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국립박물관 야외에는 서있는 부처님들이 여럿 모셔져 전시되어 있다. 저 정도의 여래입상불 같으면 박물관안에 모셔도 충분할 텐데 밖에 전시되어 하나의 장식품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특히 부여 박물관 입구 오른쪽에 세워놓은 부처님은 얼굴이 원만하고 자태가 기품있게 느껴진다. 그런데 불상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로 알려진 절터 부근에서 1933년에 발견된 석조여래입상이다. 얼굴은 크고 비만하게 표현한 반면 신체는 밋밋하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몸과 머리의 폭이 거의 비슷한 돌기둥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석주형의 석불은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당진 안국사지 석불입상,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등 고려 전기, 충청 전라지역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부처님이 얼굴이 비만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무례하게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비만이라는 용어는 신체에 사용하는데 이 경우에는 얼굴을 비만하다고 표현하고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얼굴을 표현할때는 후덕하다, 원만하다, 덕스럽다라고 표현한다. 부여의 옛 이름은 사비이고 사비에는 여섯명의 왕이 머물렀던 백제의 수도이기에 수많은 사찰과 문화재가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석탑인데도 목탑의 모양을 하고 있는 독특한 양식, 그리고 660년 백제멸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7월 18일 멸망시킨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8월 15일에 정복 기념으로 새긴 비문이 이 탑의 탑신에 남아있어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불리어졌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민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런데 예전부터 석탑을 설명을 볼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일반인이 알지도 못하는 한문투의 이름을 사용하냐는 것이다. '옥개석'을 '지붕 돌', '우주'를 '모서리 돌'로 표현 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텐데 왜 이러한 친절을 베풀지 않는지 알 수없다. 그리고 정림사지 5층석탐은 총 33층으로 이루어진 것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 33층은 불교의 욕계,색계, 무색계라는 삼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석탑을 만들때 공연히 여러층으로 석탑을 만든 것이아니다. 이렇게 석탑에 나타나는 불교 사상적인 면까지 설명이 되었으면 한다.
백제문화를 보여주는 탁월한 석탑이기에 전주시에서 땅을 매입하여 복원 계획을 가지 가지고 있는듯하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석탑 옆에는 정림사지 박물관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정림사 옆에는 주차장이 없어서 많은 분들이 불편을 겪고있다. 전주시가 주차장 문제를 시급히 해결했으면 한다. 또한 정림사지 박물관에 전시된 전시물들은 일부 창의적이기는 하나 너무 어수선하다. 더 연구해서 내실 있는 전시관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여 박물관에는 서산 마애 삼존불 모형과 예산 사면 석불 모형이 전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아이디어도 본 받을 만하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고분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 공사를 하기 위해 본래 있던 논을 갈아엎은 뒤, 터를 파던 도중 물이 고인 진흙 웅덩이 속에서 금동으로 된 향로가 발견되었다. 무려 천 년을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덕에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후 발굴 결과 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원래는 사찰 내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였다.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보아, 해당 사찰은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왕실 차원에서 세운 원찰인 듯하다.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래 내정의 혼란을 거듭하던 백제가 안정을 되찾고 꽃피운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은 물론 도교에서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혹은 신선이 조각되어 도교와 불교적 요소가 모두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 조형 솜씨가 워낙 훌륭하고 뛰어난 수준이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조상들의 걸작품이다. 신라라고 하면 떠오르는 금관처럼 일반 대중들이 백제라고 하면 딱 떠올리는 멋진 상징적 유물이 없던 차에 그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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