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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불교에서 기복(祈福)이란 무엇인가?

기복(祈福)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기복(祈福)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종교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불교는 기복(祈福)의 종교가 아니라 작복(作福)의 종교라는 주장이 있다. 과연 그럴까? 복(福)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복(福)이다. 빠알리어 뿐냐(puñña)는 복(福) 복덕(福德) 공덕(功徳)으로 번역 된다.  부처님은 성도후 녹야원으로가서 오비구를 제도하고서 재가자인 야사와 야사의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가지 행복을 설하신다.

 

"부처님은 보시에 대한 이야기(dānakathaṁ), 계행에 대한 이야기(sīlakathaṁ),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saggakathaṁ),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ānaṃ)의 위험(ādīnavaṃ)과 욕망의 여임(nekkhamme )에 대한 이익(ānisaṃsaṃ)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유연한 마음(muducitte), 열린 마음(vinīvara­ṇa­citte)이 생겨난 것을 알자, 모든 부처님들에게 핵심이 되는 가르침인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했다."

 

불교에서는 보시(報施)하고 도덕적인(持戒) 생활을 하는 것을 '금생의 행복'이라하고, 죽어서는 하늘나라에 태어난다(生天)는 것을 '내생의 행복'이라한다. 그리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을 잘 알아 사성제를 이해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것은 마지막 '궁극적인 행복'이다. 이러한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인 행복'을 위하여 공덕(功徳)을 구하고 공덕(功徳)을 쌓아야 한다는게 불교의 기복(祈福)이다. 다만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은 유루(有漏)복이고 '궁극적인 행복'은 무루(無漏)복이라한다. 부처님 이전에도 인도에는 하늘나라에 가는 가르침들이 있어왔고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복을 지어왔다. 즉, 주문을 외거나 강물에 목욕하거나 동물희생제, 고행, 불의 숭배등을 통해서 천상에 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기존의 동물희생제, 고행, 불의 숭배등을 통해서 천상에 난다는 사상을 배격한다.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그러한 행동으로 지옥이나 나쁜곳에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외도들이 군인이 전쟁터에서 장열하게 싸우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부처님은 짠다 숫따(S42:1)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세존이신 고따마여, 저는 전사들의 옛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환희하는 천인의 무리에 태어난다' 라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촌장이여, 그만두십시오. 내게 그런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에도 세번째에도 부처님은 군인에게  "내게 그런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하다가 마지막에서는 군인에게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촌장이여, 잘못된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축생이나 두가지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이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 군인은 오랜 세월동안 속아 살고 기만당해온 것을 알고 통곡한다. 이처럼 부처님은 바른 견해가 바탕이 되어야 공덕이 되고 천상에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바른견해가 없다면 공덕을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업을 짓게되므로 부처님은 항상 바른 견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불자가 되는 삼귀의도 바른견해가 있어야 가능하고, 보시(報施)하고 도덕적인(持戒) 생활을 하는 것도, 그리고  죽어서는 하늘나라에 태어난다(生天)는 것도 바른견해가 있어야 가능하다. 마흔 가지 경(M117)에서 유루(有漏)정견과 무루(無漏)정견을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바른 견해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puññabhāgiyā)에 있고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가 있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가 있다.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인가? 보시도 있고 공물도 있고 제사도 있다. 선행과 악행에 대한 결실도 있고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화생하는 중생도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바라문들도 있다.라고 아는 것이다."

 

번뇌와 함께하는 유루(有漏)정견을 요약하면 인과를 이해하고 믿는 마음이다. 눈여겨 볼 것은 유루(有漏)정견이 공덕의 편(puññabhāgiyā) 있다는 표현이다. 바른견해를 갖는 것 자체가 공덕(功德)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불교의 기복이 가지는 특징이다. 외도의 기복은 바른견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기에 '허황된 기복', '삿된 작복'이라한다. 부처님은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하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은 이러한 기도는 마치 '큰 바윗덩이를 깊은 물속에 던져놓고 수많은 군중이 "떠올라라. 떠올라라"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S42:6) 시험공부를 안했으면서 높은 성적 내기를 바라고,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어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등은 올바른 기복이 아니다.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보시는 같은 보시라도 누구에게 보시하느냐에 따라 공덕이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웰라마 경(A9:20)에 의하면 부처님은 과거전생에 웰라마라는 바라문이었는데  공덕(功徳)을 쌓기위해 보시를 하였지만 커다란 공덕을 얻을 수는 없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전에는 예류과에서 아라한과를 이룬 성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웰라마는 겨우 탐욕을 여읜 수행자나 일반범부나 축생에게 보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부처님이 나타나 세상에 여러성인들이 출현하고 비구비구니 승가가 나타나면서 그들에 대한 보시는 이전과는 비교할수 없는 커다란 공덕을 가져오게 되었다. 부처님은 자신 조차 일개 개인으로 자처하면서 개인에 대한 보시보다 승가에 대한 보시가 훨씬 공덕이 크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같은 사과 하나를 보시하더라도 부처님께 보시하는 것보다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 된다는 것이다.부처님은 개인에 대한 보시 14가지와 승가에 대한 보시 2가지를 설한다.

