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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익진 교수의 불교의 체계적 이해/불교개론

 

 

불교의 체계적 이해.hwp

 

 

근본교설의 내용은 고 고익진 교수님의 '불교의 체계적 이해'와 동국대학교에서 출판한 '불교학 개론'을 주 내용으로 하고 몇 가지를 더 첨가했습니다. 특히 고익진 교수님이 집필하신 근본교설에 대한 내용은 체계적인 저술입니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는 분들은 이 내용으로 불교 교리에 대한 전체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게재합니다.

 

교설의 특질

 

진리성 주장의 문제

 

불교가 일어날 무렵(B.C. 5세기경)의 인도사회는 여러 가지 종교사상이 발생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립상황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인간의 생사(生死) 괴로움에 대한 각파의 견해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정통파 바라문교(Brahmanism)에서는 우주의 창조주이며 본질이기도 한 범(梵,Brahman)이라는 천신(天神)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과 공희(供犧)를 통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설하였다. 그러나 그 계통에서도 우파니샤드(Upanisad) 철인들은 인간의 자아(Atman)와 범(梵)은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알음(智)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는 비의(秘義)를 전수하고 있었다. 인간의 죽음이 극복될 수 있다는 우파니샤드의 이러한 해탈철학과는 정반대로 사문계(沙門系)의 순세파(順世派,Lokayata)에서는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단멸론(斷滅,Uccheda-vada)을 주장하였으며, 생활파(生活派,Ajivaka :邪命外道)에서는 생사라는 것도 일종의 불변적 요소로서 인간의 의지로는 어 쩔 수가 없다는 무작용론(無作用論,Akrya-vada:決定論)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계파(離繫派, Nirgrantha, Jainism)에서는 정신(Jiva)을 계박(繫縛)하고 있는 육체(Pudgala)를 극렬한 고행을 통해 분리시킴으로써 인간은 생사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는 해탈사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파는 자신의 주장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진리로서 그밖의 것들은 모두가 오류라고 부정하여 심한 쟁론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통 바라문교에 의하면 베다(veda) 성전은 인간의 인식범위를 초월한 '하늘의 계시'였다. 이런 권위주의를 사문(沙門)들의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 었다. 순세파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인식은 직접적인 감각에 한정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산자야(Sanjaya Belatthiputta)와 같은 사람은 감각지(感覺知) 이상의 모든 종교적 교설을 회의하였다. 그러나 이계파의 인식론에는 추리지(推理知)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조건부적 개연성(蓋然說,syad-vada)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각파의 엇갈리는 이러한 진리성 주장은 당시의 사람들을 심한 종교적 방황과 회의에 빠지게 하였음이 틀림없다. 누구의 말이 진실이며 누구의 말이 거짓일까? 각파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다르므로 그들 중의 어느 하나가 진리라면 다른 것들은 거짓임에 틀림없다. 또는 그들의 견해가 모두 오류일지도 모르며, 맹인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 보듯이 진리의 어느 일면만을 파악하고 그것을 전체에 적용시킨 오류를 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식별해야 할까?

 

깨달음의 필요성

 

종교적 교설에 대한 이러한 회의가 발생하게 되면, 이제 덮어놓고 그것을 신앙할 수만은 없게 된다. 하늘의 계시라든가, 오랜 전통을 가졌다든가, 성인의 말이라든가 하는 이유만으로는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각파의 교설을 우선 충실히 수습(修習)하여 그 진의를 파악한 다음, 그 진 위를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 보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각파의 주장이 모두 완전한 진리에 이르지 못한 것임이 발견될 때는 종교적 진리탐구의 길은 다시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당시의 종교 사상에 대해서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출가 후 그는 곧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가 라마풋타(Uddaka Ramaputta)와 같은 저명한 바라문의 스승을 찾아가 그들의 선정(禪定,dhyana)을 익혀 마침내 그 최고의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생사를 극복할 진정한 길이 아님을 발견하 였을 때 그 곳을 서슴없이 떠나갔던 것이다. 그 뒤 우루벨라(Uruvela)에 가서 사문계(沙門系)의 수행법인 고행(苦,tapas)을 극한에 이르도록 닦아 보았는데, 그것 또한 생사를 극복할 진정한 길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가야(Gaya, 뒤에 Buddhgaya가 됨)의 조용한 숲을 찾아가 독자 적인 명상에 잠겨 마침내 '모든 것은 연기(緣起)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Buddha)이 되신 것이다.

 

'깨달음(bodhi)'이라는 말은 계시(啓示,revelation)라는 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신이 특정한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 계시라면 깨달음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침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모든 종교적 교설을 비판적 견지에서 몸소 닦아 보고 그들의 잘못을 파악한 뒤, 새로운 진리탐구를 행한 끝에 성취한 석존의 깨달음은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종교적 사유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부처님의 교설방법

 

불교는 바로 이러한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인데, 그 가르침을 베품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가 있다. 진리 탐구자로서의 석존의 길과 교설자로서의 석존의 길은 반드시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비판적 태도와 합리적 탐구가 구도(求道) 때의 일관된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은 뒤의 설법 때에는 바라문교와 같은 권위주의적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적 전도(傳道)에 있어서는 이런 권위주의적 방법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성도(成道)후 석존은 한 때 이 문제로 깊은 생각에 빠지셨다고 전해진다. "신앙하고 두려워할 대상이 없 으면 불안하고 무력해지고 말지 않겠는가."<잡아함 卷44>

