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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선명상이 위험하다!

선명상(禪瞑想)이 위험하다!

 

진우 총무원장이 선명상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서 단독으로 선명상 아카데미를 총 8회 진행하였다. 자기가 선명상을 만들고 그것을 추진하고 있으면서 그 일을 '재능보시'라고 말한다. 그 재능보시에 참가비를 50만원 받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선명상 아카데미에 참여한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대부분 종단의 소임자와 비구니회 스님들로 보인다. 그렇다면 거의가 동원된 사람들 아닌가?  진우스님은  "괴로움과 즐거움의 질량의 크기는 0.1g도 차이 없다.",  인간의 즐거움과 괴로움의 총량은 똑 같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生故彼生)라는 연기공식을 소개하며 이것과 저것에 남자와 여자, 늙음과 젊음, 밤과 낮, 즐거움과 괴로움, 부모와 자식등 반대가 되는 단어들을 대입하며 연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인 것이란다.

 

그는 "밤낮의 길이의 총량이 같다"는 것을 근거로  인간의 즐거움과 괴로움의 총량은 같다”고 말하지만 북극이나 남극에 사는 사람에게는 밤낮의 길이가 같지 않기에 "밤낮의 길이의 총량이 같다"는 것은 거짓이다. 설사 "밤낮의 길이의 총량이 같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즐거움과 괴로움의 총량은 같다”는 이유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밤과 낮의 총량과 즐거움과 괴로움을 비교하며 마치 총량이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비유의 오류이다. 육사외도중에 '막칼리 고살라'"즐거움과 괴로움의 크기는 정해져 있어 아무것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없다"라고 운명론을 말하였는데 진우스님의 주장도 이와같다. 외도의 주장 경(A3:61)에서 어떤 외도가 “사람이 느끼는 모든 느낌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진우스님의 말도 현재의 느낌은 모두 과거의 업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수행을 하면 괴로움이 줄어드는 것이고, 삿된 견해로 살아가면 괴로움이 늘어나는 것인데 항상 괴로움과 즐거움의 질량의 크기는 같다라고 주장하면 어쩌라는 것인가?  

 

 

연기공식이 원문에는 이것(imasmiṃ)과 이것(idaṃ)으로 되어 있음에도 한문경전에서 대부분 이것(是事)이 있을 때 저것(彼事)이 있다라고 번역한다. 물론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有是故是事有)라고 직역한 번역가도 있다. 부처님은 왜 동어반복같은 이것(Imasmiṃ)과 이것(ida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셨을까? 일반적으로 이것은 가까이에 있거나 두 개이상의 비슷한 것을 지칭하고, ‘저것은 멀리에 있거나 두 개이상의 다른 것을 지칭한다. ‘저것이라는 단어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밖으로 향하게한다. 진우스님은 이것()과 저것()’에 남자와 여자, 밤과 낮, 즐거움과 괴로움같은 반대되는 단어들을 대입하여 동시적인 인식론적으로 이해한다. 진우스님처럼 이것(A)과 저것(B)에 아무것이나 대입하면 12연기 각지들의 조건(條件), 인과(因果), 차제(次第)관계는 사라져버린다. 예를들면 느낌()이 있으므로 갈애()가 있다는 표현을 갈애()가 있으므로 느낌()이 있다라고 말하는 꼴이다.

 

 

연기법칙은 남자와 여자, 밤과 낮 같이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개념의 의존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한 쌍의 단어는 시간 차이가 없이 동시에 생기는 인식이지만 연기론은 그렇치 않다. 양쪽의 관계가 동시적인 것이라거나 상호의존 관계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연기를 바르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법은 자신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자신이 괴로움의 과보를 받기도하고 수행을 통해서 해탈의 길을 갈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다. 진우스님은 "삼수(三修)야 가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살아있는 사람이면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첫번째 화살은 아라한이나 중생이나 누구나 맞는다고 설한다. 문제는 그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말라고 설하는데 그것이 두번재 화살을 맞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진우스님은 마치 느낌 그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삼수(三修)야 가라"고 설법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불교의 근본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진우스님은 교육원장 시절, 자승스님이 이끄는 상월결사 천막선원 대중을 찾아가서 그 들을 9분의 아라한들이라고 교육원장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아부를 하였다. 문화재 사찰인 칠장사 전각에 불을 지르고 죽은 자승의 죽음을 '소신공양'이라고 거듭 칭송하여 모든 불자과 국민을 속였다. 스님들이 설문조사에서 97%가 자승의 유산을 종단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도 자승의 유산을 종단에 귀속시키지 못하고 있다.이렇게 종도들이 가장 원하는 일은 외면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는 선명상을 부르짖고 있으니 과연 그는 누구를 위한 총무원장인가?  

 

종단차원에서 새로운 명상법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먼저 승가내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승가 대중에게 평가 받는 것이 먼저다. 듣기로는 진우스님이 명상분야에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받아서 선명상을 개발하였다고한다. 진우스님에게 조언을 해준 그들은 진우스님의 이러한 엉터리 설명에 왜 조용한가? 진우스님 곁에서 바르게 조언하지 않고 헛되게 진우스님을 부추기는 소위 명상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더 문제가 아닌가? 예전에 "붓다로 살자"는 운동이 한 때의 헤프닝으로 끝 난 것처럼, 선명상도 한 때의 헤프닝으로 끝 날 것이다. 이것은 악담(惡談)이 아니다. 이러한 선명상이 오래 지속되는 것은 불자들과 나라의 불행(不幸)이다.

 

 

 

 

 

 

https://youtu.be/3boav9Ry5eg?si=r6xtrmyHy3DQbb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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