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백장암에서 사문과경을 주제로 토론할때 정리한 작업입니다.
사문과경 번역문장 비교
(아래 사이트를 이용하면 한글 영어 일본어를 비교하여 니까야를 읽을수 있습니다)
①각묵스님(2006년발행본) 사문과경.hwp
②전재성(2011년발행본)
③pali 원전 https://suttacentral.net/dn2/en/sujato
④수자또 비구 https://suttacentral.net/dn2/en/sujato
⑤보디 비구 https://suttacentral.net/dn2/en/bodhi
* 일본 광명사 단어분석 https://komyojikyozo.web.fc2.com/
* pali 고유명사사전 http://www.palikanon.com/english/pali_names/dic_idx.html
* 다른 영어 일본어등 번역본 https://legacy.suttacentral.net/dn
의견:
①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도 이와 같이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천명하실 수 있습니까?” 196p
② 세존이시여,세존께서는 이와같이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③ Sakkā nu kho, bhante, evameva diṭṭheva dhamme sandiṭṭhikaṃ sāmaññaphalaṃ paññapetun”ti?
④ Sir, can you point out a fruit of the ascetic life that’s likewise apparent in the present life?
의견: diṭṭheva dhamme를 ①은 ‘지금 여기에서’ ②는 ‘현세에서’로 번역했고 sandiṭṭhikaṃ은 ①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② ‘눈으로 볼 수 있는’로 ④는 ‘likewise apparent’로 번역했다. 이와 같은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은 경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sandiṭṭhiko)’와 같은 내용이다. 또한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veditabbo viññūhī)에서 ‘지자’(viññū)란 ‘상식적인 사람’으로 해석 하는게 적당할 것이다. “검은 황소는 흰 황소의 족쇄가 아니고 흰 황소는 검은 황소의 족쇄가 아닙니다. 이 둘은 하 나의 멍에나 기구에 묶여 있을 뿐입니다,(S41:1)”에 의하면 ‘지자(智者)‘들이란 분간 응력을 가진 보통사람들을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자’(viññū)가 보통사람들과 다른 수준의 사람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등과 배치된다.
① 그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저는 산자야 벨랏티뿟따에게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물었는데 그는 애매모호함을 설명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만 제게는 ‘어찌 나와 같은 왕이 나의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경시할 수 있겠는가?’라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15p
② 이와같이 저는 현세에 눈에 볼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물었는데 산자야 벨랏티뿟따는 회의주의론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와같이 ‘어찌 짐과 같은 자가 나의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수행자나 성직자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③ evameva kho me, bhante, sañcayo belaṭṭhaputto sandiṭṭhikaṃ sāmaññaphalaṃ puṭṭho samāno vikkhepaṃ byākāsi. Tassa mayhaṃ, bhante, etadahosi: ‘ayañca imesaṃ samaṇabrāhmaṇānaṃ sabbabālo sabbamūḷho.
④ I thought: ‘This is the most foolish and stupid of all these ascetics and brahmins!
의견: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들 사문이나 바라문중에서 이 자가 가장 바보같고 멍청하구나‘(Tassa mayhaṃ, bhante, etadahosi: ‘ayañca imesaṃ samaṇabrāhmaṇānaṃ sabbabālo sabbamūḷho.)라는 문장이 ① ② ⑤에는 통째로 빠져있다. 최근 번역본인 ④에는 들어있다.
①대왕이여, 여기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그는 아라한[応供]이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覚]이며, 영지와 실천이 구족한 분[明行足]이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며, 깨달은 분[仏]이며, 세존(世尊)입니다. 221p
② 대왕이여, 세상에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이해하는 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부처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 출현합니다
③“idha, mahārāja, tathāgato loke uppajjati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④ “Consider when a Realized one arises in the world, perfected, a fully awakened Buddha, accomplished in knowledge and conduct, holy, knower of the world, supreme guide for those who wish to train, teacher of gods and humans, awakened, blessed.
⑤ The Exalted one spoke: “Herein, great king, a Tathāgata arises in the world, a worthy one, perfectly enlightened, endowed with clear knowledge and conduct, accomplished, a knower of the world, unsurpassed trainer of men to be tamed, teacher of gods and men, enlightened and exalted.
