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원각사지 십층석탑
이 곳에 몇번을 방문했는데 웬지 문화재인 국보 석탑이 방치된 느낌이다. 원각사는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 본사로 세웠졌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금은 '원각사‘라는 이름도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라는 이름도 잊혀지고 지금은 그저 '탑골공원'이라 불린다. 이 석탑은 세조가 회암사에서 부처님의 사리가 분신(分身)하는 이적(異蹟)을 보고 분신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수양대군 시절부터 아버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세조는 이 석탑에 언문으로 된 원각경을 사리와 함께 봉안한다. 이 언문 원각경을 찍어내는데 필요한 금속활자(을유자)는 2021년 6월 서울 인사동 피맛골 땅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금속활자는 1465년 세조가 원각사를 세우면서 ‘원각경’을 간행하려고 만든 금속 활자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세조가 죽은 후 유자(儒者)들은 원각사탑이 한성의 경관을 해치는 매우 흉물스런 건축물이라며 철거하려고 했다. 결국 연산군은 원각사를 부수고 승려를 내쫓았으며 심지어 이 곳을 기생집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유생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가 1880년대 문호 개방과 함께 들어온 서양 인들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진다. 이들은 백색의 석탑이 홀로 솟은 기이한 경관(奇觀)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석탑을 촬영하여 한양의 명물로 소개하였다.
원각사지 십층석탑 근처에는 보물 3호로 지정된 대원각사비가 있다. 비문은 김수온(신미스님의 동생), 성임이 썼고 글씨는 강희맹, 정난종이 썼다. 세조가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옛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를 지은 내력이 쓰여있다.
이 곳은 세조와 연산군등의 조선왕들의 역사, 조선시대에 불교의 흥망성쇠, 훈민정음이 대중들에게 퍼지는 과정, 실학자 박지원등이 이곳 주변에 살아서 그들을 '백탑파'라고 불렸다는 이야기 그리고 1919년 일제 강점기에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고 소개하기 좋은 곳이다. 지금 석탑은 산성비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유리로 덮여있어 석탑을 온전히 감상할 수 없고 사진도 제대로 찍을 수 없다. 마땅히 이음새가 없는 투명한 재질로 교체되어야 한다.
탑골공원 담장 넘어 인사동에는 매일 외국인 관강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원각사지 석탑을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없다. 탑골공원의 담장을 허물고 석탑 근처에 문화재 해설사를 상주하게 해야한다. 이곳에서는 한국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조선의 역사, 훈민정음과 인쇄술, 독립운동과 삼일운동등을 알릴 수 있다. 원각사라는 이름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잊게 만들었다. 이제는 문화재를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활용하고 창조하는 시대다. 국보 2호(석탑)와 보물 3호(비석)를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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