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자들과 함께한 인도 불교 성지 순례기
2010년 3월 13일
우리는 뿌네 기차역에서 오후 8시 55분 빠트나행 기차를 탔다. 난생처음 성지순례를 떠나는 인도 불자들의 얼굴은 설레이는 듯이 보였다. 그들 중 이쁜 마음씨를 가진 어떤 사람이 장미꽃 다발을 기차 안으로 가져와서 사람들에게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뜻 밖의 선물에 우리는 그 꽃을 가슴에 꽂거나 머리에 얹어 놓으며 행복해 했다.
장미 꽃 향기를 맡으며 시작하는 여행!
뭔가 즐거운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기차는 3월 15일 오전 10시에 빠트나에 도착하였다. 2박 3일이 걸린 것이다. 정시보다 3시간 정도 늦었는데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차 안에서 이틀 밤을 보낸 우리들은 이미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이틀 동안 기차 안에 갇혀 있으면서 우리가 한 일이란 때마다 밥을 챙겨 먹고 짜이 마시고 과일 사먹고...하는 일들 뿐이라서 먹으며 떠들고, 먹고 나서 떠들고, 심심해서 말 걸고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우리 중에 어떤 진지한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암베드카의 제자들 답게 혹은 빠알리어 학과 학생들 답게 초기경전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이거나 우리가 방문하게 될 불교성지에 대한 지식을 교환하기도 했다. 인도 기차여행을 하게 되면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끼리 안 친해지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
힌두사두와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순례단
3월 15일
우리의 기차는 빠트나행이 였고 빠트나가 종착역이었으나 우리가 내린 곳은 빠트나에 한 정거장 못 가서, 다나뿌리(Danapuri)라는 기차역이었다.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인 날란다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기차역 앞에는 우리를 날란다로 태우고 갈 45인승 대형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날란다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일행
날란다 대학교수 식당에 오후 1시 쯤 도착하는 즉시 점심을 먹었다. 기차가 3시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침을 거른 우리는 많이 배고프고 지친 상태였다. 우리의 배고픔을 보상이라고 해주는 듯 날란다 대학 식당의 음식은 환상적이었다. 인도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입에도 착 달라 붙는 그런 맛이었는데 세련된 교육 도시 뿌네와는 차원이 달랐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음식 때문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들기 까지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짐을 숙소에 내리지도 않은 채 우리는 날란다 박물관과 현장스님 기념관을 먼저 관람했다. 박물관은 오후 5시에 문을 닫기에 서둘러야 한다는 마헤시교수의 재촉이 있었다. 관람료가 5루피 인 것을 감안한다면 날란다 박물관은 볼거리가 풍부한 편이었다. 시각장애인은 마헤시교수는 커다란 불상은 손으로 만지며(만지면 안 되는 것이 었지만)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유리관 속에 갖힌 유물은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 날란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미얀마스님의 초대를 받아서 날란다 대학 기숙사를 방문 했다. 우리를 초청한 스님들은 꾸살라스님의 도반스님들 이었다. 날란다 대학에만 미얀마 스님들이 97명이 있고 일반인 학생들도 100명쯤 된다고 한다. 태국스님은 5명 라오스, 캄보디아 스님이 각각 2명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미얀마스님들이 아니면 날란다 대학이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미얀마 스님들이 이 대학에 많이 오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답은 학비가 싸다는 것이다. 뿌네대학의 절반도 안 되는 학비로 이곳에서는 여유롭게 공부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날란다 대학 총잠님의 환영사를 듣고 있는 순례단
날란다 대학의 공식 명칭은 Nava nalanda deemed university 이다. 다른 대학처럼 학생이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deemed 라는 단어가 들어 간 것인데 최근 대학명칭이 university가 아닌 college로 바뀔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었다. 인도 정부가 각 대학의 등급평가를 했는데 날란다 대학이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이 소문을 규명하려고 박사과정에 있는 기숙사 대표스님(Ashin sutacaralankara)에게 물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몇 번 시위를 했다고 했고 지금은 보류상태라고 한다. 정부 입장에서는 대학이 갖추어야할 여러 학과를 갖추지 못하다보니 college로 바꾸라는 것이고 날란다 대학교나 비하르주의 입장은 어느정도 시간을 좀 달라는 것이다. 지금 기숙사 옆에는 학교 본관 건물로 사용될 제법 큰 규모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차를 마시고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별들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을 때 밤길을 걸어서 숙소에 돌아왔다. 미얀마 스님 3명이 우리를 바래다 준다고 따라 왔는데 기숙사 대표 수따짜라스님은 우리 일행 중 한명인 태국인 우텐(uthain)과 급격하게 친해졌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들은 연인 처럼 손을 잡고 걸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3월 16일
