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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짧은 경(M44)Cūḷa­ve­dalla­sutta

교리문답의 짧은 경 (M44)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 대나무 숲의 다람쥐 보허구역에 머무셨다. 그때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를 만나러 갔다. 가서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rājagahe viharati veḷuvane kalanda­ka­nivāpe. Atha kho visākho upāsako yena dhammadinnā bhikkhunī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dhammadinnaṃ bhikkhuni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visākho upāsako dhammadinnaṃ bhikkhuniṃ etadavoca:

 

 

2. 󰡒스님, 󰡐존재 더미, 존재 더미󰡑라고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 더미라고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인]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들을 존재 더미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취착의 [대상인]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인] 느낌의 무더기, 취악의 [대상인]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인] 심리현상들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인] 알음알이의 무더기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인]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들을 존재 더미라고 하셨습니다.󰡓

󰡒장하십니다. 스님.󰡓이라고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설명을 환희하고 기뻐하면서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다음 질문을 했다.

 “‘sakkāyo sakkāyo’ti, ayye, vuccati. Katamo nu kho, ayye, sakkāyo vutto bhagavatā”ti? “Pañca kho ime, āvuso visākha, 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 seyyathidaṃ— rūpupā­dā­nak­khan­dho, vedanupā­dā­nak­khan­dho, saññu­pādā­nak­khan­dho, saṅ­khā­ru­pādā­nak­khan­dho, viñ­ñāṇupā­dā­nak­khan­dho. Ime kho, āvuso visākha, pañc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ti.“Sādhayye”ti kho visākho upāsako dhammadinnāya bhikkhuniyā bhāsitaṃ abhinanditvā anumoditvā dhammadinnaṃ bhikkhuniṃ uttariṃ pañhaṃ apucchi:

 

 

3. 󰡒스님, 󰡐존재 더미의 일어남, 존재 더미의 일어남󰡑이라고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 더미의 일어남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나여,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이니,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를 일러 존재 더미의 일어남이라 하셨습니다.󰡓

“‘sakkā­ya­sa­mudayo sakkā­ya­sa­mudayo’ti, ayye, vuccati. Katamo nu kho, ayye, sakkā­ya­sa­mudayo vutto bhagavatā”ti? “Yāyaṃ, āvuso visākha, taṇhā ponobbhavikā nandī­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ay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sa­mudayo vutto bhagavatā”ti.

 

 

4. 󰡒스님, 󰡐존재 더미의 소멸, 존재 더미의 소멸,󰡑이라고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 더미의 소멸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그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를 일러 존재 더미의 소멸이라 하셨습니다.󰡓

‘Sakkāyanirodho sakkāyanirodho’ti, ayye, vuccati. Katamo nu kho, ayye, sakkāyanirodho vutto bhagavatā”ti?

Yo kho, āvuso visākha,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ay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nirodho vutto bhagavatā”ti.

 

5. 󰡒스님, 󰡐존재 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존재 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고 합니다. 스님,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 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그것은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이를 일러 존재 더미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라 하셨습니다.󰡓

‘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 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ayye, vuccati. Katamā nu kho, ayye, 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 vuttā bhagavatā”ti?

“Ayameva kho, āvuso visākh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 vuttā bhagavatā, seyyathidaṃ—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ī”ti.

 

 

6. 󰡒스님, 그러면 취착과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는 같습니까, 아니면 취착과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와 같은 것도 아니고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와 다른 것도 아닙니다. 도반 위사카여,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열망과 탐욕이 취착입니다.󰡓

Taññeva nu kho, ayye, upādānaṃ te pañcu­pādā­nak­khan­dhā udāhu aññatra pañca­hu­pādā­nak­khan­dhehi upādānan”ti? “Na kho, āvuso visākha, taññeva upādānaṃ te pañcu­pādā­nak­khan­dhā, nāpi aññatra pañca­hu­pādā­nak­khan­dhehi upādānaṃ. Yo kho, āvuso visākh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arāgo taṃ tattha upādānan”ti.

