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기독교의 차이
* 기독일보에 누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전혀 엉터리 지식을 나열하고 있다.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은 참으로 못난 짓이다. 세상 정보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요즘, 그러한 속임수로 누구를 속일 수 있을까? 그 글을 보고 부처님 제자로서 입장을 밝힌다.
1. 창조의 문제
부처님은 범망경(D1)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62가지 견해를 설명한다. 그 62가지 견해 중에서 창조주를 인정하게 되는 이유는 수행자가 삼매속에서 수십만 생을 기억해내거나 추론과 관찰에 의하여 영원하다는 견해(常見)를 갖게 된다고한다. 불교에서는 창조자나 영원하다는 생각은 과거를 기억하고나 추측으로 인한 견해일 뿐이다. 범천이 스스로가 창조주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천신이 수명과 공덕이 다하여 광음천(ābhassara)에서 떨어져서 비어 있는 범천(brahma)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면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싫증과 동요가 생겨 '다른 이가 여기에 왔으면!'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때 다른 천신이 광음천에서 수명이 다하여 범천에 태어난다. 그때 첫 번째로 태어난 천신에게 이와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범천이요, 정복자요,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창시자, 창조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다. 나에 의해 다른 천신이 창조되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전에 내게 '다른 중생이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는 생각이 일어났고, 그러한 내 마음의 바램 때문에 다른 천신이 여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라고.” 범망경(D1)
불교에서는 욕계,색계,무색계라는 세가지 세상(三界)이 있는데 광음천과 범천은 색계(色界)에있다. 범천은 광음천보다 한단계 낮은 세계인데 범천이 스스로 싫증과 동요가 생겨서 창조주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범천이 욕계(欲界)의 인간보다는 수승한 존재이지만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범천도 윤회속에서 있는 중생일 뿐이다.
2.자력(自力)과 타력(他力)
불교는 자신의 구원을 밖에서 찾지 않는다. 공덕을 지어서 천상에 태어나거나 수행을 통해서 해탈하고자한다. 부처님은 먼저 진리를 찾아나선 스승으로서 나의 수행을 도와주는 존재이다. 세상의 시초는 언제인가라는 의문은 시초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일어난 어리석은 질문이다. 부처님은 다만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인가?"를 문제 삼는다. 괴로움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는데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명하고 그 원인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성명한다.그것이 불교의 핵심인 사성제(四聖諦)이다. 부처님은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자기야 말로 자신의 주인이다. 어떤 누가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자기를 잘 다룰 때 얻기 힘든 주인을 얻은 것이다.”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anā va sudantena nāthaṁ labhati dullabhaṁ. ” 법구경 160번 게송
“자기가 악을 행하면 자기가 오염 된다. 자기가 악을 행하지 않으면 자기가 청정해진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각자에 달린 것, 누가 누구를 정화시킬 수 없다.”
Attanā va kataṁ pāpaṁ, attanā saṅkilissati, attanā akataṁ pāpaṁ, attanā va visujjhati, suddhī asuddhī paccattaṁ, nāñño aññaṁ visodhaye. 법구경 165번 게송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 묻는다. 간구한다. 매달린다. 기대한다. 신, 천국, 영생, 구원, 원죄등의 단어들은 그것을 믿음으로만 성립되는 단어이다. 본래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며 아무런 힘이 없고 원죄를 가지고 있어 스스로 자립하기에는 어려운 존재다. 매일 순간순간 기도하고 부탁하고 매달리는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편 3:7]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6:4]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시편 17:13]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시편 59:2]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레미야 17:14]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태복음 8:25]
기독교 | 불교 | |
신 | 절대신,유일신 | 욕계천신과 색계,무색계 천신들 (윤회한다) |
천국 or 천상 | 영원한 천국 | 윤회속에 있는 천상(해탈을 추구함) |
지옥 | 영원한 지옥 | 윤회속에 있는 지옥 |
시간 | 시작과 끝이있다(有始有終) | 시작과 끝이 없다(無始無終) |
3. 이해와 믿음
불교는 스스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금 여기서 보여지고 들려지고 냄새 맡아지는 것들에서 시작한다. 불교는 물질은 변화(무상)한다. 느낌은 변화(무상)한다. 지각은 변화한다. 형성은 변화한다. 의식은 변화한다. 그 변화하고 변괴하는 물질을, 느낌을, 지각을, 형성을, 의식을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괴롭다.나의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도 괴롭다. 물질은 이렇게 되어라. 느낌은 이렇게 되어라. 라고 명령하고 조정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비구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약 이 느낌이 나라면 이 지각이 나라면 이 형성이 나라면 이 의식이 나라면 만약 이 의식이 나라면 이 의식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므로 비구들이여, 이 의식이 질병이 들 수 있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무아상경(S22:59) -
내가 내 마음대로 내 몸과 정신을 조절하고 조정할 수 없으므로 괴롭고,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라고 말할 수 없으며 나의 자아라고 말할 수 없다.이렇게 불교는 아주 상식적인 무상과 고라는 것을 언급하며 곧장 무아로 접근한다. 무상-고-무아로 설명하는순서는 경전에서 한번도 그 순서가 바뀌지 않았다. 무상과 고를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먼저 대상을 언급하고나서 무상과 고를 이야기하기에 무상과 고가 관념적으로 빠지지 않는다.부처님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귀있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나는 피로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미묘하고 숭고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었네.'