아침을 7시에 먹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라즈기르(라자가하, 왕사성)로 이동했다. 깃자꿋따산(영축산)에는 날란다 대학에서 파견 나온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깃자꿋따산을 오르는 비탈길은 빔비사라왕의 이름을 따서 ‘빔비사라의 길’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그가 이 길을 넓게 만들고 이곳을 자주 찾아 왔던 까닭이다. ‘빔비사라의 길’이 시작되기 전, 오른쪽 숲은 맛다꿋치(maddakucchi)라고 불리워지는 유적지가 있다. 맛다꿋치(maddakucchi)는 맛다의 자궁이란 뜻이다. 그녀는 아자타삿투왕의 어머니이자 빔비사라왕의 부인이었는데 자신이 잉태한 아이가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낙태를 결심하고 이 숲을 찾아와 칼로 배를 찔렀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산을 오르는 길에는 2개의 탑이 이었던 흔적이 있는데 하나는 왕이 마차에서 내린 곳이고 다른 곳은 자신을 호위하던 신하를 물리치고 혼자서 산을 오르기 시작한 곳이다. 산을 오르는 중간에 작은 굴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살았다고 하여 각각 사리뿟따의 굴, 목갈라나의 굴 등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법화경을 설한 자리에 절을 올리는 일행들
산의 정상 주위에도 아직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한 작은 굴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당시의 스님들은 “이 굴은 내것이다” 라는 소유 관념이 없었을 테니, 굴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가이드는 법화경이 설해진 곳과 데바닷따가 부처님께 돌을 굴린 곳이라고 추측되는 곳을 알려주었다. 현장스님의 증언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가이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80% 이상이 현장스님의 여행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했다. 데바닷따는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3번의 시도를 한곳이 모두 라즈기르 였는데 첫 번째가 활과 칼을 지닌 자객을 보낸 것이고, 두 번째는 술 먹인 사나운 코끼리(꼬끼리의 이름은 날라기리)를 부처님이 탁발하는 길에 풀어 놓은 것이다.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산위에 숨어 있다가 부처님이 지나갈 때 바위를 굴렸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 바위는 다른 바위에 부딪쳐서 부처님은 위기를 모면했는데 바위가 부딪치면서 생긴 파편이 부처님의 발에 떨어져 피가 흐르게 되었다 한다. 그때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부처님의 앞뒤로 둘러쌌는데 부처님은 자제들이 당황하며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물리치면서 “여래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폭력으로 죽는 일이 없다.”고 제자들을 타일렀다고 한다.
사리불이 머물렀던 굴을 참배하는 태국불자들
대승불교도 들에게는 이 깃자꿋따산이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한 영산회상(영축산)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산의 정상에는 태국 단체 순례객들이 초전법륜경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경전을 읽는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참배 하였다. 가이드의 손을 잡고 마헤시교수도 산의 정상에 올라 참배를 하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가이드와 학생들 간에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갔는데 라즈기르에서 부처님과 제자들에 관련된 일들이 워낙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날란다 대학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일행
다음코스는 불교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진 벨루와나(죽림정사)였다. 작년과는 다르게 안내판도 다시 세우고 시멘트로 길을 포장해 놓았는데 안내판은 잘못 표기된 것이 보였고 시멘트 길은 예전의 그윽한 정취를 없애 버렸다. 인도의 공무원들은 잘 해보겠다고 한 일이었겠지만 불교와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안목이 없다보니 잘 하려고 한 일이 그렇치 못하게 된 듯하다. 가이드는 빔비사라왕이 죽림정사를 기증하게 된 이야기,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출가 이야기, 현재의 관리 상황등을 설명해 주었다. 꾸살라 스님은 이곳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불통게가 설해 졌다고 알려주었다.
