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설한 바가 없다는 ?rphenix 2009.03.23 16:02 |
답변 4 조회 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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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한 바가 없다'고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는 4아함과 빠알리 5니까야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금강경에 그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금강경에 그 말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가요
1. 부처님의 겸손을 말하고자 함이다.
2. 부처님의 말씀은 공허한 것이다.
3. 부처님은 설한 것에 대한 공명심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4. 부처님이 설하였으나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함으로 하여 설한 가치를 느끼지 못한 때문이다.
5. 말로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였으므로 설하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깨닫고 보니 본래의 그자리에 있으므로 하여서이다.
현재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펴는 논지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면 석가모니가 한말이거나 아니면 후에 깨달은 사람이 부연한 것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부정한 것은 아닌 것이므로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닌 다른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말의 진정한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가요.
re: 나는 설한 바가 없다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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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은 반야부 경전입니다.
실체없음 자성없음 무아 공을 말하는 것이지요.
나는 설한 바가 없다는 말은 그래서 설했다는 아상이 없음, 법의 실체없음을 말합니다.
연등불에게 받은 법도 없다하고 깨달음이라는 법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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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는 장점, 단점, 치명적인 맹독 3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1. 장점은 보살행에 대한 강조라고 하겠습니다.
이런분들은 다음을 생각해보면 좋습니다. 즉 부처님의 원음으로는 보살행을 할수 없고, 아라한들은 이기적이고, 대승보살행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기적인것이 되는가?
우리는 부파논사들이 이기적인해탈, 이론불교, 재가자들과의 분리라는 특성을 드러내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럼 아주 빨리 아라한을 이루시고 부처님과 함께 일생을 출재가 중생교화하시고, 교단을 부처님을 대신하여 통솔하시는 일에 열심히셨던 사리불존자나 목련존자나 아난존자나 부루나존자나 가전연존자 이런 분들이 해탈을 이루시고 이기적인 적멸에 머물렀는가? 이론에 빠져있었는가? 재가자들과 분리되어있었는가도 살펴보면 좋으실것입니다. 당연히 답은 아닙니다.
한편으로 아함경 즉 니까야를 전승한 남방상좌부불교국가의 승가와 사부대중이 어떠한가를 살피는것도 도움이 됩니다. 즉 남방상좌부불교국가의 아라한들은 이기적인 해탈에 머물렀는가? 이론에 빠져있고 수행이나 실천은 하지 않는가? 또는 상좌부승가와 재가대중과는 분리되어 있는가?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랬을때 대승이 내세운 보살행이라는 것이 부처님원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지아닌지에 대하여 실사구시적으로 판별하실수 있을것입니다. 부파불교에 대한 비판만으로 초기승단의 성문제자들과 남방상좌부 아라한들과 승가 사부대중을 판단하는 것이 곤혹스러울수 있습니다.
2. 단점은 아라한 능멸, 초기승단에 대한 망치질, 석가모니부처님 조종하기입니다.
부파불교 비판한다면서 초기승단의 부처님 직제자들까지 참람되게 비방하고 물어 뜯은 것, 부처님 원음에 대한 왜곡(사성제 팔정도 열반 등등), 그리고 자신들의 소설 속에서 석가모니부처님으로 하여금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하신 아함경과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같은 것을 낮은 것으로 하열한 것으로 제분정가법문으로 비방한 사악한 짓을 하게 한것입니다.
이런 것을 방편이다. 혹은 발전이다. 라고 이해하시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참조하면 좋습니다.
왜 부파불교와 싸우던 대승논사들이 자신들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부처님의 직제자들까지 물어뜯고 결과적으로 초기승단을 소승, 이기적인 집단으로 망치질 하여야 했을까요? 이시대에 많은 분들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 부르고, 그 이전의 불교를 근본불교 초기불교라 부릅니다. 근본불교와 부파불교를 따로 인식하는 것이 추세입니다. 지금의 이런 인식을 보더라도 대승논사들이 부처님의 직제자들을 물어뜯고 조롱하고 비방하고, 초기승단을 소승이라 망치질하는 작태는 가벼이 넘길수 있을까요?
단지 방편이다. 너무 큰 의미두지 말자. 뜻만 취하면 된다라고 하시는 분들은 불설조사참회경에 대한 우리 지식인들의 반응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설조사참회경을 쓴 분은 조사를 등장시켜 영구짓을 하게 합니다. 이것을 두고 많은 지식인들이 훼불이다. 아비지옥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사법처리해야 한다. 마구니의 말이다. 이런 격한 반응을 내왔습니다. 왜 불설조사참회경에서 그분들은 보살행을 강조하는 큰 의미는 주목하지 않고 조사를 조롱하는 글에만 주목하여 그렇게 반응을 하였을까요? 사실 불설조사참회경에서 금강장보살이나 관음보살 보현보살이 조사를 애취급하는 것은, 유마경에서 유마가 사리불과 마하가섭 아난을 애취급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인데요. 유마경은 방편으로 보고 어찌 불설조사참회경은 방편으로 보지 않고 격하게 반발하였을까요. 왜 훼불이라고 하였을까요. 이것을 잘 살피면 도움이 될것입니다.
