는 기록이있다. 세종실록 29년(1447) 6월 6일 " 김수온의 형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이름이 신미였다. 수양대군 이유와 안평대군 이용은 신미를 매우 신봉하고 좋아하여,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절하며 예를 다해 공양하였다. 김수온 또한 불교를 좋아하여 늘 대군들을 따라 절에 가서 불경을 펼쳐 읽고 합장하여 공경하니, 사림들이 이를 비웃었다."(守溫之兄出家爲僧,名曰信眉。首陽大君瑈、安平大君瑢酷信好之,坐信眉於高座,跪拜於前,盡禮供養。守溫亦侫佛,每從大君往寺,披閱佛經,合掌敬讀,士林笑之) 왕자들로부터 스승의 대접을 받는 신미가 왕자들과 언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고, 신미는 왕자들로부터 언문 창제와 언문의 구조등에 대해서 알고있었다고 보는것도 타당하다.
훈민정음에 관련하여 신미를 언급하면 대개의 학자들은 문종실록에 "대행왕(세종)께서 병인년(1446)에 5월 27일에 비로소 승려 신미(信眉)의 이름을 들으셨다."(大行王,自丙寅年始知信眉名)는 기록을 근거로 신미가 세종의 언문 창제를 도울 시간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세종실록에서 1446년(세종 28년 5월 27일) 신미의 이름이 처음 등장 할 때부터 신미는 요사스런 중 신미(奸僧信眉)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신미가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했기에 그런 비난을 하는지는 침묵하고있다. 처음부터 그를 기록할 때 요사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미 1446년 이전에 왕이나 신하들에게 신미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1446년 이전에 신미가 세종을 만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또한 신미의 사후에 내려진 시호를 보면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하게한다. 세종은 세자(문종)에게 법호를 내리도록 유훈을 남겼고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6일에 문종은 신미스님에게 “선종과 교종을 아우르고, 비밀한 정법을 전수 받으셨으며, 자비와 지혜를 함께 행하시어,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셨으니,모든 법을 원융무애하게 통달한 혜각(慧覺) 존자(尊者)"(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유생들은 신미스님에게 내린 법호 가운데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말에 분개하여 그달(月)에만 5번의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 신미가 우국이세(祐國利世)하지 못할 것은 사람마다 다 알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께서도 스스로 믿으실 것입니다.어째서 감히 무익한 일을 하여 만대의 웃음거리를 만드십니까?"(7월15일 박팽년), " 우국이세의 명칭은 더욱 불가합니다.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준 대신에게도 감히 이것으로 칭하지 못하는데, 함부로 늙은 간교한 중(姦僧)에게 줄 수 있습니까?"(7월16일 사헌부), "직함 안에 우국 이세(祐國利世)의 칭호가 있는 것은 신 등이 더욱 놀라는 것입니다. 이 중이 무슨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준 공이 있습니까?"(7월17일 사헌부) "하물며 이 중은 다만 한 개의 깎은 대가리인데, 국가에 무슨 복리(福利)가 있겠으며, 어찌 우국이세(祐國利世)의 칭호를 주어 온 나라 사람들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하십니까?"(7월18일 사간헌)
이렇듯 신하들은 문종 앞에서도 신미를 간악한 중 신미(姦僧信眉), 요사스러운 중 신미(妖僧信眉)라고 부르며 신미에게 내려진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단어를 삭제하라고 압박하였다.세종실록의 기록처럼 1446년에 세종이 신미를 처음 만나고 1450년에 세종이 죽었으니 그들이 서로 친교를 쌓은 기간은 겨우 3~4년 정도이다. 이런 짧은 기간에 신미가 어떤 일을 하였기에 세종은 신미스님에게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祐國利世)는 시호를 내리라고 했을까?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단어는 결국 한 달만에 삭제되고 대신 "중생을 건지고, 만물을 이롭게 했다"라는 도생이물(度生利物)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신미의 종교적인 신분과 종교적인 행위만을 나타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세종은 왜 그 짧은 기간에 신미에게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칭호를 내렸고, 신하들은 왜 기필코 우국이세(祐國利世)를 지워야 했던가? 신미스님이 세종이 훈민정음 만드는 것을 돕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필요가 있을까?
이 간승(姦僧),요승(妖僧)이라는 표현은 세종때에 많이 나타나고 문종때도 나타나지만, 세조때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세조는 수양대군이던 시절 1453년(계유년) 단종 폐위시키고 신하들을 죽이고 왕이되었다. 이러한 세조 앞에서 왕의 스승인 신미스님을 그 누구도 간승(姦僧),요승(妖僧)이라고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세종은 신미가 훈민정음 만드는 것을 도왔다고 하더라도 신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훈민정음도 세종이 혼자서 만들었다고 나온다.부처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보상절도 수양대군 혼자서 만들었다고 나온다. 그렇지만 '훈민정음 해례' 를 만드는 작업이나 운회를 번역하는 작업, 월인석보를 만드는 작업, 능엄경언해의 작업에는 모두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월인석보(1459)를 펴내면서 도움을 준 11명(신미,수미,설준,홍준,효운,지해,해초,사지,학열,학조,김수온)의 이름이 남겨져있고, 능엄경언해(1461)를 펴내는 작업에는 16명(세조,신미,정빈한씨,한계희,김수온,박건,윤필상,노사신,정효상,영순군 부,조변안,조지,사지,학열,학조,조두대 )의 이름이 등장한다.세조때 진행된 일에는 공동작업자들의 이름이 남아있는데 세종 때는 공동작업자들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왜 그랬을까?
