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이 ①자승 스님 입적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기사를 12월 8일날 올렸는데 12월 11일까지 후속 기사가 나오지 않고 있네요.
불교신문, 현대불교신문, bbs, btn 등도 법보신문처럼 자승 미화작업을 하지 않고 있는데 혼자서만 하기가 뻘쭘해서 그런가? 아니면 대부분의 댓글들이 부정적이어서 그런가?
자승이 살아있었을 땐 경쟁하듯이 한 목소리를 내던 신문들이었는데...
예상 하건데 법보신문도 ⓶자승 스님 입적 어떻게 볼 것인가?는 더 올리는게 어려울 듯 합니다.
자승의 우상화에 매달리는 법보신문은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준비된 소신공양…더 이상 구할 것 없는 견처 보인 격외의 회향”
[파격의 입적, 자승 대종사와 한국불교] ①자승 스님 입적 어떻게 볼 것인가
“죽음에 끌려가지 않아야” 평소 당부…“보여주기·흉내 불가능한 경지”
유서·기자간담회·격려모임 등 주변도 챙겨 “일상과 크게 다를 바 없어”
선사들 대부분 자발적 입적 선택…“행정·사판승 이미지에 가려진 이면”
‘생사가 없다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 구나.’(자승 스님 열반송)
12월3일, 겨울바람 시린 서울 조계사 마당에서 봉행된 자승 스님의 영결식장엔 안타까움과 무거운 혼란이 교차했다. 자승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던진 충격이 세간과 출세간 모두에 컸기 때문이다.
11월29일 늦은 밤, 원적 소식이 알려지고 조계사에 분향소가 차려지는 동안 스님의 행적이 하나둘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성 칠장사 CCTV에는 입적 당일 자승 스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손수 차량을 운전해 오후 3시11분 안성 칠장사에 도착한 스님은 주지스님을 만나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주지스님이 요사채 문을 열어 주고 자리를 떠난 직후인 4시24분, 자승 스님은 몰고 온 차 트렁크에서 하얀색 플라스틱 통 2개를 꺼내 들고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1분 후 자승 스님은 다시 밖으로 나와 CCTV 쪽을 바라보다가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시간 반쯤 지나 다시 한번 밖으로 나왔다. 2분가량을 머문 후 방으로 들어간 스님은 마지막으로 요사채 문을 한 번 더 열어 우두커니 밖을 내다본 후 곧 문을 닫았다. 1분 후 요사채에서는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오후 6시43분이었다.
자승 스님은 칠장사 요사채에 들어간 후 2시간 20분 남짓 동안 무려 3차례나 문밖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하늘을 응시하기도 했다. CCTV에 확인된 스님의 모습은 마치 그 모든 행위가 자유 의지에서 비롯됐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스님의 입적을 두고 설왕설래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소신(燒身)’이라는, 범인의 상식을 넘어선 스님의 선택은, 갑작스런 입적에 대한 충격 못지않게 매스컴의 이목을 끌었다. 갖가지 의혹과 추측들이 ‘왜’라는 질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영상이 스님의 마지막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줬지만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세간의 혼돈을 가름하고 나선 이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었다. 종단장이 확정된 다음 날인 12월1일 스님은 조계사 대웅전 분향소에서 이례적으로 예정에 없던 말문을 열었다.
“수행자 스님들의 삶은, 세계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현재의 삶과 피안이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와 상대적인 세계로 떠나는 열반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우 스님의 일성은 자승 스님의 입적이 출세간과 수행자의 선상에서 이뤄졌음을 명확히 지칭하고 있었다. 이어 “자승 스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인연 연기에 따라 살면서도 근본적인 정법 깨달음의 세계를 항상 추구하셨기에 이런 순간을 스스로 맞이하셨다”고 밝혔다. “일반에서는 이해 못하겠지만 수행자 선상에서는 충분히 있는 일, 그 이상 그 이하도 덧붙일 문제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이러한 순간을 스스로 맞이하셨다’는 진우 스님의 단언은 같은 날 오후 자승 스님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됐다. 유언장을 공개한 조계종 기획실장 우봉 스님은 “지난 3월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마치고 자승 스님이 지인들과 차를 마시다가 ‘나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내 방 어디를 열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며 “그 말을 들었던 스님 한 분이 어제 숙소에서 여러 장의 유언장을 확인했다”고 전하며 그 가운데 3장을 공개했다. 자승 스님의 모습이 담긴 영상기록과 함께 오래 전부터 준비됐음을 유언장은 말해주고 있었다.
