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은 기분 좋은 설렘을 동반한다. 시린 바람에 몸을 잔뜩 옹송그리며 덕수궁 돌담길을 종종 걸으면서, 나는 설렜다. 닮고 싶었던 이가 글 속에만 있었는데 그런 사람을 직접 '본다'는 것, 추위에도 발걸음이 마냥 살랑거렸던 건 그래설게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마속까지 정치적인>이라는 책 보다, 2007년 2월의 마지막 날(그 해 5월까지 10차례 매 주 연재) 레디앙에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글로 먼저 목수정 씨를 읽었었다. 경계를 해체한 삶. 22년 연상의 프랑스 남자와 동거하며(시민연대계약)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다소 선정적인 사실 외에도, 그의 글엔 문화, 자유, 평등, 가부장제와 결혼 등이 신랄하고 발랄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단숨에 그 글을 읽어나갔고 새로운 글이 업데이트 되기를 호기심과 목마름으로 기다렸다. 거기엔, 내가 살고 싶은 삶의 지향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디앙]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2009년 1월 13일 저녁. 나는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초청으로 '결핍 혹은 비정상이 내 발목을 죄는 족쇄가 아니라 자유로운 도약의 기회라는 것을 아는' 목수정 씨와, 그가 살아가는 '정치적인 삶'을 사랑하는(혹은 궁금해 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미화하지 않고 일부러 과감하게 질러썼다"
"내일 프랑스로 돌아가는데, 저를 저자로 만들어주시는 건 독자분들 입니다. 오늘의 만남을 통해 아무 의미없이 돌아가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시귀국. 한 신문의 보도처럼 출판관련 업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딸 '칼리가 한국을 그리워해서'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엄마의 마이크를 뺏어 "안녕하세요 저는 칼리입니다"라고 말하고 씩씩하게 웃던 아이는, 엄마가 사람들하고 대화를 나누든 말든 분주했다. 4살짜리 꼬마 숙녀의 분주함은 공간을 가르는 공기를 밝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옳은 것은 아니며 아이가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몰라야 할 것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표현 방식을 달리할 수는 있겠지만, 아이가 묻는다면 그리고 이미 보았다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32쪽)
그런 그녀에게도 신념과 생활의 모순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하는 대상은 딸 칼리다. 그는 "딸이 나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교육하면서도, "통제가 안되는 칼리 덕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치는 모순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일명 '착한 아이 놀이'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지칠 때면 아이는 다가와 '착한 아이 놀이'를 제안한다. 엄마의 지시(는 칼리가 정한다)에 "네, 엄마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달려와 안기는 놀이다. 제 이름이 엄마의 말에 자꾸 섞이자 가만 듣고 있던 칼리가 즉석에서 이 놀이를 제안해 보여줬고, 공간은 웃음으로 훈훈했다.
"미화하지 않고 일부러 과감하게 질러썼다"던 글은 레디앙 연재 당시 "소위 '좌파'라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돌팔매를 맞았고, 맷집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러나 책을 돈을 주고 사는 일반 독자들에 대한 반응에도 의연할 수는 없었던 듯 "누가 읽을까, 아무도 안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분들"이라며, "제가 쓴 것 이상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많았"단다. "이렇게 급진적인 생각을 사람들이 편히 읽다니, 역시 질러줘야한다"고 말하던 표정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걱정과는 달리 욕을 안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처럼 독자들이 '편하게만' 읽은 것은 아닌 듯 보였다. 한 독자는 "직설적인 책이 무서웠다"며 너스레를 떨어 사람들을 웃게 했다.
사랑하되 결혼하지 않는 것 -
연애는 결혼이라는 요란스런 사회적 통과의례로 가기 위한 청춘남녀의 요식행위가 돼 버렸고, 심지어 너저분한 상행위로 전락하는 경우도 숱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행복하게 결혼해서 잘 사는" 걸로 끝나지 않는 모든 사랑은 불장난이며 실패로 규정된다. (245쪽) 결혼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모순들을 가장 잘 농축한 의식이다...한국사회에서 결혼이 여자에게 극단적으로 불리한 선택인 것은 한 남자와의 서약인 동시에,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는 그 남자의 친인척에 대한 일종의 노예서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5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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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랑도 학문으로 배워야 한다고 했다. 책에서 주창한 바 있는 '사랑학' 역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모았다. 그녀가 봤을 때 지금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가 유일한 것이 아니며, 근대적 개념의 사랑이라는 건 협소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 관점을 갖고 있는지 알아가는 의미에서 사랑이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사회, 제도, 종교 등 이데올로기 권력의 질서에 맞춰 사는 세상에서는 사랑도 허용된 형태가 있고 제약돼 있다고 생각한다"며 "결혼과 사랑에 대해 한국사회가 바라는 틀을 객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까페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앉아 있되, 시선은 밖으로 열어두는 방식에서처럼, 적절한 통풍과 환기를 허락하여 서로의 삶에 독립된 영역과 자유를 적절히 보장하는 방식은 그 관계를 더 건강하게 유지하게 만든다. 사실 사랑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는 그런 무책임한 방법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260쪽) | ||
사적인 공간과 시간들이 중요하게 인정 받는 연인.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한 개인의 존재를 오롯이 인정할 때 그런 시간들이 발생하고, 그것은 상대와 나를 더 단단히 엮어준다고 생각한다. '냉소로 쪼개지지 않는 1백%의 웃음'을 가진 그녀의 '시절인연' 희완이 그러함은 물론이겠지:) 고로 나는 소망한다. 희완처럼 '자신만의 성', 소우주를 가진 남자를!