1444년 2월 20일 자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의 하단 부분에는 세종이 눈병 치료를 위해 청주 초수리로 행차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또 지금 청주 초수(椒水)로 거둥하신 것은 특별히 흉년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하는 여러 일도 모두 간략하게 하여 예전보다 열에 여덟아홉은 줄였고, 공무를 아뢰는 일조차도 정부(의정부)에 맡기셨습니다.그런데 언문(훈민정음)만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기한을 다투어야 할 급한 일이 아닌데도, 어찌하여 유독 행재소(行在)에서 그것만은 그토록 서둘러 추진하시어, 성상께서 몸을 조리하고 병환을 다스리시는 때에까지 번거롭게 하십니까? 신들은 도무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且今淸州椒水之幸 特慮年歉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尤未見其可也) 이 기록은 초수행궁에서 언문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음을 직접 증언한다. 세종은 1444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청주 초수행궁에 약 120일(121~123일) 동안 머물며 안질을 치료하는 한편 훈민정음 창제의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초수행궁 → 미원 → 보은 →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당시에도 주요 교통로였고, 말을 타면 하루 안에 충분히 왕복 가능한 거리였다. 여기에 복천암과의 가까운 거리를 함께 고려하면 신미의 관여 가능성을 논하는 하나의 정황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이미 자세히 밝힌 것처럼 훈민정음에는 범어와 중국 운서들의 음성학적 흔적이 확연하게 발견되듯이, 범어는 승려들이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들여온 경전 언어였고 승려들이 주로 학습하던 언어였다. 그러하기에 훈민정음에 불교를 상징하는 숫자들이 숨어있는 것도 예사롭지않다. 훈민정음의 자음, 모음은 28자로 이루어져 있고, 훈민정음 해례본은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훈민정음 어제는 108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 새벽예불에는 범종을 28번을 울리고 저녁 예불을 올릴때 33번의 범종을 울린다. 28번의 타종은 욕계 6천(天), 색계 18천(天), 무색계 4천(天)의 천계(天界)가 총 28천(天)이기 때문이고, 저녁에 33번을 치는 이유는 33천(도리천)의 천신들을 향하는 종소리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자주 언급하는 108번뇌도 중생의 번뇌를 108 종류가 있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이런 숫자들이 그냥 우연일까?
| 연대 | 책이름 | 참여자와 내용 요약 | 비고 |
| 1444 (세종 26) | 고금운회거요 번각 및 운회 언해 작업 개시 |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등이 참여하고, 동궁(東宮)과 진양 대군,안평 대군이 감독하게 함. 황공소의 《고금운회》를 웅충이 요약·주석한 대형 한자 운서를 조선에서 언문으로 옮기는 작업. 이 작업이 《동국정운》 편찬의 기초가 됨. | 훈민정음 창제 2달뒤인 1444년 2월 16일. 《동국정운》의 전단계. 운회 언해 완성본은 없음. |
| 1445 (세종 27) | 용비어천가 | 1442년부터 준비하여 권제(權踶),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이 언문으로 1445년 4월 5일 10권 완성. | 훈민정음으로 간행된 최초의 문헌. |
| 1446 (세종 28) | 훈민정음 해례본 |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정인지(鄭麟趾)등이 참여. 글자 제자 원리, 초·중·종성, 사성·칠음 체계 등을 해설한 문자 이론서. |
훈민정음의 정식 반포. |
| 1447 (세종 29) | 동국정운 |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 이개(李愷),이선로(李善老),조변안(曹變安),김증(金曾)이 참여. 명나라 《홍무정운》을 교정·보완하여 조선식 한자 표준음을 정리한 운서.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한 최초의 국가 표준 운서. | 1447년 편찬 완료, 1448년 간행. |
| 1447 (세종 29) | 석보상절 | 수양대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훈민정음으로 풀이한 불전 언해서. 24권으로 구성됨. | 세종의 불교 언문 사업의 일환. 《월인천강지곡》의 전거. |
| 1447~1448 | 월인천강지곡 | 세종이 석보상절의 내용을 바탕으로 부처의 공덕을 노래한 찬불가. 훈민정음으로 지어진 장편 시가집. | 후에 《석보상절》과 합쳐 《월인석보》(1459)로 재간행. |
| 1455 (단종 3) | 홍무정운역훈 | 명 태조의 《홍무정운》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훈석한 운서. 중국 한자음의 표준을 훈민정음 체계로 기록한 책. | 16권 8책(현존 14권). 운서 체계의 완성판. |