 

 

7.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가 생깁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느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자아 안에 느낌이 있다고 관찰하고, 느낌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인식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인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자아 안에 인식이 있다고 관찰하고, 인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심리현상들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심리현상들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자아 안에 심리현상들이 있다고 관찰하고, 심리현상들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자아 안에 알음알이가 있다고 관찰하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해서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고 견해가 생깁니다.󰡓

Kathaṃ panāyye, sakkāyadiṭṭhi hotī”ti? “Idhāvuso visākha,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 Vedanaṃ … pe … saññaṃ … saṅkhāre …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 Ev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diṭṭhi hotī”ti.

 

 

8.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친견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어서,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관찰하고 않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느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느낌이 있다고 관찰하고 않고, 느낌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인식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인식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인식이 있다고 관찰하고 않고, 인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심리현상들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심리현상들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심리현상들이 있다고 관찰하고 않고, 심리현상들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자아 안에 알음알이가 있다고 관찰하고 않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 우사카여, 이렇게 해서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는 생기지 않습니다.󰡓

“Kathaṃ panāyye, sakkāyadiṭṭhi na hotī”ti?

“Idhāvuso visākha, sutavā ariyasāvako, ariyānaṃ dassāvī ariyadhammassa kovido ariyadhamme suvinīto, sappurisānaṃ dassāvī sap­purisa­dhammassa kovido sap­purisa­dhamme suvinīto, na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na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na attani vā rūpaṃ, na rūpasmiṃ vā attānaṃ. Na vedanaṃ … pe … na saññaṃ … na saṅkhāre … pe … na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 na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 na attani vā viññāṇaṃ, na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 Ev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diṭṭhi na hotī”ti.

 

9. 󰡒스님, 무엇이 성스러운 팔정도 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이것이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Katamo panāyye, ariyo aṭṭhaṅgiko maggo”ti?

“Ayameva kho, āvuso visākh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ī”ti.

 

10. 󰡒스님, 그러면 성스러운 팔정도는 형성된 것 입니까, 아니면 형성된 것이 아닙니까?󰡓

󰡒도반 위사카여, 성스러운 팔정도는 형성된 것입니다.󰡓

“Ariyo panāyye, aṭṭhaṅgiko maggo saṅkhato udāhu asaṅkhato”ti?

“Ariyo kho, āvuso visākha, aṭṭhaṅgiko maggo saṅkhato”ti.

 

11. 󰡒스님, 성스러운 팔정도에 삼학이 포함됩니까, 아니면 삼학에 성스러운 팔정도가 포함됩니까?󰡓

󰡒도반 위사카여, 성스러운 팔정도에 삼학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삼학에 성스러운 팔정도가 포함됩니다. 도반 위사카여,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이 세 가지 법은 계의 무더기에 포함됩니다.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이 [세 가지] 법은 삼매의 무더기에 포함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의 이 [두 가지] 법은 통찰지의 무더기에 포함됩니다.󰡓

“Ariyena nu kho, ayye, aṭṭhaṅgikena maggena tayo khandhā saṅgahitā udāhu tīhi khandhehi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aṅgahito”ti?

“Na kho, āvuso visākha, ariyena aṭṭhaṅgikena maggena tayo khandhā saṅgahitā; tīhi ca kho, āvuso visākha, khandhehi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aṅgahito. Yā cāvuso visākha, sammāvācā yo ca sammākammanto yo ca sammāājīvo ime dhammā sīlakkhandhe saṅgahitā. Yo ca sammāvāyāmo yā ca sammāsati yo ca sammāsamādhi ime dhammā samā­dhik­khan­dhe saṅgahitā. Yā ca sammādiṭṭhi yo ca sammāsaṅkappo, ime dhammā paññākkhandhe saṅgahitā”ti.