3. 치명적인 맹독은 창작불보살입니다.
대승의 불보살이 창작불보살이 아니라 여전히 실재하는 존재라고 믿는 분들은 다음을 참조하면 좋습니다.
wonmook님이나 gi9089, av8님 angod1 pky5652님 qwes51님 baram님 db님 같은 분들은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대승의 불보살이 실재가 아니라 방편으로 창작된 것임을 이미 알고 계시고, 그것을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저의 글이 불편하시다면 위에 열거하신 분들의 글을 잘 참조해보시면 왜 그분들조차 불보살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방편으로 창작된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살펴볼수 있을것입니다.
대승의 불보살이 실재가 아니라 방편이며, 창작이라는 용어가 거북하다하더라도 어느 정도 그런 요소가 있다라고 이해하는 분들은 다음을 참조하면 좋습니다. 특히 이런 분들은 교학의 발전, 혹은 현실불교의 보호라는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경향이 큽니다.
이런 분들은
첫째 방편으로 창작된 대승의 불보살들이 바라문 전통으로의 회귀, 세상종교들로의 회귀라는 것을 참조하면 좋습니다. 부처님은 숫타니파타에서 바라문들이 신들과 경전을 만들어 왕과 중생들을 호리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비판은 바라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아는 세상종교들의 거의 전반에 대한 비판입니다. 헛개비신들을 만들어 제사장역할을 하는 것은 예나지금이나 세상종교의 특성입니다. 부처님이 강력하게 비판하시고, 땅속에 묻은 이러한 것을 굳이 대승논사들이 다시 부활시킨 것에 대하여 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둘째 불교가 세상종교와 같아져 버립니다. 세상종교는 헛개비를 신으로 모시고, 그것을 중생을 위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헛개비신을 믿음으로써 세상종교는 그 안에서 자기들만의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일정정도 있습니다. 즉 단순논리로 말하면 세상종교에도 대승논사와 같은 소위 “중생을 연민하여” 방편으로 신들을 창작해 중생들에게 던져준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우스 야훼 알라가 헛개비임이 분명한데 “중생을 연민하여” “신을 창작하여” 중생들에게 방편으로 던져준 사람들에게 그럼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비판할수 있습니까? 물론 다른 것이 엄청 많지만 드러난 것은 거의 유사합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이 과연 한 종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불보살을 창작한 의도가 백보양보하여 처음에는 순수했다고 가정해도, 지금의 행태를 보면 창작불보살은 역할모델이 아니라 기복의 대상으로 전변된지가 오래입니다. 역할모델로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면 모를까 기복의 대상으로 더욱 많은 역할을 하는 창작불보살을 보면 과연 이런 헛개비 캐릭터 아바타에게 기도하고 가피를 바라고 친견을 바라라고 하고 응답을 바라라하고 화현을 바라라하고 보시공양물을 창작불보살의 가피를 바라며 갖다 바치는 것이 참으로 중생을 위한 것인가? 부처님이 숫타니파타에서 바라문들의 행태를 비판하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되돌아봐야 합니다.
넷째 저는 예전에 소승불교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무수한 복을 주는 대승의 불보살들을 믿고 모시지 않는 것일까? 왜 복을 거부할까? 바보들 아닌가? 그래서 소승인가? 소승이라해도 이해를 여전히 못하겠다. 무량수 불보살을 믿으면 가피를 주시는데 왜 복을 차냐? 라고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전도몽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면에서 반드시 초기승단에 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창작불보살이 없으면서 어떻게 당시의 재가대중들을 교화하시고 가르침으로 이끌었는가? 알아야 합니다. 또 남방상좌부불교도 편견없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양적으로 따지면(? ^^) 남방상좌부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 한 부처님만을 모십니다. 반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위대한 창작불보살들이 넘치고 넘칩니다. 우리가 대장경을 읽어보면 관세음문수보현지장 같은 대력보살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창작된 불보살이 부지기수입니다. (예를들면 그렇게 위대한 관세음보살도 화엄경에서 입법계품에 나온 것을 보면 정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관세음은 겨우 28번째 선지식입니다. 관세음의 자비보다 더욱 뛰어난 자비를 가진 것으로 그 뒤에 주야신이니 뭐니 하는 창작신들이 나옵니다. 관세음보다 못해도 백배정도는 더욱 자비의 화신으로 나옵니다.)
