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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긴 경(M43)Mahāve­dalla­sutta

(M43)“Yā cāvuso, vedanā yā ca s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ime dhammā saṃsaṭṭhā, no visaṃ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ṃ dhammānaṃ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ṃ. Yaṃ hāvuso, vedeti taṃ sañjānāti, yaṃ sañjānāti taṃ vijānāti. 

 

(M18)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 yaṃ sañjānāti taṃ vitakketi, yaṃ vitakketi taṃ papañceti, yaṃ papañceti tatonidānaṃ purisaṃ papañ­ca­saññā­saṅ­khā samudācaranti atī­tā­nāga­ta­pac­cup­pan­nesu cak­khu­viññeyyesu rūpesu.

 

 

교리문답의 긴 경(M43)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때 마하꼿티따 존자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 사리뿟따 존자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서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물었다.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Atha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sāyanhasamayaṃ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yenāyasmā sāripu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tā sāriputtena saddhiṃ sammodi.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ntaṃ sāriputtaṃ etadavoca:

 

2. 󰡒도반이시여, 󰡐통찰지가 없는 자, 통찰지가 없는 자󰡑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통찰지가 없는 자󰡑라고 합니까?󰡓

󰡒도반이시여,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한다, 꿰뚫어 알지 못한다.󰡑고 해서 통찰지가 없는 자라 합니다. 그가 무엇을 꿰뚫어 알지 못할까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도반이시여, 󰡐그는 꿰뚫어 알지 못한다. 꿰뚫어 알지 못한다.󰡑고 해서 통찰지가 없는 자라 합니다.󰡓

󰡒장하십니다, 도반이시여.󰡓라고 마하꼿티따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설명을 환희하고 기뻐하면서 사리뿟따 존자에게 또 다시 질문을 했다.

“‘Duppañño duppañño’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duppaññoti vuccatī”ti?

“‘Nappajānāti nap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duppaññoti vuccati. Kiñca nappajānāti? ‘Idaṃ dukkhan’ti nap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nap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nap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nappajānāti. ‘Nappajānāti nap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duppaññoti vuccatī”ti.

“Sādhāvuso”ti kh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ṃ abhinanditvā anumoditvā āyasmantaṃ sāriputtaṃ uttariṃ pañhaṃ apucchi: 

 

 

3. 󰡒도반이시여, 󰡐통찰지를 가진 자, 통찰지를 가진 자󰡑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통찰지를 가진 자󰡑라고 합니까?󰡓

󰡒도반이시여, 󰡐그는 꿰뚫어 안다, 꿰뚫어 안다.󰡑고 해서 통찰지를 가진 자라 합니다. 그거 무엇을 꿰뚫어 알까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그는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그는 꿰뚫어 압니다. 도반이시여, 󰡐그는 꿰뚫어 안다. 꿰뚫어 안다.󰡑고 해서 통찰지를 가진 자라 합니다.󰡓

‘Paññavā paññavā’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paññavāti vuccatī”ti?

“‘Pajānāti 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paññavāti vuccati. Kiñca pajānāti? ‘Idaṃ dukkhan’ti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pajānāti. ‘Pajānāti pa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paññavāti vuccatī”ti.

 

 

4. 󰡒도반이시여, 󰡐알음알이, 알음알이󰡑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알음알이라고 합니까?

󰡒도반이시여,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합니다. 무엇을 분별해서 알까요? 󰡐즐거움󰡑이라고도 분별해서 알고, 󰡐괴로움󰡑이라고도 분별해서 알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라고도 분별해서 압니다. 도반이시여,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합니다.󰡓

‘Viññāṇaṃ viññāṇan’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viññāṇanti vuccatī”ti?

“‘Vijānāti vi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i. Kiñca vijānāti? Sukhantipi vijānāti, dukkhantipi vijānāti, aduk­kha­masu­khan­tipi vijānāti. ‘Vijānāti vi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ī”ti.

 

 

5. 󰡒도반이시여, 그러면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습니까, 혹은 분리되어 있습니까?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합니까?󰡓

󰡒도반이여, 그런데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꿰뚫어 아는 그것을 분별해서 알고, 분별해서 아는 그것을 꿰뚫어 압니다. 그러므로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ime dhammā saṃsaṭṭhā udāhu visaṃsaṭṭhā? Labbhā ca panimesaṃ dhammānaṃ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n”ti?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ime dhammā saṃsaṭṭhā, no visaṃ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ṃ dhammānaṃ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ṃ. Yaṃ hāvuso

, pajānāti taṃ vijānāti, yaṃ vijānāti taṃ pajānāti. Tasmā ime dhammā saṃsaṭṭhā, no visaṃ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ṃ dhammānaṃ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n”ti.