제불통게란 모든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설하는 불교의 핵심인데 그것은 법구경 183번 게송에 나타나 있다.
일체 악행을 저지르지 말고
착한 공덕을 행하며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Sabbapāpassa akaraṇaṃ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ṃ
etaṃbuddhāna sāsanaṃ.
죽림정사에서 다시 따뽀다 온천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이 따뽀다 온천 옆에는 따뽀다 승원(tapodārāme)이 있었다고 하는데 빔비사라왕과 부처님과 비구들은 이 온천에서 자주 목욕을 하셨다 한다. 경전에는 빔비사라왕이 이곳에 목욕하러 올 때마다 스님들이 목욕하고 있어서 매번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스님들과 목욕날짜가 겹치지 않도록 부처님께 건의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율장에 전한다. 지금은 흰두교 사원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제 1차 결집이 이루어졌다는 칠엽굴은 너무 멀어서 시간관계상 올라가지 못했고 까사파 존자가 머물렀다는 핍팔라 석굴에서 빔비사라 감옥으로 이동했다. 길옆에 위치한 빔비사라 감옥은 자신의 아들 아자타삿투에 의해서 갇혀 있다가 빔비사라왕이 죽은 곳이다. 굶어서 죽었다는 빔비사라왕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처님께 귀의하고 이미 성인의 흐름에 든(예류과) 빔비사라왕이 왜 말년에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는가를 의심하게 되는데 한문경전은 이것에 대한 대답하기 라도 하는 듯이 관무량수경에서는 부처님이 목련존자와 부루나존자를 보내어 설법하게 하고 빔비사라왕의 부인을 위해서는 아난존자와 목련존자를 데리고 신통력으로 시방세계의 정토(淨土)를 나타내시었다고 한다. 아자타삿투를 꼬시어 아버지를 죽이게 한 데바닷따도 법화경에서는 부처가 될 수기를 주고 있다. 이렇듯 대승경전은 이러한 의문점들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그곳에서 조금 더 가자 바위위에 마차바퀴가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아직 왜 이런 자국이 생기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흰두교들은 이것이 크리슈나가 마차를 몰아서 생긴 자국이라고 하고 불교도들은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마차를 타고 가다가 생긴 자국이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현명한 가이드는 이것이 바퀴 자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보드가야에서 라즈기리에 들어올 때 제일먼저 보게되는 큰 탑이 하나가 있는데 다음으로 그 탑을 방문하였다. 그 탑에 올라서니 주위의 이시길리산이 눈에 잘 들어왔다. 이 산은 500명의 연각불이 동시에 산속으로 사라진 곳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 산에서는 또 수행을 하던 고디까(Godhika)존자와 병이든 왁깔리 존자(Vakkali)가 자살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존은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왁깔리에게
"왁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 하느냐?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참으로 법을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법을 본다."(Vakkali sutta)
라고 법문을 이 산에서 하셨다고 전한다.
왁깔 리가 자살하기 전에 “벗들이여, 여기 나의 침상을 들어서 이시길리 산(isigilipassa) 중턱의 검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 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시길리 산은 죽은 시체를 버리는 장소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점심 시간이 되어서 날란다 대학에 돌아가서 식사를 하고 다시 오후에는 날란다 대학이 있었던 유적지를 둘러 보았다.
우리의 가이드는 7세기 초에 이곳을 방문했던 현장스님의 지적에 따라 아쇼카왕의 수투파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신 왕사성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아직 이곳이 제대로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하였는데 그 장소는 죽은 시체를 버린다는 시타림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한다.
