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식우(拭疣)이며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훈(金訓)이다. 김수온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존경하는 고승 신미(信眉)의 동생으로 불경에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육경(六經)에 해박해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었으나 곧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46년 부사직(副司直)이 되고, 이어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승문원교리(承文院郊理)·병조정랑을 거쳐 1451년(문종 1) 전농시소윤(典農司少尹), 이듬해 지영천군사(知榮川郡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57년(세조 3) 사예(司藝)로서 문과 중시에 2등으로 급제해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세조 4)에는 한성부윤을, 이듬해에는 상주목사가 되어 상주를 다스렸다. 그리고 1464년(세조 9)에는 지중추부사와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66년(세조 11) 문무관료 대상의 두 번의 임시 과거인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김수온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호조판서를 거쳐 1469년(성종 즉위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74년 영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김수온은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이석형(李石亨)과 같은 당대 석학들과 함께 문명을 논하였다. 특히 김수온이 명나라에서 온 사신 한림 진감(陳鑑)과 「희정부(喜睛賦)」로써 화답한 내용이 명나라에까지 알려지면서 그의 시문은 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치평요람(治平要覽)』과 한의학 관련 문헌을 모은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을 편찬하고, 『석가보(釋迦譜)』의 증수(增修)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명황계감(明皇誡鑑)』과 『금강경(金剛經)』등의 번역에 참여했으며, 「원각사비명(圓覺寺碑銘)」을 찬하고 유교 교육의 핵심 서적인 『사서오경』의 토(吐)를 달았다. 또한 『식우집(拭疣集)』을 간행하였다. 『식우집』의 초간본은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거의 없어지고 권2와 권4만이 후손들에 의해 낙질본(落帙本)으로 전해진다. 권2에는 시 35편이 실려있고, 권4에는 부(賦) 2편과 약 200여 편의 시가 실려있다. 아래는 식우집에 실려있는 복천사기, 사리영응기,견성암 영응기 등이다.
《복천사기》 (1465)
속리산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큰 산이며, 산 안에는 여러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복천사는 그 산 중앙에 있는 절이다.
세종 32년(1450) 경오년, 세종대왕이 병이 위중해져 효령대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종과 당시 세자였던 세조가 시종하며 의약과 기도를 다했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이에 왕실에서는 여러 승려를 불러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병세가 안정되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종친들이 금과 비단을 시주해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삼존불상을 조성하였다.
이 무렵 신미대사(혜각존자)가 복천사를 살펴보고 길지(吉地)임을 인정하여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 중창하였다. 새로 지은 누각과 전각들은 산골짜기에 우뚝 솟았고, 조성된 삼존불상 역시 이 절에 모셔졌다.
세종은 처음 신미대사의 이름을 듣고 산에서 불러 궁으로 들였다. 세종은 신미와 담화하며 그의 분별력과 이해력이 뛰어나다고 판단해 총애를 더하였다. 이후 문종은 그에게 ‘혜각존자 선교도총’의 호를 내려 승단의 영수로 삼았다. 세조 또한 세자 시절부터 신미와 가까이 지냈으며 즉위한 뒤에는 더욱 신임하였다. 복천사는 세종이 조성한 불상이 있는 절이고, 신미대사는 선왕들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천순 8년(1464) 봄, 세조는 충청도 순행 중에 보은으로 들어와 병풍송에서 행차를 멈추고 이튿날 복천사에 들렀다. 이때 여러 대군과 문무백관이 호위하였다. 세조는 중궁전과 왕세자와 함께 절을 방문하였고, 불전에서 향례를 올렸다. 그는 이 날을 시작일로 정하고 33명의 승려가 참여하는 법회를 열게 하였으며 법회는 사흘간 이어졌다.세조는 호조로 하여금 복천사에 논 200결과 벼 300석을 시주하게 하고, 형조에 명하여 죄수 30명을 풀어 상주 노동력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직접 친필로 글을 남겨 절의 문 앞에 걸도록 하였다.신미, 사지, 학열, 학조 등 승려들은 이에 감사를 표하며 문신이 이 절의 일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다. 세조는 김수온에게 기록을 작성하도록 명하였다.
