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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염처경 선바라밀 선가귀감 비교

2022년 동안거에 백장선원대중들은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의 수행법을 비교' 해보자는 마음에서 초기불교의 '대념처경'과 천태의 '선바라밀'과 선의 '선가귀감'을 공부하였다.그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 16단계

 

18.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1)

 

 

19.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해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Pīti­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pīti­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2)

 

 

20.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Cit­t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samādah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samādah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3)

 

 

21.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anicc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4)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과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에서 설명하는 16단계를 비교해보자.

들숨날숨: "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安般守意: "1즉시 스스로 숨이 길음을 아는 것, 2곧 스스로 숨이 짧음을 아는 것, 3곧 스스로 숨이 몸을 움직임을 아는 것, 4곧 스스로 숨이 미세(微細)함을 아는 것(卽時自知喘息長;卽自知喘息短;卽自知喘息動身;卽自知喘息微)

 

 

들숨날숨:"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해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安般守意: 5곧 스스로 숨이 상쾌함을 아는 것, 6곧 스스로 숨이 상쾌하지 못함을 아는 것, 7곧 스스로 숨이 멈춤을 아는 것, 8곧 스스로 숨이 멈추지 않음을 아는 것(卽自知喘息快;卽自知喘息不快;卽自知喘息止;卽自知喘息不止)

 

 

들숨날숨:"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安般守意: 9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꺼움을 아는 것, 10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껍지 않음을 아는 것, 11곧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만물이 이미 없어져 다시 숨을 얻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아는 것, 12안으로 다시 생각할 바 없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卽自知喘息歡心;卽自知喘息不歡心;卽自知內心念萬物已去不可復得,喘息自知 ,內無所復思,喘息自知)

 

 

들숨날숨:"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安般守意: 13생각하는 바를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14생각하는 바를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15신명(身命)을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16신명을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棄捐所思,喘息自知;不棄捐所思,喘息自知;放棄軀命,喘息自知;不放棄軀命,喘息自知)

 

 

평가:  "곧 스스로 숨이 멈춤을 아는 것(卽自知喘息止)"은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의 번역인데 이해하기 힘들다. 중아함(1-81)  염신경에서도 "몸에 드는 숨의 그치기를 배우고(學止身行息入) 입에서 나는 숨의 그치기를 배운다(學止口行息出)라고 번역하였다.' 한문으로된 책을 이용하여 호흡수행을 해야 했던 예전의 선배수행자들은 이러한 부정확한 번역에 몸시 혼란스러워 했을 것 같다. 숨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숨을 멈추거나 숨을 그치는 것을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오해하고 그런 수련하였다면 정말로 바른 수행이 어려웠을 것이다. '한역으로 읽는 알아차림의 확립수행85p'(아날랄요)에서는  들이쉬면서 몸의 형성[身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배우고, 내쉬면서 몸의 형성을 고요하게 하 는 것을 배운다."라고 번역한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에서 들숨날숨을 설명하는 것이 특이하다.

"안()은 몸이고, ()은 숨[]이며, 수의(守意)는 도()가 된다." 

"()은 생겨남[]이고, ()은 멸함[]이며, ()는 인연이 되고, ()는 도가 된다."

"()은 셈[]이고, ()은 서로 따름[相隨]이며, 수의(守意)는 그침[]이 된다."

"안(安)은 죄를 피하는 것이고, 반(盤)은 죄에 들지 않는 것이고,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을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특이함을 넘어 괴상하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에서 호흡관찰하는 것을 농사짓는 것과 비교하는 부분도 있는데 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비유와 달라서 혼란스런기는 마찬가지다. 
"숨을 세는 것은 땅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보습이 되며, ()는 멍에가 되고, ()은 씨앗이 되며, ()은 비가 되고, ()은 행함이 되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일로 마침내 도를 따르는 것이다.數息爲地相隨爲犂止爲軛觀爲種還爲雨淨爲行如是六事乃隨道也"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양심은 [연결하는] 막대기이고, 마음은 노끈입니다. 나의 마음챙김은 보습과 몰이막대입니다.  “몸을 수호하고 말을 보호하고 뱃속에 들어가는 음식량을 제어하고, 진리는 잡초 뽑은 갈고리로 사용하여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정진이야말로 짐을 실어 나르는 황소로서 열반으로 실어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밭갈이를 다 해마치고 불사의 열매를 거두게 되니 이러한 밭갈이를 마치고 나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풀려납니다.“까시 바라드와자 경 (S7:11)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密次第禪門)