| 도표:11 훈민정음 창제후 나타난 언문 작업들 | |||
11. 범어 발음체계를 따르는 세계의 문자들
인류 문자사에서 ‘소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문자’는 인도의 브라흐미(Brahmi) 가 처음이었다. 기원전 3세기, 아소까 왕 시대의 브라흐미 문자는 단순한 기호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발성기관을 철저히 해부한 음성학의 결정체였다. 자음은 발음 위치에 따라 연구개·경구개·권설·치·순으로 나뉘고, 발음 방법에 따라 무성·유성·기식·비음으로 세분된다. ‘까·카·가·가·응’으로 배열된 이 체계는 오늘날까지 산스크리트(범어) 의 발음 질서로 이어지고 있다. 불교가 전해지며 이 체계는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티베트의 ཀཁགགྷང, 태국의 กขคฆง, 미얀마의 ကခဂဃင, 스리랑카의 කඛගඝඞ 모두 같은 구조를 가진다. 모양은 달라도 ‘소리의 질서’는 동일하다. 범어의 음운학이 곧 아시아 문자문화의 공통 유전자였던 셈이다. 15세기 조선의 세종은 이 전통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했다. 훈민정음의 자음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뜨되, 조음 위치에 따라 아음(牙音)·설음(舌音)·순음(脣音)·치음(齒音)·후음(喉音)으로 나뉜다. 이는 산스크리트의 다섯 조음 위치(velar, palatal, retroflex, dental, labial)와 정확히 대응한다. 또한 ‘전청·차청·전탁·불청불탁’의 네 구분은 범어의 ‘무성무기·무성유기·유성무기·유성유기’와 기능상 동일하다. 세종은 불교 경전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범어음운학의 질서를 체계적으로 흡수했고, 그 원리를 ‘천지인(天地人)’의 철학으로 재해석했다. 훈민정음은 동아시아에서 다시 태어난 브라흐미 음운학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범어에서 시작된 소리의 과학은 불교와 함께 아시아를 건너 조선에 이르러, 세종의 손끝에서 훈민정음이라는 꽃으로 다시 피었다. 형태는 달라도, 그 뿌리는 같다. 다음은 불교가 전파된 각 나라의 문자를 소개하고 그 나라문자가 범어의 발음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소개하겠다.
① 태국 문자 자음 (Thai Consonants) 과 미얀마 문자 자음 (Myanmar Consonants)
기원전 3세기, 아소까 왕이 보낸 불교 전도사들이 스리랑카를 거쳐 태국으로 교법을 전했다. 이 과정에서 빨리어(Pāli) 경전이 함께 들어왔고, 이를 읽고 쓰기 위해 인도식 음운 체계를 받아들였다. 태국과 미얀마 문자의 자음 순서(ก ข ค ฆ ง)는 오늘날까지 범어의 연구개음 배열을 그대로 따른다.
| 조음 위치 | Thai (ไทย) | Burmese (မြန်မာ) |
| ① Velar (牙音) | ก ka(까), ข kha(카), ค kha(카,거센), ฆ gha(가,거센), ง nga(응) | က ka(까), ခ kha(카), ဂ ga(가), ဃ gha(가,거센), င nga(응) |
| ② Palatal (경구개음) | จ ca(짜), ฉ cha(차), ช cha(차강), ฌ jha(자강), ญ ña(냐) | စ ca(짜), ဆ cha(차), ဇ ja(자), ဈ jha(자강), ည ña(냐) |
| ③ Retroflex (설상음) | — 없음 | — 없음 |
| ④ Dental (설두음) | ต ta(따), ถ tha(타), ท tha(타강), ธ dha(다거센), น na(나) | တ ta(따), ထ tha(타), ဒ da(다), ဓ dha(다거센), န na(나) |
| ⑤ Labial (순음) | ป pa(빠), ผ pha(파), พ pha(파강), ภ bha(바거센), ม ma(마) | ပ pa(빠), ဖ pha(파), ဗ ba(바), ဘ bha(바거센), မ ma(마) |
| ⑥ Sibilants (마찰음) | ศ sa(싸), ษ sa(싸), ส sa(싸) | သ sa(싸), စ္(h)-계열 |
| ⑦ Glottal (성문음) | ห ha(하) | ဟ ha(하) |
| ⑧ Semi-vowels (반자음) | ย ya(야), ร ra(라), ล la(라), ว wa(와) | ယ ya(야), ရ ra(라), လ la(라), ဝ wa(와) |
| ⑨ Nasals (비음) | ง nga(응), ญ ña(냐), ณ ṇa(나), น na(나), ม ma(마) | င nga(응), ည ña(냐), ဏ ṇa(나), န na(나), မ ma(마) |
| 도표:12 범어 발음체계를 따르는 태국 문자 자음과 미얀마 문자 자음 | ||
② 스리랑카 문자 자음 (Sinhala Consonants)과 티베트 문자 자음 (Tibetan Consonants)
기원전 3세기 마힌다장로 그룹이 처음 스리랑카에가서 불교를 전파하였다. 빨리어(Pāli) 삼장(經 律 論)이 이곳에서 정리되었고,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할라 문자는 자연스럽게 범어식 자음 체계를 계승했다. 불교 경전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곧 문자체계의 질서가 되었다. 스리랑카와는 달리 티베트에는 비교적 늦게 불교가 전파되었다. 6세기 쯤에 불교가 인도를 넘어 히말라야로 전해졌을 때, 티베트 왕 송첸감포는 인도 스승으로부터 범어 문자를 배워 새로운 티베트 문자를 만들었다. 그 결과 탄생한 티베트 문자는 스리랑카 문자와 비교해도 자음 질서가 비슷하다.