復問曰:「賢者拘絺羅!智慧及識,此二法為合為別,此二法可得別施設耶?」

尊者大拘絺羅答曰:「此二法合不別,此二法不可別施設。所以者何?智慧所知,即是識所識。是故此二法合不別,此二法不可別施設。」

 

6. 󰡒도반이시여,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이 결합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도반이여,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통찰지는 닦아야 하고 알음알이는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 차이점입니다.󰡓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imesaṃ dhammānaṃ saṃsaṭṭhānaṃ no visaṃsaṭṭhānaṃ kiṃ nānākaraṇan”ti?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imesaṃ dhammānaṃ saṃsaṭṭhānaṃ no visaṃsaṭṭhānaṃ paññā bhāvetabbā, viññāṇaṃ pariññeyyaṃ. Idaṃ nesaṃ nānākaraṇan”ti.

 

 

7. 󰡒도반이시여, 󰡐느낌, 느낌󰡑이라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로 느낌이라 합니까?󰡓

󰡒도반이여, 󰡐느낀다,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느낄까요? 󰡐즐거움󰡑이라고도 느끼고, 󰡐괴로움󰡑이라고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라고 느낍니다. 도반이여, 그러므로 󰡐그것이 느낀다,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고 합니다.󰡒

‘Vedanā vedanā’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vedanāti vuccatī”ti?

“‘Vedeti vedetī’ti kho, āvuso, tasmā vedanāti vuccati. Kiñca vedeti? Sukhampi vedeti, dukkhampi vedeti, aduk­kha­ma­su­khampi vedeti. ‘Vedeti vedetī’ti kho, āvuso, tasmā vedanāti vuccatī”ti.

 

 

8. 󰡑도반이시여, 󰡐인식, 인식󰡑이라고 말하는데, 무슨 이유로 인식이라 합니까?󰡓

󰡒도반이여, 󰡐인식한다,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인식할까요? 󰡐푸른색󰡑이라고도 인식하고, 󰡐노란색󰡑이라고도 인식하고, 󰡐붉은색󰡑이라고도 인식하고, 󰡐흰색󰡑이라고도 인식합니다. 도반이여, 그러므로 󰡐인식한다, 인식한다.󰡑고 해서 인식이라 합니다.󰡓

“‘Saññā saññā’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saññāti vuccatī”ti?

“‘Sañjānāti sañ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saññāti vuccati. Kiñca sañjānāti? Nīlakampi sañjānāti, pītakampi sañjānāti, lohitakampi sañjānāti, odātampi sañjānāti. ‘Sañjānāti sañ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saññāti vuccatī”ti.

 

 

9. 󰡒도반이시여, 그러면 느낌과 인식과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습니까? 혹은 분리되어 있습니까?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합니까?

󰡒도반이여, 그런데 느낌과 인식과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느끼는 그것을 인식하고, 인식하는 그것을 분별해서 압니다. 그러므로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Yā cāvuso, vedanā yā ca s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ime dhammā saṃsaṭṭhā udāhu visaṃsaṭṭhā? Labbhā ca panimesaṃ dhammānaṃ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n”ti? “Yā cāvuso, vedanā yā ca s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ime dhammā saṃsaṭṭhā, no visaṃ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ṃ dhammānaṃ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ṃ. Yaṃ hāvuso, vedeti taṃ sañjānāti, yaṃ sañjānāti taṃ vijānāti. Tasmā ime dhammā saṃsaṭṭhā no visaṃ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ṃ dhammānaṃ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n”ti.

復問曰:「賢者拘絺羅!覺、想、思,此三法為合為別?此三法可別施設耶?」

尊者大拘絺羅答曰:「覺、想、思,此三法合不別,此三法不可別施設。所以者何?覺所覺者,即是想所想,思所思。是故此三法合不別,此三法不可別施設。」(한문의 설명은 이해불가)

 

 

 

 

10. 󰡒도반이시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노의 알음알이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노의 알음알이로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를 알 수 있고,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를 알 수 있고,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알 수 있습니다.󰡓

Nissaṭṭhena hāvuso

, pañcahi indriyehi parisuddhena manoviññāṇena kiṃ neyyan”ti?

“Nissaṭṭhena, āvuso, pañcahi indriyehi parisuddhena manoviññāṇena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neyyaṃ, ‘anantaṃ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ṃ neyyaṃ,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ṃ neyyan”ti.

