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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총무원장의 봉은사 초하루 법문(11.24)

총무원장의 봉은사 초하루 법문(11.24)


 

<연기, 인과, 업을 잘 이해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중도의 마음을 얻고 평안해집니다.>

 

 

의견:

<연기, 인과, 업을 잘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뒤에서는 <연기법만 깨치면 성불>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재가자들이 죽을 때까지 평안한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중도의 마음을 얻고> 재가자들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분별하지 않을 수 있죠? 스님들도 잘 안되는데...이렇게 불교를 어렵게 말하고 있으면서 뒤에 <무엇인가를 원하는게 탐진치>라는데 왜 기도는 하라고 하는지요? 기도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 기도를 하라는 것인지...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해일이 일어나고, 온난화로 얼음이 녹고, 얼음이 녹으니 바닷물 수위가 올라가고 기후 변화가 일어납니다. 환경문제가 심각해 100년 후면 우리가 지구에서 못 살 수도 있습니다.” “누구 때문인가요. 우리 때문이지요. 공동의 책임이지요. 우주 만법계가 서로 그물처럼 연결돼 인드라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구 온난화를 우리 공동의 책임 즉, 공업(共業)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우리는 연기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연기=공업이라는 설명은 아주 피상적인 생각입니다. 이러한 공업론은 누구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하고 정작 범죄자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게 됩니다.(‘공업(共業)인란 무엇인가참조)

 

<“교통사고를 봅시다. 사고가 있기 전까지 과정이 존재하지요. 어디서 뚝 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결과가 일어나는 필연적인 과정이 있지요. 명동에서 고향 사람을 만났다고 합시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두 사람이 움직여 온 것을 살펴보면 명동에서 만날 수 밖에 없는 과정이 존재합니다. 이를 필연이라고 하는거지요”>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을 필연이라고 보는 것은 모든 것을 과거의 업의 결과라고 보는 시각과 같다. 이것은 부처님이 호통치신 외도의 주장인데 이것을 공업,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외도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네요.

 

<기쁨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다. 마치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 같다.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 없어요.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습니다. 밀물이 들어오면 썰물이 나가고, 때로는 낮이 길고 밤이 짧고 밤이 길면 낮이 짧지만 결국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같은 것처럼 행복과 불행은 그 질량이 같다. 어느 때는 행복하고 어느 때는 불행하지만 삼세를 사는 우리에게 행복과 불행의 무게는 같다. 이게 인과법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당장 불자들이 어떻게 신행생활을 하라는 것인가? 기도를 하고 참회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생노병사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좋은 것, 행복한 것을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하면 반대의 건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우스님의 설볍의 핵심은 연기,인과를 아는 것이 분별없는 마음이고, 중도의 마음인데 이것을 얻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실천하고 기도하고 염불하고, 참선하고 참회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깨달으면 평안해진다. 깨닫기 위해서 <기도하고 염불하고, 참선하고 참회하라> 이러한 설법이 듣는 이를 감안하고 듣는 이들의 수준에 맞게 하는 말인가? 이러한 설법은 너무나 막연하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불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욕심이다. 당장 불자들이 어떻게 신행생활을 하라는 내용이 없다. 한 마디로 말 잔치!!!라는 인사을 받았다.

이러한 말잔치로는 포교가 효과적으로 되기 힘들다. 부처님이 설하신 차제설법, 재가자들에게 맞춤 설법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사람에 따라서 어떻게 다르게 말씀하셨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아쉽다. 최대종단인 총무원장이 이러한 정도의 설법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안목이면 이번 총무원장에게도 어떤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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