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왓티와 금강경
(왜 내가하는 불교가 최고일까?)
사왓티는 꼬살라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무엇이 있나라고 물었을 때 모든게(Sabbam) 있다(atthi)라는 대답에서 ‘사왓티’라는 도시이름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부처님시대에는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 많은 매우 번영하던 도시였다. 부처님의 후반기 삶에서 24안거를 여기서 나실 만큼 오래 머무셨던 사왓티는 그러므로 부처님과 제자들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사고가 전해져온다. 하룻밤에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부모와 오빠를 잃은 빠따짜라, 이교도(異敎徒)의 사주를 받고 부처님을 모함한 여성 찐짜마나, 이교도들이 부처님에게 살인누명을 씌우고자 일으킨 순다리살인 사건, 죽은 외아들을 안고 겨자씨를 얻으려 다녔던 끼사꼬따미, 이교도들을 교화하고자 부처님이 보이신 쌍신변(雙神變)과 천불화현의 기적, 99명을 죽이고도 아라한과를 성취한 앙굴리말라 비구, 기원정사를 보시한 아나타삔디까 장자, 보시제일로 칭송되는 위사카보살, 현명하고 지혜로운 말리까왕비, 부처님께 헌신적으로 외호한 빠세나디왕, 석까족을 멸망시킨 위두다바왕등...그러나 한국의 불자들에게 사위성은 더 특별하게 생각되는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이곳이 금강경의 설법장소였기 때문이다. 조계종은 금강경을 소위경전으로 채택하고 있고 불자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는 경전이기에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금강경에 항하사(恒河沙)의 비유가 나온다는 이유로 유리병에 갠지스강 모래를 담아 가는 불자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화경을 사경하거나 독송하는 불자들은 라자가하 영축산을 특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남방불자들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독송하지 않으며 기원정사에서 금강경을 독송하지 않는다. 그들은 왜 최상승의 법화경과 금강경을 모르고 니까야만 죽어라 독송하는 것인가?
기원정사(jetavana)에서 위빠사나 수행중인 스리랑카 불자들
이제는 소승이라는 말이 사라져가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한국의 스님들과 불자들은 대승경전이야 말로 최상승(最上乘)이고 선불교야말로 최고(最高)로 수승한 수행법이라고 믿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금강경이나 화엄경이 초기경전보다도 더 심오한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기도 한다. 우리 것이 최고이므로 우리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고 널리 알리고 싶어한다. 그것이 한국불교의 세계화라는 말이고 언어의 장벽만 넘으면 한국불교가 세계화될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지만 부처님은 기원정사에서 금강경을 설한 적이 없다. 금강경은 대승보살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간단하게 그 이유를 말하자면 첫째는 금강경은 산스끄리뜨로 문자화 되어 나타났다는 것, 둘째는 금강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후오백세는 금강경이 나타난 시기가 불멸후 500년이라는 것, 셋째는 니까야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표현인 서사수지독송(書寫受持讀誦) 즉, 책을 베껴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것, 넷째는 표현방법이 인무아(人無我)의 표현보다 법무아(法無我)를 강조하여 중생, 장엄, 열반, 사과(四果)등을 재정의 하고 있다는 것, 다섯째는 부처님시대에는 없던 사상(四想)이나 구상(九想)의 부정으로 무아(無我)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 여섯째는 인욕선인으로 살때 사지를 짤릴때도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경지를 얻을때도 부처가 되는 것도 오백년뒤에 이 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사상(자아,개아,중생,영혼이라는 관념)이 없기에 가능하다고 설명함으로서 수행계위를 무효화하고 있다는 것, 일곱째는 칠보(七寶)로 탑을 쌓는 것보다 사구게(四句偈)를 법보시(法布施)하는 것이 수승하다면서 아소카왕 이후 나타난 외형적인 보시공덕 쌓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 여덟째는 새롭게 나타난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천대받고 멸시받을 것을 미리 알고 염려하여 비난받고 멸시받음으로서 업장소멸 될 것이기에 더욱 이 경을 유포하라고 강조한다는 것, 아홉째는 보시가 아니라 보시바라밀을 반야가 아니라 반야바라밀을 강조함으로서 보살의 바라밀을 재천명하고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 열째는 경 자체에 편집상의 기법인 기승결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열한번째 소승법을 좋아하는 자가 사상에 집착하여 금강경을 듣고 받고 외우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열두번째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모든 인간천신들에게 공양받을 것이고 그곳이 바로 탑이 된다고 말한다는 것, 이렇게 금강경 자체의 내용과 표현으로 금강경이 불멸후 500년에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증거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통달무아법자 라는 기준은 초기경전의 열가지 족쇄중에서 가장 마지막 족쇄인 무명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은 무아를 수행하는 법, 무명을 소멸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직 후반부에 '일체 유위법을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이슬,번개 같다고 관찰하라'는 하나의 게송이 나온다. 초기경전의 37조도품에 비교하면 이렇게 금강경에서 간단하게 수행법을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금강경에서 수행경지를 판단하는 기준과 간단한 수행방법은 금강경을 소위경전으로 삼고있는 조계종도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부처님이 번뇌의 소멸에 따라 4가지로 수행계위를 설명하는 것은 그 어떤 종교지도자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자세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친절이다 실력이다. 이러한 불교의 특징을 무효화하고 오로지 사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금강경이 답답하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불자들이 금강경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멸후 500년에 금강경은 왜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법과 비법을 나누는 것으로 일생을 소비하는 부파불교인들에게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충고였을 것이다. 여기에 대승보살들의 고뇌가 있었으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고 있던 당시의 수행자들을 안타까워하는 대승보살들의 자비가 있다.
