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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어머니를 기억하며

 

 '사평역에서' 곽재구 시인

https://www.youtube.com/watch?v=PYKrjs_BbUM 

 

 

 

 

어머니를 기억하며

 

1937년생 김정숙여사는 충남 연기군 전동면 청송리 2(대자마을)에서 오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사실 외할머니는 십남매를 낳으셨는데 다섯이 죽고 다섯만 살아남은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한다.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는 초등학교 문턱에 들어가보지도 못하여 일생동안 한글을 모르고 살았다. 일찍이 천원군 성거읍에 사는 정()씨와 결혼하여 삼남매를 두었다. 기차사고로 남편을 잃고 나서야 뱃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걸 알았다. 아비없이 태어난 아이가 돌이 지나자, ‘연기군 서면에 사는 홍()씨에게 두 번째 시집을 갔다. 11살난 큰 딸은 작은 집에 맡기고 작은 딸과 돌이 지난 사내아이만을 데리고 갔다. 남편 홍()씨는 어머니보다 스물다섯이 많았다. 삼십년을 살면서 남매를 낳았지만 혼인신고를 하지않았다. 나는 이 사실을 장례식을 치르며 알았다.

 

어머니를 삼십년동안 동거인으로만 데리고 살았다는 것은 어머니가 데리고 자식들을 한번도 아들 딸로 생각하지 않았다는게 아닐까? 초등학생이었던 작은 누님은 소 한마리 값을 받고 홍()씨가 낳은 딸들집에 식모로 보내졌고, 나는 한번도 아버지에게 매를 맞거나 야단 맞아 본 적이 없다. 어느날 아버지가 나를 때리려다 으이그, 니 동생만 같았어도...”라며 손을 내릴 때, 맞지 않아서 좋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함 같은 것을 느꼈다. 명절날 산소에 가서 내 동생이 절을 하는데, 아버지가 내게는 절 하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동생을 따라 뒤늦게 절을 하였지만 나에게는 왜 절 하라는 말을 안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세상 물정이 없어서 아버지와 성이 다르고 내동생들과 성이 달라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고 홍()씨를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다.

 

 

홍(洪)씨 남편과 사별한 김정숙여사는 68살에 임()씨와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임()씨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자 어머니는 다시 홀로되어 둘째 아들이 사는 광양에서 살았다. 재작년에 나는 광양으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남도의 사찰을 참배했다. 그때 어머니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외할머니에게 구박 받은 응어리, 교통사고 난 외삼촌을 돌보지 않은 죄책감, 배우지 못한 한....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에게서 이야기가 두서 없이 터져나왔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황소 같은 분이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도 꿋꿋이 살아내는 낙타같은 여인이다. 가난한 살림속에서 수퍼우먼처럼 자식을 기르고 교육시켰다. 고구마, 감자, 가지, 오이, 열무, 옥수수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시장에 내다 팔았다. 옆집 아저씨가 경운기로 우리밭을 반나절 갈아주면 어머니는 품앗이로 삼일동안 그 집에 가서 일을 해주었다. 남자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강인함, 억척스러움, 세상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내 어릴적 머리맡 첫 기억은 어머니의 울음소리다. 부부싸움으로 울고, 도망가다가 잡혀와서 울고, 송아지가 쥐약을 먹고 죽어서 울고, 당신의 팔자가 사나와서 울고...

 

한편으로 어머니에게는 태생적으로 유쾌함과 천진난만함이 있었다. 우스갯소리를 잘 했다. 가슴에 쌓인 한을 해학으로 녹여 내었다. 당신에게서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어머니를 통해서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고, 슬픔을 알았고, 절망과 한탄 그리고 해학을 알았다. 젊은 나이에 감행한 나의 출가는 어쩌면 일정 부분,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화장장에서 어머니가 한줌의 재가 되어 나오니 새롭게 확인되는게 있다. 태어날 때 탯줄에 연결되어 있었듯이 나는 세상에 나와서 언제나 엄마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외로움속에서 방황할 때도, 선방에서 참선공부를 할 때도, 배낭여행자로 인도를 떠돌 때도, 내가 그리는 그림은 항상 어머니를 배경으로 하여 펼쳐졌다는 것을...

 

지금은 이월(二月), 아직 목련(木蓮)이 봉우리를 열지 못하듯이, 나의 슬픔은 터져나오지 않는다. 봄 나무들이 수액을 빨아 올리듯이 다만 슬픔이 차오르고 있다.

괴로움에서 믿음이 생겨난다고 했던가? 어머니가 보여주신 고달픈 삶, 그 여정을 기억하는 나에게 어머니의 모든 것은 이제야, 나에게 사랑으로 닻을 내리고 있음을 알게된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꽃 기르는 것을 좋아하고, 잘 울고, 웃음 많고, 인정 많고, 남자 친구도 잘 사귀는 나의 어머니,

당신이 보여준 어느 아픔도, 어느 고통도, 어느 웃음도 내겐 사랑이었어요!“

나의 어머니여서 고마웠어요. 나의 어머니여서 자랑스러웠어요.“

 

고단했던 기억은 한바탕 웃음으로 털어내시고 천상세계로 가셔요.

다음 생에는 천상(天上)의 복락(福樂)을 누리셔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엄마 안녕! ()

 
 
 

 
 
 
 

 

어머니를 기억하며 듣습니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시인    https://www.youtube.com/watch?v=PYKrjs_B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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