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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말걸기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하는 동안, 한국은 몸서리친다.

 

스웨덴 한림원은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를 제시하며,“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서정적 산문 (for her intense poetic prose that confronts historical traumas and exposes the fragility of human life)"이라고 평가하였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는 그녀의 용기는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나타난다. 한 강 작가는 2017년 《뉴욕타임스》에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하는 동안, 한국은 몸서리친다(While the U.S.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다시는 전쟁의 비극과 고통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자비심의 발로이다.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온 한 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자랑스럽고 기쁘고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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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하는 동안, 한국은 몸서리친다.
승리로 끝나는 전쟁 시나리오는 없다.
저자: 한강
날짜: 2017년 10월 7일
 
 
 
며칠 전 우연히 본 뉴스 기사를 떠올리며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70대의 한 남성이 길에서 두꺼운 현금 다발을 떨어뜨렸다. 그 돈을 주운 두 사람이 이를 나누어 가지다가 경찰에 잡혀 돈을 돌려주고 절도죄로 기소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남성이 그 많은 현금을 가지고 있던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까 걱정돼서 은행에서 저축해 둔 돈을 찾아서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고 경찰에게 말했다. 그는 매달 조금씩 모은 돈이었으며, 손자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4년 동안 저축한 돈이라고 했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 전쟁은 이 남성의 청소년기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 이후 평범한 중산층 삶을 살아온 이 남성이 저축한 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갈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해본다. 공포, 불안, 무기력함, 긴장감.
나는 그와 달리 한국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 속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북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고, 지금도 남쪽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과 만나거나 접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전후 세대인 우리에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때때로 초현실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나와 다른 남쪽 사람들도 평양이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것과 전쟁이 끝나지 않고 여전히 휴전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도로나 뉴스를 통해 확인하지 않으면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나이의 한 작가가 말했듯이, 비무장지대(DMZ)는 때때로 바다처럼 느껴진다. 마치 우리가 반도가 아닌 섬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기묘한 상황이 60년 동안 지속되면서 한국인들은 무관심과 긴장의 모순적인 감각에 마지못해 익숙해졌다.
때때로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북한에 대해 신비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도한다. 전 세계가 북한을 두려워하는 동안 한국인들은 유난히 침착해 보인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험할 때조차,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 속에서도 남쪽의 학교, 병원, 서점, 꽃집, 극장, 카페는 평소처럼 문을 연다. 어린아이들은 노란색 스쿨버스에 올라타며 창문 너머로 부모에게 손을 흔들고, 나이가 더 많은 학생들은 젖은 머리를 감고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오른다. 연인들은 꽃과 케이크를 들고 카페로 향한다.
그렇지만 이 침착함이 정말로 한국인들이 무관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모두가 정말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긴장과 공포가 우리 안 깊숙이 파고들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특히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뉴스를 통해 매일 조금씩 이 긴장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으며, 우리의 내부적인 불안 속에서 그 긴장을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집이나 직장 근처에 있는 방공호 위치를 알아내기 시작했다. 추석을 앞두고, 몇몇 사람들은 가족을 위해 평소처럼 과일 상자가 아닌 '생존 배낭'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 배낭 안에는 손전등, 라디오, 약, 비스킷 등이 담겨 있었다. 기차역과 공항에서는 전쟁 관련 뉴스 방송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긴장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본다. 이게 우리들의 상황이다. 우리는 걱정하고 있다. 북한이 국경 너머에서 또다시 핵무기를 실험하고 방사능 누출이 있을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말의 전쟁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여전히 도래할 날들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5천만 명의 사람들이 단순히 숫자가 아닌 실제 사람들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한국인들이 신중한 침착함과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다른 나라들보다 북한의 존재를 더 구체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재 정권과 그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구분하며,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상황에 홀리스틱하게 대응하려고 한다. 전쟁은 누구를 위해 벌어지는가? 이 오래된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 매우 실질적인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내 소설 "소년이 온다"를 연구하면서, 나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보스니아,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관련된 문서들도 함께 조사해야 했다. 내가 궁극적으로 집중하고 싶었던 것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보편적인 인간성이었다. 나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해칠 수 있는지, 그리고 폭력 앞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나는 야만과 존엄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틈을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더듬어 가고 싶었다. 내가 연구하는 동안 깨달은 많은 것들 중 하나는 모든 전쟁과 학살에는 인간이 특정 다른 인간을 '비인간'으로 인식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적, 인종, 종교, 이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은 인간이 남의 고통을 완전하고 진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점이었다. 이때 단순한 동정을 넘어서는 실제적인 의지와 행동이 우리에게 매 순간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 전쟁은 한반도에서 주변 강대국들이 벌인 대리전쟁이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잔혹한 3년 동안 학살당했고, 한반도의 옛 국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비극적인 과정에서 미국 군대, 즉 공식적으로 우리의 동맹국이 남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비교적 최근에 밝혀졌다. 가장 잘 알려진 노근리 학살 사건에서는 미국 군인들이 수백 명의 남한 시민들, 주로 여성과 아이들을 돌다리 밑으로 몰아넣고, 양쪽에서 며칠 동안 그들에게 총을 쏘아 대부분을 살해했다.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그들이 남한 피난민들을 '비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면, 그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완전하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존재로 인식했다면,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제 거의 7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매일 미국에서 들려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이 위험할 정도로 익숙하게 들린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하루에 2만 명의 남한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걱정 마라, 전쟁은 미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한반도에서만."
이 날카로운 대치 상황 속에서 오직 대화와 평화만을 해결책으로 이야기하는 남한 정부에게, 미국 대통령은 "그들은 오직 한 가지만 이해한다"고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한국인들은 정말로 오직 한 가지만 이해한다. 우리는 평화가 아닌 어떤 해결책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승리'는 단지 공허한 구호일 뿐이며 터무니없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한반도에서 또 다른 대리전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살고 있다.
앞으로의 몇 달을 생각하면, 나는 지난 겨울의 촛불을 떠올린다. 매주 토요일, 한국 전역의 도시들에서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부패한 정부에 반대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고, 종이컵에 담긴 촛불을 들고,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고 외쳤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나만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당시 우리는 이를 '촛불 집회'나 '촛불 시위'라고 불렀고, 지금은 우리의 '촛불 혁명'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단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촛불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고, 결국 그것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약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존재로서 존엄성을 지닌 인간들이며, 매일 카페와 찻집, 병원과 학교의 문을 열고, 매 순간 새롭게 솟아오르는 미래를 위해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평화 외에 다른 어떤 시나리오를 이야기할 사람은 누구인가?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