 

12. 󰡒스님, 무엇이 삼매이고, 어떤 법들이 삼매의 표상이고, 어떤 법들이 삼매의 필수푸미고, 어떤 것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이 삼매입니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 삼매의 표상입니다. 네 가지 바른 노력이 삼매의 필수품입니다. 여기서 이런 법을 받들어 행하고 닦고 많이 짓는 것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다.󰡓

“Katamo panāyye, samādhi, katame dhammā samādhinimittā, katame dhammā samā­dhi­parik­khārā, katamā samādhibhāvanā”ti?

“Yā kho, āvuso visākha, cittassa ekaggatā ayaṃ samādhi;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 cattāro sammappadhānā samā­dhi­parik­khārā. Yā tesaṃyeva dhammānaṃ āsevanā bhāvanā bahulīkammaṃ, ayaṃ ettha samādhibhāvanā”ti.

 

 

13. 󰡒스님, 얼마나 많은 작용들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 가지 작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작용, 말의 작용, 마음의 작용입니다.󰡓

“Kati panāyye, saṅkhārā”ti?

“Tayome, āvuso visākha, saṅkhārā—kāyasaṅkhāro, vacīsaṅkhāro, cittasaṅkhāro”ti.

 

 

14. 󰡒스님, 무엇이 몸의 작용이고, 무엇이 말의 작용이고, 무엇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이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이고, 인식과 느낌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Katamo panāyye, kāyasaṅkhāro, katamo vacīsaṅkhāro, katamo cittasaṅkhāro”ti?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asaṅkhāro,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15. 󰡒스님, 무슨 이유로 들숨과 날숨이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이고, 인식과 느낌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며 이 법들은 몸에 계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나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입니다. 인식과 느낌은 마음부수입니다. 이 법들은 마음에 계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식과 느낌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Kasmā panāyye,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k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k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ikā ete dhammā kāyap­paṭi­baddhā, tasmā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etasikā ete dhammā cittap­paṭi­baddhā, t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16. 󰡒스님, 어떻게 상수멸을 증득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비구가 상수멸을 증득할 때에 󰡐나는 상수멸을 증득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수멸에 들기] 전에 그의 마음을 닦은 그대로 그것이 그를 인도합니다.󰡓

“Kathaṃ panāyye,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 hotī”ti?

“Na kho, āvuso visākha,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an­tassa bhikkhuno evaṃ hoti: ‘ahaṃ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issan’ti vā, ‘ahaṃ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āmī’ti vā, ‘ahaṃ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ti vā. Atha khvāssa pubbeva tathā cittaṃ bhāvitaṃ hoti yaṃ taṃ tathattāya upanetī”ti.

 

 

17. 󰡒스님,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먼저 소멸합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말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먼저 말의 작용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몸의 작용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마음의 작용이 소멸합니다.󰡓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an­tassa panāyye, bhikkhuno katame dhammā paṭhamaṃ nirujjhanti—yadi vā kāyasaṅkhāro, yadi vā vacīsaṅkhāro, yadi vā cittasaṅkhāro”ti?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an­tassa kho, āvuso visākha, bhikkhuno paṭhamaṃ nirujjhati vacīsaṅkhāro, tato kāyasaṅkhāro, tato cittasaṅkhāro”ti.

 

 

18. 󰡒스님, 어떻게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비구가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할 때에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수멸에 들기] 전에 그의 마음을 닦은 그대로 그것이 그를 인도합니다.󰡓

“Kathaṃ panāyye,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ānaṃ hotī”ti?

“Na kho, āvuso visākha,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antassa bhikkhuno evaṃ hoti: ‘ahaṃ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issan’ti vā, ‘ahaṃ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āmī’ti vā, ‘ahaṃ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ito’ti vā. Atha khvāssa pubbeva tathā cittaṃ bhāvitaṃ hoti yaṃ taṃ tathattāya upanetī”ti.