 

 

11. 󰡒도반이시여, 그러면 무엇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까?󰡓

󰡒도반이여, 통찰지의 눈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다.󰡓

“Neyyaṃ panāvuso, dhammaṃ kena pajānātī”ti?

“Neyyaṃ kho, āvuso, dhammaṃ paññācakkhunā pajānātī”ti.

 

 

12. 󰡒도반이시여, 그러면 통찰지는 무엇을 목적으로 합니까?󰡓

󰡒도반이여, 통찰지는 최상의 지혜를 목적으로 하고 통달지를 목적으로 하고 버림을 목적으로 합니다.󰡓

“Paññā panāvuso, kimatthiyā”ti?

“Paññā kho, āvuso, abhiññatthā pariññatthā pahānatthā”ti.

 

 

13. 󰡒도반이시여바른 견해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바른 견해가 생기는 데에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과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입니다. 도반이여, 이 두 가지 조건이 바른 견해를 생기게 합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ā”ti?

“Dve kho, āvuso,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a—parato ca ghoso, yoniso ca manasikāro. Ime kho, āvuso, dve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ā”ti.

復問曰:「賢者拘絺羅!幾因幾緣生正見耶?」

尊者大拘絺羅答曰:「二因二緣而生正見。云何為二?一者從他聞,二者內自思惟。是謂二因二緣而生正見。」

 

14. 󰡒도반이시여, 어떤 구성요소들의 도움으로 바른 견해는 마음의 해탈의 결실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오며, 통찰지를 통한 해탈의 결실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옵니까?󰡓

󰡒도반이여,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의 도움으로 바른 견해는 마음의 해탈의 결실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오며, 통찰지를 통한 해탈의 결실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옵니다.

도반이여, 여기 바른 견해는 계의 도움을 받고, 배움의 도움을 바고, 담론의 도움을 받고, 사마타의 도움을 받고, 위빳사나의 도움을 받습니다. 도반이여, 이들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의 도움으로 바른 견해는 마음의 해탈의 결실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오며, 통찰지의 해탈의 결실과 통찰지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을 가져옵니다.󰡓

“Katihi panāvuso, aṅgehi anuggahitā sammādiṭṭhi ceto­vimutti­phalā ca hoti ceto­vimutti­phalā­nisaṃsā ca, paññā­vimutti­phalā ca hoti paññā­vimutti­phalā­nisaṃsā cā”ti?

“Pañcahi kho, āvuso, aṅgehi anuggahitā sammādiṭṭhi ceto­vimutti­phalā ca hoti ceto­vimutti­phalā­nisaṃsā ca, paññā­vimutti­phalā ca hoti paññā­vimutti­phalā­nisaṃsā ca. Idhāvuso, sammādiṭṭhi sīlānuggahitā ca hoti, sutānuggahitā ca hoti, sākac­chā­nug­gahitā ca hoti, sama­thā­nug­gahitā ca hoti, vipassa­nā­nug­gahitā ca hoti. Imehi kho, āvuso, pañcahaṅgehi anuggahitā sammādiṭṭhi ceto­vimutti­phalā ca hoti ceto­vimutti­phalā­nisaṃsā ca, paññā­vimutti­phalā ca hoti paññā­vimutti­phalā­nisaṃsā cā”ti.

 

 

15. 󰡒도반이시여, 얼마나 많은 존재가 있습니까?󰡓

󰡒도반이여, 세 가지 존재, 즉 욕계 존재와 삭께 존재와 무색계 존재가 있습니다.󰡓

“Kati panāvuso, bhavā”ti?

“Tayome, āvuso, bhavā—kāmabhavo, rūpabhavo, arūpabhavo”ti.

 

 

16. 󰡒도반이시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중생들이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여기저기서 즐기기 때문에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습니다.󰡓“Kathaṃ panāvus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Avijjā­nīvara­ṇā­naṃ kho, āvuso,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tatra­tatrā­bhi­nandanā—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17. 󰡒도반이시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까?󰡓

󰡒도반이여, 무명이 빛바래고 명지가 생기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다.󰡓

“Kathaṃ panāvus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na hotī”ti?

“Avijjāvirāgā kho, āvuso, vijjuppādā taṇhānirodhā—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na hotī”ti.

 

 

18. 󰡒도반이시여, 무엇이 초선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초선이라 합니다.󰡓

“Katamaṃ panāvuso, paṭhamaṃ jhānan”ti?