삶을 즐길 줄 모르면 좌파가 아니고, 하면서 신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다
88학번인 그녀가 민주노동당의 문화정책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NL과 PD의 계파 구분이 이젠 없겠지, 하고 안심했"단다. 그런데 현실엔 "그 것 밖에 없었다." 좌파라는 굉장히 협소한 판에서 다수 NL은 권력을 행사했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진보'를 세상에 설득하는 일은 점점 힘에 부쳤다. 그렇게 그녀는 분당을 지지했고, '진보신당의 파리지부 당원'을 자처했다.
그는 '좌파'라는 본인의 포지션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며, "문화정책이라는 게 존재하려면 사회주의적 사고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화는 단기적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적 서비스 영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든 진정한 예술작품은 시대에서 튕겨져 나간다. 시대를 저항하고 조롱하고 비판하며 앞서 나간다. 우파는 오른쪽으로 가기 보다는 주어진 길을 가는 사람들이며, 좌파는 현상을 까뒤집어보고 다른 각도에서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철학을 하는 자세와 예술을 하는 자세는 같다. 우파는 사람들을 얌전히 성냥갑 안에 넣어놓고 통제하려 들며, 좌파는 어떻게 해서든 그 통제의 틀을 뛰쳐나오려 한다. (290쪽) | ||
그녀에게 예술은 자유를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무엇'이다. 세상에서 개인은 끼워맞춰 살아지는 존재이지만 예술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본연에 존재하는 욕망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된다.
그런 그녀에게 '좌파'는 엄격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좌파라는 '빨간 물'이 어느순간 어떻게 들었는지 본인도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 넓은 의미에서 생명을 가꾸고 존중하며 존재하게 하는 모든 생각과 실천하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좌파'를 주장한다.
대의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거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적인 지향과 욕망에 충실한 선택으로서의 좌파, 자유롭고 당당한 생활좌파가 많을수록 미래가 밝다는 게 내 생각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의 깃발을 높이 올리는 모습만이 좌파의 전부는 아니며, 그런 자세가 좌파의 승리를 앞당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213쪽) | ||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
집단적인 것, 사회적인 것, 규율과 시스템에 종속된 것, 나아가 이념적인 것은 억압적인 것이며 따라서 권위와 강압으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하여도 정치 중립적일 수는 없다는 것과, 사회에 내재해 있는 갈등과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적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간결한 구호로 수렴된다(참조:<68·세계를 바꾼 문화혁명>).
68운동의 그 구호는 그녀의 글과 삶에서 맥박치듯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고, '공과 사라는 영역의 경계긋기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필자의 이야기가 삶과 생활과 정치와 다양한 관계에 대한 신선한 자극을 줄 것'이라던 레디앙 편집자의 기대는 적중했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삶의 '다름'에서 오는 불편함과 생경함은 내게 수많은 질문을 건넸고,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고민의 시간을 통해 세상의 모순을 봤다.
작년 여름, 책이 나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구매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도발적인 제목에 움찔했고, 누군가는 환호했다. 그것은 뼛속까지 자유롭다는 말 보다, '치마속까지 정치적인'에 담겨진 낯섬 때문이었을 걸로 짐작한다. '치마'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여성성과 어울리지 않는 '정치'라는 단어가 부딪쳐 만들어 낸 충돌과 불편함. 남성성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의 규칙을 과감하게 부수는 도발이 거기에 있었다.
통장잔고가 20만원 뿐이고, 특별한 노후대책은 없어도 "재밌고 유익하게 살아남는 법을 고민한다"는 그녀. "생각을 좀 더 단단히 만들기 위해 많이 읽고 공부해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던 그녀의 다음 책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가장 최근까지 읽었다며 높이 들어 보여준 책은 클라리사 P. 에스테트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1994)>이었다. 나에겐 읽어야 할 책이 또 한 권 늘었지만, 그래서 기쁘다. "대개 움직이는 것은 얼어붙지 않는다. 그러니 움직여라. 끊임없이 움직여라"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의 한 구절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모색하는 그녀의 움직임이 또 내게 어떤 용기를 줄 것인지 기대하기 때문이다.
*글은 제 개인 블로그에도 포스팅 했습니다. 좋은 만남 주선해 주신 알라딘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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