이에 대해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자승 스님의 의중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언을 전했다. “소신을 준비하고 계셨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정황들이 있었다”는 원명 스님은 “봉은사에 땔감을 쌓아 두도록 여러 차례 말씀하셔서 통나무 움막을 지어 놓았다. 다만 대중들이 그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며 회한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소신공양을 준비했었지만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봉은사에서 불길이 오를 경우 순식간에 진화될 것을 예측해 칠장사를 선택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칠장사는 평소에도 종종 들려 기도하던 수행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랬던 만큼 칠장사 요사채 전소에 대해 자승 스님은 유서를 통해 칠장사 주지스님에게 거듭 미안함을 전했다. 상좌들에게 이를 복원하라는 철저한 당부까지 남겼다.
자승 스님은 상월선원과 함께 했던 사부대중에 대한 감사와 함께 건물 경비원, 사무실 간사 등 소소한 주변의 인연들도 하나하나 챙겼다. 동시에 출가자로서 수행 정진에 소홀했던 부분에 대한 참회, 선원 정진대중에 대한 존경까지 유언장에 담고 있었다.
이러한 유서에 더해 자승 스님을 오랫동안 보필했던 박기련 동국대 건학위 사무총장은 “스님께서 11월27일 가진 기자간담회 일정을 2주 전부터 언론사에 요청해 준비했고 전례 없이 허심탄회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날 저녁에는 전법대회를 준비했던 13명의 직원들을 불러 함께 저녁공양을 하고 일일이 선물을 전하는 등 각별하게 주변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셨다”고 회고했다.
박기련 사무총장을 비롯해 일련의 과정들을 목도한 주변인들은 한결같이 “이같이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음에도 추호도 의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며 탄식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에서 순례단장 소임을 맡아 43일간을 함께 했던 조계사 주지 원명 스님은 “자승 스님께서는 ‘태어날 때에는 부모에 의지하지만, 수행자라면 결코 죽음에 끌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고 전했다. 스님은 “소신 현장에서 수습된 스님의 법체는 누운 자리 그대로 반듯했다”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하려 들기 마련이고 더구나 뜨거운 불 앞에서 몸부림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그 법체가 반듯하게 남아있었다는 점은 결코 죽음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평소의 신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교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고승들의 입적이 일상의 연장선에서 일어났음을 감안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죽음을 짐작할 특별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죽음이 일상다반사와 크게 다르지 않고 그 자체에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 숱한 고승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승 스님은 입적 당일 불씨를 당긴 직후 명료한 의식 하에 몇몇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짧게 향후 종단에 대한 당부와 소신 결행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사채에 불길이 치솟은 지 불과 5분여 만에 서울과 칠장사 등에서 소방서로 3통의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날 자승 스님의 전화는 몇 초에 불과했지만 인사와 당부, 그리고 짧은 영상통화, 무엇보다 ‘칠장사’라는 위치를 전하는 자승 스님의 목소리가 정확히 전달 된 후 끊어졌다는 것이 공통된 전언이다. 불길이 선명한 영상 속 자승 스님의 목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하고 여여했으며 삶과 죽음에 초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에서 죽음은 회피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과 사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과 열반이 궁극적 과제다. 그렇기에 불교는 생과 사를 함께 언급하고 ‘생사일대사인연’을 해결하는 것을 수행 목적으로 삼았다.
“종무행정의 중심에서 세속의 권력과 맞서거나 때로는 손잡아야 했던 자승 스님에게는 이판과 사판의 면모가 함께 존재했었다”는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오랜 시간 가까이서 지켜본 자승 스님에게서 선사의 면모를 읽어냈다. “스님은 역대 처음으로 총무원장을 두 차례나 지내는 입지전적 행적으로 세간인들에게는 늘 종권의 중심, 그 자체로 인식돼 있었다”며 “그러나 오래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승 스님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속에서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심으로 일하며 대중 속에서 중도의 이치를 깨닫고 실행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상월결사 총도감 호산 스님의 전언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자승 스님에게 총무원장으로서의 모습, 행정승의 모습만 있었다면 상월선원 천막결사에 함께 할 결심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총무원장 소임을 놓으신 후 수행자로 회향하려는 그 모습을 따르고자 했으며, 천리순례·인도순례를 하며 많은 대중에게 숨김없이 드러낸 자승 스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에게서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평가는 자승 스님의 일생 행적 곳곳에서 보여지는 치열한 수행자의 면모와도 상통한다. 젊은 시절 군복무를 마친 자승 스님은 ‘군대물’을 빼고 ‘중물’을 들이기 위해 1979년 겨울, 설악산 봉정암에 들었다. 사람 키만큼 폭설이 쌓이고 그치지 않는 칼바람이 체감온도를 영하 30~40도까지 끌어내리는 봉정암에서 25살의 자승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새벽·오전·오후·저녁까지 하루 네 번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기도했다. 꼬박 5개월을 정진하고 봄이 되어서야 봉정암을 내려왔다.