김수온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옛 제왕들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인의를 근본으로 삼고 청정을 바탕으로 삼았다. 황제가 은사(隱士)를 찾아가고 요임금이 덕 있는 이를 불러 교화한 것도 그러한 전통이었다. 불교는 삼교 중에 존귀한 가르침이며 역대의 제왕들이 공경해 온 대상이다.세조는 즉위 이후 나라 안팎을 안정시키고 농사와 정치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백성의 삶을 세밀히 살피기 위해 지방을 순행했으며, 그 와중에도 삼보를 존중하고 덕 있는 스님들을 예로써 대우하였다. 신미대사에게 가르침을 묻고 심오한 뜻을 들은 것도 이러한 국정 운영의 일환이었다.신미대사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복천사를 알게 되었고, 복천사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속리산을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세조가 직접 이곳을 방문하자 산과 절이 더욱 빛나는 명승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은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
김수온은 마지막으로, 이 절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오늘의 일은 천지와 함께 길이 전해질 것이라 적었다. 이 기록은 세조가 명한 대로, 이듬해 2월에 작성되었다.
福泉寺記





〈사리영응기〉 (1458)
세종 31년(1449년) 가을 7월 19일 계묘일에 임금께서 전지(傳旨)를 내려 의정부에 이르시기를,
“태종께서 일찍이 문소전(文昭殿) 곁에 불당을 지으신 것은 여러 성군들의 명복을 비시려는 뜻에서였다. 이제 문소전은 이미 옮겨 새로 지었으나, 불당은 아직 짓지 못하였다. 선왕의 뜻이 끊어질까 염려된다.” 하셨다. 이에 곧 의정부 좌참찬 정분, 중추원사 민신, 판내시부사 최습, 사직 권환, 부사직 변대해, 행직장 이명민에게 명하여 공사를 경영하게 하고, 안평대군 이용으로 하여금 이를 총괄하게 하였다. 또 내시부 알자 이춘, 호군 안견, 행사용 이양미, 장길생, 행사포국승 황사의에게 단청과 채색 일을 맡기고, 금성대군 이유와 의창군 이공이 이를 총괄하게 하였다.
이용 등이 궁성 북쪽에 터를 점쳐 택하여, 7월 28일 임자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겨울 11월 20일 임인일에 마쳤으니, 모두 스물여섯 칸이었다. 모든 제도와 장식이 당시의 극치였다.
처음에 태조 강헌대왕께서 황금으로 삼신여래(三身如來)를 주조하게 하셨으나, 완성되기 전에 승하하셨다. 이에 임금께서 행첨내시부사 한홍, 동판내시부사 전균, 안견, 행사직 김남흡, 행부사직 강승, 좌부승직 최습, 행내시부알자 김결 등에게 장인을 거느리고 그 유업을 이어 마무리하게 하셨다. 아울러 약사불과 아미타불, 그리고 여러 보살상과 나한상도 함께 조성하게 하셨다. 이 일은 이용과 임영대군 이규가 총괄하였다.
임금께서는 대자암 주지 신미와 김수온에게 명하여 삼불예참문(三佛禮懺文)을 짓게 하셨다. 또 친히 새 노래를 지어, ‘앙홍자(仰鴻慈)의 곡’, ‘발대원(發大願)의 곡’, ‘융선도(隆善道)의 곡’, ‘묘인연(妙因緣)의 곡’, ‘포법운(布法雲)의 곡’, ‘연감로(演甘露)의 곡’, ‘의정혜(依定慧)의 곡’을 지으셨다. 그 악장(樂章)은 아홉 가지로, ‘귀삼보(歸三寶)’, ‘찬법신(贊法身)’, ‘찬보신(贊報身)’, ‘찬화신(贊化身)’, ‘찬약사(贊藥師)’, ‘찬미타(贊彌陁)’, ‘찬삼승(贊三乘)’, ‘찬팔부(贊八部)’, ‘희명자(希冥資)’였다.
또 행상호군 박약, 행우부승직 임동, 전악 김윤산, 황귀존, 행내시부급사 안충언으로 하여금 악공들을 거느리고 이를 익히게 하셨으며, 수양대군 이유가 악보를 관장하게 하였다. 악기를 잡는 자가 마흔다섯 명, 죽률을 부는 자가 두 명, 노래하는 자가 열 명, 꽃을 들고 춤추는 동자가 열 명이었는데, 한 명은 푸른 연꽃, 한 명은 누런 연꽃, 한 명은 붉은 연꽃, 한 명은 흰 연꽃, 한 명은 누런 모란, 한 명은 흰 모란, 한 명은 누런 작약, 한 명은 붉은 작약, 한 명은 흰 작약을 들었다.
