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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온 글

[스크랩] 지금 당장, 여기에서 나의 글쓰기를 시작하겠다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쓴 이만교작가의 신간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는 지금까지 읽어본 글쓰기 교본 중 단연 엄지다. 글쓰기가 마음의 실질적 상태를 바꾸는 일이라는 말에 심하게 공감한다. '글쓰기는 ‘나’를 담보로 할 때, 진정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말에는 찔린다. "언어의 발견을 인류사의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 한다면, 언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야말로 인류사의 가장 놀라운 두번째 사건이라 일컬을 만하다.”는 말에는 어찌나 언어를 사랑하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언어의 힘, 어령을 믿는 사람이 좋다. 잘 쓰고 싶어서 산 책인대 잘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글쓰기 훈련을, 자신의 감각과 인식과 상상까지도 새롭게 만드는 근원적이고도 전복적이고도 생동적인 욕망으로 인식하는 한, 우리는 언제든 새롭게 기꺼이 다시 도전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문장 하나가 좋아지는 그만큼 나는 어쨌거나 새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239쪽)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 같은 악기나 사진 찍는 기술은 좀 다룰 줄 알거나 다루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언어는 형편없이 다루며 살아가고,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해서는 고민조차 하지 않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언어를 지나치게 거칠게 혹은 안일하게 혹은 편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만큼 거칠거나 삭막하거나 조악한 사유나 신념이나 인간관계에 스스로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 언어의 발견을 인류사의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 한다면, 언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야말로 인류사의 가장 놀라운 두번째 사건이라 일컬을 만하다.”( 8쪽)

 

 

 “우리의 글쓰기 역시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늦은 것일 수 없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지금 읽고 쓰고 성찰하는 우리 각자의 행동이 언제나 가장 빠른 길이다. 나는 나를 이런저런 망상에 빠트리는 이 문구가 너무 좋다. ‘모든 행동은 그것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는 늦지 않습니다. 언제나 후회만이 늦을 뿐, 행동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첫번째 행동은 아마 꿈을 꾸는 것이리라. 가장 빠른 첫번째 변화는 마음의 실질적 상태를 바꾸는 것이리라. 그리고 가장 빠른 첫걸음은 이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리라.” (384쪽)

 

“나를 종종 소설가라고 소개하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겠다고 부러워하는 회사원이나 주부들을 자주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심히 의심스럽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지? 당신이 무의식 중에 정말로 원하는 것은, 회사원이나 주부로서 안정된 삶을 살면서 소설가나 화가를 보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겠어요!‘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삶이 아닐까?”(19쪽)

“이렇듯 실질적 정직은 글쓰기의 기본정신이다. 실질적 정직 없이는 글감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실질적 정직을 유지한다면 삶의 모든 것이 글감으로 변한다.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적 목소리가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끝없이 자기 마음속에 귀 기울여야 한다. 잠을 깬 순간 밤새 꾼 꿈을 차근차근 되새김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낮 동안의 머리와 마음속에 떠오른 크고 작은 미망과 생각과 행위 하나하나까지도, 다가오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느낌과 상상 하나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36쪽)

“그 어떤 악기보다도 그 어떤 매체보다도 예민하고 섬세하고 복잡한 성능을 지닌 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그런데 적잖은 습작생들이 갖고 있는 이상한 오해 중 하나가, 자신은 언어를 별 문제없이 잘 다루고 있다는, 혹은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피아노 학원생들은 적어도 삼사 년을 기초훈련만 익히고, 미술 학원생들 역시 데생 훈련을 반복한다. 이제 겨우 피아노 학원에 나가 바이엘을 익히면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려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 교실의 사정은 다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편쯤은 쉽게 (사실은 조급하게) 쓸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혹은 얼마간 노력하면 자신도 그 못지않은 수준작을 써낼듯이 글쓰기를 만만하게 생각한다. 피아노 학원에 처음 등록한 학생은 자신이 피아노에 무지한 사실을 당연한 일로 인정하지만, 미술 학원에 처음 등록한 학생은 자신의 붓 터치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지만, 글쓰기 교실에 온 학생들은 이 같은 인정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121쪽)

 

 
앞집 여자가 샤워를 한다! 훔쳐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평가를 신경 쓰는 데 이미 길들여진 우리는 도덕적인 선택을 하기가 쉽다. 그러나 작가라면, 훔쳐보지 않았다고 해서 도덕적 우월감에 빠질 일도 아니고, 훔쳐보았다고 해서 단순한 죄책감에 빠질 일도, 마냥 즐거워할 일도 아니다. 당연하고 도덕적인 정직은 나의 글쓰기를 어떤 식으로도 촉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말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앞집 여자를 훔쳐보고 싶으면 훔쳐보고 싶은 솔직한 욕망(여인의 나체에 대한 탐미적 표현·심미적 고찰·죄의식 등)을, 훔쳐보지 않아서 아쉽다면 그 아쉬움에서 비롯되는 솔직한 욕망(도덕적 우월감,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 훔쳐보지는 않았지만 계속 이어지는 상상)을 정직하고 면밀하게 글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솔직한 욕망을 주시하는 것이 바로 저자가 강조해 마지않는 ‘실질적 정직’이다. 타자의 평가를 중시하는 도덕적 정직과는 달리, 자기 마음결에 교차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느낌 모두를 중시하며 자신의 욕망을 면밀하고 집요하게 들여다보도록 하는 실질적 정직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도덕적 도그마에 갇히지 않고 풍요로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감상적·도식적·윤리적·일상적·상투적·통념적 언어질서에 복종하는 글쓰기는 약자의 글쓰기다. 반면 스스로의 감각과 사유와 상상을 생성해 내고 즐기며 기성문법을 넘어서는 새롭고 낯선 소수언어를 만드는 자가 비로소 작가고 예술가다.”(본문 238쪽)