 

 

19. 󰡒스님, 그러면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하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먼저 일어납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말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먼저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몸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말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antassa panāyye, bhikkhuno katame dhammā paṭhamaṃ uppajjanti—yadi vā kāyasaṅkhāro, yadi vā vacīsaṅkhāro, yadi vā cittasaṅkhāro”ti?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antassa kho, āvuso visākha, bhikkhuno paṭhamaṃ uppajjati cittasaṅkhāro, tato kāyasaṅkhāro, tato vacīsaṅkhāro”ti.

 

 

20. 󰡒스님,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몇 가지 감각접촉이 닿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세 가지 감각접촉이 닿습니다. 그것은 공한 감각접촉, 표상 없는 감각접촉, 원함 없는 감각접촉입니다.󰡓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itaṃ panāyye, bhikkhuṃ kati phassā phusantī”ti?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itaṃ kho, āvuso visākha, bhikkhuṃ tayo phassā phusanti—suññato phasso, animitto phasso, appaṇihito phasso”ti.

 

 

21. 󰡒스님,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의 마음은 무엇을 향하고, 무엇으로 기울고, 무엇을 기댑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에서 출정한 비구의 마음은 멀리 여윔을 향하고, 멀리 여윔으로 기울고, 멀리 여윔을 기댑니다.󰡓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itassa panāyye, bhikkhuno kiṃninnaṃ cittaṃ hoti kiṃpoṇaṃ kiṃpabbhāran”ti?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itassa kho, āvuso visākha, bhikkhuno vivekaninnaṃ cittaṃ hoti, vivekapoṇaṃ viveka­pabbhā­ran”ti.

 

 

22. 󰡒스님, 몇 가지 느낌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Kati panāyye, vedanā”ti?

“Tisso kho imā, āvuso visākha, vedanā—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ti.

 

 

23. 󰡒스님, 어떤 것이 즐거운 느낌이고, 어떤 것이 괴로운 느낌이고, 어떤 것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 유쾌한 느낌이 즐거운 느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 불쾌한 느낌이 괴로운 느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불쾌하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느낌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Katamā panāyye, sukhā vedanā, katamā dukkhā vedanā, katamā adukkhamasukhā vedanā”ti?

“Yaṃ kho, āvuso visākha, kāyikaṃ vā cetasikaṃ vā sukhaṃ sātaṃ vedayitaṃ—ayaṃ sukhā vedanā. Yaṃ kho, āvuso visākha, kāyikaṃ vā cetasikaṃ vā dukkhaṃ asātaṃ vedayitaṃ—ayaṃ dukkhā vedanā. Yaṃ kho, āvuso visākha, kāyikaṃ vā cetasikaṃ vā neva sātaṃ nāsātaṃ vedayitaṃ—ayaṃ adukkhamasukhā vedanā”ti.

 

 

24. 스님, 그러면 즐거운 느낌은 무엇이 즐거움이고 무엇이 괴로움이며, 괴로운 느낌은 무엇이 즐거움이고 무엇이 괴로움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엇이 즐거움이고 무엇이 괴로움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은 현존하면 즐거움이고 없으면 괴로움입니다. 괴로운 느낌은 현존하면 괴로움이고 없으면 즐거움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은 [그 느낌을] 알면 즐거움이고 알지 못하면 괴로움입니다.󰡓

“Sukhā panāyye, vedanā kiṃsukhā kiṃdukkhā, dukkhā vedanā kiṃsukhā kiṃdukkhā, adukkhamasukhā vedanā kiṃsukhā kiṃdukkhā”ti?

“Sukhā kho, āvuso visākha, vedanā ṭhitisukhā vipari­ṇāma­duk­khā; dukkhā vedanā ṭhitidukkhā vipari­ṇāma­su­khā; adukkhamasukhā vedanā ñāṇasukhā aññāṇadukkhā”ti.

 

 

25. 󰡒스님, 그러면 즐거운 느낌에는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해있고, 괴로운 느낌에는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해있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고, 괴로운 느낌에는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으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습니다.󰡓

“Sukhāya panāyye, vedanāya kiṃ a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kiṃ a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kiṃ anusayo anusetī”ti?

