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를 ‘스님들’이라고

번역한 현재의

우리말 삼귀의는

재고돼야 하며

승가의 의미부터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

‘승가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어 이제 3회를 남겨두고 있다. 이번 달 주제는 ‘수행풍토 진작과 승가공동체 회복’이라는 주제인데 사실 승가공동체 회복은 이제까지 다뤄 왔던 모든 주제를 포괄하는 중요한 주제다. 승가공동체 구성원간의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구조를 해결하지 않고는 수행풍토를 바로세우고 화합승가를 이루기는 어렵다. 이번 대중공사에서 승가공동체 회복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그런데 논의에 앞서 ‘승가의 의미’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상가(san.gha)는 중(衆), 화합중(和合衆), 교단(敎壇) 등으로 의역되고 승가(僧伽)로 음사되기도 한다. 음사된 승가(僧伽)는 다시 줄여져 승(僧)이 되고 이것을 승려, 스님이라는 단수로 이해해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비구와 비구니를 ‘중’이라 부른 것은 상가를 의역한 중(衆)에서 비롯한 것이고 스님이라고 부른 것은 음사된 승(僧)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승가는 성스런 승가(聖衆)와 일반승가(世俗衆)로도 나뉘는데 성스런 승가는 승보(僧寶)라 하며 귀의의 대상이 되는 사쌍팔배의 성인들이고 일반승가는 과위를 얻기 위하여 수행하는 일반 스님들이다.

<깃발경>(S11:3)에는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하여 성스런 승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 성스런 승가의 특징과 자질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念僧)은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고(念佛)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念法)처럼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우리말 삼귀의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가 바르지 않게 번역됐다는 목소리들이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번역에서 ‘거룩한’이라는 단어는 사쌍팔배의 성스런 제자들을 의미하고 ‘스님들’ 이라는 복수는 승가의 의미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승가를 스님들이라고 번역해 사용할 때에 모순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대중공사에서 나온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라는 발언은 승가공동체가 가진 많은 재산을 활용해 승려노후복지가 정착되면 스님들은 노후걱정 없이 청빈하게 살게 돼 사회의 존경을 받고 수행과 포교를 잘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승가’라는 단어에 ‘스님들’을 대입하면 “‘스님들’은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는 이상한 말이 된다. 또한 ‘스님들’이라는 복수는 2인 이상의 스님들을 의미하는데 승가는 최소한 4인 이상이어야 승가라 할 수 있으므로 승가=스님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발생한다. 정확히 말하면 스님이라는 용어는 비구(bhikku)나 비구니(bhikkuni)의 번역어에 해당하지 상가의 번역어가 아니다. 승가(僧伽)를 ‘스님들’이라고 번역하면 사방승가(四方僧伽), 현전승가(現前僧伽)등에서 보이는 ‘공동체’의 의미를 표현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승가’를 ‘스님들’이라고 번역한 현재의 우리말 삼귀의는 재고돼야 하며 승가의 의미부터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 ‘승가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불교신문3138호/2015년9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