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언문 글자는 세종 28년인 즉 병인년에 처음 지었는데, 온갖 소리를 글자로 형용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창힐(倉頡)과 태사(太史) 주(籒)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라.” 하였다.
我東諺字剏扵世宗朝丙寅凡有音者莫不有字人稱倉籕以来未始有也
원 세조(元世祖) 때에 파스파(巴思八)가 불씨(佛氏)의 유교(遺敎)를 얻어 몽고(蒙古)의 글자를 지었는데, 평ㆍ상ㆍ거ㆍ입(平上去入)의 네 가지 음운(音韻)으로써 순(唇)ㆍ설(舌)ㆍ후(喉)ㆍ치(齒)ㆍ아(牙)ㆍ반순(半唇)ㆍ반치(半齒) 등 칠음(七音)의 모자(母字)로 나누어 무릇 소리가 있는 것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元世祖時巴思八者得佛氏遺敎制蒙古字平上去入四聲之韻分唇舌喉齒牙半唇半齒七音之母字苟有其音者一無所遺
무릇 중국의 글자는 형상을 주장하므로 사람들이 손으로 전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몽고의 글자는 소리를 주장하므로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고 귀로 듣게 되어 있다. 凡中國之字以形為主故人以手傳而目視也蒙字以聲為主故人以口傳而耳聼也
그러나 형상이 전혀 없으니 어떻게 유전하여 민멸되지 않겠는가? 이제 그 자세한 내용을 얻어 볼 길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규례를 미루어 문자를 만들었더라면 천하 후세에까지 통용되어 우리나라의 언문과 같은 공효가 있었을 것이니, 생각건대 명 나라 초엽에는 반드시 그 법규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然全無其形又何能傳而不泯今無以得見其詳若推例為文字可以通行扵天下後世與我之諺文同科意者明初必有其法也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처음 지을 때에는 궁중에 관서를 차리고 정인지ㆍ성삼문ㆍ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찬정(撰定)하게 하였다.
이때에 명 나라의 학사(學士) 황찬(黃鑽)이 죄를 짓고 요동으로 귀양왔었는데, 성삼문 등을 시켜 찾아가 질문하게 했으니 왕복이 무릇 13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측해 본다면 지금 언문이 중국의 문자와 판이하게 다른데 황찬과 무슨 관련이 있었겠는가?我國之始制也設局禁中命鄭麟趾成三問申叔舟䓁撰㝎時皇朝學士黃鑚罪謫遼東使三問䓁徃質凡徃返十三度云以意臆之今諺文與中國字絶異鑚何與焉
이때에 원 나라가 멸망한 지 겨우 79년이었으니 몽고의 문자가 반드시 남아 있었을 것이며, 황찬이 우리에게 전한 바는 아마도 이 밖에 다른 것은 없었을 것이다.
是時元亾𦆵七十九年其事必有未泯者鑚之所傳扵我者抑恐外此更無其物也
〈고려사〉를 상고하건대, “충렬왕 때에 공주(公主 원 세조의 딸)가 총애를 투기하여 외오아(畏吾兒)의 문자로 편지를 써서 원 나라에 보냈으니, 이는 남들이 알까 두려워한 것이다.” 하였고, 〈사기〉에는, “외오아의 문자는 곧 위구르(回鶻)의 글이라.” 하였다.
우신행(于愼行)은, “송 나라 가정(嘉定 영종(寧宗)의 연호) 3년에 외오아국(畏吾兒國)이 몽고에 항복했으니, 곧 당(唐) 나라 때의 고창(高昌) 땅이라.” 하였다.按髙麗忠烈王時公主妬寵作畏吾兒字達于元欲人之不暁也史云回鶻書于慎行云宋嘉㝎三年畏吾兒國降扵蒙古唐之髙昌也
거감주(居甘州)는 곧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로서 불교를 신앙하는데, 파스파(巴思八)의 전한 바에 이미, “불교에 의거하여 몽고의 글자를 지어 원 나라 시대에 통용했다.” 했으니, 공주가 사용한 문자는 이 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언문과 모습은 다르지만 뜻은 같았을 것이다.
居甘州即西域國名而奉佛敎者也巴思八所傳既云佛敎而元世之通行則公主之所作字非此而何 然則與今諺字不過形別而意同者歟
무릇 중국의 문자는 소리는 있으나 문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반이 넘는다. 입술과 혀와 목과 이를 여닫아 맑고 흐린 음성이 입에 따라 다른데, 무슨 까닭으로 이를 형용하는 문자가 혹은 있고 혹은 없는가?
