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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꽃경(S22:94)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 비교

있다(atthi)와 없다(natthi)  VS 상견(atthita)과 단견(natthita)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심오한 연기법을 설명할 때 있다(atthi) 없다(natthi)를 주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견(atthita)과 단견(natthita)을 부정하는 것이다.꽃경(S22:94)에서 처럼 일상적인 언어인 있다(atthi) 없다(natthi)가 사용되는데 이것은 상견과 단견에 떨어지는 것과 다르다. 영어로는 있다(atthi) 없다(natthi)는 표현은 있다(exist) 없다(not exist)로 표현하고 

상견(atthita)과 단견(natthita)은 있음(notions of existence)과 없음( notions of  non-existence)으로 표현한다.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처럼 상견(atthita)과 단견(natthita)은 부정된다. 일상전인 언어인 동사 있다(atthī)와 없다(natthī)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가 붙으면 명사 있음(atthitā)와 없음(natthitā)이 되는데 이것이 부처님이 부정하는 상견(atthita)과 단견(natthita)이다.

명사 있음(atthitā)은 본래부터 있음, 영원히 있음의 뜻이 되어 기독교의 절대신, 창조신 브라흐마같은 존재를 인정하는 상견(常見)이고 명사 없음(natthitā)은 본래부터 없음, 영원히 없음의 뜻이 되어 단견(斷見)이다.

 

 

이러한 상견과 단견을 논파하고자 부처님은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명하며 중으로(majjhena) 법을 설하시고 후대에 용수보살은 중론에서 깟짜나경을 인용하여 유무중도를 설명한다. 유무중도를 통해서 논파되는 유무는 부처님이 사용하신 일상적인 어법의 있다,없다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고행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뜨만과 브라흐마라는 존재성(atthitā)을 믿는 이들이 추구했으며 쾌락주의는 비존재성(natthitā)이라는 세계관을 가졌던 이들이 추구하였다. 인간의 행위는 그가 가진 세계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오비구에게 고락중도를 통해서 유무중도를 실천하라고 설명하고 다른곳에서는 유무중도를 통해서 고락중도를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참고 경전]

 

꽃경(S22:94)

 

“nāhaṃ, bhikkhave, lokena vivadāmi, lokova mayā vivadati. na, bhikkhave, dhammavādī kenaci lokasmiṃ vivadati.

yaṃ, bhikkhave, n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natthī’ti vadāmi.

yaṃ, bhikkhave, 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atthī’ti vadāmi”.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단지 세상이 나와 다툴 뿐이다. 비구들이여,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에서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있다고 말한다."

What the astute deem as not existing, I too say does not exist.

What the astute deem as existing, I too say exists.

 

 

“kiñca, bhikkhave, n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yamahaṃ ‘natthī’ti vadāmi? rūpaṃ, bhikkhave, niccaṃ dhuvaṃ sassataṃ avipariṇāmadhammaṃ n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natthī’ti vadāmi. vedanā... saññā... saṅkhārā... viññāṇaṃ niccaṃ dhuvaṃ sassataṃ avipariṇāmadhammaṃ n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natthī’ti vadāmi. idaṃ kho, bhikkhave, n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natthī’ti vadāmi”.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동의하고 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현자들은 상()하고 지속되고 불변이고 변하지 않는 것인 색()은 없다고 동의하고 나도 그것은 없다고 말한다. () ... () ... () ... ()하고 지속되고 불변이고 변하지 않는 것인 식()은 없다고 동의하고 나도 그것은 없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동의하고 나도 그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kiñca, bhikkhave, 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yamahaṃ ‘atthī’ti vadāmi? rūpaṃ, bhikkhave, a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atthī’ti vadāmi. vedanā aniccā ... pe ... viññāṇaṃ a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atthī’ti vadāmi. idaṃ kho, bhikkhave, atthisammataṃ loke paṇḍitānaṃ; ahampi taṃ ‘atthī’ti vadāmi”.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동의하고 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현자들은 무상(無常)하고 불만족스럽고 변하는 것인 색()은 있다고 동의하고 나도 그것은 있다고 말한다. () ... () ... () ... 무상(無常)하고 불만족스럽고 변하는 것인 식()은 있다고 동의하고 나도 그것은 있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동의하고 나도 그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atthi, bhikkhave, loke lokadhammo, 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taṃ ācikkhati deseti pañña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상의 법이 있다. 여래(如來)는 그것을 깨달았고 실현하였다. 깨닫고 실현한 뒤에 그것을 공표하고, 전달하고, 선언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다.

 

 

“kiñca, bhikkhave, loke lokadhammo, 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a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rūpaṃ, bhikkhave, loke lokadhammo 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a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세상에 있는 세상의 법이어서 여래(如來)는 그것을 깨달았고 실현하였고, 깨닫고 실현한 뒤에 그것을 공표하고, 전달하고, 선언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하는가? 비구들이여, ()은 세상에 있는 세상의 법이어서 여래(如來)는 그것을 깨달았고 실현하였고, 깨닫고 실현한 뒤에 그것을 공표하고, 전달하고, 선언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다.

 

 

“yo, bhikkhave, tathāgatena evaṃ ācikkhiyamāne desiyamāne paññapiyamāne paṭṭhapiyamāne vivariyamāne vibhajiyamāne uttānīkariyamāne na jānāti na passati tamahaṃ, bhikkhave, bālaṃ puthujjanaṃ andhaṃ acakkhukaṃ ajānantaṃ apassantaṃ kinti karomi! vedanā, bhikkhave, loke lokadhammo ... pe ... saññā, bhikkhave... saṅkhārā, bhikkhave... viññāṇaṃ, bhikkhave, loke lokadhammo 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a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비구들이여, 여래가 이렇게 공표하고, 전달하고, 선언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했는데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범부, 어리석고 눈이 없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는 세상에 있는 세상의 법이어서 ... 비구들이여, ()... 비구들이여, ()... 비구들이여, ()은 세상에 있는 세상의 법이어서 여래(如來)는 그것을 깨달았고 실현하였고, 깨닫고 실현한 뒤에 그것을 공표하고, 전달하고, 선언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다.

