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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재가 화엄학림에서 도법 스님 강연 있었습니다

첨부화일 : 없음
재가 화엄학림 입학식-도법스님 참석,설법- 古佛心 2005.03.26

첨부화일 : 없음
실상사 [화림원]과 [자비신행회]그리고 [광주.전남 교사불자회]가 공동 주관하는
재가 '화엄학림' 입학식이 있었습니다;

3월26일(토) 오후 2시30분~5시)
(구)지원초등학교.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 3대 학장님이신 '재연스님(인도 푸나 대 졸)의 말씀: 우리가 佛法을 모르면 마음씨 좋은 바보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질적으로 향상하고,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내 속아지를 먼저 보면서 공부를 스스로 지어가도록 합시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지, 강사가 끌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사에서는 서로 토론을 하는 도중에 간간이 방향만 잡아주는 식으로 난상토론식 강론으로 화엄학림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3월 31일 목요일 오후 2시 첫번째 광주 재가 화엄학림 수업을 위해 우리 재가 불자들은 예습을 철저히 해야겠습니다. 교재는 [[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What the Buddha Taught and Noble Eightfold Path) -한국 빠알리 성전협회(Korea Pali Text Society) 간 ]]-9,000원-입니다.)

지원동에 위치한 자비신행회에 많은 차들이 주차 되었고, 한참 탁발수행을 하시면서 생명운동중이신 '도법스님(실상사 화엄학림 2대 학장)'께서 어려운 자리를 함께 해 귀한 법문은 주셨습니다.

원래 화엄학림은 1992년 화엄사에서 도법스님께서 어려운 '화엄경'을 쉬운말로 일반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강구하시다가 깊은 고민과 사색끝에 탄생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지리산 실상사 -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508번지 -에서 여러 스님들이 함께 강론과 대토론을 통해서 하나씩 내용을 정리하고 계십니다.
재가자를 위한 강론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귀한 자리를 베풀어 주신 부처님과 여러 덕높으신 스님들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

릴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장미꽃이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어떻게 단순해 보이는 흙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모습이 탄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실상사 '도법'스님의 법문은 화엄으로 내리는 시원한 꽃비였습니다.

도법스님은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의 진면목]은 당신 목전에서 국가와 민족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서도 <진리의 정신>을 더럽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의연하게 지켜나가신 점 - 佛法의 우선성-
자신의 제자인 '제바닷다'가 부처님을 3번이나 살해할 음모를 갖고 있음을 알면서도 부처님께서 취하셨던 태도 -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으신 - 가해자 혹은 정복자를 대할 때도 무한한 인내와 관용으로 이들을 다루셨고 살인마 '앙굴리라마'를 교화시키는 점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화엄경의 진면목]은

<장미 한 송이가 피려면>
과거. 현재. 미래
먼곳의 것, 가까운 곳의 것.
좋은 것, 나쁜 것....
.
.
모든 것들이 참여해야 꽃은 필 수 있는 것
한 송이의
장미꽃 속에는
태양이 존재하고 있다.

하여
태양과 장미는
둘이 아니다(不一不二)
이 둘은
하나가 아니라서
태양에 타버리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 이라네

온갖 신비한것, 전생을 알아보는 것..신비주의가 깨달음이 아니라네

조견오온개공

눈이 있어 눈으로 볼 수 있고
귀가 있어 귀로 볼 수 있고
손이 있어 물건을 활용할 수 있고
입이 있어 말할 수 있고
발이 있어 걸을 수 있는데..

뭐든 '있어서' 할 수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더 부족한가?

현재 있는 그대고써 그 자체는 '원만구족'하나니
우리는 '본래 부처인것'을

'일체유심조'라,
색안경속에서는 검은것도, 흰것도, 분홍색도 각기 따로 존재하나
색안경을 벗어 버리면 본체는 변함없이 원래 그대로인 것을
하여
분노하고, 싸우고, 의견이 다르다 하여도
본래 싸울 일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을

佛敎란 이처럼
원래 단순. 명쾌한 종교.

현재 나 (도법)는 동냥중인 수행승
생명평화 탁발 수행승

탁발하면서 나는 4가지를 얻는다네
'밥'을 얻어 신체를 유지시키고
'잠자리'를 얻어 육신을 쉬게하고
'기금'을 모아 '지리산생명평화결사운동'을 한다네
또 새 문명을 가꾸기 위한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10만명의 '마음'을 받아서 싱그러운 새 운동을 하고 있다네

개인의 수행에만 자신을 가두려 하지 말고
불교라는 집단과 문명사회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不一不二)
창조적 승화와 전통을 계승하는 운동을 이어가세

화엄사상으로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고
불교만이 할 수 있는 새 문명 창조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하다네

불자들이 나서서
자부심, 사명감을 갖고 중심에 서서 헌신적을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네

현재의 아픔과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은 화엄사상의 실천에 있다고 보는데
구체적인 행은 '보현행원품'에 잘 나와 있다네
하여 이 문제들을 풀어 갈 수 있는 참다운 세계관이 오늘부터 우리가 시작하려는 공부 속에 있다네.
[화엄경]은 세계 문학사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 지는 경으로써
화염경 공부를 통해서
맑은 세상이 더 넓혀지고
화엄세상, 극락정토로 다 같이 멋진세상을 만들어 가세

처음 화엄경을 대했을 때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답답했다. 이 상태에 어떻게 하면 쉬운말고 전할 수 있을 까를 15 ~ 20년동안 고민할 정도로 어려운 경전이 화엄경이다.
왜냐하면 보통의 경전들은 한쪽면에서만 부분적으로 보는 반면, 화엄경은 열가지 (十方)측면에서 상하좌우, 입체적, 동시적으로 깨달아서 눈뜬 자의 입장에서 실상을 온전하게 보고 설명함으로써 내용들이 복잡하고 다양해 졌기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즉, 타 경전과 화엄경의 결정적인 차이는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눈으로 보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화엄경]은 망망대해에 떠있는 일엽편주에 비견되어지는데, 실제로 화엄의 목적지는 없다. 왜냐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곧 바로 화엄의 세계이므로.