| 조음위치 | Sinhala (스리랑카) | Tibetan (티베트) |
| ① Velar (牙音) | ක ka(까), ඛ kha(카), ග ga(가), ඝ gha(가강), ඞ ṅa(응) | ཀ ka(까), ཁ kha(카), ག ga(가), གྷ gha(가강), ང nga(응) |
| ② Palatal (경구개음) | ච ca(짜), ඡ cha(차), ජ ja(자), ඣ jha(자강), ඤ ña(냐) | ཅ ca(짜), ཆ cha(차), ཇ ja(자), (jha 없음), ཉ ña(냐) |
| ③ Retroflex (설상음) | ට ṭa(따), ඨ ṭha(타), ඩ ḍa(다), ඪ ḍha(다강), ණ ṇa(나) | ཊ ṭa(따), ཋ ṭha(타), ཌ ḍa(다), ཌྷ ḍha(다강), ཎ ṇa(나) |
| ④ Dental (설두음) | ත ta(따), ථ tha(타), ද da(다), ධ dha(다강), න na(나) | ཏ ta(따), ཐ tha(타), ད da(다), དྷ dha(다강), ན na(나) |
| ⑤ Labial (순음) | ප pa(빠), ඵ pha(파), බ ba(바), භ bha(바강), ම ma(마) | པ pa(빠), ཕ pha(파), བ ba(바), བྷ bha(바강), མ ma(마) |
| ⑥ Sibilants (마찰음) | ශ śa(샤), ෂ ṣa(싸,설상), ස sa(사) | ཤ śa(샤), ཥ ṣa(싸), ས sa(사) |
| ⑦ Glottal (성문음) | හ ha(하) | ཧ ha(하) |
| ⑧ Semi-vowels (반자음) | ය ya(야), ර ra(라), ල la(라), ව wa(와) | ཡ ya(야), ར ra(라), ལ la(라), ཝ wa(와) |
| 도표:13 범어 발음체계를 따르는 스리랑카 문자 자음과 티베트 문자 자음 | ||
③ 브라흐미와 싯담과 파스파와 훈민정음
고대 브라흐미 계통 문자는 정밀한 조음 분류를 기준으로 문자 배열을 구성했다. 이 전통은 불교의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확산되었고, 특히 싯담(Siddhaṃ) 과 파스파(’Phags-pa) 두 문자에서 매우 선명하게 유지되었다. 훈민정음 역시 기본적인 음운 분류 체계(牙音·舌音·脣音·齒音·喉音)에서 브라흐미·싯담·파스파와 유사한 조음 위치 중심의 원리를 보인다. 훈민정음은 한국어에 맞는 단순화된 구조를 취해 범어의 설상음(ṭ 계열)이나 유성·유기 대조를 모두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자모 배열과 제자 원리를 조음 위치에 기반하여 설계했다는 점에서 브라흐미 계열 문자와 구조적 친연성을 드러낸다.
| 조음위치 (조음순서별) | Brahmi (기원전 3C~3C) |
Siddhaṃ (5C ~ 12C) |
파스파 문자 (원나라, 1269) |
힌디(Romanized) | 훈민정음 (조선,1446) |
| 1. 아음 (牙音) | 𑀓 𑀔 𑀕 𑀖 𑀗 | 𑖎 𑖏 𑖐 𑖑 𑖒 | ꡀ ka, ꡁ kha, ꡂ ga, ꡃ gha, ꡄ ṅa | ka kha ga gha ṅa | ㄱ ㅋ ㄲ ㆁ |
| 2. 설음 (舌音) | 𑀝 𑀞 𑀟 𑀠 𑀡 𑀢 𑀣 𑀤 𑀥 𑀦 |
𑖘 𑖙 𑖚 𑖛 𑖜 𑖝 𑖞 𑖟 𑖠 𑖡 |
ꡊ ṭa, ꡋ ṭha, ꡌ ḍa, ꡍ ḍha, ꡎ ṇa ꡏ ta, ꡐ tha, ꡑ da, ꡒ dha, ꡓ na |
ṭa ṭha ḍa ḍha ṇa ta tha da dha na |
ㄷ ㅌ ㄸ ㄴ |
| 3. 순음 (脣音) | 𑀧 𑀨 𑀩 𑀪 𑀫 | 𑖢 𑖣 𑖤 𑖥 𑖦 | ꡔ pa, ꡕ pha, ꡖ ba, ꡗ bha, ꡘ ma | pa pha ba bha ma | ㅂ ㅍ ㅃ ㅁ |
| 4. 치음 (齒音) | 𑀘 𑀙 𑀚 𑀛 𑀜 𑀰 𑀱 𑀲 |
𑖓 𑖔 𑖕 𑖖 𑖗 𑖫 𑖬 𑖭 |
ꡅ ca, ꡆ cha, ꡇ ja, ꡈ jha, ꡉ ña | ca cha ja jha ña śa ṣa sa |
ㅈ ㅊ ㅉ ㅅ ㅆ ㅿ |
| 5. 후음 (喉音) | 𑀳 | 𑖮 | ꡠ ha | ha | ㅎ |
| 6. 반설음 (半舌音) | 𑀭 𑀴 | 𑖨 𑖯 | ꡚ ra, ꡛ la, | ra ḻa | ㄹ |
| 7. 반치음 (半齒音) | — | — | — | — | ㅿ (반치음) |
| 도표:14 범어 발음체계를 따르는 싯담-파스파-힌디-훈민정음 문자 자음 비교 | |||||
불교가 각 지역에 전파되면서 문자와 음운 체계에 남긴 흔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빨리어 경전을 보유한 상좌부 불교권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이 지역들은 브라흐미 문자에서 직접 계통을 이어받은 문자를 채택했다. 싱할라 문자, 미얀마 문자, 태국 문자, 크메르 문자, 라오 문자는 모두 브라흐미 계열의 자음-모음 결합형 음절문자(아부기다)이며, 원래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래서 이 문자들은 빨리어 음운체계의 특징인 권설음(retroflex), 유기음과 무기음의 구별, 장단모음 구별 등을 그대로 반영하는 자모 배열을 갖추고 있다. 이후 이 문자 체계가 자국어를 적는 데도 쓰이면서, 자국어에는 없던 산스크리트·빨리어 기원의 음소 구별 문자까지 함께 차용되어 표기상 잉여 자모가 많이 남아 있는 경우가 흔하다. 티베트는 조금 특수한 사례다. 톤미 삼보타가 산스크리트 문자를 본떠 티베트 문자를 새로 창제했는데, 이 역시 브라흐미 계열 문자를 모델로 삼아 산스크리트 음운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도록 설계된 문자이다. 따라서 티베트는 한역이 아니라 산스크리트 원전을 직접 옮기는 번역 전통을 택했고, 문자 구조 자체가 산스크리트 음운체계와 거의 대응한다.