 

그러나 석존은 끝내 그런 권위주의적 길을 택하시지 아니하였다. 앞서 인용한 경문에는 곧 이어 "오직 정법(正法)이 있어 나로 하여금 자각(自覺)케 하여 깨달은 자가 되게 하였으니 내 마땅히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리라."는 말이 따르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깨달음을 열게 하려는 굳은 결의의 표명이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 혼란을 깊이 고민해 보았던 석존의 지극한 인간애의 발로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이룬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이루게 하고 싶었던 석존의 이러한 바램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룬 깨달음은 너무나도 미묘하고 심오하여, 탐욕에 가린 중생들에게는 도저히 실현될 수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설해서 무슨 소용이 있 겠는가. 전도를 단념하고 싶을 정도로 석존의 괴로움은 컸다. 그가 세상에 나가 전도하게 된 것은 오로지 범천(梵天)의 지극한 권청(勸請)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장아함 卷1 대본경> 이것은 당시의 종교계에서 인간주의적인 바른 종교의 출현이 얼마나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었던가를 극화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석존이 바라는 인간주의적 바른 종교가 세상에 행해지기 위해서는 이제 그 '깨닫기 어렵다'는 문제가 어떻게라도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석존은 이 문제에 골몰하여 마침내 하나의 묘안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중생들의 '깨닫는 능력(機)'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 가서 마침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론을 불교에서는 방편시설(方便施設)이라고 부른다. 방편(方便,upaya)은 '접근한다'는 말이고, 시설(施設, prajnapti)은 '알아내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입장에서 석존은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인 사실을 깨우치는 일에서부터 설해가기 시작하였다.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설해가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정반대의 방향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실적 사실과 합리적 사유의 중요성이 강조됨은 물론이다.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法)에 의지하라."<잡아함 卷2>는 말이 경전에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것 또한 인간의 합리적 사유를 비판하고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깨달음의 효과적 실현에 집중된 석존의 이러한 교설에, 그런 목적에 필요치 않은 이론이나 실천이 설해질 까닭이 없다. 인간의 자각에 필요한 사항만이 베풀어져 있다는 말이다. 깨달음의 직접적인 내용에 관한 것도 경전에 자세하게 나타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 문제는 깨달음의 대상으로 남겨져야 하고, 깨달음을 이루면 저절로 자명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존은 한 때 숲을 지나면서 나뭇잎 하나를 손에 따들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일이 있다. "내가 깨달은 법에서 너희에게 설하는 것은 이 나뭇잎 하나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잡아함 卷16)

 

따라서 석존의 교설에서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해명을 구하고자 함은 잘못이다. 만동자(蔓童子,Malunkyaputta)라는 비구가 하루는 부처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진 일이 있다. "이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無常)한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안하는가."<중아함 卷60 전유경> 다른 종교에서는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있는데 석존의 교설에는 그러한 해명이 없으므로 몹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는 만일 끝까지 부처님께서 답변을 거절한다면 부처님 곁을 떠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석존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든 다음, 그런 문제는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깨우치고 계신다.

 

점진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석존의 이러한 방법론은 많은 교법의 시설을 필요로 한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적 능력이 성숙함에 따라 그에 알맞은 법이 계속해서 설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종교에서는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법이 불교 경전에 등장하고 있다. 이런 교법들을 법문(法門,Dharma-paryaya)이라고 한다. 각기 독자성을 지니면서 궁극적인 진리에 취입(趣入)하는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존의 교설은 이렇게 진리에 이르는 교량적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진리 그 자체라고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구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석존의 교설에 입각해서 '전정사유(專精思惟)'하여 깨달음을 열어야 하지만, 깨달음을 연 다음에는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나의 法은 뗏목과 같은 것이니 건너간 다음에는 마땅히 버려야 한다.<중아함 卷54>고 석존 스스로 경계하고 계시는 것이다.

 

석존의 교설은 단순한 수의설에 불과하다고 보려는 학자들이 있다.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게 설한 것이라는 말이다. 불교 경전에도 또한 잡다하고 다양한 교리가 일정한 체계 없이 수록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얼마나 피상적인 관찰인가를 알 수가 있다. 법문(法門)과 법문 사이에는 미묘한 중층적 교리조직이 짜여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 이다. 석존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는 견해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불교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해명을 찾을 수 없음은 사실이지만, 그런 문제의 해명을 깨닫게 하고자 한 교설에 그런 해명이 밖으로 언표(言表)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깨달은 사람에 의한, 깨닫게 하려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 두어야 한다.

 

 

12처와 18계설

 

십이처설

 

불교는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설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세계란 과연 어떤 구조와 성질을 가진 것인가.

