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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불교

대승적인 출가자의 의미는 무엇입 니까?


[질문] 대승적인 출가자의 의미는 무엇입 니까?

 

[답변]

 

대승불교권의 출가자 수행에 대해 물으셔는데

말씀하신 김에 대승불교의 출가자와 재가자 간의 관계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 답해보겠습니다.


국내외의 불교학자들 중에 대승불교에서의 승속 관계는

소승불교의 승속 관계가 다르다고 설명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대승불교의 경우 승속 모두 보살도를 닦기에 승과 속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경우 삼보 가운데 마지막 승보의 범위에 출가자와 재가자가 모두 포함된다고 주장하면서

삼귀의를 다음과 같이 변형시켜서 봉독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그런데 단적으로 말해서 승보 속에 재가불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라는 사부대중 속에는 재가불자인 우바새와 우바이가 포함되지만

일반적인 재가불자는 절대 승보가 아닙니다.

초기불전에서는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聖人)만을 승보로 간주합니다.

수다원향, 수다원과, 사다함향, 사다함과, 아나함향, 아나함과, 아라한향, 아라한과의 여덟 성인입니다.

전문용어로 팔배중생이라고 부릅니다.

향(向)은 과(果) 직전의 단계에서 과를 지향하는 분을 가리키고, 과는 그 지위에 오른 분을 가리킵니다.

용수의 <중론>에서도 이런 팔배중생만이 승보라고 봅니다.

그런데 후대의 대승불전에서는 출가한 스님 모두를 승보에 포함시킵니다.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 비구, 비구니의 출가오중 모두를 승보로 격상시켜 귀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어쨌든, 초기불전이나 대승불전 그 어디에서도 재가불자를 승가에 포함시키는 경문은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대승불교의 경우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 보살도를 닦기에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이는 대승에 대한 오해에서 비로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은 '신분'이 아니라 '이념'입니다.

성불을 지향하면서 끝 없는 윤회 속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삶을 살기로 다짐한 분들,

또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보살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경우도 출가자와 재가자는 판이하게 구분됩니다.

스님은 출가보살이고, 재가불자는 재가보살일 뿐입니다.


윤리규범인 계(戒)에 대해서도 잘못된 주장을 하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우리가 대승불교권에 속하기 때문에

스님들이 250계(비구스님)나 348계(비구니스님) 등의 구족계를 받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출가계에 있어서 대승과 소승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보살도를 닦는 대승불교권의 스님이라고 하더라도 출가자인 이상 소승과 동일한 구족계를 받아야 합니다.

다만 그 수행 목표가 현생에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량겁 후에 부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덧붙여 보살계를 더 받을 수는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수계식을 치릅니다.

초기율장인 사분율에 의거하여 구족계도 받고, 범망경에 의거하여 보살계도 받습니다.

과거의 눈밝은 우리 율사 스님들께서 정해 놓으신 여법한 방식입니다.


대승불교의 출가자가 소승불교의 출가자와 다른 점은 '지적인 깨달음'에 조급해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3아승기 100겁 동안의 보살도를 닦아 복덕 자량을 축적한 후 성불하겠다는 보살의 길을 가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무한정진의 서원을 하고,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충실한 수행을 하는 분들이 대승불교의 수행자입니다.

소승불교 출가자의 경우,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데 전념하는 반면

대승불교 출가자의 경우는 계, 정, 혜 삼학의 수행과 아울러 복덕을 쌓는 삶을 살아갑니다.

즉, 스님으로서 청정한 삶을 살아감과 아울러 중생을 위한 교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대지도론에서는 소승불교 수행자가 목표로 삼는 <아라한>과

대승불교 수행자가 목표로 삼는 <부처님>

그리고 세속적 욕락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인들 가운데 가장 최고의 지위인 <전륜성왕>

이 세 분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데

복덕과 지혜의 유무에 의한 비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이해의 편의를 위해 단순화 시켰습니다.).


              아라한          부처님          전륜성왕
복덕            無                有              有 
지혜            有                有              無


아라한은 생사를 초월하는 지혜는 있으나 복덕은 적습니다.
전륜성왕은 온 세상을 지배하는 복덕은 있으나 생사를 초월하는 지혜는 없습니다.
부처님은 온 세상을 지배하는 복덕과 함께 생사를 초월하는 지혜도 갖추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불을 지향하는 대승불교의 출가자들이

아라한을 지향하는 소승불교의 출가자와 다른 점은

부처의 복덕을 갖추기 위해 <복덕>을 쌓는 수행을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육체 노동과 같은 것이 복덕을 쌓는 수행입니다.

육체 노동을 통해서 남에게 도움을 줄 경우

노동의 고통으로 전생의 악업이 씻어지고

노동의 결과물로 남에게 보시의 선업을 짓게 됩니다.

악업을 씻고, 선업을 쌓는 수행 중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육체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승불교권인 중국의 선승 '백장(百丈) 스님'께서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일하지 않는 날에는 굶겠다)"을 지침으로 삼아 후학들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출가자에게 육체노동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경우 출가자든 재가자든 앞장 서서 육체노동을 해야 합니다.

성불의 길에서 복덕의 자량을 쌓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대승불교 출가자의 경우

'부처의 복덕'을 갖추기 위해 자량을 쌓는 수행에 적극적이고

현생에 완전히 깨닫고야 말겠다는 조급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소승불교 출가자와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출처: 김성철교수 홈페이지

http://www.kimsch.net/mettafram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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