의견: sugato를 ④⑤는 holy와 accomplished로 번역했고 ①은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②는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으로 번역했는데 각각 원문에는 없는 ’피안으로‘와 ’올바른 길로‘를 첨가하여 번역한 것이다. purisadammasārathi를 ①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 ②는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④는 ’supreme guide for those who wish to train‘ ⑤는 ’unsurpassed trainer of men to be tamed‘라고 번역했다. damma는 어근 dam의 미래분사로 ’길들여 질‘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다 길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길들여 질 사람‘을 길들인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이므로 ⑤의 번역이 가장 적당하다고 본다. 부처님은 타심통으로 길들여 질 가능성을 보시고 전도를 하시므로 대기설법이라하고 그렇게 가능성을 알고 제도하기에 제도되는 확률이 높았다. 이것이 성도후 오비구를 찾아 먼 길을 떠난 이유이고, 같은 지역에 사는 6사외도를 만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부처님이 길들여질 사람을 길들인다는 증거는 께시 경(A4:111)에서도 보인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존께서 사람을 길들일 때 그 사람이 온화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께시여, 만일 내가 사람을 길들일 때 그 사람이 온화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는 그를 죽여 버린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생명을 결코 죽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나는 그를 죽여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께시여, 여래가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만일 사람을 길들일 때 그 사람이 온화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여래는 그를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청정범행을 닦는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도 그를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께시여, 여래가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청정범행을 닦는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이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이 성스러운 율에서 살해된 자이니라.”
①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잘 갖추고 이러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어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합니다. 237p
② 이러한 고귀한 여러 계행의 다발을 잘 갖추고 이러한 고귀한 감각능력의 수호를 잘 갖추고 이러한 고귀한 새김과 알아차림을 잘 갖추고 이러한 고귀한 만족을 갖추고 숲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계곡이나 동굴이나 묘지나 숲속이나 노지나 짚더미가 있는 외딴 곳의 처소를 벗으로 삼습니다.
③ iminā ca ariyena sīlakkhandhena samannāgato, iminā ca ariyena indriyasaṃvarena samannāgato, iminā ca ariyena satisampajaññena samannāgato, imāya ca ariyāya santuṭṭhiyā samannāgato,
④When they have this noble spectrum of ethics, this noble sense restraint, this noble mindfulness and situational awareness, and this noble contentment,
의견: ①은 ‘이러한 성스러운 만족을 갖추고’(imāya ca ariyāya santuṭṭhiyā samannāgato)를 생략하고 있다.
①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이 없이 머무릅니다. 광명상(光明想)을 가져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239p
② 해태와 혼침을 버리고 해태와 혼침을 여읜 마음으로 지내며, 빛에 대한 지각을 갖추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
③ Thinamiddhaṃ pahāya vigatathinamiddho viharati ālokasaññī, sato sampajāno, thinamiddhā cittaṃ parisodheti.
④ Giving up dullness and drowsiness, they meditate with a mind rid of dullness and drowsiness, perceiving light, mindful and aware, cleansing the mind of dullness and drowsiness.
의견: ① ②의 번역은 ‘광명상(光明想)을 가져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이 없이 머무릅니다.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해태와 혼침을 그냥 제거하는게 아니라 광명상(āloka-saññā)를 통해 제거하기 때문이다.
①“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이들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환희가 생깁니다. 환희로운 자에게 희열이 생깁니다. 희열을 느끼는 자의 몸은 경안(軽安)합니다. 몸이 경안한 자는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듭니다. 242p
②대왕이여, 자기에게서 다섯가지 장애가 버려진 것을 보면 희열이 생겨나고, 희열이 생겨납니다. 희열이 생겨난 자에게 기쁨이 생겨납니다. 기쁨이 생겨난 자에게 몸이 안온해집니다. 몸이 안온해진 자에게 행복이 느껴집니다. 행복을 느끼는 자에게 마음이 집중됩니다.
③evameva kho, mahārāja, bhikkhu ime pañca nīvaraṇe pahīne attani samanupassati. Tassime pañca nīvaraṇe pahīne attani samanupassato pāmojjaṃ jāyati, pamuditassa pīti jāyati,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o sukhaṃ vedeti,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④Seeing that the hindrances have been given up in them, joy springs up. Being joyful, rapture springs up. When the mind is full of rapture, the body becomes tranquil. When the body is tranquil, they feel bliss. And when blissful, the mind becomes immersed.
의견: 삼매에 드는 순서인 pāmojjaṃ- pīti- passambhati- sukhaṃ을 ①은 환희- 희열- 경안-행복 ②는 희열 –기쁨- 안온- 행복으로 번역하였다. 한글의 단계는 영어의 joy- rapture- tranquil-bliss에 비해 이해하기 힘들다.