한역 경전을 사용한 한자문화권 (중국, 한국, 일본) 이 지역은 표어문자인 한자 체계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브라흐미 계열 문자를 자국어 표기 자체에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다라니(陀羅尼)나 진언(眞言) 등 음을 그대로 살려야 하는 부분에 한해 싯담(悉曇) 문자를 병기하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산스크리트 음운학의 영향으로 반절법(反切法)이나 등운도(等韻圖) 같은 독자적인 한자음 표기·분석 체계가 발달했는데, 이는 문자 자체를 바꾼 것이 아니라 산스크리트식 음운 분석 방법론만 차용한 것이다. 일본은 밀교 전통 속에서 싯담 문자를 상당히 오래 보존했고(悉曇学), 가나의 오십음도(五十音図) 배열 순서가 산스크리트 음운 배열(모음-자음 순서, 조음 위치별 정렬)의 영향을 받았다.일본은 싯담학을 통해 익힌 산스크리트 음운학의 틀(모음 우선 배열, 조음 위치별 자음 정렬)을 오십음도라는 '분류표'에 적용했다. 오십음도는 자음군을 나열하기 전에 모음(a-i-u-e-o)을 먼저 세운다. 또한 자음이 조음 위치를 따라 목구멍에서 입술로 이동한다. 연구개(か)에서 시작해 치경(さ・た)을 거쳐 비음(な), 양순음(は・ま)에 이르고 마지막에 반모음(や・ら・わ)으로 끝나는 흐름이다.이 대응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이 순서를 실질적으로 완성한 인물이 명각이라는 헤이안 후기 승려였고, 그가 다름 아닌 실담학의 시조로 불리는 학승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조선은 중국 성운학(등운학)의 틀, 특히 반절법과 자모(字母) 체계, 그리고 칠음(七音, 아설순치후반설반치)·사성(四聲)의 분류 방식을 훈민정음 제자 원리에 적용했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은 새로 만들었다. 초성 기본자(ㄱㄴㅁㅅㅇ)는 조음기관의 모양을 상형(象形)하여 만들었고, 나머지 자음은 그 기본자에 획을 더해(가획, 加劃) 만들었으며,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상형한 기본자(ㆍㅡㅣ)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일본처럼 한자의 자형을 빌리거나 변형한 것이 아니고, 조음 원리 자체를 도상화(圖像化)한 완전히 새로운 조형 체계다.범어 음운학이라는 하나의 원천이 중국이라는 필터를 거쳐 동아시아 전역에 퍼졌고, 일본은 그 분석틀을 기존 문자의 배열에 입혔고, 조선은 그 분석틀을 조음기관 상형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조형 원리로 구현했다. 빨리어 경전을 계승한 상좌부 불교권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은 브라흐미 문자 계통을 이어받은 반면 한역 경전을 쓴 나라들은 기존의 독자적 문자(한자, 가나, 훈민정음)를 유지한 채, 조음위치나 조음 방법등 형식적인 틀에서 범어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12.브라흐미-홍무정운-훈민정음의 공통점 8가지
인도 음성학의 출발점은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가"와 "소리가 어떻게 나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소리가 나는가는 조음 위치(Place of Articulation) 이고, 어떻게 소리가 나는가는 조음 방법(Manner of Articulation) 이다. 브라흐미 문자의 자음 배열은 이러한 음성학 원리에 따라 발견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이것이 칠음(七音)과 사성(四聲)의 체계로 정리되었다. 훈민정음 역시 같은 원리로 자음을 배열하고있다.인도의 브라흐미 음성학은 천축 승려들에 의해서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전해졌고, 중국에서는 『절운』·『광운』·『운회』·『홍무정운』으로 이어지는 운학(韻學)으로 발전하였다. 세종은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어의 실제 발음을 분석하여 훈민정음을 완성하였다. 훈민정음은 고립된 환경에서 갑자기 나타난 문자가 아니라, 오랜 음성학 전통을 조선어에 맞게 새롭게 정리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브라흐미·홍무정운·훈민정음의 공통점 8가지를 적어본다.