 

한 때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석존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일체(一切)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잡아함 卷 13> 당시의 인도에서 일체(一切,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세계(世界)나 세간(世間,loka)이라는 말과도 등치시킬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런 일체에 대해서 각 종교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제 석존은 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석존은 생문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十二處)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시설코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잡아함 卷13>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해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열 두 가지에 거뜬히 포섭(包攝)된다는 것이오, 그 열 두 가지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열 두 가지를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뜻을 취하여 처(處,ayatana)라고 부르고 이 교설을 십이처설(十二處說)이라고 부른다.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만유(一切萬有)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종교적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입장이 선언되는 사상적 배경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십이처의 구성이 눈·귀·코·혀·몸·의지라는 여섯 개의 인식기관(六根)과 색·소리·냄새·맛·촉감·법이라는 여섯 개의 인식대상(六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인식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실재를 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실재가 종교적인 수행(修行)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 자증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십이처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존은 당시의 바라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신다.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장아함 卷16 삼명경>

 

십이처설에서 우리는 둘째로,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설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은 그대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六境)은 그러한 인간의 자연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主體)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意志,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法,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법(法)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뜻의 의지와 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의 특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라문교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은 창조주인 범(梵)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存在)는 그 종속적 피조물에 불과하다.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가져오는 것도 범(梵)의 의지에 의한다. 사문(沙門)측의 생활파(生活派)에서도 인간은 생사(生死)의 코스를 바꿀 수 없다는 무작용론(無作用論:決定論)을 펴고 있었다. 이들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십이처설(十二處說)을 볼 때 우리는 일견 소박한 듯한 그 세계관이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단명한 것이며,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십팔계설

 

십팔계설 이란 위의 십이처설이 주로 물질적인 색법(色法)의 분류인데 비하여 십팔계설은 여기에 심법(心法)을 추가하여 색(色)·심(心) 양면을 다 포함하는 일체 만유의 분류법이다. 界라는 말은 종족의 뜻도 있다고 하고 본생의 뜻도 있다고 하는데 먼저 종족의 뜻은 십팔계의 제법(諸法)이 그 자성에 있어서 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다음 本生의 뜻은 이들이 곧 모든 심적 활동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십팔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 말한 십이처에 인식작용의 주 체인 육식을 포함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열 여덟 가지를 말한다.

 

<十八界>

① 眼根 耳根 鼻根 舌根 身根 意根의 六根

② 色境 聲境 香境 味境 觸境 法境의 六境

③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의 六識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이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렇다면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대할 때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하는 등의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육식(六識)이라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 기관인 육근(六根)과 그의 대상인 육경(六境)과 인식주체인 육식(六識)과의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에만 일어난다. 만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코 우리의 심적 활동은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육근과 육경은 다른 것이 자명하지만 육식은 과연 어떤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육식(六識)이란 별개의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심(一心)이 육근(六根)을 통하여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하여 심적 작용을 일으킬 때 각기 식(識)의 이름을 얻어 육식(六識)이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심(一心)이 눈을 통하여 색경(色境)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안식(眼識)이 되고, 이근(耳根)을 통하여 성경(聲境)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이식(耳識)이 되고, 이렇게 하여 육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과의 문제를 놓고 보면 앞의 십이처설 에서는 육근이 주관이요 육경이 객관이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육경도 또한 물질적인 것이라 주관이 될 수 없는 점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십팔계에서는 육식이 더해지므로 육식이 참다운 주관이 되고 육경과 육근은 함께 객관이 된다고 하겠다. 이제 이 식(識)·근(根)·경(境)의 관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十八界

六識 … 眼識 - 耳識 - 鼻識 - 舌識 - 身識 - 意識

↓ ↓ ↓ ↓ ↓ ↓ ↓

六根 … 眼根 - 耳根 - 鼻根 - 舌根 - 身根 - 意根

↓ ↓ ↓ ↓ ↓ ↓ ↓

六境 … 色境 - 聲境 - 香境 - 味境 - 觸境 - 法境

 

이상과 같이 볼 때 앞에 나온 오온설(五蘊說)이 마음(心)에 치우치고 십이처설이 물질(色)에 치우친데 비해 이 십팔계설은 색(色)·심(心) 양면을 고르게 統攝하여 분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분류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상에 살펴본 바와 같은 오온설, 십이처설, 십팔계설의 셋은 다 같이 우리 인생을 중심으로 한 일체 만유의 분류법으로 흔히 삼과설이라 하여 한데 묶어져 설하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다 같이 인생을 중심으로 한 분류법이 이상과 같이 각각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대비바사론)에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교화될 바 유정(有情)에는 둔근기(鈍根機), 중근기(中根機), 이근기(利根機)가 있으니 둔근자(鈍根者)를 위해서는 십팔계를, 중근자(中根者)를 위해서는 십이처를, 이근자(利根者)를 위해서는 오온(五蘊)을 설한다.

㉡ 교화될 바 유정에는 광(廣)을 좋아하는 자, 중(中)을 좋아하는 자, 약(略)을 좋아하는 자가 있으니 광을 좋아하는 자에 대해서는 십팔계를, 중을 좋아하는 자를 위해서는 십이처를, 약을 좋아하는 자에 대해서는 오온을 설한다.

㉢ 교화될 바 유정에는 색심(色心)에 우매한 자, 색(色)에 우매한 자, 심(心)에 우매한 자가 있으니, 색심(色心)에 우매한 자를 위해선 십팔계를, 색(色)에 우매한 자를 위해선 십이처를, 심(心)에 우매한 자를 위해 서는 오온을 설한다.

