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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말걸기

고흥 천등산 금탑사 서림 스님

 

 

 

월간 해인 (2003년3월)-호계1

 

                 고흥 천등산 금탑사 서림 스님

  

                                                                             김영옥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금탑사, 찻길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는 절 초입에는 ‘천등산天燈山 금탑사’라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으니, 이 곳에도 옛사람의 믿음이 그 이름으로 남아 있다. 역사에서 천등산은, ‘하늘 아래 등불 하나 켜 든 듯이 아리따운 산’이라는 뜻으로 하늘 ‘천’자를 쓰기도 했지만, 때로는 일천 ‘천’자를 써서, ‘석존의 제자 중에 두타 제일 가섭이 그의 부모를 위해 등 일천 개를 밝혀 올린 산’이라는 뜻으로 적기도 했던 것이다. 금탑사란, 아육왕이 띄워 보낸 탑을 모신 것을 기리어 지은 이름일 터이니, 천등산은 일천 개의 등을 밝히었던 가섭의 행적을 기린 뜻으로 풀어야 짝이 맞게 된다.

다 저문 해거름에 이른 금탑사는 대중 스님이 살고 계신 곳이기는 한지, 따따그르르… 새 울음소리뿐, 그저 적요했다. 이 산중에 이런 대찰이 숨어 있었나 싶게 두렷한 도량, 지붕 위로 따뜻이 피어 오르는 연기조차 없었으면 발길을 되돌려 내려갈 뻔했다. 스님께 예 올리자마자, 가는 댓가지에 돌돌 말아서 화롯불에 구워 내는 고운 파래 무침에 코를 박고 밥그릇부터 비워 냈다. 이 곳 살림이 어떠하신지는 낮은 다탁 위에 차려진 공양 한 끼로 바로 짐작이 되었다. 몇 번을 우려 끓인 것인지 알 수 없는 묵은 김치찌개에 버섯 무침, 맛 깊은 동치미, 그리고 생전 처음 맛본 산포래(산파래) 숯불구이였다.

불사를 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세월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그 ‘궂은’ 세월은 그러나 1992년부터 주지소임을 살고 있는 서림 스님의 단아한 몸매와 고운 얼굴선을 헝클어 놓지는 못했으니, 스님은 한 순간도 이 탁한 사바에 머문 바 없었던가 보다. ‘좋은 곳’ 있다 하여 도반 따라 온 곳, 그러나, 정작 그를 이 곳으로 이끌었던 스님은 떠나 버리고 만 곳이다.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부터 불사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절은 피폐해져 있었다. 비에 젖는 부처님과, 내리는 비를 견디지 못하고 한밤중에도 우르르 소리 내며 무너지는 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비 새는 법당과 그 곳을 지키는 노전, 그리고 명부전 세 채만 있던 곳, 동짓달까지 한뎃잠을 자다시피하고 불사가 시작되었으니, 십 년 세월 동안 이 까풀막진 산 속에 그가 새로 지은 건물만 일곱 채나 된다. 치어다보면 2층이 되는 금화루 누각, 지장전, 나한전, 종각, 삼성각, 명부전 등이 새로 지어지거나 고쳐 지어졌다. 그뿐이랴, 낮은 땅은 돋워올리고 가파른 곳은 모를 깎아 도량을 안돈시키고, 건물을 위협하는 산자락을 쳐내어 법당에 비가 들이치지 않게 했다. 찻길에서 절로 이어지는 길은 포장하고, 길을 잃지 않고 정해진 길로만 흐르도록 물길도 새로 냈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라 했다. 불사란 뜻을 세운다고 다 되는 일도, 뜻이 없었어도 피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 했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이 단아한 몸 안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을까. 천등산을 떠받치듯 호쾌하게 쌓아 올린 석축을 보고, 어떤 비구 스님은 이 절 주지 스님이 비구인 줄로 알았더라 했다. 이즈음에 이런 식의 불사는 그리 보기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곳이 다른 곳과 구별되는 점은, 어느 신심 깊은 불자의 뭉텅돈으로 단숨에 이루어진 불사가 아니라, 그의 서슬 푸른 호법 정신과, 엄정한 계행, 하루도 방일함이 없는 여법한 일상을 눈으로 본 가근방 부락민들의 마음이 모여 차근차근 이루어진 불사라는 점이다. 십 년 공부를 짓던 내원사는 까마득히 잊어 버린 채 새로 시작한 살림, 불사가 한창일 때에는 하루에 도량 안에서 걷는 걸음만 해도 일백 리는 좋이 되었던 고단한 나날이었다. 소화제커녕, 끼니도 놓쳐 버리곤 했던 나날이었다. 조사 스님들도 일과 공부는 둘이 아닌 하나였다! 그저 새중 때에 배운 바대로, 스무 해 넘게 지켰던 선방에서도 공부하는 틈틈이 나무 해서 대중 목욕물 데우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놓고 앉아서도 해진 소쿠리를 기웠던 것처럼, 손발은 잠시도 놀리는 바가 없었다. 외진 곳에도 손님이 없지 않아, 주지 방이라고 마련된 뒤에도, 그의 방은 일쑤 접객실이 되곤 했다. 대여섯 대중이 해가 있는 낮에는 풀을 베면서도 입으로는 염불을 하고, 밤에는 행자나 사미니들과 함께 글을 읽었다.