다음으로 찾아 간곳은 목갈라나 존자의 생가가 있다는 시골 마을이었다. 생각보다 먼 곳에 위치한 그곳은 버스가 들어가기 어려운 작은 시골동네였다. 버스에 내려서 보리밭 사이 길을 걸어가야 했다. 보리밭 길을 걷다가 시골 아이들을 만났는데 정말 천진하고 순진해서 그아이들의 웃음에 우리들까지 행복해 졌다. 목갈라나 스님의 생가에 세워진 사리탑은 이미 파헤쳐져서 사리탑이라고 말 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우리들에게 반짝 반짝 빛나는 그릇 조각들을 찾아 보라고 말했으므로 우리는 무너진 탑위에 올라가 손꼽놀이 하듯이 그릇 조각을 찾았다. 그곳에는 얇지만 빛나는 조각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니 도자기 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건련의 사리탑이 있었던 자리에서
저녁에 날란다 대학 세미나실에 모여서 날란다 대학 총장의 환영사를 듣고 이어서 슬라이드 화면을 보면서 날란다 유적지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열반경에 나오는 지명들 즉, 부처님이 라즈기르에서 쿠시나가라까지 가실 때 들리셨던 마을을 발굴해 내어 새로운 순례코스를 만드는 계획이 진행중이라고 했다. 가이드는 이제까지 날란다 대학에서 연구해온 모든 자료를 자신이 만든 블로그에 공개를 하고 있다.
날란다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저녁에 다시 날란다 대학에 있는 미얀마스님들이 초청을 받아서 그곳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스님들은 지프차로 우리를 데리러 왔고 다시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이번에는 나와 꾸살라스님, 유미, 우텐 이렇게 4명이 갔다. 스님들이 손수 음식을 준비하고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 부족한 반찬을 날라다 주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대부분이 미얀마에서 가져온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었는데 미얀마불자들이 성지 순례를 자주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님들은 우리들에게 각각 미얀마 커피를 한 봉지씩 주었다. 사람을 대접하는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3월 17일
오늘 아침에 인도불자들이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아침을 먹으러 나왔다. 우텐의 설명에 의하면 오늘은 보드가야를 순례하기 때문이란다.
부처님이 깨달은 보드가야는 인도불자들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나 보다. 오늘은 보드가야에서 잔뼈가 굵은 새로운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했다. 인도 불자들은 모두 공양 올릴 꽃을 사서 두 손에 들고 법당을 참배했다. 가이드가 설명하는 데로 부처님이 칠칠일(49일)동안 깨달음의 즐거움을 누리며 앉아있던 7군데의 장소를 찾아서 참배를 하고 마지막으로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되새겼다. 꾸살라 스님은 삼보에 귀의하는 게송을 읊고 붓다가 처음 깨달았을 때 터져 나온 오도송을 읊었다.
그 오도송은 법구경 153.154번 게송에 있다.
“한량없는 세월의 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보리수 아래에 앉아 기도하는 마헤시 교수
그리고 12연기, 24조건, 삼보찬탄으로 마무리 했다. 꾸살라 스님의 염불에 이어 우리는 잠시 좌선의 시간을 가졌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부처님이 깨달은 자리에서 좌선 할 때 큰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사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 꾸살라 스님과 순례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각 장소에 맞는 경전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경전을 간추리기로 했는데 프린트기를 사용하는 문제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서 실행해 옮기지 못했다. 그래서 어릴적 부터 빠알리 경전을 외우도록 훈련 받아온 꾸살라 스님에게 의존하게 된 것인데 인도불자들에게 빠알리 찬팅은 친숙했으므로 감동이 더 컸을 것이다. 마헤시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불자들도 이곳 보드가야에서 부처님의 오도송을 읊어보고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인 십이연기와 24조건 등을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참선이 끝나고 감동한 몇몇 인도불자들이 꾸살라스님께 약간의 돈을 보시하였으나 꾸살라스님은 보시함에 넣으라고 말하며 사양했다.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한국스님이 운영하는 한국 절에서 원만스님을 찾아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워서 이달 말에 한국에 들어가신다고 한다. 한국사원 고려사에도 들려 보았으나 사람이 없는 듯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잠겨진 문을 뒤로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와야 했다.
점식식사후에 우리 일행은 보드가야에 있는 각국의 사원을 참배하였다. 태국사원, 중국사원, 일본 사원, 부탄사원 등등....