“Idhāvuso,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idaṃ vuccati, āvuso, paṭhamaṃ jhānan”ti.

 

 

19. 󰡒도반이시여, 초선은 얼마나 많은 구성요소를 가졌습니까?󰡓

󰡒도반이여, 초선은 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졌습니다. 도반이여, 여기 초선을 증득한 비구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과 희열과 행복과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초선은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졌습니다.

“Paṭhamaṃ panāvuso, jhānaṃ katiaṅgikan”ti?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pañcaṅgikaṃ. Idhāvuso, 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bhikkhuno vitakko ca vattati,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evaṃ pañcaṅgikan”ti.

 

 

20. 󰡒도반이시여, 초선에서 얼마나 많은 구성요소들이 버려지고 얼마나 많은 구성요소들을 가지게 됩니까?󰡓

󰡒도반이여, 초선에서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버려지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게 됩니다. 도반이여, 여기 초선을 증득한 비구에게 감각적 욕망이 버려지고, 악의가 버려지고, 해태와 혼침을 버려지고, 들듬과 후회가 버려지고, 의심이 버려집니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과 희열과 행복과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이 있게 됩니다. 도반이여, 초선에서 이와 가팅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버려지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게 됩니다.󰡓

“Paṭhamaṃ panāvuso, jhānaṃ kataṅ­ga­vippa­hīnaṃ kataṅ­ga­saman­nā­gatan”ti?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pañcaṅ­ga­vippa­hīnaṃ, pañcaṅ­ga­saman­nā­gataṃ. Idhāvuso, 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bhikkhuno kāmacchando pahīno hoti, byāpādo pahīno hoti, thinamiddhaṃ pahīnaṃ hoti, uddhac­ca­kukkuc­caṃ pahīnaṃ hoti, vicikicchā pahīnā hoti; vitakko ca vattati,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evaṃ pañcaṅ­ga­vippa­hīnaṃ pañcaṅ­ga­saman­nā­gatan”ti.

 

 

21. 󰡒도반이시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이들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시여,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고, 무엇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까?󰡓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i, seyyathidaṃ—cakkhundriyaṃ, sotindriyaṃ, ghānindriyaṃ, jivhindriyaṃ, kāyindriyaṃ. Imesaṃ kho, āvuso, pañcannaṃ indriyānaṃ nānāvisayānaṃ nānāgocarānaṃ,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ā­naṃ, kiṃ paṭisaraṇaṃ, ko c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인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시여, 디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지만 마음이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고, 마음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다.󰡓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i, seyyathidaṃ—cakkhundriyaṃ, sotindriyaṃ, ghānindriyaṃ, jivhindriyaṃ, kāyindriyaṃ. Imesaṃ kho, āvuso, pañcannaṃ indriyānaṃ nānāvisayānaṃ nānāgocarānaṃ,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ā­naṃ, mano paṭisaraṇaṃ, mano c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

 

 

22. 󰡒도반이시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인 이들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인 이들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수명을 조건하여 존재합니다.󰡓“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seyyathidaṃ—cakkhundriyaṃ, sotindriyaṃ, ghānindriyaṃ, jivhindriyaṃ, kāyindriyaṃ. Imāni kho, āvuso, pañcindriyāni kiṃ paṭicca tiṭṭhantī”ti?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seyyathidaṃ—cakkhundriyaṃ, sotindriyaṃ, ghānindriyaṃ, jivhindriyaṃ, kāyindriyaṃ. Imāni kho, āvuso, pañcindriyāni āyuṃ paṭicca tiṭṭhantī”ti.

 

 

󰡒도반이시여, 수명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

󰡒수명은 온기를 조건하여 존재합니다.󰡓

“Āyu panāvuso, kiṃ paṭicca tiṭṭhatī”ti?

“Āyu usmaṃ paṭicca tiṭṭhatī”ti.

 

󰡒도반이시여, 온기는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

󰡒온기는 수명을 조건하여 존재합니다.󰡓

“Usmā panāvuso, kiṃ paṭicca tiṭṭhatī”ti?

“Usmā āyuṃ paṭicca tiṭṭhatī”ti.