그 혹독한 겨울과 맞섰던 결연함은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사판승’ ‘입지전적 인물’로 세간에 각인된 후에도 몸속 깊숙한 곳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총무원장 소임에서 물러난 자승 스님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를 찾아 무문관에 들었다. 굳게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스님은 하루 한 끼 공양에 의지해 정진했다. 유나 영진 스님은 “수행처에서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두 차례 났다”며 “곡기와 잠을 끊고 1주일간 정진하다가 두 번이나 쓰러졌다는 말을 해제 후에야 듣게 됐다”고 전한 바 있다. 영진 스님은 “무문관에서 나올 때 자승 스님의 몸무게가 17kg이나 줄어 있었다”며 “이처럼 혹독한 수행은 나로서도 평생 처음 보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생사를 건 수행은 2년 후인 2019년 11월 상월결사 천막결사로 이어졌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한겨울 도심의 콘크리트 밀림 한복판 천막에 스스로를 가뒀다. 극한에 가까운 90일의 정진이 끝났을 때 자승 스님을 포함한 아홉 스님의 정진대중은 낙오자 하나 없이 산문을 나섰다. 혼자 이어왔던 치열한 수행이 대중의 수행으로 회향된 첫 순간이었다.
이듬해 10월 ‘국난극복 자비순례’, 2021년 ‘삼보사찰 천리순례’, 2022년 ‘생명평화 방생순례’를 이어가며 움직이는 수행, 활발발한 대중정진의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2023년 43일간 1167km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통해 그 모든 정진의 결실을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전법선언으로 회향했다. 세간을 향한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도 자승 스님이 남긴 말은 ‘부처님 법을 전하자’는 당부였다.
동국대 건학위원장 돈관 스님은 “소신으로 보이신 그 뜻이 무엇인지 남아있는 사람들이 잘 헤아려야 한다”며 “인도순례를 통해 전법 없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직접 보고 보여주고자 하셨으며 전법선언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또한 직접 보여주셨다. 불교의 미래를 위한 전법에 사부대중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확연히 보이신 것”이라고 말했다.
세간의 눈에 자승 스님의 입적은 벼락같은 소식이었다. ‘왜’라는 온갖 추측이 넘쳐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라는 팩트에 집중해야 하고 어떤 ‘메시지’인지 묻고 물어야 한다. 이(理)와 사(事)를 넘나들었던 불교지도자이며 수행자였던 자승 스님이 던진 메시지에 불교중흥과 전법의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댓글 37개
불자라고 한다네
사람의 죽음앞에
스님의 죽음앞에
추모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지 못할지라도
참으로
비겁한 인간의 탈을 쓴 그들
민주적인라는
양심적이라는
개혁적인이라는
시민이나 국민이나 불자를 위한다는 말과 글로
인간딥지도
불자답지도 않게
참으로
그분의 불교중흥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 입니다답글 작성
뭘 그렇게 미화를 시켜려 날리냐? 큰스님 놀이 잘하다가 죽어서도 대접 잘받고 갔잔아
그럼 됐다.답글 작성
에고를 없애려 하는 것이 에고이기 때문에, 에고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렴 에고의 소멸이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에고를 벗어났다는 말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에고[생각] 틀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그 생각 속의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Now)"은 생각,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는 자리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에고도 없습니다.
이게 에고를 없애는 방법입니다.
'나[에고]'라는 망상이 사라지면,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필요한 애씀과 저항이 사라지면서 저절로 깨침[행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답글 1
짧은 시간에 이리 많은 댓글 ?..
하나가 돌려가며 오지게 써댓나보다
티좀 안나게 써봐라 틀딱들아 ㅋㅋㅋㅋ
애쓴다.. 안쓰럽고답글 작성
제가 감히 한말씀 드리게 되어서
불교가
특히 한국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화합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때 부터인가
시대흐름속에서
불교에도 진영논리
진영갈등이 펼쳐 지고 있는듯 합니다
자기 집단에 이익 안되다면
사실을 보고도, 알고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것이 아니라
무조건
비방하고 욕하고
자기반성이나 자기의 허물은 전혀 없는것 처럼
스님이라면
잠다운 불자라면
먼저 자기의 삶을 비추워 허물을 얘기하고 난 후
상대방의 부족함이나 허물을 논할것인데
바른 변화는 자기의 철저한 반성으로
시작됨을 충분히 인식하고
비방이나 지적보다는
한번쯤은 칭찬하고 포용하는 마음으로
참다운 자기 자기 자신되었쓰면 합니다
죄송합니다답글 작성
자승스님의 소신의 불이 대학생 전법이라는 큰 불길로 퍼져나가길 발원합니다.답글 작성
천주교와 야합한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미국세력을 등에 업고 조직적으로
베삭데이 축하 행사 진압과 많은 사람들 총살 등
불교를 적극 탄압했고 독재정치와
친인척들의 대규모 비리와 부정부페에 맞서
사이공 캄보디아 대사관 앞에서 가부좌로 분신 소신공양
미국 저널리스트 맬컴 브라운이 전세계로 보도 플리처상 수상
소신공양 하기전
내가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하고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
신체의 특성상 불에 타게 되면 다들 앞으로 넘어지는데
정좌한 자세에서 타는 중 앞으로 약간 숙여 졌으나
끝네 뒤로 쓰러 졌었다.