①그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禅)을 구족하여 머무릅니다. 242p
② 대왕이여, 그 수행승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찬 첫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③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④Quite secluded from sensual pleasures, secluded from unskillful qualities, they enter and remain in the first absorption, which has the rapture and bliss born of seclusion, while placing the mind and keeping it connected.
의견: savitakkaṃ savicāraṃ는 구역에서는 각관(覺觀) 신역에서는 심사(尋伺)로 번역되었다. 이것을 ①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 ②는 ‘사유와 숙고’로 번역하였다. ④는 placing the mind and keeping it connected. ⑤는 applied and sustained thought라고 번역했다. 단순히 각관(覺觀), 심사(尋伺),사유와 숙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명상주제에 대한 ‘생각과 고찰’, 명상주제에 대한 ‘사유와 숙고’라고 주석을 달아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선정을 닦아야 하는데 번역이 정확하지 않으니 혼란스럽다. ‘떠올리기’와 ‘살펴보기’라고 번역한 이도 있다.
① “대왕이여, 다시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禅)을 구족하여 머무릅니다. 243p
② 그는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찬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③Puna caparaṃ, mahārāja, bhikkhu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④ “Further, great king, with the subsiding of applied and sustained thought, the bhikkhu enters and dwells in the second jhāna, which is accompanied by internal confidence and unification of mind, is without applied and sustained thought, and is filled with the rapture and happiness born of concentration.
의견:ajjhattaṃ sampasādanaṃ를 ①은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로 나누어 번역하였는데 이해가 선명하지 않다. ②는 ‘내적인 평온’이라고 번역했고 ④는 internal confidence로 번역했다.
①차가운 물이 그 꽃들을 꼭대기에서 뿌리까지 흠뻑 적시고 충만하게 하고 가득 채우고 속속들이 스며든다면 그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어떤 부분도 물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244p
② 그것들의 꼭지에서 뿌리에 이르기까지 차가운 물이 흐르게 되고 넘치게 되고 가득 채워지므로, 그 어떠한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라도 차가운 물로 가득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③ tāni yāva caggā yāva ca mūlā sītena vārinā abhisannāni parisannāni paripūrāni paripphuṭāni, nāssa kiñci sabbāvataṃ uppalānaṃ vā padumānaṃ vā puṇḍarīkānaṃ vā sītena vārinā apphuṭaṃ assa;
④From the tip to the root they’re drenched, steeped, filled, and soaked with cool water. There’s no part of them that’s not soaked with cool water.
의견: 물속에 있는 연이므로 아직 꽃이 핀 것이 아니므로 ①처럼 ‘그 꽃들을’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②처럼 ‘꼭지에서 뿌리’나 ‘봉우리에서 뿌리’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①“대왕이여, 다시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清浄] 제4선(四禅)을 구족하여 머무릅니다. 245p
②대왕이여, 그 수행승은 또한 즐거움과 괴로움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뒤,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③Puna caparaṃ, mahārāja,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④Furthermore, giving up pleasure and pain, and ending former happiness and sadness, a mendicant enters and remains in the fourth absorption, without pleasure or pain, with pure equanimity and mindfulness.
⑤“Further, great king, with the abandoning of pleasure and pain, and with the previous passing away of joy and grief, the bhikkhu enters and dwells in the fourth jhāna, which is neither pleasant nor painful and contains mindfulness fully purified by equanimity.
의견: ①은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선정’으로 번역하여 마음챙김을 강조했고 ②는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으로 번역하여 어느 하나가 강조되지 않았다.④는 pure equanimity and mindfulness로 번역하여 평정을 더 강조하였고 ⑤는 contains mindfulness fully purified by equanimity라 하여 ①과 같이 마음챙김을 더 강조하였다.
①“그가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活溌溌)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246p
②그 수행승은 이렇게 마음이 삼매에들어 청정하고 고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적응성이 뛰어나 부동에 도달하여, 앎과 봄으로 마음을 지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여
③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ñāṇadassa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④When their mind has become immersed in samādhi like this—purified, bright, flawless, rid of corruptions, pliable, workable, steady, and imperturbable—they extend it and project it toward knowledge and vision.
⑤“When his mind is thus concentrated, pure and bright, unblemished, free from defects, malleable, wieldy, steady and attained to imperturbability, he directs and inclines it to knowledge and vision.