 

󰡒도반이시여, 이제 우리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수명은 온기를 조건하여 존재하고, 온기는 수명을 조건하여 존재한다.󰡑라고. 도반이시여,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도반이여, 그렇다면 비유를 들겠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여기 어떤 지자들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할 것입니다. 도반이여, 예를 들면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불꽃에 의지하여 빛이 드러나고 빛을 의지하여 불꽃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이여, 이와 같이 수명은 온기를 조건하여 존재하고, 온기는 수명을 조건하여 존재합니다.󰡓

“Idāneva kho mayaṃ, āvus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ṃ evaṃ ājānāma: ‘āyu usmaṃ paṭicca tiṭṭhatī’ti. Idāneva pana mayaṃ, āvus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ṃ evaṃ ājānāma: ‘usmā āyuṃ paṭicca tiṭṭhatī’ti. Yathā kathaṃ panāvuso, imassa bhāsitassa attho daṭṭhabbo”ti?

“Tena hāvuso, upamaṃ te karissāmi; upamāya­pi­dhekacce viññū purisā bhāsitassa atthaṃ ājānanti. Seyyathāpi, āvuso, telappadīpassa jhāyato acciṃ paṭicca ābhā paññāyati, ābhaṃ paṭicca acci paññāyati; evameva kho, āvuso, āyu usmaṃ paṭicca tiṭṭhati, usmā āyuṃ paṭicca tiṭṭhatī”ti.

 

 

23. 󰡒도반이시여, 수명이라는 것은 느낌과 동일합니까, 아니면 수명과 느김은 서로 다른 것입니까?󰡓

󰡒도반이여, 그 수명은 느낌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수명이 느낌과 같은 것이라면 비구가 상수멸을 증득했을 때 그것에서 출정하는 것이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도반이여,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비구가 상수멸을 증득했을 때 그것에서 출정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Teva nu kho, āvuso, āyusaṅkhārā, te vedaniyā dhammā udāhu aññe āyusaṅkhārā aññe vedaniyā dhammā”ti?

“Na kho, āvuso, teva āyusaṅkhārā te vedaniyā dhammā. Te ca hāvuso, āyusaṅkhārā abhaviṃsu te vedaniyā dhammā, na yidaṃ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assa bhikkhuno vuṭṭhānaṃ paññāyetha. Yasmā ca kho, āvuso, aññe āyusaṅkhārā aññe vedaniyā dhammā, tasmā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assa bhikkhuno vuṭṭhānaṃ paññāyatī”ti.

 

 

24. 󰡒도반이시여, 얼마나 많은 법들이 이 몸을 떠날 때 이 몸은 마치 무정물인 통나무처럼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져서 누워있게 됩니가?󰡓

󰡒도반이여, 수명과 온기와 알음알이의 3가지 법들이 이 몸을 떠날 때 이 몸은 마치 무정물인 통나무처럼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져서 누워있게 됩니다.󰡓

“Yadā nu kho, āvuso, imaṃ kāyaṃ kati dhammā jahanti; athāyaṃ kāyo ujjhito avakkhitto seti, yathā kaṭṭhaṃ acetanan”ti?

“Yadā kho, āvuso, imaṃ kāyaṃ tayo dhammā jahanti—āyu usmā ca viññāṇaṃ; athāyaṃ kāyo ujjhito avakkhitto seti, yathā kaṭṭhaṃ acetanan”ti.

一者壽,二者暖,三者識。此三法生身死已,身棄塚間,如木無情。」

 

25. 󰡒도반이시여, 죽어 생을 마친 자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도반이여, 죽어 생을 마친 자는 몸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말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마음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수명이 다하고, 온기가 식어버리고, 감각기능들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그러나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는 몸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말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고, 마음의 작용들이 소멸하여 가라앉지만, 수명은 다하지 않고 온기가 식지 않고 감각기능들은 아주 분명합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죽어 생을 마친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의 차이점입니다.󰡓

“Yvāyaṃ, āvuso, mato kālaṅkato, yo cāyaṃ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imesaṃ kiṃ nānākaraṇan”ti?

“Yvāyaṃ, āvuso, mato kālaṅkato tassa kāy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vacī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citt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āyu parikkhīṇo, usmā vūpasantā, indriyāni paribhinnāni. Yo cāyaṃ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 tassapi kāy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vacī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citt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āyu na parikkhīṇo, usmā avūpasantā, indriyāni vippasannāni. Yvāyaṃ, āvuso, mato kālaṅkato, yo cāyaṃ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idaṃ nesaṃ nānākaraṇan”ti.

 

 

 

26. 󰡒도반이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잇습니다.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이들 네 가지 조건들이 있습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Cattāro kho, āvus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 Idhāvuso,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me kho, āvuso, cattār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27. 󰡒도반이시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즉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함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Dve kho, 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sabba­nimittā­nañca amanasikāro, animittāya ca dhātuyā manasikāro. Ime kho, āvuso, dve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28. 󰡒도반이시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함과 이 증득에 들기 전의 결심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ti?