 

그리고 이 삼과설(三科說)에는 극소한 부분 무위법(無爲法)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유위법(有爲法)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는 인연의 화합으로 모였다가 인연의 이산(離散)으로 흩 어진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를 밝히는데 그 주안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대요소설

 

사대요소설

 

물체는 몇 가지 요소로 분석되고 또 그것들을 화합하면 물체가 형성된다. 인간 또한 죽으면 몇 가지 물질적 요소로 분산되고 만다. 그렇다면 일체 존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요 소는 무엇일까? 궁극적인 물질적 요소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볼 수가 있어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 인도, 중국 등의 자연철학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현대의 자 연과학에서도 원소물질에 대한 탐구는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의 인도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구성하는 그러한 기본적인 물질적 요소로 서 지(地,prthivi)·수(水,ap)·화(火,tejas)·풍(風,vayu)의 네 가지를 주로 인정하고 있었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전변설에는 "태초에 유(有)가 있어 욕심을 일으켜 風·火·水·地를 발생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사문계의 적취설(積聚說)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는 역시 그러한 사대(四大)를 인정하고 있었다. 석존 또한 당시 인도의 그러한 시대요소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십이처 중에서 눈·귀·코·혀·몸의 오근(五根)과 색·소리·냄새·맛·촉감의 오경(五境)은 각각 사대로로 분석된다고 설하고, 그러한 사대가 화합한 것이 곧 '색(色,rupa, 물질적 형체)'이라는 것이다.<잡아함 卷 13> 석존이 만일 오늘날 탄생하셨다면 현대 자연과학의 원소설을 채택하셨음에 틀림없다.

 

오온설

 

십이처 가운데 다섯 개의 감관과 그 대상이 이렇게 사대요소로 분석되고 그것이 화합한 것이 색(色) 즉 물질적인 형체라면, 인간과 자연은 그 존재의 근저에 이러한 색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존재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물질적인 형체를 '색온(色蘊,rupa-skandha)'이라고 부른다. 색은 사대가 화합한 것이고, 온(蘊,skandha)은 흔히 '쌓임(聚, heap)'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말은 '근간적인 부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인 색온만이 인간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물질에는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다. 인과율에 따라 필연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러한 색온을 갖고 인간 실존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이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사유와 행동을 줄기차게 전개시키고 있는 비물질적 기능의 존재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당시 인도 사상가들의 해명은 다양하였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사대요소가 화합한 복합물(devata)에 범(梵)이 명아(命我,jiva-atman)의 상태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모든 물질 속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이 된다. 인간의 생명은 사대의 분산과 함께 단절된다는 순세파(順世派)의 주장은 生命도 일종의 물질적 화합현상으로 보는 입장이고, 생활파(生活派)에서는 생명을 아예 물질적 요소로 간주해버렸다. 한편 이계파(離繫派)에서는 인간은 생명과 물질이 대립적으로 결합된 상태라고 설하였다.

 

인간의 생명이나 정신이라는 것이 물질의 화합에서 발생하는 물리화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냐, 그렇지 않고 정신의 독자적 존재성이 있는 것이냐의 문제는 오늘날 현대 생물학에서도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자를 기계론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생기론(生氣論)이라고 부르는데, 현 학계는 기계론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자연과학시대의 추세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석존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계시는가. 물질적인 색온(色蘊)외에 다시 수(受,vedana)·상(想,samjna)·행(行,samskara)·식(識,vijnana)이라는 정신적인 사온을 추가한 오온설을 제시하고 계신다.<잡아함 卷3> 受·想·行·識의 사온은 물질적인 색온을 바탕으로 개체를 지속적으로 존속시키려고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작용하고(行), 식별하는(識) 정신적인 기능을 각각 표현한 것이다. 인간존재를 물질과 정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경우, 그 정신적인 부분을 생명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세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십이처가 일체존재를 포괄하는 일종의 분류법이라면, 오온 또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일체존재에 대한 분류법이 될 수가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간적 구성부분일 뿐만 아니라 외계존재도 그러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십이처와 함께 오온 또한 일체존재를 가리키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온이라는 술어를 갖고 인간 존재를 특히 한정적으로 지시하고자 할 때는 '오취온(五取蘊,upadana-skandha)'이라는 말을 별도로 사용한다. 오온이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온과 오취온은 똑같은 것이라고도 못하고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온에 욕탐이 있는 것이 곧 오취온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잡아함 卷2>

 

불교의 오취온설은 정신과 육체를 싸고도는 당시 사상계의 문제성을 잘 지양(止揚)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범신론적 견해는 생물과 무생물이 우리 현실계에서 엄연한 속성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는 현상에 부합되지 않는다. 순세파의 유물론적 견해는 현대 생물학의 기계론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위의 현상에 맞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 로 보는 생활파의 견해는 심신의 밀접한 상호관계성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영혼과 육체는 대립한다는 이계파(離繫派)의 이원론 또한 그 두 부분이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로 상관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불교의 오취온설은 물질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신의 독자성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물질보다는 정신 쪽에 중점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생명활동의 측면에서 관찰하고 있어 현실세계의 현상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삼법인설

 

일체무상

 

이상 소개한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에 대한 중요한 교설들인데, 이제 이러한 십이처나 사대, 오온과 같은 것들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를 보자. 그러한 일체는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이라고 석존은 단정하신다. "색(色)은 무상(無常)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이다. 수(受)·상(想)·행(行)·식(識)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卷1>