그렇게 이쁜 옷은 처음 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누비 동방아는 삼십 년 동안 그와 함께 해 온 것이었다! 그 세월 지나는 동안에 본디 천은 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터였고, 해진 데 누비고 호고 덧댄 천과 실만 남았을 터였다. 내원사에서 공부를 할 적에 창고에서 주운, 기계를 닦고 버린 더러운 무명 천조각은, 이후로 오늘에까지 그가 스무 해 가까이 목수건으로 쓰고 있다.

남쪽 바닷가 지방에는 남방 전래의 설화가 깃든 불적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돌 속의 화석처럼 그저 흔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전남 하고도 땅끝, 이 곳 고흥은 불심이 그리 높지 않은 곳이었다. 척지, 금사, 신기 사람들에게 금탑사란, 통행 수단이 여의치 않은 형편으로 손쉽게 가볼 만한 퇴락한 동네 절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사람들 마음에, 이 낡은 도량에 살게 된 스님들은 목청을 크게 돋우는 바 없이, 사는 바 눈여겨보니 기특하고나 싶어졌을 것이다. 유난히 차 사고가 많은 곳에서 수륙재를 한 번 올려 주신 뒤로는 몇 년째 사고 한 번 나지 않고 있으니, 가만 있을 수 있나. 나무라도 몇 그루 찍어 불사에 보태야 되지 않겠나, 자신들도 선뜻 베어 쓸 수 없었던 나무를 서까래감으로 또는 기둥감으로 공양 올리니,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 되어 갔던 것이다.

산에 자라는 나무는 거저 얻었으나, 삯을 치르고 베어넘길 형편이 못 되었다. 이즈음에는 어디고 사정은 비슷해서, 땅을 지키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노인들이기 쉽다. 가을걷이 끝난 뒤에 마을 노인들이 모여 그가 외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들으며 나무를 베어넘겼고, 제가 먹을 음식을 싸들고 절로 와서 나무 껍질을 벗기고, 비 오는 날이면 도량 뒤를 휘어감으며 자라는 비자나무숲에서 열매를 거두는 등 노는 손을 보탰다. 무심한 주지 스님의 뒷방에서 마르고 있던 비자 열매는, 또 그들이 주머니를 끌러 돈사주었다. 그야말로 개미들의 역사役事로 이루어진 불사였다. 오늘도 아랫말에서 대여섯 보살님들이 놋쇠 다기를 닦으러 자진해서 올라왔다. 내가 설밑인 줄이나 알았가듸? 스스로 알아서들 오신 것이제. 추수 때는 쌀이고, 찹쌀이고, 고추, 호박 등, 거둔 것은 죄다 절로 쪼끔쓱 가져와요. 메주 갖다 주고, 정월에는 와서 장 담아 주고 가고.

이렇듯 오고감과 주고받음이 어여쁘니, 그렇다면 그가 이 곳에서 이루어 낸 불사는 건물 불사가 아니라, 어쩌면 스님대에서 끝나고 말지도 모를, 승속을 뛰어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근원적인 관계 회복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승과 속이 함께 짜낸 베, ‘천등’을 어찌 적어야 할까 싶었더니, ‘천 명의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불 밝히어 든 등’으로 새기어야 옳을 듯하다.