There is no war scenario that ends in victory.

 

By HAN KANGOCT. 7, 2017

 

I cannot turn my thoughts from the news article I happened to see a few days ago. A man in his 70s accidentally dropped two thick wads of cash in the street. Two people who happened upon this bundle of money and shared it between them were caught by the police, made to give up the money and charged with theft.

 

Up until here, it is still an ordinary story. But there was a special reason this man was carrying so much cash on him. “I’m worried that a war might be coming,” he told the police, “so I’d just taken my savings out of the bank and was on my way home.” He said that it was money he had saved a little bit each month for four years, intended to send his grandchildren to college. Since the Korean War broke out in 1950, war would have been the enduring experience of this man’s adolescence. I imagine what he would have been feeling, a man who has lived an ordinary middle-class life ever since, on his way to the bank to take out his savings. The terror, the unease, the impotence, the nervousness.

 

Unlike that man, I belong to the generation that never experienced the Korean War. Crossing the border to the North was already impossible before I was born, and even now it is forbidden for Southerners to meet or have contact with Northerners. For those of us of the postwar generation, the country known as North Korea is at times felt as a kind of surreal entity. Of course, rationally, I and other Southerners are aware that Pyongyang is only two hours by car from Seoul and that the war is not over but still only at a cease-fire. I know it exists in reality, not as a delusion or mirage, though the only way to check up on this is through maps and the news.

 

 

But as a fellow writer who is of a similar age to me once said, the DMZ at times feels like the ocean. As though we live not on a peninsula but on an island. And as this peculiar situation has continued for 60 years, South Koreans have reluctantly become accustomed to a taut and contradictory sensation of indifference and tension.

 

Now and then, foreigners report that South Koreans have a mysterious attitude toward North Korea. Even as the rest of the world watches the North in fear, South Koreans appear unusually calm. Even as the North tests nuclear weapons, even amid reports of a possible pre-emptive strike on North Korea by the United States, the schools, hospitals, bookshops, florists, theaters and cafes in the South all open their doors at the usual time. Small children climb into yellow school buses and wave at their parents through the windows; older students step into the buses in their uniforms, their hair still wet from washing; and lovers head to cafes carrying flowers and cake.