11월 28일 경술일에는 궁궐 안에서 재계(齋戒)를 시작하였다. 12월 초이틀 갑인일에는 백관에게 형벌과 도살을 금하게 하였다. 이 날 신미와 판선종사 언주 등 51인의 비구가 새 절에 모였고, 임금은 이용에게 명하여 그들과 함께 모이게 하였다. 정분, 민신, 박약, 판내시부사 엄자치, 최습, 행좌승직 안로, 한홍, 행동판내시부사 인평, 도승지 이사철, 행동지내시부사 이귀균, 소윤 정효강, 행내시부알자 이운, 권환, 최습, 변대해, 이명민, 주서 성임과 김수온 등이 여러 일을 나누어 맡았다.
3일 을묘 새벽에 수양대군이 한홍, 정효강, 안견, 김남흡, 임동, 최습, 김수온 등과 함께 궁중에서 불상을 모셔 나왔다. 임금은 효령대군 이보, 임영대군 이규, 금성대군 이유, 영응대군 염, 광덕대부 안맹담에게 불상을 모시고 가게 하였다. 불상은 교태전에서 떠나 뜰을 지나, 현무문으로 나와 절로 향하였다. 임동, 김윤산, 황귀존은 악공들을 거느리고 현무문 밖에서 기다렸다가, 불상이 나올 때 새로 만든 음악을 연주하며 앞장섰다.
이용은 비구들과 정분, 민신, 박약, 최습, 이사철, 이귀균, 권환, 변대해, 이명민, 성임 등과 함께 향과 등, 깃발을 들고, 법라를 불고 법고를 치며 범패를 크게 외워, 절 뒤의 고개에서 불상을 맞이하였다. 가까이 모신 이들은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도성 안팎의 남녀들이 달려와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였다. 그렇게 하여 불상을 새 전각에 편안히 모셨다.
4일 병진일에는 임금이 수양대군에게 향을 올리게 하였는데, 대군이 궁에 나아가 향을 받들고 내려왔다. 5일 정사일에는 불상의 눈을 점찍는 의식을 마쳤다. 6일 무오일에는 법석(法筵)을 베풀어 낙성 법회를 열었다.
이날 저녁 임금께서 이용과 염을 부르시고 이르셨다.
“나의 이 효성스럽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어찌 감히 스스로 부처님의 거울 같은 지혜에 가 닿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여러 대중의 힘을 빌려 감응의 자취를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선왕을 추모하는 나의 마음이 충분히 위로될 것이다. 사리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인데,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오늘 밤에 바로 지극한 정성으로 간절히 구해야 한다.”
이에 대중은 머리를 조아리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곧 나가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으며, 앞다투어 정성을 다해 발원하였다. 서로 약속하며 말하기를,
“지금 성상께서는 선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끝이 없어, 큰 서원을 일으켜 복전(福田)을 창건하시고, 신민과 더불어, 또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함께 이롭게 하고자 하신다. 높고 훌륭한 공덕을 함께 쌓아 선인(善因)을 맺으려 하시니, 실로 보살의 큰 서원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세존의 자비는 중생에 응하면 곧 나타나시니, 마치 달이 강물에 비치는 것 같고, 골짜기가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다. 본래의 큰 서원을 힘입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시니, 지극한 정성을 다하기만 하면 미세한 것이라도 비추지 않음이 없다. 오늘 성상께서 세존께 지극한 마음으로 간절히 매달리며 참된 몸을 뵙고자 하시니, 세존께서 응하실지 안 하실지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바치는 정성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우리가 만일 사리를 얻지 못한다면 삼계의 죄인이 되어, 살아서는 재앙을 받고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무슨 낯으로 다시 세상 사람들을 보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죽음을 기한으로 삼아, 반드시 얻기로 기약해야 한다.” 하였다.
곧 있는 대중을 모두 모아 귀천을 막론하고 불전으로 들어가니, 모두 261명이었다. 각자 팔에 불을 태우며 참회하였다.
이때 이용과 신미가 곤룡포를 올리는 의식을 마치고, 수양대군이 다시 더욱 공손히 향을 피워 올리며 바치는 바를 아뢰었다. 범패 소리가 한 번 울리고 “나무 석가모니불”을 부르자, 그때 사리탑 사이에서 흰 기운이 가로질러 뻗어 나왔다. 승려와 속인이 함께 어울려 앞으로 뒤로 뛰며 기뻐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괴로움을 무릅쓰고 기도하였다. 징과 북 소리는 점점 더 급해지고, 무리의 뜻은 더욱 힘이 났다.
