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3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33년 전이면 현기 스님이 53살이었다. 그때 묘사된 현기 스님의 모습이 올해 만난 현기스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스님을 그려내는 박원자님의 눈길이 무심하면서도 따뜻하다.
"그러면서 조금 웃으시는 스님의 모습이 '수행자' 이전의 혈육 같다."표현이 정확히 내가 현기스님에게 느꼈던 점이다. 현기스님의 할아버지 품같은 따스함이 상무주암에 올라가면 나를 버릇없는 아이로 만들었다.
‘지리산의 은둔 수행자’로 알려진 현기(玄機·86) 스님이 20일 오전 3시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입적했다. 향곡(香谷)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기장 묘관음사, 송광사, 칠불암, 통도사 극락암 등에서 간화선 수행을 해오다가 1981년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올라간 후 44 년간 두문불출하며 채소를 길러 먹으며 수행에만 몰두했다고한다. 공식적으로 외출한 것은 2013년 조계사, 2016년 동화사, 2022년 전등사 정도였다. 영결식은 24일 오전 10시 선산 죽림사에서 열릴 예정이다.
상무주암 현기스님
글 :박원자 (1992년 04월 122호)
일행을 바라보는 스님의 눈빛이 차다. 아니, \'무심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렇잖아도 십 년도 넘는 세월을 지리산 산중의 암자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는 \'구도자\'를 만나는 일에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스님의 그러한 눈빛에 괜히 주눅이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눈길에 흠뻑 젖은 운동화끈을 풀었다. \"눈길에 고생이 많았지요?\" 그랬다. 우리 일행은 이제 막 봄이 시작되려는 삼월의 한가운데에서 눈을 만났던 것이다. 지리산에 내려 앉은 \'눈꽃\', 그것은 신이 빚어내 인간에게 내린 지고의 선물이었다. 삶이 예기치 않은 일의 연속이듯, 우리는 그 뜻하지 않았던 지리산 눈꽃들의 축제 속에서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그 설화의 \'아름다움\'은 재촉해야 할 발걸음을 여러 번 멈추게 했다. 이 아름다움 속에서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각기 명분을 달리한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었단 말인가. 도무지, 순백의 눈속에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혼들이 묻혔을 지리산의 지난 역사가 믿기지 않았다.
눈속을 헤치고 엎어지며 예상보다 한 시간은 더 걸려 해발 천삼백 미터에 있는 상무주암에 다다랐을 때, 주인은 보이지 않고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물 소리만이 한가로웠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셨던 터라, 스님의 \'부재중\'이 마음에 걸려 눈 내린 뜰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스님의 눈빛이 차갑게 느껴졌던 것이다. 인사를 나눈 뒤, 스님은 암자 앞 채마밭에서 손수 키운 무며 당근을 내오셨다. 시정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빛이 곱고 맑았다. 역시 손수 빚으셨다는 다래범벅을 조금씩 떠 먹는 동안 젖어 있던 몸이 훈훈해졌다. 다래의 알콜 기운 때문이었을까. 음식을 나누면서 오가는 마음 탓이었을까. 잔뜩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한눈에 청빈한 수행인의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귀퉁이가 깨어져나간 조그만한 거울을 테이프로 땜질해 걸어놓은 것이 그렇고, 오래 되었음직한 좌복의 모양새가 그러했다. 문앞에 놓인 손때 묻은 자그마한 책상이 정갈해 보였는데, 스님이 직접 나무로 만들어 종이를 바르고 옻칠을 했다고 한다. 그 뒤에 단정하게 놓인 낡은 \'벽암록\' 한 권이 객의 눈길을 끌었다. 선방수좌들 사이에서 \'도인\'으로 불리고 있는 스님은 1981년에 이곳 상무주암에 오셔서 열두 해째 머물고 있다. 상무주암은 신라 천년의 고찰로서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삼 년 동안 주석했다는 기록이 지눌스님의 행장에 보인다. 지눌스님이 \'초견성\' 했다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암자는 근래에는 월인스님과 혜암스님 같이 덕 높으신 스님네들이 수행하셨던 곳이기도 하여 수도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머물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면히 내려오는 수도처로서의 명성 때문에 현기스님의 상무주암에서의 수도정진은 더욱 의미 깊어 보였다. 예전엔 안거가 끝나고 해제철이 되면 걸망을 짊어진 스님네들이 다음 철 안거에 들 선방을 찾아 들르기도 했는데, 요즘엔 그런 스님네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스님은 요즘의 이러한 모습에서 선방의 분위기가 옛모습과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선방 생활이 어려운 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살이가 편하다면 구하고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누구든 사는 것이 어렵고 고생이 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고 바라는 이상이 있기 마련이지요. 우리가 공부해서 도달하는 부처님, 곧 법신불엔 전후가 없어요. 수행면에서는 실제적으로 선후가 없는 얘기지요. 내가 먼저 출가했다고 해서 보여줄 게 있어야지요. 오히려 내가 뒤떨어져 있는 것 같아요.\"
선방의 중진 스님네들이 대중처소에 있으면서 후학들이 경책을 받을 수 있는 만남의 자리가 적어 아쉽다는 얘기에 스님들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이 어떻게 살았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가\'를 보려고 하기보다는 당장 보고 들을 수 있는 어록이나 논에 공부의 중점을 두고 있는 세태를 아쉬워했다.