① 조음 위치·조음 방법이라는 이중 좌표
인도 음성학의 출발점은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가"와 "소리가 어떻게 나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소리가 나는가는 조음 위치이고, 어떻게 소리가 나는가는 조음 방법이다. 브라흐미 문자체계는 조음 위치를 연구개·구개·권설·치·순·반설·반치로 분류하고, 조음 방법을 무성무기음·무성유기음·유성무기음·유성유기음·비음으로 분류한다. 이것을 중국 운서에서 칠음(七音)과 사성(四聲)으로 정리한다. 훈민정음 제자해도 ㆁ을 배치할 때 "그 소리가 ㅇ과 비슷하여 운서에서도 의모(疑母)와 유모(喩母)가 자주 섞여 쓰인다"고 설명하며,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이라는 이중 좌표를 전승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좌표 체계가 있었기에 신숙주가 『동국정운』에서 "계모(溪母)가 견모(見母)로 들어갔다", "계모(溪母)가 효모(曉母)로 들어갔다"를 구별해 서술할 수 있었다.
② 홍무정운과 훈민정음의 같은 용어 사용
브라흐미의 자음은 중국에 와서 자모(字母)라는 이름을 얻었고, 훈민정음 초성해는 "정음의 초성은 곧 운서의 자모다, 성음이 이로부터 생겨나므로 어머니(母)라고 한다"(正音初聲 卽韻書之字母也. 聲音由此而生 故曰母)라고 그 전승을 밝히고 있다. 아음·설음·순음·치음·후음·반설음·반치음, 전청·차청·전탁·불청불탁, 자모·칠음·사성 등 홍무정운에서 쓰이던 용어를 훈민정음이 그대로 가져다 쓴다. 이는 훈민정음이 중국 운학의 개념 체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며,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브라흐미의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의 분류에 닿는다.
③ 자음 배열 순서의 계보
브라흐미의 조음 위치는 구강의 가장 안쪽에서 소리나는 아음(ka → kha → ga → gha → ṅa)부터 시작한이다. 『홍무정운』에서도 아음(견(見) → 계(溪) → 군(群) → 의(疑)) 순서로 배열되고, 『훈민정음』에서도 아음(군(君) → 쾌(快) → 뀨(虯) → 업(業))의 순서로 배열된다. 모두 발음하기 쉬운 무성 무기음에서 시작하고 마지막 자음은 가장 발음하기 어려운 비음으로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브라흐미 자음은 중국인들에게 발음이 어려운 유성유기음이 생략되고 중국인들의 독특한 발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치두음·정치음·순경음이 첨가되었다. 조선에서는 중국에서 첨가된 자음들을 생략하고 조선인들의 발음체계에 맞게 23자음으로 정리되었다.
④ 음차-반절-발음기호로 발전
브라흐미 자음을 한자로 음사하던 방식이 만족스럽지 않게 되자, 중국에서 반절(反切)이라는 임시 해법이 고안되었다. 예를들어 동(東)이라는 한자의 반절 표기는 "덕홍절"(德紅切)이라 하여, 덕(德)의 초성 'ㄷ'과 홍(紅)의 종성 '옹'을 합쳐 '동'으로 읽는다는 뜻이다. 초성해의 "쾌자의 초성은 ㅋ이니, ㅋ과 ㅙ가 합하여 쾌가 된다"(快字初聲是ㅋ ㅋ與ㅙ而爲쾌)라는 서술 방식은 이 반절 논리를 발음기호 설명으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 브라흐미의 소리 체계가 한자 음차되다가 중국에서 반절로 표기되다가 마침내 조선에서 발음기호로 만들어진 것이 훈민정음이다. 조선에서 발음기호로 만들어지기 전에 반절 군(君) 쾌(快) 뀨(虯) 업(業)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은 이미 소리가 전달되었다는 뜻이다.