“Tayo kho, 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sabba­nimittā­nañca amanasikāro, animittāya ca dhātuyā manasikāro, pubbe ca abhisaṅkhāro. Ime kho, āvuso, tay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ti.

 

 

29. 󰡒도반이시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함과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해서는 이들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Kati pan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vuṭṭhānāyā”ti?

“Dve kho, 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vuṭṭhānāya—sabba­nimittā­nañca manasikāro, animittāya ca dhātuyā amanasikāro. Ime kho, āvuso, dve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vuṭṭhānāyā”ti.

 

 

30. 󰡒도반이시여, 무량한 마음의 해탈과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과 공한 마음의 해탈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뜻은 같고 표현만 다른 것입니까?󰡓

󰡒도반이여, 방편이 있는데, 그 방편에 따라 이 법들은 그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르며, 방편에 따라서는 뜻은 같고 표현만 다릅니다.󰡓

“Yā cāyaṃ, 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 yā ca ākiñcaññā cetovimutti, yā ca suññatā cetovimutti, yā ca animittā cetovimutti—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udāhu ekatthā byañjanameva nānan”ti?

“Yā cāyaṃ, 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 yā ca ākiñcaññā cetovimutti, yā ca suññatā cetovimutti, yā ca animittā cetovimutti—atthi kho, āvuso,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atthi ca kho, āvuso,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ṃ.

 

 

31. 󰡒도반이시여, 어떤 방편이 있어, 그 방편에 따라서는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더불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면서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무량한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Katamo cāvuso,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Idhāvuso, bhikkhu mettā­saha­gatena cetasā ekaṃ disaṃ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ṃ, tathā tatiyaṃ, tathā catutthaṃ. Iti uddhamadho tiriyaṃ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ṃ lokaṃ mett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ṇena averena abyābajjhena pharitvā viharati. Karuṇā­saha­gatena cetasā … pe … muditā­saha­gatena cetasā … upekkhā­saha­gatena cetasā ekaṃ disaṃ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ṃ, tathā tatiyaṃ, tathā catutthaṃ. Iti uddhamadho tiriyaṃ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ṃ lokaṃ upekkh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ṇena averena abyābajjhena pharitvā viharati. Ayaṃ vuccat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

 

 

32. 󰡒도반이시여, 어떤 것이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Katamā c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

 

 

33. 󰡒도반이시여, 어떤 것이 공한 마음의 해탈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서 󰡐이것은 장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공하다.󰡑라고 숙고합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공한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Katamā cāvuso, suññat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iti paṭi­sañcik­khati: ‘suññamidaṃ attena vā attaniyena vā’ti. Ayaṃ vuccatāvuso, suññatā cetovimutti.

 

 

34. 󰡒도반이이시여, 어떤 것이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를 증득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를 일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 합니다.

도반이여, 이런 방편이 있어, 방편에 따라서는 이 법들은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릅니다.󰡓

Katamā cāvuso, animittā cetovimutti?

Idhāvuso, bhikkhu sabba­nimittā­naṃ amanasikārā animittaṃ cetosamādhi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āvuso, animittā cetovimutti. Ayaṃ kho, āvuso,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ime dhammā nānātthā ceva nānābyañjanā ca.

 

 

35. 󰡒도반이시여, 어떤 방편이 있어, 그 방편에 따라서는 이 법들은 뜻은 같고 표현만 다릅니까?󰡓

 

󰡒도반이여, 탐욕은 한계를 만들고, 성냄은 한계를 만들고, 어리석음은 한계를 만듭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들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도반이여, 모든 무량한 마음의 해탈 가운데서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을 최상이라고 합니다.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Katamo cāvuso,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ṃ?

Rāgo kho, āvuso, pamāṇakaraṇo, doso pamāṇakaraṇo, moho pamāṇakaraṇ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appamāṇ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ṃ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36. 󰡒도반이여, 탐욕은 그 무엇이 있는 것이고, 성냄은 그 무엇이 있는 것이고, 어리석음은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들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도반이여, 모든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 가운데서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을 최상이라고 합니다.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Rāgo kho, āvuso, kiñcano, doso kiñcano, moho kiñcan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ākiñcaññ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ṃ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37. 󰡒도반이여, 탐욕은 표상을 만들고 성냄은 표상을 만들고 어리석음은 표상을 만듭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이들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합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 가운데서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을 최상이라고 합니다.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이야말로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Rāgo kho, āvuso, nimittakaraṇo, doso nimittakaraṇo, moho nimittakaraṇo. Te khīṇāsavassa bhikkhuno pahīnā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ṅ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 Yāvatā kho, āvuso, animittā cetovimuttiyo, akuppā tāsaṃ cetovimutti aggamakkhāyati. Sā kho panākuppā cetovimutti suññā rāgena, suññā dosena, suññā mohena.