시간관계상, 전정각산, 수자터 집터, 박물관등을 생략하고 라즈기르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쉬다가 10시에 출발하는 사르나트행 기차를 타러 라지기르역으로 떠났다.
3월18일
아침에 사르나트에 도착하여 티벳트 인스터튜트(www.cihts.ac.in)에 여장을 풀었다.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Central Institute of Higher Tibetan Studies(Deemed University) 이다. 1967년 달라이 라마의 원력으로 세워진 학교인데 도서관, 강당등 여러 가지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꾸살라스님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짐을 정리한 후 점심을 먹고 사르나트 박물관을 들렸다. 이번에도 이곳 전문가이드가 설명을 했는데 그는 티벳인 이었다. 영어도 잘하고 힌디도 잘했지만 설명하는 수준은 기대 이하였다. 박물관에 들렸다가 한국비구니 스님 3명을 만나서 나는 잠시 그분들의 가이드가 잠시 되기도 했다. 이 박물관은 성지 순례중에 만날 수 있는 가장 마음에 드는 박물관이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녹야원을 참배하였다. 외국인은 100루피를 입장료로 받고 있었는데 인도인은 10루피 였다. 일본인 유미와 태국인 우텐은 인도인들과 섞이여 자연스럽게 입장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외국인 인것이 탄로가 나서 관리소 직원이 나만 다시 티켓을 끊으라고 했다. 스님이 불교유적지에 들어가는데 왜 돈을 받느냐고 항의를 해보았으나, 원칙을 강조하는 직원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라도 입장료를 받았는데 미얀마스님들의 시위와 항의로 입장료를 없앴다고 한다. 사르나트도 불자들이 힘을 모아 입장료를 없애야 할 것이다.(나중에 태국인 우텐에게 들으니 태국인들은 인도인, 티벳인, 네팔인과 마찬가지로 5루피를 낸다고 한다. 인도 정부와 태국정부가 그렇게 합의 했다고 한다.) 녹야원에서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은 다메크(Dhamekh)스투파이다. 이 스투파는 다르마차크라 스투파(Dhar-machakra)라 불리기도 하는데 부처님이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 법을 설한 장소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스리랑카 사찰내의 사실적인 벽화
일본사찰 내의 세련된 벽화
지금의 모양은 아쇼카 왕 이후 계속 증축되어 굽타 왕조에 이르러 조성된 것인데 1835년 컨닝햄은 이 스투파의 중심부 수직갱도를 파내려가던 중 정상에서 91.4cm정도의 아래 부분에서 6~7세기 경에 쓰여진 '법신게(法身偈)를 발견하였다.
“모든 법은 인(因)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여래께서는 이 인(因)을 설하시었다.
모든 법의 소멸에 대해서도
위대한 사문은 그와 같다고 설하시었다.”)
(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彼法因緣塵 是大沙門說.)
"Ye dhammāhetuppabhavā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ñca yo nirodho evamvādīmahāsamano." <Vin. I, p.40.>
이 게송은 다른 수투파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사리뿟따도 라즈기르에서 탁발하고 있던 앗사지로부터 이 게송을 얻어듣고 부처라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알게 되었고 예류과를 얻게 된다. 이 게송이 법신게(法身偈)로 불리우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게송을 듣고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경서보살은 그 당시에 절대적인 존재 아뜨만 브라흐마를 믿는 상황에서 緣起緣滅을 주장하는 이 가르침이 사리뿟다에게는 충격적이 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굴당시 사르나트의 모습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가이드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엉뚱하게도 일련정종 계열의 일본 사찰이었다. 이유는 그의 스승이 이 절의 스님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묘호랑게교”를 되풀이 하면 건강도 좋아지고 재물도 들어 오는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보다 못해 내가 한마디를 했다. “남묘호랑게교는 대단한 진언이 아니고 다만 묘법연화경(sadhammapundarikasutra)을 일본식 발음에 지나지 않으며, 단지 대승불교 중에 하나의 종파(창가학회,SGI)인데 한국불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고.... 나의 갑작스런 발언을 마헤시 교수는 즐거워하지 않았지만 몇몇 불자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갔다.