⑤ 반자(半字)+반자=만자(滿字)의 전승
범어에서 모음(마다, 摩多)과 자음(체문, 體文)은 각각 반자이고, 이 둘이 결합해야 만자(음절)가 된다. 훈민정음의 초성+중성+종성이라는 모아쓰기 구조는 이 반자-만자 원리를 계승한 것이다. 자음과 모음을 대등한 두 계열로 놓고 모아쓰는 발상은 유교 경학에도, 한자라는 표어문자의 논리에도 없다. 브라흐미와 훈민정음이 정사각형 공간 안에 자음과 모음을 결합해 하나의 음절을 만든다는 구조적 유사성은, 대반열반경 문자품 등 불교 경전을 통해 전승된 흔적이다.
⑥ 자음군을 나란히 붙여 적는 병서(竝書)의 원리
범어(산스크리트)는 자음이 겹치는 자음군이 있을 때, 새 글자를 만들지 않고 기존 자음자를 위아래로 겹쳐 붙여 하나의 결합자로 나타낸다. 예컨대 k와 r이 겹치면 두 글자를 포개어 'kra'라는 합성 자형을 만드는 식이다.훈민정음도 같은 발상으로 병서(竝書)를 둔다. 서로 다른 자음자를 나란히 붙이는 합용병서(ㅺ·ㅼ·ㅽ·ㅳ 등)는 실제로 이어지는 자음군을 나타내고, 같은 자음자를 겹쳐 쓰는 각자병서(ㄲ·ㄸ·ㅃ·ㅆ·ㅉ 등)는 된소리를 나타낸다. 훈민정음 해례 합자해는 이를 "초성 두 글자, 세 글자를 합쳐 나란히 쓴다"(初聲二字三字合用並書)고 규정한다.즉 새 글자를 늘리는 대신 있는 글자를 붙여 쓴다는 원리가 범어의 결합자 방식과 훈민정음의 병서 방식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⑦ 중국 운서와 훈민정음의 사상 공유
『훈민정음 해례』는 아음(牙音)을 봄(春)과 나무(木)와 각(角)에 대응하고, 설음(舌音)을 여름(夏)과 불(火)과 치(徵) 에 대응하고, 순음(脣音)을 늦여름과 흙(土)과 궁(宮)에 대응하고, 치음(齒音)을 가을과 금(金)과 상(商) 에 대응하고, 후음(喉音)을 겨울(冬)과 물(水)과 우(羽)에 대응시킨다. 이것은『절운지장도』에서 설명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또한 "학이 우는 소리든, 바람이 스치는 소리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든, 우레가 하늘을 뒤흔드는 소리든, 모기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아주 작은 소리든 다 받아 적을 수 있다 "는 칠음략(七音略)의 설명과 "쓰이지 않는 곳이 없고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으며, 가는 곳마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비록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 닭 울음과 개 짖는 소리라 할지라도 모두 옮겨 적을 수 있다."는 정인지의 설명도 같다.
⑧ 사성점과 방점의 대응
중국 운서는 한자마다 평성·상성·거성·입성이라는 네 성조를 글자 네 모서리 중 한 곳에 점을 찍어 표시했다. 훈민정음은 이를 글자 왼쪽 한 자리로 단순화하여 점의 개수로 구별했다. 훈민정음 언해 범례는 이를 "평성은 점이 없고, 상성은 점이 둘이요, 거성은 점이 하나이며, 입성은 점 더하는 법은 같으나 촉급하다"(平聲則無點, 上聲則二點, 去聲則一點, 入聲則加點同而促急)고 규정한다. 즉 점이 없으면 평성, 하나면 거성, 둘이면 상성이며, 입성은 종성이 촉급하게 끝나는 음절 구조 자체로 규정되고 그 위에 평성·상성·거성의 점 규칙이 그대로 얹힌다. 표시 위치와 분류 방식은 다르지만, 글자의 자형은 그대로 두고 점이라는 부호로 성조를 표시한다는 발상의 골격은 완전히 같다.

훈민정음은 흔히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이러한 원리와 공통점에서 새롭게 발음기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학교에서는 그 과학성이 무엇인지 자세히 배우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가나다라마바사'를 외우면서 한글을 배우지만, 『훈민정음 해례』가 설명하는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 그리고 자모가 만들어진 원리는 거의 접하지 못한다. 『훈민정음 해례』의 자음은 아음·설음·순음·치음·후음이라는 조음 위치에 따라 배열되어 있었다. 같은 위치 안에서는 예사소리·거센소리·된소리·비음이 차례대로 놓여 하나의 음성학적 격자를 이루었다.그러나 1527년 최세진은 『훈몽자회』를 편찬하면서 어린이들이 배우기 쉽도록 자모 배열을 재구성하였다. 이후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오늘날의 ㄱㄴㄷㄹㅁㅂㅅㅇ… 순서가 표준으로 정착하였다. 그 결과 자음을 음성학적 체계로 이해하는 교육보다, 암기하기 쉬운 순서로 익히는 교육이 중심이 되었다.