 

 

 

 

  

짜증이 난다. 우울하고 괜시리 화가 치민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는 “나도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뭘까. 술? 수다? 노래방?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는 바로 그런 순간에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낱낱이 파헤치고, 고민을 끝까지 밀고나가야만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고민과 갈등을 피하지 않고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삶 또한 치열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바꾸고 삶을 바꾸는 진짜 글쓰기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소설가 이만교의 글쓰기 강의를 1년째 듣고 있는 수강생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글에서 내 삶과 내 고민과 내 인간관계까지 다 읽어내는 이만교의 글쓰기 강의는 분명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갈등하는지 스스로도 잘 파악하지 못할 때 글쓰기 강사인 이만교의 “세밀하게 사유해라. 거칠게 사유하지 마라”는 가르침은 자신을 자유롭게 했다고. 비단 등단 지망생뿐 아니라, 직장인, 주부, 회사원 등과 함께 진행된 글쓰기 강의는 어느덧, 이만‘교’(?를 운운할 만큼 열광적 호응을 얻었고, 사람들은 살면서 꽉 막힐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 고민을 치열하게 풀어내고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수강생들이 입을 모아 이만교의 글쓰기 강의를 두고 ‘정신분석’ 시간이라고 했던 것은 그만큼 자신을 진실되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진실된 자신과 만나게 만들었던 글쓰기 강의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낸 것이 바로 이 책,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다. 한때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우리 사회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던 이만교가 이제는 우리의 잘못된 언어습관과 사유습관을 도발하며 새로운 글쓰기를 상상하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어렵다. 쓰고 싶은 내용이 있긴 한데, 그 글을 어떻게 시작할지, 다시 말해 첫 문장을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저자는 “강렬한 주제의식 없이는 첫 문장조차 쓸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어려운 ‘첫 문장’을 쓰는 법부터 식상한 결론에 이르지 않는 법, 그래서 온전히 글 한 편을 써내는 법을 글쓰기 강사로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풀어내고 있다. 부유하는 자신의 막연한 감상을 명료한 문장으로 잡아내는 것, 그 문장들을 확장해서 글로 만드는 것, 그래서 그 누구라도 나의 느낌과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의 저자 이만교의 글쓰기 강의가 지닌 남다른 장점이다. 단지 등단 지망생뿐만 아니라, 직장인이나 학생이나 주부나 블로거나 자신의 일상을 다르게 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금 당장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글을 도저히 못 쓰겠다는 사람은 “글을 도저히 못 쓰겠다”고 쓰고, 그 이유를 촘촘히 파헤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하는 책, 그러니 글쓰기는 전혀 어려운 게 아니라고 말하는 책,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는 따라서 모두에게 열려 있는 책이다.


글을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대개 등단 내지는 책을 출간하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과 태도로 글을 쓰는 한, 타자의 욕망에 끊임없이 끄달리게 된다. 당연히 좋은 글이 나올 리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 맨 처음 나로 하여금 “글을 쓰고 싶다”고 열망하게 했던 문장, “나도 이렇게 진한 울림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했던 바로 그 문장, 내 글의 씨앗이 되어 준 ‘씨앗 문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재해 있던 글쓰기의 본능, 그 최초 원인으로 돌아갈 수 있고, 그 문장에 다시금 전율하면서 기꺼이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의욕과 각오를 다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씨앗 문장이 우리의 글쓰기를 초발심으로 이끈다면, ‘씨앗 도서’는 우리의 글쓰기를 시작하게 하는 힘이 된다. 저자는, “뛰어난 작가가 되는 첫번째 걸음은, 타고난 재능이나 기발한 상상력이 아니라, 다만 ‘씨앗 도서’ 한 권을 제대로 선정하여 읽는 일”이며, “독서가 곧 재능”이라고까지 하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책을 읽는 데에 따로 정해진 좋은 책은 없으며, 자기 상황과 자기 고민에 맞는 책이 정말 좋은 책이라고 말한다. 책에도 시절인연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시절인연이 맞는 책을 만나 많이 생각하게 되고, 많은 밑줄을 긋게 된다면 그 ‘씨앗 도서’를 만나기 위해 쏟았던 우리의 노력은 강렬하게 살아 있는 독서를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목적은 단 한 권이라도 나를 강하게 흔들어 놓는 책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지, 구입한 책을 다 읽어 보는 데 있지 않다.