 

And yet, does this calm prove that South Koreans really are as indifferent as we might seem? Has everyone really managed to transcend the fear of war? No, it is not so. Rather, the tension and terror that have accumulated for decades have burrowed deep inside us and show themselves in brief flashes even in humdrum conversation. Especially over the past few months, we have witnessed this tension gradually increasing, on the news day after day, and inside our own nervousness. People began to find out where the nearest air-raid shelter from their home and office is. Ahead of Chuseok, our harvest festival, some people even prepared gifts for their family not the usual box of fruit, but “survival backpacks,” filled with a flashlight, a radio, medicine, biscuits. In train stations and airports, each time there is a news broadcast related to war, people gather in front of the television, watching the screen with tense faces. That’s how things are with us. We are worried. We are afraid of the direct possibility of North Korea, just over the border, testing a nuclear weapon again and of a radiation leak. We are afraid of a gradually escalating war of words becoming war in reality. Because there are days we still want to see arrive. Because there are loved ones beside us. Because there are 50 million people living in the south part of this peninsula, and the fact that there are 700,000 kindergartners among them is not a mere number to us.

 

One reason, even in these extreme circumstances, South Koreans are struggling to maintain a careful calm and equilibrium is that we feel more concretely than the rest of the world the existence of North Korea, too. Because we naturally distinguish between dictatorships and those who suffer under them, we try to respond to circumstances holistically, going beyond the dichotomy of good and evil. For whose sake is war waged? This type of longstanding question is staring us straight in the face right now, as a vividly felt actuality.

 

In researching my novel “Human Acts,” which deals with the 1980 Gwangju Uprising, when the military dictatorship turned to the armed forces to suppress student protests against martial law, I had to widen the field to include documents related not only to Gwangju but also to World War II, the Spanish Civil War, Bosnia and the massacres of Native Americans. Because what I ultimately wanted to focus on was not one particular time and place but the face of universal humanity that is revealed in the history of this world. I wanted to ask what it is that makes human beings harm others so brutally, and how we ought to understand those who never lose hold of their humanity in the face of violence. I wanted to grope toward a bridge spanning the yawning chasm between savagery and dignity. One of the many things I realized during my research is that in all wars and massacres there is a critical point at which human beings perceive certain other human beings as “subhuman” because they have a different nationality, ethnicity, religion, ideology. This realization, too, came at the same time: The last line of defense by which human beings can remain human is the complete and true perception of another’s suffering, which wins out over all of these biases. And the fact that actual, practical volition and action, which goes beyond simple compassion for the suffering of others, is demanded of us at every moment.

 

The Korean War was a proxy war enacted on the Korean Peninsula by neighboring great powers. Millions of people were butchered over those three brutal years, and the former national territory was utterly destroyed. Only relatively recently has it come to light that in this tragic process were several instances of the American Army, officially our allies, massacring South Korean citizens. In the most well-known of these, the No Gun Ri Massacre, American soldiers drove hundreds of citizens, mainly women and children, under a stone bridge, then shot at them from both sides for several days, killing most of them. Why did it have to be like this? If they did not perceive the South Korean refugees as “subhuman,” if they had perceived the suffering of others completely and truly, as dignified human beings, would such a thing have been possible?

 

Now, nearly 70 years on, I am listening as hard as I can each day to what is being said on the news from America, and it sounds perilously familiar. “We have several scenarios.” “We will win.” “If war breaks out on the Korean Peninsula, 20,000 South Koreans will be killed every day.” “Don’t worry, war won’t happen in America. Only on the Korean Peninsula.”

 

To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hich speaks only of a solution of dialogue and peace in this situation of sharp confrontation,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has said, “They only understand one thing.” It’s an accurate comment. Koreans really do understand only one thing. We understand that any solution that is not peace is meaningless and that “victory” is just an empty slogan, absurd and impossible. People who absolutely do not want another proxy war are living, here and now, on the Korean Peninsula.

 

When I think about the months to come, I remember the candlelight of last winter. Every Saturday, in cities across South Korea, hundreds of thousands of citizens gathered and sang together in protest against the corrupt government, holding candles in paper cups, shouting that the president should step down. I, too, was in the streets, holding up a flame of my own. At the time, we called it the “candlelight rally” or “candlelight demonstration”; we now call it our “candlelight revolution.”

 

We only wanted to change society through the quiet and peaceful tool of candlelight, and those who eventually made that into a reality no, the tens of millions of human beings who have dignity, simply through having been born into this world as lives, weak and unsullied carry on opening the doors of cafes and teahouses and hospitals and schools every day, going forward together one step at a time for the sake of a future that surges up afresh every moment. Who will speak, to them, of any scenario other than peace?

 

 

 

 
 

Opinion |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 (Published 2017)

There is no war scenario that ends in victory.

www.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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