의견: kammaniye를 ①은 활발발(活溌溌)하고 ②는 ‘적응성이 뛰어나다’라고 번역하였는데 ④⑤의 번역(workable이나 wieldy)도 ②와 가깝다. 4선의 상태를 활발발(活溌溌)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다른 표현들과 비교해도 너무 튀어 보인다. 4선의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구별하는 위빠사나 가 가능하다는 설명인데 D28에서는 초선에 들어 차례로 4가지 견의 증득(dassanasamāpatti)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서 이 몸은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머리털 끝에서부터 아래로, 살갗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浄)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반조합니다.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imameva kāyaṃ uddhaṃ pādatalā adho kesamatthakā...)
①“대왕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문자 풀로부터 갈대를 골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 풀이고 이것은 갈대이다. 문자 풀과 갈대는 다르다. 문자 풀로부터 갈대가 제거되었다.’라고. 249p
② 대왕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문자풀에서 갈대를 뽑아내는 것과 같이 ‘이것이 문자풀이고 이것이 갈대이다. 문자풀과 갈대는 다른 것이다. 문자풀에서 갈대가 뽑힌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③Seyyathāpi, mahārāja, puriso muñjamhā īsikaṃ pavāheyya. Tassa evamassa: ‘ayaṃ muñjo, ayaṃ īsikā, añño muñjo, aññā īsikā, muñjamhā tveva īsikā pavāḷhā’ti.
④Suppose a person was to draw a reed out from its sheath.They’d think: ‘This is the reed, this is the sheath. The reed and the sheath are different things. The reed has been drawn out from the sheath.’
의견: 문자풀에서 갈대를 뽑아내는 것은 칼집에서 칼을 뽑아내는 비유와 뱀허물에서 뱀이 나오는 비유들과 어울린다. ①처럼 문자 풀로부터 갈대를 ‘골라낸다’는 표현은 문자풀과 갈대가 애초에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뽑아낸다는 표현으로 애초에 한 몸이라는 비유인 것이다. ④도 to draw a reed out from its sheath라고 번역하였다.
① 대왕이여, 다시 예를 들면 사람이 뱀을 개미집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뱀이고 이것은 개미집이다. 뱀과 개미집은 다르다. 개미집으로부터 뱀은 끄집어내졌다.’라고. 249p
② 다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뱀을 뱀허물에서 뽑아 이와 같이 ‘이것이 뱀이고 이것이 뱀허물이다. 뱀과 뱀허물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뱀은 뱀허물에서 뽑혀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③ ‘ayaṃ ahi, ayaṃ karaṇḍo. Añño ahi, añño karaṇḍo, karaṇḍā tveva ahi ubbhato’ti.
④‘This is the snake, this is the slough. The snake and the slough are different things. The snake has been drawn out from the slough.’
의견: 다른 번역들은 karaṇḍā를 모두 뱀허물로 번역했는데 ①만 생뚱맞게 개미집으로 번역하였다. ④⑤도 slough로 번역하였다. 개미집으로 번역하면 의생신이 만들어지는 비유와 어긋나게될 것이다.
① “대왕이여, 예를 들면 먼 길을 여행하는 자가 큰 북소리, 무딩가 북소리, 고동소리, 빠나와 북소리, 딘디마 북소리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큰북소리다. 이것은 무딩가 북소리다. 이것은 고동소리다. 이것은 빠나와 북소리다. 이것은 딘디마 북소리다.’라고. 252p
② 대왕이여, 예를들어 강력한 나팔수가 손쉽게 사방으로 소리를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강력한 나팔수가 손쉽게 사방으로 소리를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③Seyyathāpi, mahārāja, puriso addhānamaggappaṭipanno. So suṇeyya bherisaddampi mudiṅgasaddampi saṅkhapaṇavadindimasaddampi. Tassa evamassa: ‘bherisaddo’ itipi, ‘mudiṅgasaddo’ itipi, ‘saṅkhapaṇavadindimasaddo’ itipi.
④ Suppose there was a person traveling along the road. They’d hear the sound of drums, clay drums, horns, kettledrums, and tom-toms. They’d think: ‘That’s the sound of drums,’ and ‘that’s the sound of clay-drums,’ and ‘that’s the sound of horns, kettledrums, and tom-toms.’
