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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부여 무령왕릉을 처음으로 방문하다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무녕왕릉에 도착하다. 1971년, 발굴되었다가 1979년에 영구히 폐쇄되었다. 그래서 2003년 무령왕릉 전시관에서 무덤과 유물을 관람할수 있다. 기존에 발견되었던 송산리 벽돌무덤 6호분의 유입수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국당시 내부 묘비석에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는 적혀 있어서 누구의 왕릉인지 알수 있었다고한다. 묘지명(墓誌銘)을 따로 쓰지 않는 삼국시대의 여러 왕릉과 고분들 중에서 희귀한 케이스라고한다.  왕릉이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왔으나 무령왕릉을 찾아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무령왕릉이 특이한 것은 왕릉을 만들기 위해서 벽돌을 새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때 벽돌로 무덤을 만들면서 무덤 속에 창문을 만들고 등불을 놓은 등불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벽돌을 촘촘하게 세로로 세워놓아서 창살처럼 만든 것인데 그래서 '가창'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창문은 창문모양의 벽돌(가창)이기에 실제로 그 창으로 바람이 드나들지는 않는다. 죽은 사람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창문이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죽은 자를 위해서 창을 만들었다는 것이 산뜻하다.  마치 마치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생각해서 창을 만드는 그 넉넉한 마음이 따듯하다.나는 언제나 산자의 편인가 보다.

무덤에 만든 창이라.....

 

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 不從律令

돈 1만 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위에서 보는 바처럼 무령왕 지석은 앞면에 왕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묘 위치의 방위를 나타내는 간지도로 구성되었는데 간지도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교적 색채는 매지권 말미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구절 등 이외에도 몇몇 부분이 있다. 이것은 도교의 주문으로 밝혀졌다.무령왕비 지석은 앞면에 왕비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자리로 정한 땅을 구입했음을 증명하는 매지권이다.

왕비가 왕보다 후에 죽었다. 따라서 왕비의 지석이 제작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먼저 왕의 사후 27개월 간 시신을 빈전에 모시는 빈장 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능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고, 후에 왕비를 안치할 때 매지권을 적은 지석을 뒤집어 왕비의 묘지를 새겼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당대 백제에서는 중국식 삼년상의 풍습이 완전히 정착했음을 알수 있다. 비근한 예로 광개토왕릉비에도 24개월간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3년 후(이 경우에는 만 24개월)에 장례를 치렀다고 서술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에서는 삼년상의 풍습이 널리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6세기 초반까지 순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풍습이 고구려와 백제와 비슷했는지 달랐는지는 의문의 영역이다.(나무위키)



<무령왕비 지석 뒷면>

寧東大將軍百濟斯 / 麻王 年六十二歲 癸 / 卯年五月丙戌朔七 / 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 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 / 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 지석 앞면>

 

 

 

창문 모형의 가짜 창문

 

 

 

 

 

 

 

 

창문과 등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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