 

일체의 속성에 대한 이 세 가지 명제를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른다. '법의 특성(dharma-laksana)'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삼법인 중에서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항목을 빼고, '열반(涅槃)은 고요함(寂精)'이라는 항목을 보태 삼법인으로 할 때가 있다. "모든 행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은 무아요(諸法無我), 열반은 적정하다(涅槃寂靜)."는 설이 곧 그것이다.<잡아함 卷10> 또는 여기에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다 시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으로 할 때도 있다.<증일아함 卷18>

 

그러나 불교의 초기경전에 줄기차게 설해지고 있는 것은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고 일체는 무아"라는 맨 처음의 형태이다. 이제 이 삼법인(三法印)의 각항을 고찰해 보자.

 

일체무상

 

인생으로서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과정(有爲四相)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불사영생(不死永生)을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물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 안의 모든 존재는 생하고(生) 머물고(住) 달라지고(變) 없어지고(滅) 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과 같은 물질적 요소는 어떨까? 순세파(順世派)와 사명파(邪命派)에서는 이것을 불변적 요소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존은 그것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하신다.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원소가 원자로 분석되고 원자 또한 파괴되며,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도 불변의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에너지(energy) 불변의 법칙이 있지만,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한 것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jiva)이나 자아(atman)와 같은 것은 어떨까? 대개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육신은 비록 사멸하여도 그 영혼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거나 또는 다른 몸을 만나 재생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그렇게 불변의 존재일까?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자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서 불교의 오온설을 살피는 곳에서, 우파니샤드 철학의 자아(atman)나 생활파의 명(命,jiva), 이계파의 영혼(jiva) 등은 모두가 오취온설의 차원에서 이야기되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그러기에 석존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불변적 아체(我體)가 있다고 헤아린다면 그들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렇게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잡아함 卷3>

 

그렇다면 바라문들이 말하는 자아나 사문들이 말하는 영혼도 마땅히 무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취온에서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색온인데, 색온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가 이미 무상한 것이니, 오취온의 무상성은 재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색을 발생시키는 인(因)과 연(緣)이 벌써 무상(無常)하니,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으로 발생한 색(色)이 어찌 유상(有常)하겠는가. 수(受)·상(想)·행(行)·식(識)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卷1>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이처로부터 사대·오온에 이르는 모든 것은 하나도 항구 불변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일체는 무상하다(sarvamanityam)."고 석존은 단언하신다. 이 단안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성구(成句)로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져 있다. 이 말 속의 '행(行,samskara)'은 오온 중의 행온(行蘊)을 가리키는데 무상한 세계 속에서 개체를 유지하려는 행의 작용이야말로 무상함을 가장 실감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은 이렇게 덧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사실을 진정으로 의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고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구들의 임종을 보며 生의 덧없음을 느끼고, 고대문명의 유적을 보며 하염없는 탄식을 보낸다. 그러나 존재의 밑바탕에서부터 무상함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바라문이나 사문들까지도 그러지 못하였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만큼 사람들은 유상(有常)하다고 본다. 백 년이나 천 년을 살 것같이 생각하고, 자기의 재산과 권력과 명예는 영원히 갈 것으로 본다. 탐착(貪着)과 인색과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일생동안 남에게 선심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깊은 회한 속에서 생을 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불교의 무상설(無常說)은 중생들의 이러한 뒤바뀐(顚倒) 착각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다.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코자 하면 먼저 현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일체무상(一切無常)은 이러한 목적을 가진 것이다.

 

일체개고

 

삼법인의 둘째 항목인 '일체는 괴로움(dukkha)'이라는 단안은 첫째 항목의 판단이 성립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석존은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苦)'이라고 설하신다.<잡아함 卷1> 불교의 이런 단안에 대해서, 세상에는 그렇게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 젊고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것이 어찌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거기에 금상첨화로 미워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구하는 바를 얻을 때 그 즐거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에 있다. 영원히 머물어만 준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영원히 머물어 주지 않는 곳에, 다시 말하면 무상한 곳에 불안과 서글픔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라.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저 불행한 사람들을 보라. 그러한 불행이 언제 우리에게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괴로운 것으로 봐야 한다. 인간의 느낌(受)에는 괴로움과 즐거움과 그 중간(不苦不樂, 捨)의 세 가지가 있다. 삼법인설에서의 괴로움은 이 중에서 괴로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중간의 느낌까지도 괴로움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도 괴로움으로 봐야 한다면, 이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뒷일을 미리부터 그렇게 걱정하며 괴로워할 필요는 무엇인가.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현재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김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 무상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에 즐거움이 느껴지고 있다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 이라고, 우리 주변에는 이런 낙천주의적 인생관이 크게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의 즐거움을 그렇게 즐거움으로 볼 수가 있을까? 인간실존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오취온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시금 그런 낙천주의적 인생관이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을 깨 닫게 된다. 오취온의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색온(色蘊)은 항구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四大要素)가 이미 무상한 것이므로 그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분산하려는 무상성(無常性)을 지니고 있다.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사온(四蘊)은 이런 색온에 입각해서 개체를 지속하려는 비물질적(정신적)인 노력이며 그러한 노력의 중심은 행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몹시 힘이 들것이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붕괴하고 말 것이다(死). 괴로움(duhkha)이라는 말은 원래 '힘이 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현재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실존을 그 밑바탕에서부터 관찰할 때는 괴로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석존은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단정하신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세상에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 (病) 죽는(死) 것은 괴로움이다.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은 괴로움이다."<증일아함 卷17 사체품> 이것을 불교에서는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의 세 가지 괴로움을 들 때가 있는데, '괴로움의 괴로움(苦苦)'은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가리킨다. '행의 괴로움(行苦)'은 개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온(行蘊)의 괴로움을 뜻하고, '부서짐의 괴로움(壞苦)'은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상 부서지게 되는 죽음의 괴로움이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오취온을 중심으로 해서 괴로움의 종류를 구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불교를 현실부정적 염세종교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이러한 괴로움의 교설을 보고 그러한 자신들의 견해를 더욱 강화시킬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보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겠지만, 그러나 불교의 입장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해야 한다. 인간의 실존이 만일 괴로움이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 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에 입각해서 생의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나 진실에 미치지 못한 천견(淺見)을 석존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일체무아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는데, 그러한 인간을 주관적으로 말하면 '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그 '나'는 어떤 것을 가리킬까? 십이처설(十二處說)에서 말 하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을 말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나를 탐구해 들어간다면 오취온에 이른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나'의 실체를 헤아린 다면 그것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런다."<잡아함 卷3>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그러나 육근이나 오취온이 그렇게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일까.