병술생이니 올로써 세는 나이로 쉰여덟, 스무 살도 못 되어 시작한 산문 안 나날이다. 동학사 강원에 이어, 전주에서 명봉 비구 스님에게서 두어 해 동안 금강경, 원각경 따위를 배웠다. 책도 안 보고 강을 해도 토 하나 틀림이 없던 분이다. 탁발을 해 가며 간경을 했던 그 세월 뒤로, 해인사 약수암, 보현암, 내원사 등에서 지은 좌복 위 정진은 참으로 서슬 푸르고도 오롯한 것이었다. 장좌불와 9년, 내원사에서 삼 년 결사를 세 번 해마쳤더니 십 년 세월이 흘러 있었다. 일주문 밖을 나오는 일도 없이 천성산만 오르내리며 몰두했던 때였다. 묵언 정진, 야채식 따위,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은 안 써 본 것이 없었다. 누가 시킨다고 그랬으랴. 그러나 스스로 좌복 위에 붙박아 버린 삶, 한 생각 뒤집어진 뒤에 누린 삶, 그것은 강제된 삶이 아니라, 어떤 시인이 읊은 것처럼, 소풍이라도 온 듯 법락으로 가득했던 즐겁고 신바람 나는 시간들이었다.

이 곳에 오면서도, 독살이는 생각도 못해 보았다. 한 순간도 그런 생각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이 도량을 새로 짓고 고쳐 짓고 개금한 것은, 여러 대중을 전제로 한, 대중이 함께 살며 공부할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십 년 세월 동안에 늘 대여섯 대중이 함께 살던 곳, 지금 처소로 삼고 있는 응향각에는 장군 죽비가 그대로 걸려 있거니와, 지난 철에도 이 곳에 스무 명 선객이 좌복에 앉았었다. 금당선원, 송광사 방장 스님이 당호도 지어 주셨고, 이제 선방 문 해 달 일만 남았다.

공부에 고금이 따로 있을 것인가. 일신을 안온히 두어 두는 일이란 당치 않은 일이다. 시류란 따라야 할 것이 아니라, 공부인이 이끌어가야 할 바이다. 수행자란 모름지기 몸은 좀 불편하게 거두는 가운데 마음을 챙기어야 하느니, 좌복 위 정진뿐 아니라, 나날의 삶에서도 서림 스님 자신이 모범을 지어가야 할 터였다. 그런데 수삼 년 전부터 몸이 마음 같지 않아졌다. 세 끼 공양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바, 법을 거둘 몸을 그 동안 너무 홀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잠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중이다. 약도 챙기어 먹고, 우스워라, 조사 스님들도 그저 일로써 몸을 단련했을 뿐일 텐데, 그러나 의사가 이르는 대로 포행도 조석으로 맘 먹고 일로 삼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시간, 그의 눈에 새삼스럽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 누가 읊으셨나, 명아주 지팡 짚고 이 곳에 걸음했던 옛사람, “영주(바닷가 마을) 땅은 깨끗하기가 신선굴과 같도다” 하신 곳이다. 공기도 맑고, 잔잔한 섬들이 많아 그런가,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여 사람 속을 들쑤셔 놓는 법이 없는 곳, 그저 눈이 적게 내리는 것 한 가지만 서운할 뿐인 곳이다. 동이 트면 관세음보살의 옷자락과도 같이 찬란한 햇빛이 비자나무 도탑게 뒤두른 법당을 돌아가며 비추는 곳, 나무관세음, 저절로 탄식하게 만드는 곳이다. 바닷가라 그런가, 가을이면 유난히 노을이 아름다운 곳, 어느 때에 본, 저녁 예불 무렵에 법당을 휩싼 햇살은 필경 천상에서나 볼 만한 자금색이었다! 그런 것들을 몇 줄의 글로도 표현해 보았다. 모으니 시집 한 권이 되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언제나 기운이 쇠해지던 까닭도, 몇 년 전에사 알았다. 쑥단에 불을 지펴 모기를 쫓으며, 도량 안으로 아늑히 번져 나가는 연기의 자취를, 또는 도량을 서늘하게 하는 냉갈이 밤하늘의 은하수에까지 다 닿은 듯, 그렇게 맑고 초롱한 밤하늘의 별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었고나.

그것이 언제적이었더라, 까마득히 잊고 마는 지난 날,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지금까지도 숫자 놀음이 서툴거나 또는 아주 없다. 머물러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고나. 그것이 묘인 줄로 알게 된 어린 나이 적부터, 따박따박 걸음 옮기는 아이 적부터, 동그란 흙무덤이 무서워 피해야 할 곳이 아니라, 그저 안온한 놀이터로만 여겨졌던 바, ‘저 너머’를 봐 버렸거나 전생에 깨친 바 있지 않았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을 터였다.

비만 조금 많이 와도 절로 올라와 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 늘 함께 저녁 포행 길 동행하는 박경식 이장님 내외, 직수굿이 머리 숙이고 앉아 객과 함께 스님 법문 듣는 동안에, 산사의 저녁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이 곳에 와서도 행자들에게 밭을 매면서 경을 가르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불법의 깊고 푸른 바다에서 ‘놀아 버린 것’이었더라 했다.□

 

김영옥의 «자귀나무에 분홍꽃 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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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된 비자나무들이 3300여 그루다. 비자나무 숲은 사시사철 깊은 초록이다.