천태지의가 지은 선바라밀은 선학입문을 통해 공부하였다. 천태지자는 《차제선문》은 《대안반수의경》, 《선비요법경》, 《좌선삼매경》, 《달마다라선경》 등 선정 수행법을 중점적으로 설명한 경전과 《구사론》, 《대지도론》 등의 논서를 참조해 선바라밀을 강설했다고 하는데 경을 인용할때 인용부호나 어떤 표시를 하지 않아서 모든 내용이 천태지자의 개인 의견이 되어 경전의 권위가 사라졌다.  천태지자는 오시팔교(五時八敎)를 설명하며 오시를 제1 화엄시, 제2 녹원시[아함시], 제3 방등시, 제4 반야시, 제5 법화열반시로 설명하여 요즘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오시(五時)로 불교를 설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천태는 또한 중국의 음양오행을 경전에 삽입하는 과감성도 보여주는데 이런 것들은 불교가 당시 중국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스리랑카스님들이 니까야에 스리랑카 사상이나 문화를 첨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중국인들은 모방을 넘어 창조하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보인다.
 "이에 간장은 혼魂 을 간직하고, 폐장은 백魄을 간직하고, 신장은 의지(志)를 간직하고, 심장은 신神을 간직하고, 비장은 뜻(意)을 간직한다. 사대가 화합하여 오행五行 이 성취되면 뼈로 기틀을 잡고, 골수로 기름칠을 하고, 힘줄로 봉합하고 핏줄로 관통하고, 피로 윤택하게 하고, 살로 감싸고, 피부로 덮는다. 이러 한 인연으로 곧 머리 몸 · 손 · 발의 여섯 신체 부위가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근본세간과 의세간이다."( 於是肝藏魂。肺 藏魄。 腎藏志。 心藏神。 脾藏意。 四大和合。 五行成就。 骨以柱之。 髓以膏之。 筋以縫之。 脉以通之。 血以潤之。 肉以裹之。 皮以覆之。 以是因緣。 即有頭 身手足六分之軀。 此則根本義世間)" (선학입문 104p)
 

넷째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다.(四調氣息)라는 부분에서는 니까야에 나오지 않는 상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논에서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흡에는 풍상風相·천상喘相·기상氣相· 식상息相의 네 가 지 상相이 있다코로 쉬는 숨을 마음으로 지각할 때들어오고 나가며 소리가 나는 것을 풍상風相이라 하고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나가고 들어오는 기운이 맺히고 막혀 통하지 않는 것을 천상喘相이라 하며소리도 없고 맺힘도 없지만 들어오고 나감이 미세하지 않은 것을 기상氣相이라 한다이 세 가지는 조화롭지 못한 모습이다이를 조절하지 않고 좌선하면 병이 쉽게 생기고 마음이 고요해지기 어렵다이를 조절하려면 세 가지 법을 사용해야 한다첫째마음을 가라앉혀 안정시키는 것이고둘째신체를 느슨히 하는 것이며셋째온몸의 털구 멍으로 두루 호흡해 출입에 장애가 없이 잘 통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그 마음을 세밀하게 하고 호흡을 미미하게 해 호흡이 조절되면 온갖 병이 생기지 않고 그 마음이 쉽게 안정된다식상息相이란 소리가 나지 않고 맺히지 않으며 거칠지도 않은 호흡이다있는 듯 없는 듯 출입이 면면히 이어져 정신이 안온해지고 마음에 기쁨이 생기도록 돕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선학입문166p

 

염려스러운 부분은 무상을 관하는 것(觀無常)에서 부터,  나가서 흩어지는 것을 관하는 것(觀出散), 욕망을 관하는 것(觀欲) ,멸함을 관하는 것(觀滅), 포기하고 버림을 관하는 것(觀棄捨)을 모두 무색계정으로 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멸함을 관하는 것(nirodhānupassī)등을 무소유처정에 배대함으로서 위빠사나의 작용을 무색처정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천태지자가 스스로 수행체험이 없이 이 책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다섯째, 멸함을 관하는 것은 무소유처정을 대치한다. 불용처정은 무위법의 경계를 반연하므로 마음이 무위와 상응한다. 따라서 범부가 이를 얻으면 버릴 수가 없다. 지금 "멸함을 관찰한다"고 한 것은 이 선정을 얻었을 때 식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식이 비록 적긴 하지만 역시 수 · 상· 행 · 식의 사온이 화합한 무상하고 무아인 법이니 물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第十五觀滅。 對無所有處者。 不用處定。 綠無為法塵。 心與無為相應。凡夫 得之不能捨離。 今言觀滅者。 得此定時。 覺有少識。 此識雖少。 亦是四陰和合。無常無我之法。 不可染著也)"