“Sukhāya kho, āvuso visākha, vedanāya rāgā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anusetī”ti.

 

26. 󰡒스님, 모든 즐거운 느낌에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운 ㄴ낌에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는 것은 아닙니다.󰡓

“Sabbāya nu kho, ayy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o anuseti, sabb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anuseti, sabbāy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anusetī”ti?

“Na kho, āvuso visākha, sabbāya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o anuseti, na sabb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anuseti, na sabbāy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anusetī”ti.

 

27. 󰡒스님, 그러면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무엇을 버려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는 무엇을 버려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는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는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는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합니다.󰡓

Sukhāya panāyye, vedanāya kiṃ pahātabbaṃ, dukkhāya vedanāya kiṃ pahātabbaṃ, aduk­kha­ma­su­khāya vedanāya kiṃ pahātabban”ti?

“Sukhāya kho, āvuso visākha, vedanāya rāgānusayo pahātabbo,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pahātabbo,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pahātabbo”ti.

 

28. 󰡒스님,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해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해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해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해 적의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드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것으로 탐욕을 제거합니다. 거기에는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이렇게 반조합니다. 󰡐성자들이 증득하여 머무는 그런 경지를 언제 나는 증득하여 머물게 될 것인가?󰡑라고. 이처럼 위없는 해탈들에 대한 염원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에게 [304] 그 염원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이 생깁니다. 이것으로 그는 적의를 제거합니다. 거기에는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이것으로 그는 무명을 제거합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Sabbāya nu kho, ayy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o pahātabbo, sabb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pahātabbo, sabbāy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pahātabbo”ti?

“Na kho, āvuso visākha, sabbāya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o pahātabbo, na sabb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pahātabbo, na sabbāy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pahātabbo. Idhāvuso visākha,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Rāgaṃ tena pajahati, na tattha rāgānusayo anuseti. Idhāvuso visākha, bhikkhu iti paṭi­sañcik­khati: ‘kudāssu nāmāhaṃ tadāyatanaṃ upasampajja viharissāmi yadariyā etarahi 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ntī’ti? Iti anuttaresu vimokkhesu pihaṃ upaṭṭhāpayato uppajjati pihāppaccayā domanassaṃ. Paṭighaṃ tena pajahati, na tattha paṭighānusayo anuseti. Idhāvuso visākha,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vijjaṃ tena pajahati, na tattha avijjānusayo anusetī”ti.

 

 

29. 󰡒스님, 즐거운 느낌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의 이면은 괴로운 느낌입니다.󰡓

󰡑스님, 괴로운 느낌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괴로운 느낌의 이면은 즐거운 느낌입니다.󰡓

󰡒스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이면은 무명입니다.󰡓

󰡒스님, 무명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무명의 이면은 명지입니다.󰡓

󰡒스님, 명지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명지의 이면은 해탈입니다.󰡓

󰡒스님, 해탈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해탈의 이면은 열반입니다.󰡓

Sukhāya panāyye, vedanāya kiṃ paṭibhāgo”ti?

“Sukhāya kho, āvuso visākha, vedanāya dukkhā vedanā paṭibhāgo”ti.

“Dukkhāya pannāyye, vedanāya kiṃ paṭibhāgo”ti?

“Dukkhāya kho, āvuso visākha, vedanāya sukhā vedanā paṭibhāgo”ti.

“Aduk­kha­ma­su­khāya panāyye, vedanāya kiṃ paṭibhāgo”ti?

“Aduk­kha­ma­su­khāya kho, āvuso visākha, vedanāya avijjā paṭibhāgo”ti.

“Avijjāya panāyye, kiṃ paṭibhāgo”ti?

“Avijjāya kho, āvuso visākha, vijjā paṭibhāgo”ti.

“Vijjāya panāyye, kiṃ paṭibhāgo”ti?

“Vijjāya kho, āvuso visākha, vimutti paṭibhāgo”ti.