다음날 그 가이드는 다른 그룹을 안내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나니 사르나트에 살고 있는 경서보살이 찾아왔다. 유미와 우텐과 경서보살과 내가 함께 도량을 산책하다가 헤어졌다.
3월 19일
이곳의 숙소는 호텔급 수준이었는데 밤중에 전기가 나가자 여인숙 보다도 못하게 되었다. 선풍기가 안돌아 가자 통풍이 안 되어서 더웠고 모기가 밤새도록 피를 빨았다. 우리는 거의 잠을 설쳐야 했다. 통풍이 안 되게 건물을 지은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다. 아침을 먹고 세미나 실에서 티벳트 인스터튜트에 대한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강사로 나온 티벳스님은 영어와 힌디를 잘 했는데 인도인들과는 힌디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티벳불교에 흥미를 보인 인도불자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나중에 그것이 업, 윤회등에 관한 질 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Dukkha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그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괴로움에 대해 나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이 “책상 그자체도 둑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아비담마를 가르쳤던 담마디빠스님과 대부분의 미얀마스님들이 가진 견해였다. 기차 안에서도 우리는 이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었는데 심지어 위빠사나 선생이라는 인도불자는 부처님이 대답하지 않은 질문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꾸살라스님은 나의 견해에 동조하는 티벳스님의 대답을 듣더니 그때 내가 그 스님에게 그런 대답을 유도하더라고 했다. 유도된 질문이기에 자신은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아무튼 나의 질문으로 인도불자들이 Dukkha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업을 받는 학생들
스님의 안내로 우리는 수업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산스크리트 수업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빠알리 수업에는 겨우 3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미얀마 스님이 빠알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도 티벳불교에서 빠알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티벳스님들이 인도에 살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현대식
교육과 티벳전통교육이 잘 조화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어서 도서관장으로부터 도서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도서관을 관람했다. 이 대학에서 발간한 책들을 살 수도 있었는데 주로 산스크리트와 영어로 된 책들 중에는 좋은 책이 많이 보였다.
점심을 먹고나서 부터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내일 새벽 3시 기차를 타고 다시 뿌네로 돌아가야 하기에 선물을 사거나 주위를 둘러볼 시간을 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가강을 구경하고 선물을 사기 위하여 바라나시로 떠났다. 내게는 바라나시가 그리 유혹적인 동네가 아니었고 선물 살 일도 없었으므로 방에서 샤워하고 쉬었다.
저녁에 사람들이 돌아와서 바라나시에 다녀온 소감을 듣고 있자니 경서보살이 왔다. 기차역으로 떠나기 까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우리들은 다시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미와 우텐도 참여해서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는데 나중에는 삼카락키따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 미렌드라까지 참여해 늦도록 열띤 토론을 했다. 경서 보살의 폼나는 영어 실력과 힌디어, 그리고 불교사상과 인도문화에 대한 이해에 모두들 감탄을 했다. 특히 유미와 우텐은 경서 보살의 영어 발음과 다이내믹한 동작을 흉내 내면서 즐거워 하였다.
우리가 나눈 주제는 왜 불교를 가르치는 교수들이나 학자들이 힌두교인으로 남아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힌두인으로서 불교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간디 조차도 “부처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교리를 가르친 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가지는 불교인으로 개종하면 그동안 상위계급으로 누렸던 여러 가지 기득권을 박탈당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불교인 이라고 밝히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혜와 더불어 용기까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기어이 새벽 2시 까지 시간을 채우고 뿌네로 돌아가기 위해 무갈사라이 역으로 떠나는 이들을 배웅했다. 2시에 일행들을 배웅해주고 방에 돌아오니 허전함이 몰려왔다.
3월 20일
이제 사르나트에 남은 것은 나와 우텐 둘 뿐이었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천여 수좌, 4대강 중단 촉구 (0) | 2010.05.30 |
---|---|
룸비니에서의 사진 (0) | 2010.05.30 |
인도 불자의 결혼식 (0) | 2010.03.12 |
법정스님을 기리며 (0) | 2010.03.11 |
이제는 법어대신 인터뷰를 하자 (0) | 2010.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