 

먼저 인간의 나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 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바라문의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나의 이런 불변성 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인 범(梵,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說)에까지 심화시켜 갔던 것은 누차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러한 나를 그들은 '아트만(a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이 있어 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이나 오취온에 그러한 상일(常一)·주재성(主宰性)이 있을까. 그들이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은 앞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무상함은 상일성(常一性) 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주재성(主宰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결코 '나의 실체(實體,mama atman)'라고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석존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눈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할 수가 없다. 귀·코·혀·몸·의지 또한 그와 같다."<잡 아함 卷1> 다음과 같은 말도 경전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 "색(色)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오,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오(非我), 나의 것(我所)이 아니다."<잡아함 卷1>

 

석존은 그의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자주 교환하고 계신다. "색은 무상한가 아닌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오, 이것이 나요, 이것은 나의 실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없을 까?" "말할 수가 없습니다." " 수(受)·상(想)·행(行)·식(識)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卷1>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六根·四大·五取蘊)은 이렇게 나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常一)·주재성(主宰性)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實體)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我執)으로 말미암아 대립,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자아를 탐구한다는 바나문이나 사문들도 아직 진정한 자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 경계는 오취온의 차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석존은 범부들의 아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바라문이나 사문들의 철저치 못한 자아관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관찰에 이어,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불교의 현실판단은 이 무아설(無我說, an-atma-vada)에 이르러 일단락을 이루는데, 이것은 인도 정통파 철학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트만사상(atman-vada)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무아설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입장으로서 인도철학사상 이채를 띤 사상이라고 평가됨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아설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오해가 발생할 수가 있으니, 석존의 재세시에 벌써 그런 예를 볼 수가 있다. "만일 일체법이 무아요 일체행(一切行)이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나 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卷10> 나가 없다는 것이 불가 하다는 견해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존은 "나에 의지하고 法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계시며, "나의 主人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라."<법구경>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석존의 뜻이 참다운 나를 찾는 데에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녹야원에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을 마친 석존은 우루벨라(Uruvela)를 향해 가시는 도중 나무그늘에서 잠시 선정에 잠기신 일이 있었다. 이 때 마침 그 부근에 남녀쌍쌍으로 행락을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유녀가 놀고 있는 틈을 타서 귀중한 재물들을 챙겨 달아난 일이 생겼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부근을 찾아 헤매다가 나무그늘에 안좌한 석존을 보고, "혹시 그런 유녀를 보시지 않았는가?"하고 물었다. 이 때 석존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고 계신다. "젊은이들이여, 잃어버린 자기 진심을 찾는 일과, 도망친 유녀를 찾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보는가?" <사분율 卷32>

 

무아설의 목적이 이렇게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 참다운 나란 도대체 어떤 것 인가. 이 문제를 위해 우리는 불교에서 설하는, 일체법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다음 절에서 다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연기의 진리-법칙성의 존재

 

인과율

 

일체존재는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이합집산(離合集散)하여 항구불변(恒久不變)의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변이(無常變易)하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常住)하여 그에 입각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無常)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 상주(常住)하는 이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의 현실관찰은 삼법인설에 이어서 다시 이 법칙성의 관찰로 전개되고 있다.

 

인과율

 

먼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이처설에 입각해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어떤 법칙이 있는가부터 살펴보자.

십이처설에서 주체적 인간을 의지라는 말로 표현하고, 객체적 대상을 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인간은 능동적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런 작용이 가해지면 대상은 그에 상응한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물 사이에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함을 본다. 남이 내게 잘 해주면 나도 그에게 잘 해주지 않을 수가 없고, 남이 내게 나쁘게 대하면 나도 그에게 나쁘게 대해지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따라서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원인(hetu)이 되어,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phala)로서 따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그런 의지적 작용을 '업(業, karma)'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 vipaka)'라고 부른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든가,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성립하게 된다.