“Vimuttiyā panāyye, kiṃ paṭibhāgo”ti?

“Vimuttiyā kho, āvuso visākha, nibbānaṃ paṭibhāgo”ti.

 

 

󰡒스님, 열반의 이면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그런 질문들은 한계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왜냐하면 청정범행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을 궁극으로 하고 열반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그대가 원한다면 세존을 뵙고 세존께 이 뜻을 여쭈어보십시오. 그래서 세존께서 설명해주시는 대로 호지하십시오.󰡓

Nibbānassa panāyye, kiṃ paṭibhāgo”ti? “Accayāsi, āvuso

 visākha, pañhaṃ, nāsakkhi pañhānaṃ pariyantaṃ gahetuṃ. Nibbā­nogadhañhi, āvuso visākha, brahmacariyaṃ, nib­bā­na­parā­yanaṃ nib­bā­na­pari­yosānaṃ. Ākaṅkhamāno ca tvaṃ, āvuso visākha, bhagavantaṃ upasaṅkamitvā etamatthaṃ puccheyyāsi, yathā ca te bhagavā byākaroti tathā naṃ dhāreyyāsī”ti.

 

 

30. 그러자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말을 크게 기뻐하고 감사드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위사카 청신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Atha kho visākho upāsako dhammadinnāya bhikkhuniyā bhāsitaṃ abhinanditvā anumoditvā uṭṭhāyāsanā dhammadinnaṃ bhikkhuniṃ abhivādetvā padakkhiṇaṃ katv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visākho upāsako yāvatako ahosi dhammadinnāya bhikkhuniyā saddhiṃ kathāsallāpo taṃ sabbaṃ bhagavato ārocesi. Evaṃ vutte, bhagavā visākhaṃ upāsakaṃ etadavoca:

 

 

31. 󰡒위사카여, 담마딘나 비구니는 현자이다. 위사카여, 담마딘나 비구니는 큰 통찰지를 가졌다. 위사카여, 그대가 만일 내게 이 뜻을 물었더라고 나 역시 담마딘나 비구니가 설명한 대로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로 호지하라.󰡓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위사카 청신사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paṇḍitā, visākha, dhammadinnā bhikkhunī, mahāpaññā, visākha, dhammadinnā bhikkhunī. Mañcepi tvaṃ, visākha, etamatthaṃ puccheyyāsi, ahampi taṃ evamevaṃ byākareyyaṃ, yathā taṃ dhammadinnāya bhikkhuniyā byākataṃ. Eso cevetassa  attho. Evañca naṃ  dhārehī”ti.

Idamavoca bhagavā. Attamano visākho upāsako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īti.

Cūḷa­vedal­la­suttaṃ niṭṭhitaṃ catutthaṃ.

교리문답의 짧은 경(M44)이 끝났다.

 

 

 

 

 

Madhyamāgama中阿含經

Chapter 17晡利多品

210.(二一〇)法樂比丘尼經

中阿含經卷第五十八

東晉罽賓三藏瞿曇僧伽提婆譯

我聞如是:

一時,佛遊舍衛國,在勝林給孤獨園。

爾時,毘舍佉優婆夷往詣法樂比丘尼所,稽首禮足,却坐一面,白法樂比丘尼曰:「賢聖!欲有所問,聽我問耶?」

法樂比丘尼答曰:「毘舍佉!欲問便問,我聞已當思。」

毗舍佉優婆夷便問曰:「賢聖!自身,說自身。云何為自身耶?」

法樂比丘尼答曰:「世尊說五盛陰,自身色盛陰,覺、想、行、識盛陰,是謂世尊說五盛陰。」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云何為自身見耶?」

法樂比丘尼答曰:「不多聞愚癡凡夫不見善知識,不知聖法,不御聖法,彼見色是神,見神有色,見神中有色,見色中有神也。見覺、想、行、識是神,見神有識,見神中有識,見識中有神也。是謂自身見也。」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云何無身見耶?」