 

 

“yo, bhikkhave, tathāgatena evaṃ ācikkhiyamāne desiyamāne paññapiyamāne paṭṭhapiyamāne vivariyamāne vibhajiyamāne uttānīkariyamāne na jānāti na passati tamahaṃ, bhikkhave, bālaṃ puthujjanaṃ andhaṃ acakkhukaṃ ajānantaṃ apassantaṃ kinti karomi!

비구들이여, 여래가 이렇게 공표하고, 전달하고, 선언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했는데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범부, 어리석고 눈이 없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seyyathāpi, bhikkhave, uppalaṃ vā padumaṃ vā puṇḍarīkaṃ vā udake jātaṃ udake saṃvaḍḍhaṃ udakā accuggamma ṭhāti anupalittaṃ udakena; evameva kho, bhikkhave, tathāgato loke jāto loke saṃvaḍḍho lokaṃ abhibhuyya viharati anupalitto lokenā”ti.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청련(靑蓮)이나 홍련(紅蓮)이나 백련(白蓮)이 물에서 생겨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을 벗어나서 물에 젖지 않고 피어 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자랐지만 세상을 지배한 뒤 세상에 젖지 않고 머문다.

 

 

 

 

 

 

깟짜야나곳따의 경(Kaccāyanagottasutta, S12:15)

 

1.1At Sāvatthī. Sāvatthiyaṃ viharati.

1.2 Atha kho āyasmā kaccānagott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kaccānagotto bhagavantaṃ etadavoca:

1.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그 때 존자 깟짜야나곳따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2. 한 쪽으로 물러나 앉은 존자 깟짜야나곳따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1.3“Sir, they speak of this thing called ‘right view’.

“‘sammādiṭṭhi sammādiṭṭhī’ti, bhante, vuccati.

1.4How is right view defined?”

Kittāvatā nu kho, bhante, sammādiṭṭhi hotī”ti?

[깟짜야나] “세존이시여,‘올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어떠한 점 에서 올바른 견해가 있는 것입니까?”

 

 

2.1“Kaccāna, this world mostly relies on the dual notions of existence and non-existence.

“Dvayanissito khvāyaṃ, kaccāna, loko yebhuyyenaatthitañceva natthitañca.

3. [세존] “깟짜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존재(상견) 또는 비존재(단견) 두 가지에 의존한다.

“Kaccāna, this world mostly relies on the dual notions of existence and non-existence.(수자또)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의 두 가지에 의존한다.(전재성)

“깟짜야나여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각묵)

*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있다(atthi) 없다(natthi)가 아니라 상견(atthita)과 단견(natthita)이다.

 

 

2.2But when you truly see the origin of the world with right understanding, you won’t have the notion of non-existence regarding the world.

Lokasamudayaṃ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4.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2.3And when you truly see the cessation of the world with right understanding, you won’t have the notion of existence regarding the world. Lokanirodhaṃ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atthitā sā na hoti.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2.4The world is for the most part shackled to attraction, grasping, and insisting.

Upayupādānābhinivesavinibandho khvāyaṃ, kaccāna, loko yebhuyyena.

 

2.5But ifwhen it comes to this attraction, grasping, mental fixation, insistence, and underlying tendencyyou don’t get attracted, grasp, and commit to the notion ‘my self’,

Tañcāyaṃ upayupādānaṃ cetaso adhiṭṭhānaṃ abhinivesānusayaṃ na upeti na upādiyati nādhiṭṭhāti: ‘attā me’ti.

2.6you’ll have no doubt or uncertainty that what arises is just suffering arising, and what ceases is just suffering ceasing. Your knowledge about this is independent of others.

‘Dukkhameva uppajjamānaṃ uppajjati, dukkhaṃ nirujjhamānaṃ nirujjhatī’ti na kaṅkhati na vicikicchati aparapaccayā ñāṇamevassa ettha hoti.

2.7This is how right view is defined.

Ettāvatā kho, kaccāna, sammādiṭṭhi hoti.

5. 깟짜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집착, 주착을 통해 구속 되어 있지만, 그는 접근, 집착, 그리고 마음의 독단, 주착, 경향에 접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는 독단을 취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 라고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앎이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점에서 올바른 견해가 있는 것이다.

 

 

3.1‘All exists’: this is one extreme.

‘Sabbamatthī’ti kho, kaccāna, ayameko anto.

3.2‘All doesn’t exist’: this is the second extreme.

‘Sabbaṃ natthī’ti ayaṃ dutiyo anto.

3.3Avoiding these two extremes, the Realized One teaches by the middle way: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6. 깟짜야나여,‘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3.4‘Ignorance is a condition for choices.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3.5Choices are a condition for consciousness.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pe

3.6That is how this entire mass of suffering originates.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7.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9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난다.

 

 

3.7When ignorance fades away and ceases with nothing left over, choices cease.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3.8When choices cease, consciousness ceases.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pe

3.9That is how this entire mass of suffering ceases.’”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가지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가지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

 

 

 

 

 

-각묵스님 번역-

 

 

 

깟짜나곳따 경(S12:15)

 

2. 그때 깟짜나곳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깟짜나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正見], 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세존이시여, 바른 견해는 어떻게 해서 있게 됩니까?”

 

4.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5.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 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6.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 물질이,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하고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밀린다왕문경-

https://blog.naver.com/shinsa9800/22205568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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