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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불자회

자유 의지는 있는가?

 

자유 의지는 있는가?

 

 

자유 의지는 있는가? 자유 의지는 없는가?라는 질문이 요즘 많이 논의되고 있습나다. 특히 뇌과학, 양자역학 그리고 생각하는 기계 AI의 등장으로 그 논의가 더욱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 의지를 묻기전에 우선 자유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어를 인간이 만들었지만 다시 언어가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용어는 이미 누구의 자유’, ‘무엇으로 부터의 자유처럼 이미 주체를 상정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오염된 의지오염을 벗어난 의지를 설명합니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인들은 나의 주체가 있다는 착각을 하고 그것을 아뜨만이라 불렀습니다. 그 착각으로 인해서 여러가지 심각한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의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서 인간을 몸(rupa), 느낌(vedana), 지각(saññā), (saṅkhāra), (viññāṇa)라고 나누어 설명하며, 이 다섯가지 작용만 있지 주체(아뜨만)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온의 하나하나에 또는 오온을 합쳐서도 주체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비구들이여, 몸은 내가 아니다(Rūpaṃ anattā). 느낌은 내가 아니다(Vedanā anattā), 지각은 내가 아니다(saññā anattā), 형성은 내가 아니다(saṅkhārā anattā), 식은 내가 아니다(viññāṇaṁ anattā). 비구들이여, 만약 이 몸이, 느낌이, 지각이, 형성이, 식이 나라면 이 몸은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몸에 대하여 '나의 몸은 이렇게 되라. 나의 몸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몸은 내가 아니므로 비구들이여, 이 몸이 질병이 들 수 있고 이 몸에 대하여 '나의 몸은 이렇게 되라. 나의 몸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S22:59)

 

부처님은 몸은 내가 아니다(Rūpaṃ anattā)라는 설명에서 끝나지 않고, 나의 몸을,느낌을,지각을,의도를,의식을 내가 조정할 수 없기에 내가 아니다라는 설명까지 합니다. 부처님은 항상 몸은,느낌, 지각은,의도는, 식은 내가 아니다,라고 구체적인 대상을 지적하면서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내가 없다(無我)’ 충격에서 비롯된 허무주의(단견)에 빠지지 않고 내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내가 없다고 말하는 현상은 있다는 알게합니다. 부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인간이 열가지 족쇄에 묶인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열가지 족쇄는 유신견(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계금취견,sīlabbataparāmāso), 감각욕망(kāmacchando), 악의(byāpādo) 색계의 탐욕(rūparāgo), 무색계의 탐욕(arūparāgo), 자만(māno), 들뜸(uddhaccaṃ), 무명(avijjā)10가지입니다. 예류자는 유신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을 버린 자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n)라고 관찰합니다. 그러나 예류자(預流者)가 몸(kāya)을 나라고 보는 견해를 내려 놓았지만 아직 자만, 들뜸등 7가지 미세한 번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류자인 아난다가 연기법이 저에게 훤히 드러났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아난다야 그렇게 말하지 말라, 연기법은 그것보다 더 심오하다라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예류자는 일어나고 사라짐만 보았지 그 조건(paccaya)들을 보지 못합니다. 조건은 가장 심오한 단어이며, 부처님도 조건들을 알고자 하면 깊이 숙고하고 난 다음에야 알 수 있습니다. 느낌(vedana), 지각(saññā), (saṅkhāra), (viññāṇa)은 모두 조건(paccaya)으로 일어나는데 이 조건들은 사연(4,paccaya),이십사연(24,paccaya)등으로 자세히 설명합니다.

 

 

뇌과학에서 주체없음을 설명하지만 부처님처럼 업과 연기의 조건(paccaya)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짐만을 설명하면 인간세상에서는 윤리적인 오류가 발생합니다. 수천 명을 죽인 히틀러의 행위나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의 행위는 분명 책임을 져야할 큰 죄이지만 주체에게 책임을 묻기가 힘들어 집니다. 불교에서는 업의 주체를 설명하기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주체없음(無我)를 말하기도합니다. 업 분석의 짧은 경(M135)에서 중생들 업이 그들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이다. 업이 중생들을 구분 지어서 천박하고 고귀하게 만든다.”라며 도덕적인 삶을 권장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명하기전에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를 말하는 이유입니다.

 

조건을 보지 못하여 주체를 상정하는 인간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하는데 부처님은 그것을 사띠(Sati)와 삼빠자나(Sampajañña)로 설명합니다.

"비구들이여, 길게 들이쉬면서는 `나는 길게 들이쉰다'고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나는 길게 내쉰다'고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는 `나는 짧게 들이쉰다'고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나는 짧게 내쉰다'고 안다. 걸어가면서 `나는 걷고 있다'고 알고, 서 있으면서는 `나는 서 있다'고 알며, 앉아 있으면서는 `나는 앉아 있다'고 알고, 누워 있으면서는 `나는 누워 있다'고 안다.”(M119)

 

또한 스스로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행위를 조절합니다.

어떤 사람이 급히 가다가 '왜 내가 급히 가지? 나는 천천히 가야지.'라면서 천천히 간다. '왜 내가 천천히 가지? 나는 서야지.'하면서 선다. '왜 내가 서 있지? 나는 앉아야지.'하면서 앉는다. '왜 내가 앉아있지? 나는 누워야지.'하면서 눕는다.”(M20) 이러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서서히 조건(오온)을 보게 됩니다.

 

범부들이 사용하는 자유의지는 주체를 상정한 표현입니다. 업을 짓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주체의 자유의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범부의 자유의지는 업을 수반하고 아라한의 자유의지는 업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하는 문제는 오염된 의지오염을 벗어난 의지로 나누어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범부는 의도를 나의 의지, 내가 일으킨 의지라고 착각합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모순을 보고 오염된 의지오염을 벗어난 의지로 설명하였습니다. 인간이 주체를 상정할 때는 인과응보를 설명하여 도덕적인 삶을 살게하고, 주체가 없음을 발견하여 제법무아를 설명합니다. 말로서 표현 할 수 없는 무아의 상태를 이 몸은, 느낌은, 지각은, 형성은, 식은 내가 아니다라고 언어로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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