法樂比丘尼答曰:「多聞聖弟子見善知識,知聖法,善御聖法,彼不見色是神,不見神有色,不見神中有色,不見色中有神也。不見覺、想、行、識是神,不見神有識,不見神中有識,不見識中有神也。是謂無身見也。」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云何滅自身耶?」

法樂比丘尼答曰:「色盛陰斷無餘,捨、吐、盡、不染、滅、息、沒也。覺、想、行、識盛陰斷無餘,捨、吐、盡、不染、滅、息、沒也。是謂自身滅。」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陰說陰盛,陰說盛陰,陰即是盛陰,盛陰即是陰耶?為陰異、盛陰異耶?」

法樂比丘尼答曰:「或陰即是盛陰,或陰非盛陰。云何陰即是盛陰?若色有漏有受,覺、想、行、識有漏有受,是謂陰即是盛陰。云何陰非盛陰?色無漏無受,覺、想、行、識無漏無受,是謂陰非盛陰。」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云何八支聖道耶?」

法樂比丘尼答曰:「八支聖道者,正見乃至正定,是謂為八,是謂八支聖道。」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八支聖道有為耶?」

法樂比丘尼答曰:「如是八支聖道有為也。」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有幾聚耶?」

法樂比丘尼答曰:「有三聚。戒聚、定聚、慧聚。」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八支聖道攝三聚,為三聚攝八支聖道耶?」

法樂比丘尼答曰:「非八支聖道攝三聚。三聚攝八支聖道。正語、正業、正命,此三道支聖戒聚所攝。正念、正定,此二道支聖定聚所攝。正見、正志、正方便,此三道支聖慧聚所攝。是謂非八支聖道攝三聚,三聚攝八支聖道。」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滅有對耶?」

法樂比丘尼答曰:「滅無對也。」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初禪有幾支耶?」

法樂比丘尼答曰:「初禪有五支,覺、觀、喜、樂、一心,是謂初禪有五支。」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云何?云何定相?云何定力?云何定功?云何修定耶?」

法樂比丘尼答曰:「若善心得一者,是謂定也。四念處,是謂定相也。四正斷,是謂定力也。四如意足,是謂定功也。若習此諸善法服,數數專修精勤者,是謂定修也。」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有幾法生身死已,身棄塚間,如木無情?」

法樂比丘尼答曰:「有三法生身死已,身棄塚間,如木無情。云何為三?一者壽,二者暖,三者識,是謂三法生身死已,身棄塚間,如木無情。」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若死及入滅盡定者,有何差別?」

法樂比丘尼答曰:「死者壽命滅訖,溫暖已去,諸根敗壞。比丘入滅盡定者,壽不滅訖,暖亦不去,諸根不敗壞,若死及入滅盡定者,是謂差別。」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若入滅盡定及入無想定者,有何差別?」

法樂比丘尼答曰:「比丘入滅盡定者,想及知滅。入無想定者,想知不滅。若入滅盡定及入無想定者,是謂差別。」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若從滅盡定起及從無想定起者,有何差別?」

法樂比丘尼答曰:「比丘從滅盡定起時,不作是念:『我從滅盡定起。』比丘從無想定起時,作如是念:『我為有想,我為無想?』若從滅盡定起及從無想定起者,是謂差別。」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比丘入滅盡定時,作如是念:『我入滅盡定耶?』」

法樂比丘尼答曰:「比丘入滅盡定時,不作是念:『我入滅盡定。』然本如是修習心,以是故如是趣向。」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比丘從滅盡定起,作如是念:『我從滅盡定起耶?』」

法樂比丘尼答曰:「比丘從滅盡定起時,不作是念:『我從滅盡定起。』然因此身及六處緣命根,是故從定起。」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比丘從滅盡定起已,心何所樂,何所趣,何所順耶?」

法樂比丘尼答曰:「比丘從滅盡定起已,心樂離、趣離、順離。」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有幾覺耶?」