Apārutā tesaṁ amatassa dvārā,
Ye sotavanto pamuñcantu saddhaṁ;
Vihiṁsasaññī paguṇaṁ na bhāsiṁ,
Dhammaṁ paṇītaṁ manujesu brahme”ti.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나를 믿어라라고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자. 보고 아는 것으로 족하다. 서양인들에게 '자유탐사헌장'으로 불리는 깔라마경(AN 3:65)서 부처님은 스스로 확인하고 경험한 다음에 어떤 사상과 종교를 선택하라고 충고한다. 부처 자신도 이러한 검증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갔다.
"깔라마들이여, 오랫동안 전승되어 왔다고 해서, 대대로 계승되어 왔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성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 때문에,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합니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따르지 마십시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됩니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창조, 천국, 원죄, 영생등 하나같이 믿음으로 시작하는 말이다.지금 여기서 보여지고 들려지고 냄새 맡아지는 것들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서 존재하고 믿음으로서 신앙심이 생겨나고 믿음으로서 구원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1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1]
4. 천상과 천당
불교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인 행복(열반)을 말하고있다. 금생의 행복(보시,지계)과 내생의 행복(천상)은 주로 재가자들에게 설하셨다. 천상의 세계는 욕계의 천상, 색계의 천상, 무색계의 천상등 다양한데 범천의 세상에서 범천의 수명은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러므로 범천들은 자기가 세상의 창조자로 착각을 하고 자기가 영생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있다. 그 중에서 아나함이 가는 정거천(淨居天)은 대승불교에서 극락(極樂)이라고 여겨진다. 인과(因果)를 믿고 공덕(功德)을 지어서 천상세계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천당에 간다는 기독교와 흡사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불교의 범천이며 천당은 범천이 머무는 천상세계인 것이다.
'신을 믿으라'는 말은 타당하지만 '부처님을 믿으라' 혹은 '불교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sātthaṁ)을 갖추고 문장(sabyañjanaṁ)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고 말하신다.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는 언어를 잘 사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사람에 따라 적재적시에 나오는 설법을 하였다. 믿음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단합과 화합을 가져오지만,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배타적인 모습을 띠게된다. 믿음이라는 속성이 그러하니 어쩔수 없다. 믿음이 달라서 벌어진 종교전쟁을 보라.
이해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고 여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지게 만든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게 한다. 서로가 자라온 환경 인연맺은 관계에 의해서 서로의 의견이 다르게된다.. 이해의 길은 인류가 가야할 보편적인 길이고 평화의 길이다. 우리 불자들은 믿음의 길 보다는 이해의 길을 가야하고 타력의 길보다는 자력을 가야한다. 그것이 진리를 대하는 자세이다.
5. 신통력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신통력을 높게 여겨 그 신통력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삼고있다.
마태오의 복음 27:53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마태오의 복음 14:26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러한 신통력은 불교 경전에도 수없이 나타난다. 더무 많아서 특별하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원하는 만큼 신통변화(神足通)를 나툰다. 하나인 채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한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벽이나 담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한다. 땅에서도 떠올랐다 잠겼다 하기를 물 속에서처럼 한다. 물 위에서 빠지지 않고 걸어가기를 땅 위에서처럼 한다. 가부좌한 채 허공을 날아가기를 날개 달린 새처럼 한다. 저 막강하고 위력적인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저 쓰다듬기도 하며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의 세상에까지도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한다.[] 비구들이여, 깟사빠도 원하는 만큼 신통변화를 나툰다. 하나인 채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한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벽이나 담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한다. 땅에서도 떠올랐다 잠겼다 하기를 물속에서처럼 한다. 물 위에서 빠지지 않고 걸어가기를 땅 위에서처럼 한다. 가부좌한 채 허공을 날아가기를 날개 달린 새처럼 한다. 저 막강하고 위력적인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저 쓰다듬기도 하며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의 세상에까지도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한다.” 선(禪)과 지혜의 경(S16:9)
부처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신통변화를 세가지로 설명하며 그 중에서 가르침의 신통변화를 가장 수승하게 여긴다.
“바라문이여, 세 가지 기적(神變)이 있다. 여러 몸을 나투는 신통변화의 기적, 남의 마음을 아는 기적(觀察他心神變), 가르침의 기적(敎誡神變)이다." 상가라와 경(A3:60)
여러 몸을 나투는 신통변화의 기적, 남의 마음을 아는 기적(觀察他心神變)은 그것을 나투는 자만이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나투는 자만의 것이지만 가르침의 기적(敎誡神變)은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을 괴로움에서 건져네는 신통력이기에 가장 뛰어나고 수승한 기적이다.
-끝-
'종단개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월결사가 '대 국민 사기극'인 이유(민들레 기고글) (2) | 2023.01.29 |
---|---|
뭣이 중한가? (0) | 2023.01.15 |
돈 많은 승려 (0) | 2023.01.04 |
상월결사는 '대 국민 사기극'이다 (6) | 2022.11.30 |
판결문-승려도 노동자 지위를 얻다 (0) | 2022.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