 

인연화합

 

인간과 대상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는 이상과 같거니와, 다음은 생멸변화하는 사물에 있어서 그 '변화(anyatha-bhava)'라는 현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불교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우유의 변화를 예로 드는 것이 편리하다.

우유를 발효하면 낙(酪)이 되고 낙은 수가 되고 수는 제호가 된다. 요즘말로 하면, 우유가 치즈가 되고 버터가 되는 것과 같다. 이 때 치즈나 버터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유에 발효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치즈나 버터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에 발효조건을 갖추어 주는 일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인위적 작 용이다. 따라서 그것은 앞서 살펴본 주체적 인간의 업인에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적 원인만으로는 치즈나 버터가 발생할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발효 조건은 있지만 우유가 없을 경우를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돌이나 물에 아무리 발효 조건을 갖추어 줘도 치즈나 버터는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치즈나 버터가 발생하는 데는 발효 조건을 갖춰 주는 동력인(動力因) 외에 다시 또 하나의 조건, 즉 우유라는 질료인(質料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질료인을 불교에서는 '연(緣, pratyaya)'이라고 부른다. 우유에 '연'하여 치즈나 버터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변화에는 이렇게 원인과 연(緣)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두 조건이 갖추어짐을 불교에서는 인(因)과 연(緣)의 화합(和合, samgati)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원인은 직접적이고 연(緣)은 간접적이라는 입장에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라는 말이 있으며, 서구학자들은 원인(原因)을 'primary cause', 연(緣)을 'secondary cause'로 번역하고 있다.

 

불교의 이런 인연화합설(因緣和合說)은 인간의 성패를 해명하는 원리로도 적용될 수가 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외연(外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당사자의 자발적인 노력이 없을 때는 성공이 또한 기대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상의상관성

 

인간이 외계에 의지적 작용을 가하면 외계는 이상과 같이 물리적 또는 화학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의지는 세계의 생멸변화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동시에 인간의지의 절대성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것이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 그러냐면,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동시에 세계의 영향도 받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에서는 다시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idam-pratyaya-ta)'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상의상관성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이다.

 

현대 불교학자들은 불교 경전에서 이런 상의상관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교설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즐겨 인용한다. "이것이 있으므로써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하므로써 저것이 생한다(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므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써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잡아함 卷15> 그리하여 이것을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 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기본공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기(緣起)'라는 개념은 뒤에 십이연기설을 소개하는 곳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인류의 철학적 사유에는 제일원인에 대한 탐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 현상은 무엇을 근본원인으로 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의 바라문교에서는 그것을 범(梵)이라고 설하였다. 범은 일체의 창조주이며, 아버지이며, 자존자(自存者)라는 것이다.<중아함 卷19 범천청불경>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바라문교의 그런 주장은 현실의 정확한 포착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결과임과 동시에 원인이기도 한 상의상관성의 측면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 자존자는 이 세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법주법계

 

모든 것은 무상하지만 덮어놓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는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사물의 생멸변화에는 인연화합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이 있다.

 

무상한 것들 속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상주(常住)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다. 멸해버린 것과 새로 발생한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한 것과 생한 것은 다같이 똑같은 법칙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무상(無常)한 속에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어 각 존재에는 그런 법칙이 머물고 있다고. 이것을 우리는 '법주(法住, dharma-sthiti)'라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잡아함 卷12> 또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要素, dhatu)로 해서 성립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이 산소와 수소로 되어 있듯이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경전에는 이 뜻이 '법계(法界, dharma-dhatu)'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잡아함 卷12> '계(界)'는 구성요소나 층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존재가 본래 법칙을 그의 성단(性亶)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모든 존재는 그런 법성(法性)을 지닌 '법(法, dharma)' 그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체를 '제법(諸法, sarva-dharma)'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무아(無我)인 존재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상주(常住)의 법성(法性)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성에 어떤 구체적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생멸변화하는 모든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어떤 형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일체 존재와 그 생멸변화에 일관하는 상주법성(常住法性)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 법성(法性)을 일체 존재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봐서도 안된다.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일체 존재의 생멸변화에 그런 법칙성은 나타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성과 존재(法)는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미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 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앞서 삼법인(三法印)의 무아설(無我說)을 살핀 끝에, 불교의 무아설은 잘못된 아관(我見)을 시정하려는 것이지 참다운 나의 탐구를 부정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그 참다운 나의 실체, 또는 본질이란 어떤 것일까? 상주(常一)·주재(主宰)의 성질을 가져야만 할 그 참다운 나란, 바로 무상한 속에 상주하는 이 법칙성이라고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법칙성의 '나'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트만(atman)이나 이계파(離繫派-jainism)의 영혼(jiva)과는 다르다. 그들도 존재의 본질로서 그러한 실체를 내세웠겠지만, 아직도 오취온(五取蘊)의 경계에 머물고 있어 철저한 법성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설

 

십이연기설의 내용

 