의견: ②는 소리를 들어야 함에도 나팔을 불어서 소리를 알린다고 하고 다양한 악기의 이름들도 생략되어 있다. ②가 번역한 M77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번역되어 있는걸 보면 텍스트 자체가 다른지도 모르겠다. ① ④ ⑤는 다양한 악기 이름이 등장한다.
① 수축한 마음은 수축한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흩어진 마음은 흩어진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다. 고귀한 마음은 고귀한 마음이라고 꿰뚫어 알고 고귀하지 않은 마음은 고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꿰뚫어 압니다. 253p
② 주의 깊은 마음을 주의 깊은 마음이라고 알고,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발된 마음을 계발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을 계발되지 않은 마음을 계발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③ saṅkhittaṃ vā cittaṃ ‘saṅkhittaṃ cittan’ti pajānāti, vikkhittaṃ vā cittaṃ ‘vikkhittaṃ cittan’ti pajānāti, mahaggataṃ vā cittaṃ ‘mahaggataṃ cittan’ti pajānāti, amahaggataṃ vā cittaṃ ‘amahaggataṃ cittan’ti pajānāti
④ They understand constricted mind as ‘constricted mind’, and scattered mind as ‘scattered mind’. They understand expansive mind as ‘expansive mind’, and unexpansive mind as ‘unexpansive mind’.
의견: saṅkhittaṃ cittan①은 ‘수축한 마음’이라 했는데 D22에서는 ‘위축된 마음’이라고 번역하였고 해태와 혼침에 빠진 마음이라는 해설을 달았다. 그렇다면 산란한 마음은 들뜸과후회의 마음일 것이다. ②는 주의 깊은 마음으로 번역했는데 M77에서 같은 문장을 ‘통일된 마음’이라고 번역하였다. mahaggataṃ cittan을 ①은 ‘고귀한 마음’ ②는 ‘계발된 마음’ 다른곳에서는 ‘최상으로 노력하는 마음’ ④는 expansive mind로 번역하고 있다.
①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255p
②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③ anekepi saṃvaṭṭakappe anekepi vivaṭṭakappe anekepi saṃvaṭṭavivaṭṭakappe,
④many eons of the world contracting, many eons of the world expanding, many eons of the world contracting and expanding.
의견: ①은 앞에서 saṅkhittaṃ cittan을 ‘수축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했는데 다시 saṃvaṭṭakappe를 ‘수축하는 겁’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수축과 팽창은 현대물리학 이론과도 맞는 표현이므로 ‘파괴’와 ‘생성’보다는 수축과 팽창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①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또한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목숨이 있는 날까지 귀의한 청신사로 받아주소서. 262p
②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재가신자로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③Esāhaṃ, bhante, bhagavant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ṅghañca. Upāsakaṃ maṃ bhagavā dhāretu ajjatagge 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ṃ.
④ I go for refuge to the Buddha, to the teaching, and to the mendicant Saṅgha.
From this day forth, may the Buddha remember me as a lay follower who has gone for refuge for life.
⑤ I go for refuge to the Exalted one, to the Dhamma, and to the Bhikkhu Saṅgha. Let the Exalted one accept me as a lay follower gone for refuge from this day onwards as long as I live.
의견: 상가(Saṅgha)에 대해서 ①은 “승가로 음역한 상가(Saṅgha)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인 집단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좁게는 비구 비구니의 승단, 넓게는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의 사부대중의 모임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②는 “재가자를 포함시킬 때 승가라는 말 대신에 사부대중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승가안에 재가자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사방승가안에는 재가자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승가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지금까지도 승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고 있다.
①④⑤는 ‘오늘부터 목숨이 있는 날까지 귀의한 청신사로 받아주소서‘라고 번역하였는데 ②만이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오늘부터 목숨이 있는 날까지‘라는 표현은 진중하고 은근하며 법을 이해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발언이라면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는 무조건적인 충성의 마음, 과격함, 맹목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결의가 느껴진다. 이해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불교의 순서상 ‘오늘부터 목숨이 있는 날까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고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귀의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재가자들이 승가에 귀의할 때 비구승가(bhikkhusaṅgha)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비구니승가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경과 율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율장의 갈마부분에 '비구니승가'라는 표혀는 많이 나타나지만 여성불자가 삼귀의 할때도 오부니까야에는 '비구승가'에 귀의한다는 표현만 나타나지 '비구니승가'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일반인이 삼보에 귀의 할 적에 '승보에 귀의한다'는 표현도 없고 다만 ’비구승가에 귀의한다'는 표현만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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