만약 학생들에게 훈민정음 해례의 원리에 따라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을 함께 가르친다면 아이들은 ① 글자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체계를 이해하게 된다. 'ㄱ 다음은 ㄴ'을 암기하는 대신, 연구개에서 나는 소리에서 혀끝소리, 입술소리로 이동하는 질서를 이해하게 된다. 아이들은 새로운 글자를 만나도 스스로 그 위치를 추론할 수 있게 된다. ② 예사소리·거센소리·된소리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해한다.ㄱ·ㅋ·ㄲ은 서로 다른 글자가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나는 소리의 변화라는 사실을 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발음과 맞춤법을 훨씬 쉽게 익힐 수 있다.한글이 임의의 기호가 아니라 음성을 시각화한 문자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③ 발음 교육이 훨씬 쉬워진다.입술소리, 혀소리, 목구멍소리를 직접 발음해 보면서 자신의 발음기관을 관찰하게 된다. 문자 교육이 동시에 음성학 교육이 되는 것이다. ④ 외국어 발음을 배우기 쉬워진다.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이라는 공통 원리를 이해하면 영어나 중국어, 일본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른 언어의 발음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소리를 완전히 낯선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기존 체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⑤ 논리적 사고력과 분류 능력이 향상된다.훈민정음은 자음을 무작정 나열하지 않고,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이라는 두 기준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분류 원리를 배우면 아이들은 규칙을 발견하고 체계를 이해하는 사고력을 자연스럽게 기를 수 있다.

13.나가는 말
지금 국어 학계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완전히 혼자서 만든 것으로 확정한다. 만약 '세종 단독 창제설'이 성립하려면 두 가지가 충족돼야 한다. 첫째, 당시 조선 사회가 자음-모음의 분리결합 개념에 노출된 적이 없어야 한다. 둘째, 세종이 백지상태에서 자음-모음의 분리결합 개념을 발견했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기록은 이와 배치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번역된 대반열반경「문자품(文字品)」처럼 자음과 모음을 각각 '반자(半字)'라 하고, 자음과 모음이 결합된 형태를 '만자(滿字)'라 하는 사상이 천년 동안 존재해 왔다. 이처럼 불교의 전파와 같이 흘러온 음운학의 흐름 속에서 훈민정음을 바라보면, 그것이 고립된 섬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문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세종 단독 창제설"이 범어-중국 성운학이라는 지적 전통 없이 백지에서 발명했다는 뜻이라면 성립하기 어렵다. 자음-모음 분리결합 개념에 노출된 분위기속에서 새로운 문자 형태를 구현했다는 뜻이라면 그 독창성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세종 단독 창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종과 문종이 함께 작업했다는 역사적인 사실 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성삼문의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서문에서 "우리 세종과 문종께서 이점을 염려하시어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我世宗,文宗慨念於此. 旣作訓民正音)라는 증언이나, 신숙주의 홍무정운 역훈 서문에서 "문종 공순대왕께서 동궁(세자)의 관저에 계실 적부터 성인(문종)으로서 성인(세종)을 도와 성운(聲韻) 작업에 참여하였다."(文宗恭順大王 自在東邸 以聖輔聖 參定聲韻)라는 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훈민정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상형과 가획의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닌다.그렇다고 그 독창성이 '세종 단독 창제설'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홍무정운 역훈 서문에서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범음(梵音,불경)은 중국 전역에까지 퍼져나갔지만, 우리 공자님의 경전은 저 발제하(인도의 강 이름)를 건너가지 못했다. 그 까닭은 [범음은] 소리로 전해졌고, [공자의 경전은] 문자로 전해졌기 때문이다."(古人謂梵音行於中國 而吾夫子之經不能跋提河者 以字不以聲也)라고 말하듯, 인도에서 건너온 표음문자의 소리는 중국과 조선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훈민정음은 브라흐미 문자(ka-kha-ga-gha-ṅa)가 중국에서 전해져(見(k) - 溪(kʰ) - 群(g) - 疑(ŋ))로 전승되고, 조선에서 君(ㄱ)- 快(ㅋ) - 虯(ㄲ) - 業(ㆁ) 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오래전부터 가사(칠음)와 리듬(사성)을 가진 소리가 있었다. 그 노래소리는 아소까 석주에 새겨졌고 불교가 전파되는 태국,스리랑카,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티벳 등에 도착하여 그 소리를 유지한 채로 독자적인 문자로 태어났다. 훈민정음에서도 그 가사와 리듬이 확인된다. 세종은 그 소리를 기준으로 기본 자음(ㄱ, ㄴ, ㅅ, ㅁ, ㅇ)을 만들고, 여기에 가획(加劃)하여 소리와 글자가 닮은 문자를 발명하였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불교는 단순히 교리의 이동이 아니라, 소리의 이동이었으며, 문자의 이동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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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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