그러나 결코 금강경이 부처님이 천명한 깨달음의 경지보다 더 깊고 높은 경지를 말하거나 기존의 가르침과 차별되는 특별한 가르침을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승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최고, 최상승이라는 표현들은 어느덧 오염되어 버린 경들에 대한 해석을 본래의 부처님 뜻에 맞게 해석하라는 강조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탐진치(貪瞋癡) 없음이 열반’이라는 표현이나 ‘탐진치가 이름하여 탐진치이므로 탐진치가 본래없음을 아는 것이 열반’이라는 표현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대승불교권의 스님들과 불자들은 최고, 최상승이라는 표현에 함몰되고 이중 삼중 부정의 논리에 도취되어 대승우월주의에 빠져있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이 분들은 대승경전이 초기의 아함이나 니까야보다 더 깊은 뜻이 있으며 선불교로 얻은 깨달음이 위빠사나를 통해 얻은 깨달음보다 더 깊은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요즘도 선지식이라는 분들은 공공연히 그렇게 법문하고 있다. 마치 최상승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이고 화두를 드는 사람만이 최상의 공부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제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왜 기원정사에서 스리랑카와 미얀마 불자들은 금강경을 독송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독송하지 않을까? 대승의 최상승 공부를 하지 않는 그들은 근기가 하열(下劣)하고 복(福)이 없는 것인가? 우리가 읽고 있는 대승경전과 간화선법은 최고이고 최상이어서 우리는 최상승 근기이고 최고의 복을 갖춘 사람들인가? 만약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불교, 수행법, 우리가 가진 경전이 우리의 선택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화점에서 몇백개의 상품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듯이 우리는 우리가 가장 마음에 드는 경전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 대승경전을 모르는 그들이나 법화경이나 화엄경이 최고의 경전으로 배운 우리들이나 모두 자신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남방불교든 대승불교든 누구에게도 그런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선불교를 배워야 했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대승불자가 되어야했다. 남방불교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그것이 전혀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우리가 선택한 것인 냥 착각하고 우열을 나누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 우월한 한국불교를 세계화해야 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각 나라의 불교는 각자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지도
왜 스리랑카와 미얀마와 태국등은 니까야를 기본 경전으로 삼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불교가 되었을까? 위 지도의 동그라미 B에서 보듯이 그들은 지리적으로 인도 가까이에 존재했고 일찍 불교가 전파되었다. 지금 이들 나라들은 니까야를 기본으로 하는 테라와다 불교권이다. B그룹의 나라들은 불멸후 200년이 지나 아소카왕이 보낸 전파사가 도착한 나라들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대한민국이나 일본, 티벳에 속하는 C그룹은 인도에서 거리가 멀어서 아소카왕이 보낸 전파사가 도착하지 못했다. 불멸후 500년이 지나자 인도라는 A그룹에서 산스끄리뜨로 대승경전이 만들어지고 빠알리경전도 산스끄리뜨 아가마로 변화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시기가 이 때이므로 중국불교는 아함경과 대승경전이 뒤섞여서 졌다. 이렇게 다양한 사상의 경전이 전해지니 중국에서는 나름대로 경전이 설해진 시기를 나누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것을 시도하게 되었고 아함경전과 대승경전을 우열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 한국 일본등에서는 최상승이라는 대승경전이 유행하게 되었다. 티벳은 인도와 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불멸후 약 천년후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므로 만트라를 외우는 금강승과 중관, 유식, 설일체유부, 경량부의 같고 다른 점을 치열하게 토론하는 나란다 대학의 학풍이 전해졌다. 소승과 대승경전을 함께 받아들인 대승불교권 불자들은 불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해왔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인도와 가까워서 불교를 일찍 받아들인 남방국가들은 대승불교는 애초의 불교에서 변질된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어 대승불교가 자국에 전파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이렇게 각나라의 불교전통은 불교가 전파된 시기에 따라서 독특한 특색을 갖게 된 것이다. 각 나라별로 다른 불교전통은 본인들의 선택이 아니다. 마치 오리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사람을 엄마인 것처럼 따라다니듯이 우리의 선배들이 받아들인 경전과 수행법을 후배들에게 물려준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우리나라가 스리랑카처럼 인도가까이에 위치했다면 우리는 상좌부불교를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갑질을 하게되어 내가 하는 수행법이 아닌 것은 배척하고 불이익을 주면서도 자신은 전통을 지켜내는 자랑스러운 일을 하는 줄 착각한다. 적어도 지금 내가하고 있는 불교가 나의 선택이 아니란 것 만 알아도 그런 배타심은 없어질 것이다.
이제 기원정사에서 금강경을 독송하는 불자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을 읽는 불자들은 이제 빈번하게 만나고 있다. 정보가 개방되고 어느 나라든지 갈 수 있는 시대에 대승경전을 보다가 초기경전을 보는 일은 자연스럽다. 반대로 초기경전을 보다가 대승경전을 보는 일도 자연스럽다. 각 나라의 전통 수행법을 경험해 보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교류하고 소통하는 시대가 된 만큼 각 불교전통들은 보완되고 수정되어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갈 것이다. 티벳불교를 공부하거나 남방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마치 변절자처럼 취급을 받아서는 안된다. 애초에 나의 선택이 아니었으므로 이제 진지하게 내 취향에 맞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탐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최상승법을 선택했다는 착각속에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면 시대를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닫혀있는 마음을 가진 개인이아 집단은 쇠락한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인연으로 찾아오는 출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면 결국 내 수행법, 내가 하는 불교에 맞지 않는 다고 출가자를 쫓아버리는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불교를 접한 장소와 시기가 다르다는 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할 줄모르면 자신은 잘 한다고 하는 일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하는 것이 된다. 사왓티에서 금강경을 독송하는 불자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동원정사(Pubbārāma)를 참배한는 미얀마 불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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