첫 번째 법회가 시작될 때에는 모두 숨이 막힐 듯하였고, 어떤 이는 자리 위에 쓰러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입을 벌린 채 감응을 받아 다물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기도 하였다. 2경 1점에서 3점에 이르기까지 두 번의 법회를 마쳤다. 이 사이에 궁궐 안팎의 사부대중이 모두 “전각 위에서 빛이 난다.”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우러러 바라보며 참배하였다. 그윽한 향기가 가득 퍼져, 안팎에서 모두 맡을 수 있었다.
이윽고 사리탑 앞의 덮개를 걷어 보니, 이미 사리 두 알이 홀연히 나타나 있었다. 촛불을 비추어 보니, 고르고 둥글며 맑고 투명하여 빛이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한 자리에 모인 대중은 절하며 울고, 희유한 마음을 내어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라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지금 비로자나, 무상세존을 친견하였다. 아득한 겁 동안 쌓인 모든 업장이 오늘 다 소멸되었다. 우리 부처 여래께서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내신 것이다. 이는 모두 성상께서 지극한 정성을 바친 감응이다.”라고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깊이 마음을 모아 예를 올렸다.
이 사실이 임금께 아뢰어졌다. 임금은 최습을 보내어 곤룡단(곤룡포에 쓰이는 비단) 두 필과 채색 비단 두 필을 바치게 하고, 사리를 공양하게 하였다. 향과 꽃과 음악과 갖가지 공양구를 다 갖추어 공경히 공양하였다. 그 기쁨과 경사는 차마 다 말할 수 없었다. 신령한 광명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비추어, 부처님의 세계가 모두 한 번에 함께 기뻐하는 것과 같았다. 전각을 봉하고 물러났다.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사리 두 알을 얻어 모두 네 알이 되었다. 임금은 다시 최습을 보내어 곤룡단 두 필과 채색 비단 두 필을 바치고, 향과 꽃과 음악과 온갖 뛰어난 공양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하게 하였다. 아울러 명주와 베를 여러 대중에게 베풀어 시주하였다. 모든 큰 회중이 함께 발원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오늘 우리 임금의 큰 덕을 입어 화장세계의 법회에 참여한 것처럼 세존께 친히 공양을 올리게 되었으니, 아난과 가섭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영원한 세월 동안 함께 수행하며 서로 떠나지 않고, 깨달음을 이루어 미혹을 깨치고 가라앉은 중생들을 건져, 함께 여래의 바른 깨달음의 바다에 들기를 원한다.” 하였다. 이에 분신사리와 시방의 모든 부처와 보살, 연각과 성문, 천룡팔부가, 승속이 서로 마주 서서 함께 절하는 것을 위하여 함께 예를 받은 듯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는 선왕의 덕을 잘 이어받고 잘 펼쳐, 세상을 화평하게 다스리고, 백성을 인자하고 오래 살게 하시며, 예악을 완비하여 큰 도에 오르셨으니, 동방에는 일찍이 없었던 대평(큰 평화)을 이뤄냈다. 그러나 효심은 끝이 없고, 선왕을 추모하는 마음도 그치지 않으니, 서릿발과 이슬에 감응하듯 그리움은 더욱 깊고, 어머니를 그리워 담장에 기대어 본다는 옛말처럼 생각은 더욱 간절하다. 삼보를 높이고, 선왕의 복을 기원하는 일에는 정성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으므로, 이러한 상서로운 은총을 입게 된 것이다.
또 공사를 시작한 이래로 날마다 삼천여 명을 감독하였으나, 돌과 나무에 부딪혀 털끝 하나 다친 사람도 없었고, 병에 걸린 사람도 없었다. 불상을 절에 모시기 사흘 전에는 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날씨가 탁하고 찬기운이 응어리져 있었으나, 그날 새벽, 밤중 이후에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자 하늘이 훤히 개고 매서운 찬 기운이 칼로 자른 듯했다. 불상이 길을 오를 때까지도 바람은 세차게 불었으나, 절 뒤의 고개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이 그치고 햇빛이 따뜻하게 퍼졌다. 법회를 연 칠일 동안은 봄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벌과 나비와 풀벌레들이 법회 자리 안에 날아다녔으니, 이는 곧 세존께서 도리천의 환희원에서 어머니께 설법하실 때 제때가 아닌 꽃과 과일이 피고 익었다는 상서로운 징조와 같은 것이다. 법회가 끝나고 나서는 찬 기운이 매서워지고 큰 눈이 겹겹이 쌓였으니, 감응의 모습이 이처럼 뚜렷하였다.