\"부처님은 \'모든 법의 적멸상은 불가언설\'이라면서 \'내가 입을 열어 보아야 중생들이 이해할 수 없으니 열반에 들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결국 제석천이 간청하여 말씀을 하긴 했지만, 그 말씀은 제이의 방편문일 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불교를 곧 부처님의 교시로 이해하거나 방편으로 말씀하신 교시를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같아요. 불교에는 \'몸\'으로써 보여주는 것이 제일 큰 일인데, 스님네들이 아무리 모여 있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 있지 않아 밖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후학들이 방편에 눈을 돌리는 것이지요.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선문을 철저히 공부해야 진정한 공부가 되겠지요.\"
어느 강원을 마쳤고 선방에서 몇 철을 났으며 어느 대학에서 무슨 박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성불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건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내세워 실력 행사를 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나도 수행인이지만 부처가되겠다고 하는 사문의 입지가 시종일관해야 하는데, 어디 그것이 쉬운 일입니까. 다른 생각이 두 배, 세 배 늘어나게 마련이지요. 수행에는 믿음이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바로 믿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지요.\"
\'일거수 일투족이 신심으로 뭉쳐져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은 불교라는 종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이들이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으로 여겨졌다.
스님은 일 년에 한두 차례 서울의 치과에 들르는 일이나 가끔 밖에 나가 일을 보는 것 말고는 거의 산문 밖을 나서지 않는다. 가끔씩 하는 바깥나들이도 볼일이 끝나면 돌아오는 걸음을 서두를 만큼 산중이 그리운 것을 보면, 아마도 \'산중에 익은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산중에서의, 그것도 인적이 드문 지리산 꼭대기에서의 생활에서 느끼는 적막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것에나 사람에겐 친소 심리가 있기 마련이어서 산중에서 자칫 느껴질 수 있는 삭막함은 \'고요함\' 쪽으로 더 친숙하다. 그러한 고요함 속에서 몇 날 며칠을 말하지 않고 지낼 때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적도 있지만, 소리 없이 몸을 바꾸며 다가오는 지리산의 사계가 그렇게 넉넉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특히, 봄이 되면 지리산 잡목들의 초록빛이 부처님의 광명처럼 느껴진다. 잡목의 초색에서 뿜어나오는 기운이 스님의 혈맥과 통하는 것 같은 희열을 맛보는 것 또한 산중살이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하나이다. 가끔씩 하는 나들이에서나 산중에서 시정을 바라볼 때, 세상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너무도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것이어서 세상이 점점 진짜로 있어야 할 것은 없어지고 빈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위압적\'으로 느껴질 수가 없다. 오늘날 \'강북파\'니 \'강남파\'니 해서 갈라져 있는 종단의 문제만 해도 기후처럼 변화하는 세상 인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라며 하루 빨리 \'안\'으로 시선을 돌려 제 본분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시끄러움은 같이 논하면 일이 더 커지거나 똑같이 시끄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싸움을 말릴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사심과 어리석음부터 없애야 합니다. 이기심이 남아 있는 한 싸움을 말릴 순 없어요, 세상이나 종단을 걱정하는 거리감은 똑같습니다.\"
산중에서 입다물고 있는 일을 자칫 세상과의 \'단절\'로 여길 수도 있는 견해에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살아 온 삶의 궤적을 글로 옮기는 일은 사실 불가능한 일일게다. 더구나 온몸으로 뜨겁게 삶을 부딪쳐 왔을 \'수행인\'을 평범한 이의 눈으로 읽어 표현하는 일은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스님은 \'뿌리만 성하면 가지에서 잎으로 저절로 전해지기 마련\'이라며 말로 표현되거나 글로 나타내는 인위적인 작업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냥 \'놀다가라\'고 하시며 자신에 대한 말씀은 조금도 입밖에 내지 않아 그 \'말없음\'의 여백을 읽어야 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웠다.
\"날도 저물고 눈도 이렇게 오는데 하루 묵어들 가지.\"
우리 일행이 머물방에 불을 지펴야겠다며 스님이 일어섰다. 마룻문을 여니 싸락눈이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스님과 얘기하는 동안 그쳤던 눈이 다시 내렸던 듯 하다. 산중의 일기는 예측할 수 없어서, 만약 밤새 눈이 온다면 다음날엔 산을 내려가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 하루를 묵으려던 처음의 계획을 바꿔 무리를 해서라도 그냥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내 얘기보다는 그대들 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그러면서 조금 웃으시는 스님의 모습이 \'수행자\' 이전의 혈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이기에 저리도 인적이 드문 산중에 오랫동안 한 구도자의 발길을 묶어 놓는가. 조심해서 내려가라면서 눈 내리는 사립문 밖에 서 계신 스님의 모습에 괜시리 가슴 저려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새 산짐승이 지나간 것일까. 내려오는 산길에 점을 찍어 놓은 듯한 작은 발자욱이 눈에 띄었다. 옷이며 운동화를 흠뻑 적신 채 한시간 반쯤 걸려 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내려왔을 때, 지리산은 이미 어둠에 묻혀 있었다. 그래, 한 수행인은 \'벽암록\'을 마주하며 어둠에 묻힌 지리산의 암자에 남아 있고, 한 무리는 다시 시끌벅적대는 시정을 향해 발길을 옮겨 놓는 것, 아마도 그것이 삶의 모습일는지 모르겠다. 차창으로 비껴 내리는 눈발이 쉬 멈춰질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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