 

도반이여, 이런 방편이 있어, 이 방편에 따라서는 이 법들은 뜻은 같고 표현만 다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와 같이 설했다. 마하꼿티따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사리뿟따 존자의 설법을 크게 기뻐했다.

Ayaṃ kho, āvuso,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ime dhammā ekatthā byañjanameva nānan”ti.

Idamavocāyasmā sāriputto. Attamano āyasmā mahākoṭṭhiko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ṃ abhinandīti.

 

 

Mahāve­dalla­suttaṃ niṭṭhitaṃ tatiyaṃ.

교리문답의 긴 경(M43)이 끝났다.

 

 

 

Madhyamāgama中阿含經

Chapter 17晡利多品

211.(二一一)大拘絺羅經

我聞如是:

一時,佛遊王舍城,在竹林迦蘭哆園。

爾時,尊者舍黎子則於晡時從燕坐起,往詣尊者大拘絺羅所,共相問訊,却坐一面。

尊者舍黎子語曰:「賢者拘絺羅!欲有所問,聽我問耶?」

尊者大拘絺羅白曰:「尊者舍黎子!欲問便問,我聞已當思。」

尊者舍黎子問曰:「賢者拘絺羅!不善者說不善,不善根者說不善根。何者不善,何者不善根耶?」

尊者大拘絺羅答曰:「身惡行,口、意惡行,是不善也。貪、恚、癡,是不善根也。是謂不善,是謂不善根。」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善者說善,善根者說善根。何者為善,何者善根耶?」

尊者大拘絺羅答曰:「身妙行,口、意妙行,是善也。不貪、不恚、不癡,是善根也。是謂為善,是謂善根。」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智慧者說智慧,何者智慧?」

尊者大拘絺羅答曰:「知如是故說智慧。知何等耶?知此苦如真,知此苦習、知此苦滅、知此苦滅道如真,知如是故說智慧。」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識者說識,何者識耶?」

尊者大拘絺羅答曰:「識識是故說識。識何等耶?識色,識聲、香、味、觸、法,識識是故說識。」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智慧及識,此二法為合為別,此二法可得別施設耶?」

尊者大拘絺羅答曰:「此二法合不別,此二法不可別施設。所以者何?智慧所知,即是識所識。是故此二法合不別,此二法不可別施設。」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知者汝以何等知?」

尊者大拘絺羅答曰:「知者我以智慧知。」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智慧有何義,有何勝,有何功德?」

尊者大拘絺羅答曰:「智慧者有厭義、無欲義、見如真義。」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云何正見?」

尊者大拘絺羅答曰:「知苦如真,知苦習、滅、道如真者,是謂正見。」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幾因幾緣生正見耶?」

尊者大拘絺羅答曰:「二因二緣而生正見。云何為二?一者從他聞,二者內自思惟。是謂二因二緣而生正見。」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幾支攝正見,得心解脫果、慧解脫果,得心解脫功德、慧解脫功德耶?」

尊者大拘絺羅答曰:「有五支攝正見,得心解脫果、慧解脫果,得心解脫功德、慧解脫功德。云何為五?一者真諦所攝,二者戒所攝,三者博聞所攝,四者止所攝,五者觀所攝。是謂有五支攝正見,得心解脫果、慧解脫果,得心解脫功德、慧解脫功德。」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云何生當來有?」

尊者大拘絺羅答曰:「愚癡凡夫無知、不多聞,無明所覆,愛結所繫,不見善知識,不知聖法,不御聖法,是謂生當來有。」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云何不生當來有?」

尊者大拘絺羅答曰:「若無明已盡,明已生者,必盡苦也。是謂不生於當來有。」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幾覺耶?」

尊者大拘絺羅答曰:「有三覺:樂覺、苦覺、不苦不樂覺:此緣何有耶?緣更樂有。」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覺、想、思,此三法為合為別?此三法可別施設耶?」

尊者大拘絺羅答曰:「覺、想、思,此三法合不別,此三法不可別施設。所以者何?覺所覺者,即是想所想,思所思。是故此三法合不別,此三法不可別施設。」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滅者有何對?」