또 사리를 구하는 일은 궁중에서만 결정되어, 밖 사람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용과 염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아직 궁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절 안에서는 ‘안평대군과 영응대군이 향과 폐백을 받들고 사리를 청하러 온다.’는 말이 자자하였다. 사리가 처음 두 알 나타난 그날 밤에는 ‘분신사리 네 알이 내려온다.’는 말이 떠돌았고, 다음 날 아침에 과연 네 알을 얻었으니, 실로 신묘하기 짝이 없다. 이와 같이 신령스럽고 기묘한 일들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나, 모두 우리 임금의 지극한 덕이 틈이 없고, 대웅의 도와 합치되며, 효성과 정성이 감응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참으로 고금에 뛰어난 인연이며, 우리 나라가 억만 세월토록 누릴 수 있는 한없는 복이라 할 것이다.
열반의 터전은 본디 헤아릴 수 없고, 해탈의 경계는 본래 생각으로 미칠 수 없으니, 어찌 신하의 찬탄이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하 된 몸으로 이 기이한 인연을 만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졸렬한 붓을 놀려 삼가 여기와 같이 기록한다. 이 글 뒤에 다시 시를 이어 지어 후세에 드리우고자 하니, 바라건대 만분의 일이라도 성상께서 하신 일을 드높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 시에 이르기를,
“하늘이 동방에서 열려
우리의 큰 운명이 처음 열렸도다.
성인이 일을 일으키고 신명이 그것을 이어받으니,
요임금과 순임금과 같도다.
우리 임금께서 나시어 일어나심에
그 덕은 삼대와 오제를 아우르시니,
무릇 세우시고 행하시는 모든 도모가
움직일 때마다 옛 성왕들을 능가하신다.
도(道)는 정치를 적시어 흘러가고,
예는 갖추어지고 악(樂)이 행해져
백성은 큰 평화를 즐기니,
때가 올라 온화함에 머문다.
아, 역대 성왕들이여,
영원히 신선의 집에 깊이 숨으셨는데,
서리와 이슬에 감응하듯
그리워하는 정은 더욱 깊어진다.
이에 신성한 결단을 내리시어
부처의 가람을 다시 세우셨으니,
높은 곳에 깃발처럼 우뚝 서서
깊은 골짜기까지 비추도다.
곧 도량을 열어
성스러운 진리를 드날리니,
법석은 청정하고
높고 뛰어난 이들이 가득 모여 앉았도다.
북과 악기와 거문고와 노래가
미묘한 소리를 연주하니,
그 소리는 온화하고 기품 있어
뭇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위대한 사리가
그 영험을 환히 드러내었으니,
어찌 다른 까닭이 있으랴,
임금의 정성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부처님의 몸은 걸림이 없어
허공과 한가지이시니,
시방으로 가로질러 두루하고
과거·현재·미래 삼세를 세로로 다 통달하셨다.
두드리면 곧바로 메아리하니
골짜기의 소리와 같고,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부처님의 응감’이라 하나
나는 말하노니 그렇지 않다고 하겠다.
우리 임금의 덕 향기로 인한 것이니라.
아, 임금의 덕 향기여,
이렇게 밝은 빛이 있어
만 겁 천 겁을 두루하여
영원히 한이 없이 퍼져 나가리라.”
〈견성암 영응기(見性菴靈應記) (1464)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이며, 세조의 친동생이었다.
그는 성년이 된 뒤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부인 영가 신씨는 깊이 슬퍼했고, 장례를 치른 뒤 더욱 의지할 곳이 없어 무덤 근처에 크게 가람(寺院)을 세웠다.
해마다 3백~4백 명의 승려를 머물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광평대군의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이것이 견성암이 처음 세워진 연유이다.
천순 8년(1464) 갑신년 4월 14일, 부인 신씨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위하여 법회를 열어 극락왕생을 기원했고,
자신의 친정어머니 왕씨, 그리고 광평대군 또한 열반을 이루기를 발원하였다.
승려 50인을 ‘상당(上堂)’으로 청하고, 원통지 대사를 법회 주교(講主)로 세워 이 절에서 법화경 도장을 열었다.