저자 이만교는 대단히 열정적인 글쓰기 강사다. 훌륭한 문학작품을 파헤치는 연구자처럼 학생들의 작품을 온몸과 마음으로 읽었다.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고, 글을 특징별로 분석하면서 학생이 2장짜리 글을 써가면 그는 10장에 달하는 분석과 평가를 담은 합평을 써왔으며, 그것을 빔 프로젝터로 쏘아서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학생들의 평소 언어습관과 행동패턴까지 읽어내는 글쓰기 강사 이만교. 학생들이 그와의 합평 시간을 ‘정신분석’ 시간이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가 가진 열정은 이 책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습작생들의 작품을 예로 싣고 그들의 언어습관이 어디가 어떻게 왜 잘못 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것이다. 글쓰기 강의 때 습작생들의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살피면서 잘못된 언어습관과 부적절한 어휘사용을 어떻게 교정해야 하는지, 읽는 이의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구체적으로 짚어냈던 지적은 직설적이지만, 그만큼 적실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식의 글쓰기 강의는 늘 비슷한 오류를 범하며 매번 글쓰기 앞에 무릎 꿇는 일반 독자에게도 분명, 자신이 선택한 단어 하나, 문장 한 줄까지 민감하게 느끼며 섬세하게 다루도록 하는 자극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감정을 가장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를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문장을 세밀하게 가공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언어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를 테크닉으로만 생각하고, 글쓰기의 목표를 등단으로 한정해 버리는 기존의 글쓰기 강의와 이만교의 글쓰기 강의가 어떻게 다른가를 정확하게 지적해 낸 한 수강생의 말이다. 글쓰기는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고민을 풀어내는 수단이자 타인과 교감하는 통로이며, 그러면서 나의 삶을 꼼꼼히 들여다보게 하는 공부일 뿐이라는, 이만교의 글쓰기관(?은 기존의 글쓰기를 완전히 뒤집는 반전이다. 글쓰기는 ‘나’를 담보로 할 때, 진정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글쓰기 책은 글쓰기를 ‘기술’로만 다루어 왔다. 논술용·자기소개서용 글쓰기, 혹은 등단용 글쓰기만이 글쓰기의 영역이었고, 그런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기술’뿐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거대한 물음표를 찍는다. 바로,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 우리 삶에서 글쓰기는, “기존의 입장과는 다른 시각과 강도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며, “언제나 인식적이고 언제나 실천적인 행위”이며, “기성질서 및 일상감각을 전복하고 자기만의 새롭고 자유로운 감각·사유·상상을 펼치는 일”이고, “언어 및 사유의 변화를 통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관계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라 말하며 저자는 지금까지의 글쓰기 ‘기술’에 작별을 고한다. 글쓰기는 단순히 ‘쓰기’ 훈련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훈련이며, 다양한 잠재성을 촉발하는 공부인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해보자. 그 사람에게 아이스크림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하면 A4 서너 장은 너끈히 써낼 것이다. 어느 회사에서 나온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고, 몇 년 전 아이스크림 의 유행상품은 무엇이었고… 등등 할 얘기가 끝도 없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에서 흘러넘치는 이야기이고, 삶에서 시작되는 글감이다. 반면 생각지도 않던 여성주의나, 생태주의에 대해 쓰라고 한다면, A4 한 장도 채 채우기 힘들 것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이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으로서 갖게 되는 특유의 경험과 갈등을 묘파하면 충분히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백수 무명작가가 무명작가의 생활을 서술하면 그것만으로도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하기에 충분한 문제적 이슈가 된다. 바람직한 모든 사회적 이슈나 인문학 담론들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내용과 맞물려 있어 바람직한 것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있을 자가 오늘 있다. 내일 그리고 모레,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오늘을 바꿔야 한다. 나를 둘러싼 일상에 그 어떤 자극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가 똑같이 흘러가는 이 현실이 싫다면, 바로 오늘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는 게 답답했던,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직장인은 이만교의 글쓰기 수업을 듣고 삶의 활력을 얻었고, ‘그냥 살지 않게’ 되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글쓰기를 택한 것이다. 이만교 역시 마찬가지다. 글쓰기가 꽉 막혀 답답할 때, 그는 글쓰기 수업을 맡게 되었다. 본인이 글쓰기에 절박했던 만큼 글쓰기 강의에 온힘을 기울일 수 있었고, 그 덕에 글쓰기를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글쓰기는 과연 무엇인지 본질적인 고민을 할 수 있었다. 함께 하는 수업과 타인의 글을 통해서 답답했던 자신의 글쓰기에 해답을 찾을 수 있었던 이만교는, 학생들이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멋진 글을 쓰기보다는 일상에서 살맛나는 상태에 이르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더 즐겁고 자유롭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만교의 글쓰기 책을 읽고 나면 나도 감히, 글을 잘 쓸 수 있겠다고, 글쓰기가 어쩌면 즐거운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글쓰기 강의를 읽고 혹은 듣고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나의 글쓰기를 시작하겠다”고. (출판사서평 중에서)

 

 

 


 


출처 : 세계를 읽어주는 나뭇잎숨결
글쓴이 : 나뭇잎숨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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