그러니 우리 불제자들이 이제 관음문수보현지장 뿐 아니라 대장경안에서 더욱 많은 창작불보살을 발굴하고 재조명하여 법당안에 꽉차게 들어앉히면 우리 대승불교국가인 우리들은 남방상좌부불교보다 천만배 더욱 중생들이 행복하고, 사회는 대승적으로 변하고, 승가는 대보살들로 꽉차고, 사부대중과 승가가 강고한 결합을 하게 될수 있을까요? 대승의 불보살을 이미 방편으로 알고 있는 분들은 그래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또는 불교용어로 여실지견으로 법다운 눈으로 견해에 붙들리지 않은 눈으로 초기승단과 남방상좌부불교국가의 승가과 사부대중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대승을 장점, 단점, 치명적인 맹독으로 보시면서
부파불교에만 잣대를 들이대지 마시고,
초기승단과 남방상좌부승단을 보시면
좀 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며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내장이 쏟아져 죽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는 길임을 알게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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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나는 설한 바가 없다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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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짧은 견해로는 '부처님의 직접적인 언급'이라기 보다는
금강경 스스로의 입장을 누군가(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각자)가
기술적(구어를 문어적으로 전환)으로 표현한것이라 봅니다.
부처님께서 일반적 어법(대화)을 사용하시는 가운데,
'나는 설한 바가 없다'라는 다소 생뚱한 '문어'적인 표현을 하셧겠는가 하는 의문이 드네요.
이러한 말씀은 '공'에 대한 기본 관점을 철저히 드러내려는 원작자의 의도이지요.
이것이 대승적 특징인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소승에서는 이러저러한 관점(의미)이 부각되어서는 안되지요.
오직 찰나생 찰나멸하는 기능적(수단) 작용에 대한 상황으로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살피는 '기술적' 입장에 충실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대승적 관점이 부각된 경전이며,
소승적 시각(일어나고 사라지는 기술)으로서는 그 의미(관점,목적)를 헤아리는것이 부당하며,
대승적 관점으로서만이 그 의미를 잘 파악하는것이라 여깁니다.
기본적으로는 어떤 관점이 제시되지 않은 경전이란 있을 수 없으나,
부득불 그러한 관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 소승적 입장으로 보며,
그러한 관점이 실재함을 인정하는 태도에 대해 대승적이다라고 봅니다.
따라서 위의 '나는 설한 바가 없다'는 말씀에 대하여 취하는 관점과 의미부여는
스스로 대승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함을 자인하는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의미는 이제 대승적 관점을 가지는것이 되며,
대승적이라 할 때의 의미는 단순히 경전적 말씀에 얽메인 기능적(기술적) 문자만을 지칭하는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현재의 '나'가 가지는 기능적 수단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것이 됩니다.
부처님의 '기능'이 아닌, '나'의 '기능'이 어떠한 것인가의 의미를
경전속이 아닌, 현 상황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수단)에서 살필 수 있을때,
'나는 설한 바가 없다'는 의미가 비로서 온전히 드러나는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각각의 기능이 일률적으로 각각의 상황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므로
그러한 말씀의 의미 역시 고정적이지 않고 무한하게 기능해야(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위의 몇가지 관념으로 고착하는것이야말로
대승을 잘 모르는 오해이며,
차라리 그러한 관념적 기술(기능)을 추구하게 되는것이야말로 '소승'적 경향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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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1
re: 나는 설한 바가 없다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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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이 아닌 이유
고타마 싯닷타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겸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타마는 깨닫고 나서 사자후를 하였는데요,
그 사자후의 내용은 어찌 보면 오만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깨닫고 나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봅니다.^^
2번이 아닌 이유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공허하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죠.
45년간 헛 짓했다는 말입니까?
그럼 그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뭐가 됩니까?^^
3번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고타마께서 공명심은 없었겠지만 공명심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은 아니라고 보여짐
공명심 정도는 이미 초월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음
4번이 아닌 이유
알아들은 사람이 많이 있었고
사랑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고타마보다 먼저 죽은 제자 2명이 있었죠.
고타마께서 그들을 사랑한 이유는 말이 잘 통해서였겠죠^^
5번이 아닌 이유
말로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할 리 없습니다.
말할만한 필요가 있고 말로 전달되는 바가 있으므로 말을 한 것입니다.
6번이 아닌 이유
깨달음을 얻기 전과 얻은 후가 어찌 같을까요?^^
제 생각에는
만약 그 말이 고타마께서 직접 한 말이라면
고타마의 말을 듣는 이가 그 말이 지시하는 바를 보지 못하고
고타마의 말 자체에 집착하여 깨달음에 이르지 못함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고타마의 말은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쳐다볼까봐^^
즉 법을 보라고 설하였는데 법을 아니보고 설에 집착할까봐^^
만약 고타마께서 직접 한 말이 아니라면
금강경 저자가 형식과 문자에 얽매이는 불교를 비판한 것이겠죠.^^
비판의 내용은 위와 동일할 것이고요.
출처 :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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