이제 언문은 반ㆍ절(反切)이 무릇 열 네 모음이며, 모음만 있고 절(切)은 없는 것이 또한 네 가지이니, 세속에서 이른바 입성(入聲)이 이것이다. 그 혀를 윗잇몸에 붙이는 한 가지 소리는 우리나라에도 또한 문자가 없으며, 침(侵)ㆍ담(覃)ㆍ염(鹽)ㆍ함(咸) 4운은 진(眞)ㆍ문(文) 등과 절(切)이 동일하다.凡中國書有音而無字者過半凡唇舌喉齒開合淸濁随口異聲何故或有或無今諺反㘦凡十四母有其母而無其㘦亦四條俗所謂入聲也其舌帖上齶一條我國亦無字侵覃塩咸四韻與真文䓁同㘦
우리나라의 이른바 입성이 중국에는 없는데 다만 아(兒)ㆍ가(二) 두 자가 있으며, 소(蕭)ㆍ효(肴)ㆍ우(尤) 세 운은 모두 한 자에 두 음이 되니, 이는 이해할 도리가 없다.
我所謂入聲中國無有只有兒二兩字其蕭爻尤三韻皆一字二音此不可暁也
생각건대, 오호(五胡)의 난리 후에 원위(元魏)를 거쳐 중국의 음이 북방의 음으로 모두 변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 습속이 서도(西道)에 흐린 음성이 많고 도성 가운데 반촌(泮村)이 또한 그러하며, 북도의 백성이 제주로 옮겼으므로, 그 음성이 북도와 비슷하니, 이로써 증험할 수 있다.
서역(西域)의 문자는 음성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옥(屋)ㆍ옥(沃) 이하 입성(入聲) 17운 밖에는 아마 별다른 음성이 없을 것이니, 황찬에게서 얻은 것이 이와 같은 유이다.
意者五胡以後歴元魏華音變盡北方之音有然者耶我俗西邉多濁聲都中泮村亦然北民移濟州故其音與北相類可以為驗西域之字無音不備則屋沃以下入聲十七韻外恐更別無其音而其得扵鑚者
그렇다면 이것이 파사팔(巴思八)의 끼친 뜻임을 또 알 수 있는데, 후일에 나온 것이 더욱 공교하다고 할 만하다.
다만 그 문자의 모습이 전혀 의의가 없고 오직 1점 2점으로써 분별하는데, 1점은 모두 혀끝에서 나와 정음(正音)이 되고, 2점은 모두 혀의 우편에서 나와 편음(偏音)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의 범례는 이제 상고할 길이 없다.
如此然則此為巴思八之餘意又可想可謂後出益工但其字形專沒意義惟以一㸃二㸃為別一㸃者皆出扵舌端為正音二㸃者皆出扵舌右旁偏音也其初凡例今無所考
ⓒ 한국고전번역원 | 정지상 (역) | 1978
我東諺字剏扵世宗朝丙寅凡有音者莫不有字人稱倉籕以来未始有也元世祖時巴思八者得佛氏遺敎制蒙古字平上去入四聲之韻分唇舌喉齒牙半唇半齒七音之母字苟有其音者一無所遺凡中國之字以形為主故人以手傳而目視也蒙字以聲為主故人以口傳而耳聼也然全無其形又何能傳而不泯今無以得見其詳若推例為文字可以通行扵天下後世與我之諺文同科意者明初必有其法也我國之始制也設局禁中命鄭麟趾成三問申叔舟䓁撰㝎時皇朝學士黃鑚罪謫遼東使三問䓁徃質凡徃返十三度云以意臆之今諺文與中國字絶異鑚何與焉是時元亾𦆵七十九年其事必有未泯者鑚之所傳扵我者抑恐外此更無其物也按髙麗忠烈王時公主妬寵作畏吾兒字達于元欲人之不暁也史云回鶻書于慎行云宋嘉㝎三年畏吾兒國降扵蒙古唐之髙昌也居甘州即西域國名而奉佛敎者也巴思八所傳既云佛敎而元世之通行則公主之所作字非此而何然則與今諺字不過形別而意同者歟凡中國書有音而無字者過半凡唇舌喉齒開合淸濁随口異聲何故或有或無今諺反㘦凡十四母有其母而無其㘦亦四條俗所謂入聲也其舌帖上齶一條我國亦無字侵覃塩咸四韻與真文䓁同㘦我所謂入聲中國無有只有兒二兩字其蕭爻尤三韻皆一字二音此不可暁也意者五胡以後歴元魏華音變盡北方之音有然者耶我俗西邉多濁聲都中泮村亦然北民移濟州故其音與北相類可以為驗西域之字無音不備則屋沃以下入聲十七韻外恐更別無其音而其得扵鑚者如此然則此為巴思八之餘意又可想可謂後出益工但其字形專沒意義惟以一㸃二㸃為別一㸃者皆出扵舌端為正音二㸃者皆出扵舌右旁偏音也其初凡例今無所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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