法樂比丘尼答曰:「有三覺:樂覺、苦覺、不苦不樂覺。此何緣有耶?緣更樂有。」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云何樂覺?云何苦覺?云何不苦不樂覺耶?」

法樂比丘尼答曰:「若樂更樂所觸生,身心樂善覺,是覺謂樂覺也。若苦更樂所觸生,身心苦不善覺,是覺謂苦覺也。若不苦不樂更樂所觸生,身心不苦不樂,非善非不善覺,是覺謂不苦不樂覺。」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樂覺者,云何樂?云何苦?云何無常?云何災患?云何使耶?苦覺者,云何樂?云何苦?云何無常?云何災患?云何使耶?不苦不樂覺者,云何樂?云何苦?云何無常?云何災患?云何使耶?」

法樂比丘尼答曰:「樂覺者,生樂住樂,變易苦,無常者即是災患,欲使也。苦覺者,生苦住苦,變易樂,無常者即是災患,恚使也。不苦不樂覺者,不知苦、不知樂,無常者即是變易,無明使也。」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一切樂覺欲使耶?一切苦覺恚使耶?一切不苦不樂覺無明使耶?」

法樂比丘尼答曰:「非一切樂覺欲使也,非一切苦覺恚使也,非一切不苦不樂覺無明使也。云何樂覺非欲使耶?若比丘離欲、離惡不善之法,有覺、有觀,離生喜、樂,得初禪成就遊,是謂樂覺非欲使也。所以者何?此斷欲故。云何苦覺非恚使耶?若求上解脫樂,求願悒悒生憂苦,是謂苦覺非恚使也。所以者何?此斷恚故。云何不苦不樂覺非無明使耶?樂滅、苦滅,喜、憂本已滅,不苦不樂、捨、念、清淨,得第四禪成就遊,是謂不苦不樂覺非無明使也。所以者何?此斷無明故。」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樂覺者有何對耶?」

法樂比丘尼答曰:「樂覺者以苦覺為對。」

毗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毗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苦覺者有何對耶?」

法樂比丘尼答曰:「苦覺者以樂覺為對。」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樂覺苦覺者有何對耶?」

法樂比丘尼答曰:「樂覺苦覺者以不苦不樂為對。」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不苦不樂覺者有何對耶?」

法樂比丘尼答曰:「不苦不樂覺者以無明為對。」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無明者有何對耶?」

法樂比丘尼答曰:「無明者以明為對。」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賢聖!明者有何對耶?」

法樂比丘尼答曰:「明者以涅槃為對。」

毘舍佉優婆夷聞已,歎曰:「善哉!善哉!賢聖!」毘舍佉優婆夷歎已,歡喜奉行。

復問曰:「聖賢!涅槃者有何對耶?」

法樂比丘尼告曰:「君欲問無窮事,然君問事不能得窮我邊也。涅槃者,無對也。涅槃者,以無羂過、羂羂滅訖。以此義故,從世尊行梵行。」

於是,毘舍佉優婆夷聞法樂比丘尼所說,善受善持,善誦習已,即從坐起,稽首禮法樂比丘尼足,繞三匝而去。

於是,法樂比丘尼見毘舍佉優婆夷去後不久,往詣佛所,稽首佛足,却坐一面,與毘舍佉優婆夷所共論者,盡向佛說,叉手向佛,白曰:「世尊!我如是說、如是答,非為誣謗世尊耶?說真實、說如法、說法次法耶?於如法中,非有相違、有諍、有咎耶?」

世尊答曰:「比丘尼!汝如是說、如是答,不誣謗我,汝說真實,說如法、說法次法,於如法中而不相違,無諍咎也。比丘尼!若毘舍佉優婆夷以此句、以此文來問我者,我為毘舍佉優婆夷亦以此義、以此句、以此文而答彼也。比丘尼!此義如汝所說,汝當如是持。所以者何?此說即是義故。」

佛說如是。法樂比丘尼及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法樂比丘尼經第九竟(三千四十九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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