 

 

 

선가귀감(禪家龜鑑)

청허휴정의 선가귀감은 불성과 청정심을 기반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이러한 자성청정심은 초기불교의 사상과 거리가 있어보이는데 요즘 학자들은 이러한 자성청정사상이 니까야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들로부터 벗어났다.(pabhassaram 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 ti. pabhassaram 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vippamuttan ti) -A1:10-

 

그러나 이것이 빛나는 마음은 '자성청정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오염원이 없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일수 있다. "비구들이여 , 그와 같이 마음에는 다섯가지 오염원(불순물) 이 있나니 , 그 오염원(upakkilesa)에 오염되면 마음은 부드럽지도 않고 다루기에 적합하지도 않고 빛 나지도 않고 잘 부서지며 번뇌들(Asava)을 멸진하기 위한 바른 삼매에 들지 못한 다. 무엇이 다섯인가? 비구들이여 . 감각적 욕망 대한 욕구는 마음의 오염원(cittassa upakkilesa)이다 이 러한 오염원에 오염되면 마음은 부드럽지도 않고 다루기에 적합하지도 않고 빛나 지도 않고 잘 부서지며 번뇌들(Asava)을 멸진하기 위한 바른 삼매에 들지못한다. 비구들이여, 악의는..해태와 혼침은..들뜸과 후회는..의심은 마음의 오염원이다."

 

또한 아잔 브람, [놓아버리기] 164쪽 '호흡명상의 경'에서 고요하게 멈춘 마음을 방문 하는 니밋따에 관한 설명처럼

" 이 수행단계에서 여러분이 보는 반영은 니밋따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마음의 반영입 니다. 여러분은 모든 먼지와 때가 깨끗하게 닦인 거울 속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니밋따 또는 선정을 통해서만 마음을 직접 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라는 설명처럼 '니밋따'를 표현하는 문장일수가 있다.

 

선가귀감은 불성, 자성청정심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나의 그 무엇[一物]이 여기에 있다(有一物於此). 그것은 본래부터 밝디밝으며 신령스럽고 신령스럽지만(從本以來, 昭昭靈靈) 생성한 적도 없고 소멸한 적도 없으니(不曾生, 不曾滅)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려 나타낼 수도 없다.(名不得, 狀不得)"

그런데 이러한 자성청정심을 유가(儒家)의 일태극(一太極)이나 도가(道家)의 천하모(天下母)와 같다고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유·불·도 삼교의 성인들이 모두 이 구절로부터 나왔으니(三敎聖人, 從此句出), 유가(儒家)에서는 일태극(一太極)이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천하모(天下母)라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일물(一物)이라 한다."

 

이러한 삼교회통사상은 숭유억불시대의 자구책으로 봐줄수도 있겠지만 그런 표현이 현대의 종교평화선언(아소까 선언)으로 이어지는것을 보더라도 그 위험성은 충분하다고 알수있다.아소까선언에서는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는 표현을 쓰고있다.

 

자성청정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부처님이 가르치신 점짐 적인 수행법을 소승이라 폄해하고 대승보살은 끊을 번뇌가 없다고 말한다.

"(54)번뇌를 끊는다는 생각으로 수행하는 이를 성문 연각의 소승이라 하거니와(斷煩惱者를 名二乘)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끊을 번뇌가 없는 것을 대열반이라한다.(煩惱不生 名大涅槃)"

 

그러면서도  "(24)참선은 반드시 세 가지 중요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니, 첫째 큰 신심이 있어야 하고(有大信根), 둘째 분발하는 뜻이 있어야 하며(有大憤志), 셋째 큰 의정을 내는 것이다.(有大疑情) 이 가운데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처럼 마침내 폐기가 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은 모순이라 할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데 어찌 다시 신심을 내라하며, 분심을 내라하며, 의심을 내라하는가? 

 

더구나 그러한 자성청정심을 신회(神會)선사가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며,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불생불멸하는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오해되고 있으니 자성청정심의 표현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본다. 불생불멸하는 아트만과 다를바가 없게 되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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