주변 경찰관도 절을
남은 시신을 화장을 하였으나 심장은 타지 않고 사리로...
독재정권은 무너졌고,답글 작성
그렴 에고의 소멸이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에고를 벗어났다는 말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에고[생각] 틀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각이 붙지 않는 無心(無我) 자리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에고도 없습니다. 이게 에고를 없애는 방법 아닌 방법입니다.답글 작성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생사 없다에 속아
생사 없는 곳 따로 찾았나
구한다 조차 끊어졌으니
사라질 인연 다시 있으랴답글 작성
뭐가 이리도 사람을 힘들게 만들었을까요?
우린 한佛제자 아닌가요?
자승스님께 불만있으신 불자님들은 털어 먼지안나는 인생을 살고계시나요?
각자의 자리에서 본분에 충실하고ᆢ
승가의 잘못은 승가에서 ᆢ
전ᆢ 이번일을 겪으면서ᆢ 비판을 하는 분들의 의중이 궁금하며ᆢ
한국불교가 왜? 이리 되었는지ㅜ
왜 상대의 탓만 하나요? 아픕니다ᆢ
비판하는분들 또한 한국불교?를 걱정하시는분들이시겠죠ᆢ
그럼 그대들은 한국불교를 위해서 무엇을 하나요?
보시? 기부? 봉사?답글 작성
사찰이나 교회가 성도가 많고 적음은 세상적인 걱정이에요. 수가 적고는 표층적인 생각이다.
깨달음을 성취한 修行者나 佛子가 있다면 거기가 도량(道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법(傳法)합시다" 대체 뭘로 전법하시렵니까?
깨달아야 전법할 수 있어요. 깨닫지 못하는 전법이 불가능 해요.
선방(禪房)에 다닐수록 더 못 깨달아요. 조계종 선방에서 깨달은 사람이 대체 몇사람이나 나왔냐요? 고시원을 차렸으면 합격생이 나와아 그나마 변명이라도 하지?
서점에 가 보시라 서양에서 깨달으신 서양의 깨달음 체험자들의 책들이 즐비하다.
한국 불교는 깨어나야 한다. 조계종 스님들이여! 제발 정신차리세요. 심각하게 받아들이세요.
한국 불교는 대변혁(大變革)의 시기가 도래된답글 작성
영결식에서 보았던 당신의 생전 영상의 말씀이 그 전법의 불교중흥으로 일관되셨음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살아남은 저희 불자가 스님의 목숨바쳐 호소하신 그 가르침 실천하여 불교중흥의 국토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답글 작성
정법당간을 세우고자
일신을 소신하신 스승님이시어!
일찍이
불법의 한자락조차
맛보지 못하였던 자들이
진실과 거짓조차
혼돈하는 자들이
세상과 교단을 어지럽히면서
짐짓, 선지자연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참람한맘으로
저희 제자는
참회하고 참회하나이다
왕생극락하시옵소서- !답글 작성
소설이라고 댓글 쓰신분
삼악도에 떨어질것 입니다
기자의 양심으로
입적한신 스님을 위해서
소설을 쓰겠습니까
진정한 불자라면
그러시면 안됩니다
먼저 참다운 마음가짐 으로
세상을 보시고 살아 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답글 3
어쨋든 자승이가 사라진 것은 불행중 다행이다 문제는 앞으로라도 좀 잘 할 수 있느냐다.답글 작성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님. 매일 축원 드립니다.
몸 바꾸셔서도 한국불교를 향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으로 다시 만나 뵙길 청합니다.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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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의 슬픔과 욕심이 이러할까요?
마지막까지 전법을 위해서 보여주시고 가신 그 열반!!!
사진을 볼때마다 그 결연하고 온화한 눈빛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듭니다.
유지 받들어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답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