그때 큰 시주자로서 정의공주, 임영대군 부부, 영응대군 부부 등이 수행원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신앙심 깊은 사부대중도 천여 명이 모였다.
법회에 앞서 가뭄이 심했는데, 도량을 열고 의식을 시작한 그날 밤 큰비가 내려 사방의 들판이 넉넉히 적셨다.
바람과 기운이 상서로웠고, 법회가 이어지는 동안 날씨가 맑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하는 등 이상한 변화가 잇따라 일어나자
모두가 이를 부인의 지극한 정성에 대한 부처의 감응으로 여겼다. 법회 당일 정오에 공양을 올리고
범패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부대중이 모두 절을 올리던 중,갑자기 불단 앞 탁자 위에서 빛이 번쩍이며 사방으로 퍼졌다.
대중이 수행을 멈추고 살펴보니 사리가 이미 다섯십팔 알 나타나 있었다.
향수를 뿌리고 그것을 주워 쟁반 위에 담으니
수정처럼 투명하고 빛이 환하여 사람을 비출 만큼 맑았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과 감격으로 달려오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라 탄식하였다.
산의 골짜기까지 울릴 만큼 환호와 찬탄이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태우거나 손가락을 태우며 참회했고, 어떤 사람은 옷이나 장식물을 풀어 공양물로 바쳤다.
이 소식은 곧 서울까지 퍼졌고, 남녀노소가 끊이지 않고 찾아와 며칠 동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법회가 끝난 뒤에도 승려 21명이 결제를 하며 석 달 동안 머물러 참선과 독경을 이어갔다.
7월 15일 백종(百終)이라 부르는 날에는 십방의 보살들이 현세에 내려와 대덕을 찾아 의심을 해결한다고 전해졌기 때문에
우란분재(盂蘭盆齋)를 크게 베풀었다.
그날 다시 불단 위에서 사리가 천 알이 넘게 나타났다.
부인은 손수 봉함하고 이 모든 기이한 현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세조는 크게 기뻐하여 사리를 함원전(含元殿)에 모시고 다시 본래 절로 옮겨 보관하게 하였다.
사리는 산스크리트어로 ‘보리라(寶利羅)’, ‘설리라(設利羅)’라 하며
중국에서는 영골(靈骨), 혹은 영신(靈身)이라 번역한다.
부처의 유골에서 나오는 영물이라는 뜻이다.
부처는 “참되고 고요하며 신령한 지혜가 곧 나의 참된 몸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법신은 허공과 같아 생멸이 없다”고 설한 바 있다.
달이 물에 비치되 물이 맑으면 환히 드러나고 물결이 흐리면 달이 흐려지는 것처럼,
소리는 쇠북을 치면 울리지만 쇠북이 울리지 않는 것은 쇠북이 잘못이 아니라 사람이 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신씨 부인이 세종대왕, 소헌왕후를 위하여 기도하고 선대 조상과 광평대군, 그리고 친정 어머니 왕씨를 추모한 정성이 매우 지극했기 때문에 그 정성이 깊어 곧바로 감응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급하게 구한 것이 아니라 절로 이뤄진 것이고, 기약한 바가 없는데 스스로 도래한 것이며,이 또한 부처의 신통작용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부인의 정성을 알고 싶다면 내려온 영험을 보면 되고, 부처의 변화 작용을 알고 싶다면 나타난 사리의 기묘함을 보면 된다.
이 일이 단지 부인의 정성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부처의 공덕과 법신이 법계에 가득하여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절이 처음 세워진 내력과 이번 법회의 성대함,그리고 세조가 왕세자 시절 친히 이 절을 방문해 비문을 새겨 남긴 일은
이 절이 앞으로도 길이 흥할 상서로운 일임을 보여준다. 비문은 “창룡(蒼龍)·전몽(旃蒙)·악작(噩作)” 운에 맞추고
달이 기울어가는 계절에 삼가 기록한다.

'훈민정음과 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훈민져ᇰᅙᅳᆷ 해례/訓民正音 (0) | 2026.05.26 |
|---|---|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번역및 평가 (3) | 2025.12.25 |
| 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 (0) | 2025.11.24 |
| 3년의 기한을 정하여, 만약 도를 이루지 못한다면-김수온 (1) | 2025.11.23 |
| 능엄경 언해 어제 발문(御製 跋文) (0) | 2025.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