또 화엄경이 이처럼 숭상을 받는 이유는 언어의 현란함에 있다. 내용의 규모는 영원.무한을 다루고 있어서 실로 어마어마하여 종잡을 수 없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그렇더라고 실상을 보면 화엄경의 내용은 <지금, 여기, 내 눈 앞의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화엄경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화엄경을 공부하고 "아, 이제 나도 장엄한 화엄의 꽃으로 피어나야지!"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전도몽상이다. 우리는 이미 화엄의 꽃이다.
태어남, 죽음 모두 화엄의 꽃이다.
태어남을 좋아하고, 죽는것을 싫어하는 것오 전도 몽상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태어남도 화엄의 꽃이고
지금.현재도 미래의 죽음도 똑같이 화엄의 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와같은 꿈에서 깨어나라.
착각과 환상을 버리면 곧 '구경열반'이라. 이는 반야심경의 '원리전도몽상'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본래 부처이니, 본래 부처로 살아라.
우리의 무지.환상 탓으로 본래 면목을 못 보는 것!
이미 본래의 우리는 화엄으로 존재하고 있다.

"깨달아서 부처되지 말고, 본래부처이니 부처로 살아라"는 방법론이 화엄경 속의 "보현행원품"이다. 그대로 살아간다면, 가볍고 싶으면 가벼워 지느 것이고, 무겁고 싶으면 무거워지는 것이다. 하여 <자유롭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병'이다>
그러면, 한국에서 왕성한 '화두선'이란 무엇인가?
'화두'란 본래 부처임을 나타내는 몸짓이다. 바로 '화두를 드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성성적적'한 상태로 나타나서 늘 깨어서 계속 유지해야 하니 '적적' 할 수 밖에. 이 과정 속에서 '무지無智의 업습業習' 이 타파되는데, 이를 '확철대오'라고 한다.

지금까지 불교는 사상과 실천면에서는 다른듯 해도, 시대 마다 내용은 같다.

불교를 알면 알수록 '안과 밖'이 없다.
현재 우리가 '내면'을 보고 있으면, 내면의 실상을
현재 우리가 '물질'을 보고 있으면, 물질의 실상을 보는 것이 불교이다.
자꾸 내면으로만 가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현재의 진실이고 존재의 실상이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화엄경의 커다란 가르침은 전도몽상의 견해로써, "장미는 장미이고 나는 나이다"가 아니고,
깨달은 자가 열린 눈으로 "나라는 존재는 장미에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自他不二)"라는 관점으로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다보면 '너'라는 존재는 절대로 없으면 안되는 존재라서, 이 때의 '너'는 정말로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진리에 의거한 행동을 불교의 '자비慈悲'라고 한다. 그러므로 '너'를 향해서 공격하거나 파괴하지 못한다. 결국 '너'라고 하는 것은 '나의 의지처, 나의 모체' 이므로, 결국은 '내'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화엄경을 공부할 때 간과해서는 안될 2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워낙 화려.장엄한 세계가 갖가지 방법으로 묘사.설명이 되어지고 있어서 '신비주의적'으로 흐를 우려가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허랑방탕'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고 했으니, 더 이상 道닦을 것 없잖아?" 이렇게 과대망상에 빠지지 말고, 잘 살펴서 이 함정을 피해가야 합니다. 본래 부처이니 공부 안해도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경전에 과학적, 실사구시적, 중도적인 태도로 접근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속에서 싸움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싸움을 이겨 넘기는 역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뺏고 뺏기고, 죽고 죽이고, 정복하고 정복당하고...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경이 화엄경입니다. 화엄사상고의 내용으로 보현행원품을 통한 구체적인 실천을 현대화 시켜서 실상사에서는 범종교 생명평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3가지 문제의식을 갖고 (현대과학이 내포한 세계관의 문제/ 역사적 스승들의 세계관의 오류 (2원론적: 유신.무신론적 세계관 / 유물론.관념론/ 성선설.성악설...) 붓다는 이 모두를 타파하고 대신 '연기론'으로 풀이를 했습니다./또 역사적 교훈들 속에 내포된 오류.

생명위기시대, 사는 방식을 바꿀 때, 너무 넘쳐서 문제가 되는 시대...조건 따라 생성하고 소멸하는 우주의 진리이니, 이웃 가족은 우리 가족의 의지처이고, 우리가족은 이웃 가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임을 화엄경을 통해 잘 배워, 진리의 정신에 따라 뭇 생명의 뿌리인 자연과 우리의 의지처인 타인과, 내 생명의 어버이신 그대의 개성과 가치의 존귀함과 고마움과 위대함에 대하여 지극히 겸허한 마음으로 존중하고 감사하고 찬탄하면서 진리의 정신에 따라 이상적인 삶인 '달관의 안목'을 가꾸고 '청빈淸貧과 청부淸富의 삶'을 살아갑시다.
내 삶의 의지처인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상대와 함께하는 진리의 삶을 삽시다. 우주의 여우언한 진리에 따라 끝없는 성찰과 참회와 존중과 감사와 찬탄과 나눔의 삶을 살아갑시다.
출처 : 전남광주생명평화결사
글쓴이 : 강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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