 

“아난다여, 그런데 열네 가지 개인을 위한 보시가 있다. ① 여래․아라한․정등각, ② 벽지불, ③ 아라한, ④ 아라한과의 실현을 닦는 자, ⑤ 불환자, ⑥ 불환과의 실현을 닦는 자, ⑦ 일래자, ⑧ 일래과의 실현을 닦는 자, ⑨ 예류자, ⑩ 예류과의 실현을 닦는 자, ⑪ 감각적 욕망들에 대해 탐욕을 여읜 이교도, ⑫ 행실이 바른 범부, ⑬ 행실이 나쁜 범부, ⑭ 축생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네 가지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아난다여, 그런데 두 가지 승가를 위한 보시가 있다.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첫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여래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서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두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아난다여,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승가에게 하는 보시보다 그 과보가 더 크다고 나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M142)

 

 불자들의 보시는 탁발나온 스님들께 음식을 보시하는 것에서부터 승원을 건립하여 보시하고, 재물을 보시하고, 부처님의 게송을 들려주는 보시까지 다양하다그런데 '보시의 공덕'보다 잠간 동안이라도 '삼귀의'를하는 수행의 공덕이 더 크다. 삼귀의를 하는 공덕은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에서 말하는 특별한 공덕으로 불교적인 기복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마음속으로 삼귀의한 것만으로 천상에 태어난 이야기를 들어보자. 

 

부처님 당시에 사왓티에 인색한 브라흐민이 살았다. 그는 얼마나 인색한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고, 무엇이든지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오면 다시는 내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는 맛타꾼달리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는 그만 황달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 구두쇠는 아들을 의사에게 데려가면 치료비 쓰는게 아까워서 자신이 배워서 치료하고자 했으나 아들의 병은 더욱 깊어졌다. 아들을 집에 두었다가 죽게 되면 아들의 조문을 온 사람들에게 자기가 재산이 많다는 것이 알려질까봐 아들을 문 밖의 정자에 내놓았다. 아들이 죽게되면 그 정자에서 바로 화장을 시켜 버릴 셈이었다그때 부처님은 맛타꾼달리가 누워 있는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맛타꾼달리는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저는 구두쇠 아버지 때문에 그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도 못했고, 또 부처님의 설법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에도 힘이 듭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마음을 다하여 귀의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소년의 간절한 표정을 바라보고  "맛타꾼달리야, 너는 그것만으로 네가 할 일을 충분히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소년 맛타꾼달리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닌 채 죽었다. 그는 죽자마자 곧 바로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맑은 정신을 지닌채 도리천에 태어났다.

 

소년 맛타꾼달리는 죽기 직전에 누운자세에서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마음으로 말하였고 그 공덕으로 도리천에 태어났다. 이 이야기는 불교에서 삼귀의 하는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려주고 동시에 몸으로 짓는 업이나 말로 짓는 업보다 뜻으로 짓는 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기복과 작복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기복의 특징이다. 즉, 몸으로 보시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공덕을 넘어서 맛타꾼달리처럼 한 생각 일으킨 공덕을 더 수승하다고 말한다. 또한 물질적인 보시도 중요하지만 재물이 없는 사람도 보시할 수 있다는 무재칠시(無財七施)의 가르침이 소중하게 전해져 오고있다. 

 

첫째 화안시(和顔施)는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미소(微笑)짓는 것이다.

둘째 언시(言施)는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셋째 심시(心施)는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며.

넷째 안시(眼施)는 사랑을 담은 눈빛, 부드러운 눈빛으로 베푸는 것이고.

다섯째 신시(身施)는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등 다른이를 몸으로 도와주는 것이고

여섯째 좌시(坐施)는 자기의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 것이요.

일곱째 찰시(察施)는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속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승가에 과일을 올리거나 복전함에 시주 하면서 "제가 보시한 공덕으로 사업이 잘 되고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라고 기원하는 것은 바른 기복이며 작복이다. 바른견해를 가지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떤 불자가 법당에 빈손으로 오거나 과일을 가져와서 마음속으로 삼귀의를 하면서 절을 한다면 그 공덕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매일 사시예불 때 불자들이 다같이 자애경이나 보배경등을 독송하며 모든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도 매우 큰 공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보시공덕보다 삼귀의를 하고 무상을 닦고 자애를 닦는 잠깐의 수행이 더 큰 공덕을 가져온다는 것도 알려 주어야한다. 귀의공덕과 수행공덕은 '구경의 행복'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인 행복'을 위한 모든 유루복과 무루복을 바라는 기복행위, 이러한 기복은 적극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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