햇살 끝에도 바람 끝에도 봄이 매달렸다. 땅은 조금씩 초록색들로 채워진다. 보리들이 푸르다. 나무 끝에는 붉은 기운이 몽글거린다. 남쪽의 들녁에 온통 따뜻한 햇살이 달겨든다. 가는 길 어느 무덤가에 하얀 매화가 흐드러졌다. 처연하거나 눈부시거나 아련하다. 고흥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모두 봄빛이다. 비자나무 숲길을 가지고 있는 고흥 금탑사에 간다.

깊은 초록, 비자나무숲

금탑사로 가는 길은 임도를 따라 산길을 오르는 길이다. 고흥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천등산(550m) 중턱에 살포시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빈 가지들이 쓸쓸한 숲길. 매끈한 나무 가지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다 갑자기 깊은 초록과 만난다. 그 반전이 너무나 갑작스럽다.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숲. 금탑사로 들어가는 길, 숲에서 시간을 뺏긴다.

10m가 넘는 키 큰 비자나무들이 사시사철 깊은 초록을 만들어낸다. 천등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비자나무 숲은 금탑사 주위 13ha에 이른다. 3300여 그루의 비자나무들이 금탑사 주위에서 살고 있다. 나이는 300살 쯤. 사찰 창건 후 300~400년이 지난 1700년 이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숲은 나이 만큼이나 품고 있는 것이 많다. 빗살같은 나무 가지들과 사철 푸른 나뭇잎들을 달고 있으면서도 따스한 햇살을 독점하지 않는다. 햇살은 비자나무 사이를 통과해서 무사히 발 아래까지 당도한다. 발 밑 푹신한 낙엽 사이 봄 풀꽃들이 고개를 드민다.

너무 높아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들 사이로 후두득 나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삐비비 삐비비 우는 새가 있고 날 때 마다 요란스럽게 소리가 나는 덩치큰 새가 있다.

가느다란 풀씨가 옷 자락에 단단히 달라붙었다. 봄이 오니 풀씨들도 어디로든 떠나 새 순을 틔울 준비를 한다. 묻어온 것은 풀씨만이 아니다. 온 몸에 온통 봄이 매달려있다. 

 ▲ 여염집 같은 절 구석구석 스님들의 손길로 정갈하다.

여염집 같은 절 금탑사


오랜 만에 공사중이지 않은 절을 만났다. 송광사 말사이면서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는 작은 절인 금탑사.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창건 당시에 금탑(金塔)이 있어 ‘금탑사’라고 불렸던 사찰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선조 37년(1604)에 중건했다. 그 후 숙종 18년(1692)에 또 불에 타 극락전만 남았다. 절에서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절 같지 않고 가정집 같은 느낌이다. 텃밭과 장독대와 평상에서 말려지고 있는 나물들이 그렇다. 좋은 햇살에 메주가 담긴 장독대 뚜껑은 벌써 열려져 있다. 절 구석 구석 꼼꼼한 손길이 닿았다.

스님들은 텃밭을 일구는 일에 분주하다. 면장갑을 끼고 삽과 호미를 든 스님들이 절집 여기 저기를 바지런히 오간다. 단정한 절집의 뒤에는 스님들의 울력이 있다.

절 안에는 어떤 인위적 소리도 없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 풍경소리 그리고 스님들의 대화 소리가 전부다. 가끔 절집을 지키는 삽살개 ‘천등이’가 짖는 소리가 절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리다. 삽살개는 액운이나 귀신을 쫓는다고 했다. 아직 액운이나 귀신을 쫓을 일이 없는지 천등이는 봄날의 나른함을 즐기고 있다.


머리 위가 서늘하다. 솔개일까? 날개짓 없이 하늘 위에 정지해 있거나 빙글 빙글 도는 폼이 영락없는 맹금류다. 졸고 있는 병아리라도 보았을까. 나른함 속에 긴장감이다. 그러고 보니 속 편하게 봄날을 즐기는 것은 절 집에 찾아든 이방인과 천등이 밖에 없는 듯 하다. 스님들은 텃밭일에 분주하고, 풀씨는 필사적으로 옷자락에 붙고, 나무들은 새순을 틔우려고 부지런히 가지 끝으로 붉은 기운을 밀어올리고 있다.

봄날이 오기 전 긴장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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