尊者大拘絺羅答曰:「滅者無有對。」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五根異行、異境界,各各受自境界,眼根,耳、鼻、舌、身根,此五根異行、異境界,各各受自境界,誰為彼盡受境界,誰為彼依耶?」

尊者大拘絺羅答曰:「五根異行、異境界,各各自受境界,眼根,耳、鼻、舌、身根,此五根異行、異境界,各各受自境界,意為彼盡受境界,意為彼依。」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意者依何住耶?」

尊者大拘絺羅答曰:「意者依壽,依壽住。」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壽者依何住耶?」

尊者大拘絺羅答曰:「壽者依暖,依暖住。」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壽及暖,此二法為合為別?此二法可得別施設耶?」

尊者大拘絺羅答曰:「壽及暖,此二法合不別,此二法不可別施設。所以者何?因壽故有暖,因暖故有壽,若無壽者則無暖,無暖者則無壽。猶如因油因炷,故得燃燈,彼中因[火*僉]故有光,因光故有[火*僉],若無[火*僉]者則無光,無光者則無[火*僉]。如是因壽故有暖,因暖故有壽,若無壽者則無暖,無暖者則無壽。是故此二法合不別,此二法不可別施設。」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幾法生身死已,身棄塚間,如木無情?」

尊者大拘絺羅答曰:「有三法生身死已,身棄塚間,如木無情。云何為三?一者壽,二者暖,三者識。此三法生身死已,身棄塚間,如木無情。」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若死及入滅盡定者,有何差別?」

尊者大拘絺羅答曰:「死者壽命滅訖,溫暖已去,諸根敗壞。比丘入滅盡定者,壽不滅訖,暖亦不去,諸根不敗壞。死及入滅盡定者,是謂差別。」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若入滅盡定及入無想定者,有何差別?」

尊者大拘絺羅答曰:「比丘入滅盡定者,想及知滅。比丘入無想定者,想知不滅。若入滅盡定及入無想定者,是謂差別。」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若從滅盡定起及從無想定起者,有何差別?」

尊者大拘絺羅答曰:「比丘從滅盡定起時,不如是念:『我從滅盡定起。』比丘從無想定起時,作如是念:『我為有想,我為無想?』從滅盡定起及從無想定起者,是謂差別。」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比丘入滅盡定時先滅何法?為身行,為口、意行耶?」

尊者大拘絺羅答曰:「比丘入滅盡定時,先滅身行,次滅口行,後滅意行。」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比丘從滅盡定起時,先生何法?為身行,口、意行耶?」

尊者大拘絺羅答曰:「比丘從滅盡定起時,先生意行,次生口行,後生身行。」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比丘從滅盡定起時觸幾觸?」

尊者大拘絺羅答曰:「比丘從滅盡定起時觸三觸。云何為三?一者不移動觸,二者無所有觸,三者無相觸。比丘從滅盡定起時觸此三觸。」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空、無願、無相,此三法異義、異文耶?為一義、異文耶?」

尊者大拘絺羅答曰:「空、無願、無相,此三法異義、異文。」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幾因幾緣生不移動定耶?」

尊者大拘絺羅答曰:「有四因四緣生不移動定。云何為四?若比丘離欲、離惡不善之法,至得第四禪成就遊,是謂四因四緣生不移動定。」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幾因幾緣生無所有定耶?」

尊者大拘絺羅答曰:「有三因三緣生無所有定。云何為三?若比丘度一切色想,至得無所有處成就遊,是謂有三因三緣生無所有定。」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幾因幾緣生無想定?」

尊者大拘絺羅答曰:「有二因二緣生無想定。云何為二?一者不念一切想,二者念無想界。是謂二因二緣生無想定。」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幾因幾緣住無想定耶?」

尊者大拘絺羅答曰:「有二因二緣住無想定。云何為二?一者不念一切想,二者念無想界。是謂二因二緣住無想定。」

尊者舍黎子聞已,歎曰:「善哉!善哉!賢者拘絺羅!」尊者舍黎子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者拘絺羅!有幾因幾緣從無想定起?」

尊者大拘絺羅答曰:「有三因三緣從無想定起。云何為三?一者念一切想,二者不念無想界,三者因此身因六處緣命根,是謂三因三緣,從無想定起。」

如是,彼二尊更相稱歎善哉善哉,更互所說,歡喜奉行。從坐起去。

尊者大拘絺羅經第十竟(三千七十五字)

中阿含經卷第五十八(六千一百二十四字)

中阿含晡利多品第三竟(三萬四百四十五字)(第五後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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