제법(諸法)의 실상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지혜(智慧,prajna:般若)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살펴온 일체의 구조(十二處·四大·五蘊)와 속성(三法印), 인과(因果), 인연(因緣), 상의상관(相依相關), 법칙성(法則性) 등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법칙성(法則性)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명(明,vidya)'이라는 말로 부른다. 'vid'는 실제로 존재한다. 또는 발견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vidya'는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것을 '명(明)' 즉 '밝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명(明)의 유무(有無)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무상(無常)한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을 발견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존재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게 될까? 이 물음에 대한 불교의 해답을 우리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명(明)과 모순되는 개념을 '무명(無明,avidya)'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무명(無明)이 사람에게 있게 되면, 이것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게 되고, 행(行)을 연하여 식(識)이 있게 되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게 되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게 되고, 육처를 연하여 촉(觸)이 있게 되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게 되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게 되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게 되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게 되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게 되고, 생을 연하여 노(老)·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하나의 괴로운 온(蘊)의 집(集, 발생)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잡아함 卷15>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명(明)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죽음이 있게 되는 형성 과정을 열 두 단계로 자세하게 분석해서 보여 주고 있다. 이제 그 형성과정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① '무명(無明, a-vidya)'은 명(明)이 아닌 것(非明) 또는 명이 없는 것(無明)의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실재아닌 것 또는 실재성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로 착각한 망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나로 집착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또는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라고 말할 수도 있다.

② 이러한 무명(無明)이 있으면 그것을 연(緣)하여 '행(行,samskara)'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행은 '결합하는(sam) 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대학자들 속에는 그 말을 형성작용이라고 번역하는 이가 있으 며, 서구에서는 'impulse'라고 번역함이 보통이다. 어떻든 인간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힘든 자기 형성의 업(業)이라고 볼 수 있다.

③ 행(行)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 곳에 '식(識, vijnana)'이 발생한다고 한다. 식(識)은 불교에 쓰이는 중요한 술어 중의 하나인데 식별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개체가 형성되자 그 곳에 분별(分別) 하는 인식(認識)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④ 식(識)을 연하여 '명색(名色,nama-rupa)'이 일어나는데,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名)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오온설(五蘊說)로 설명하면 색온(色蘊)은 색(色)에, 수(受)·상(想)·행(行)·식온(識蘊)은 명(名)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명색(名色)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形色)과 비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다.

⑤ 이렇게 명색(名色)이 있게 되면 그것을 연하여 '육처(六處, sad-ayatana)'가 일어난다. 육처는 십이처설의 여섯 개의 감관, 즉 눈·귀·코·혀·몸·의지의 육근(六根)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개념이다. 인간 실재(六根)의 근저를 이루는 것을 오취온(五取蘊)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명색(名色:五蘊)의 다음에 육처(六處)의 발생을 설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할 것이다.

⑥ 육처(六處)를 연하여 '촉(觸,samsparsa)'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한다, 위돌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눈·귀·코·혀·몸·의지에 발생한 식)이 화 합하는 것이다. 단순히 육처가 육경에 접촉하는 현상은 아닌 것이다.

⑦ 촉(觸)에 연하여 '수(受,vedana)'가 발생한다.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경전에서는 그 내용으로서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 중간 느낌(捨受)의 세 가지 종류를 들고 있다. 접촉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⑧ 수(受)를 연하여 '애(愛,trsna)'가 발생한다. 끝없는 갈애(渴愛,thirst)를 뜻한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애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 한 것으로 보고, 수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한다. 무명은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所知障)요, 애는 마음(心)을 염착시키는 번뇌장(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이다.

⑨ 애(愛)를 연하여 일어나는 '취(取,upadana)'는 취득하여 병합하는 작용이다.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취(取)라는 술어는 오취온설(五取蘊說)에서 이미 등장했던 것인데, 거기에서도 오온(五蘊)을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⑩ 취(取)를 연하여 '유(有,bhava)'가 발생한다. 유(bhava)라는 말은 'bhu'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인데 '있다(be)'·'된다(become)'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생사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경전에서 유(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가 곧 그것이라고 설명한다. 삼계(三界)는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⑪ 유(有)에 연하여 '생(生,jati)'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생한다'는 뜻이다. 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위에서 살폈는데, 유가 그렇게 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을 뜻한다면, 그것에 연하여 생이 있게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⑫ 생(生)이 있으므로써 노(老)·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눈앞에 보는 바로서 다시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 곳의 생(生)과 사(死)는 육체적 생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사한다고 보게 된 꿈과 같은 환상과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생사 다음에 우(憂)·비(悲)·뇌(惱)·고(苦)가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온(蘊)'이라는 술어는 오온설(五蘊說)에 등장했던 말로서,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근간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그러한 온(蘊)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삼법인(三法印)의 괴로움을 소개하는 곳에서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집(集,samudaya)'이라는 말이 새로 나오고 있는데, 이 술어는 다음 장의 사제(四諦)를 소개하는 곳에서 자세한 설명이 따를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발생'을 뜻하는 불교 술어의 일종이라는 것만을 알면 된다. 요는 무명(無明)이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생사(生死)라는 중생의 괴로운 존재방식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無明)의 멸진(滅盡)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는 무명에서 생사의 발생과정을 설한 다음에는 반드시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멸을 설하고 있다. "무명(無明)이 멸(滅)하므로 행(行)이 멸하고, 내지(乃至)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게 된다."<잡아함 卷12>

 

이상과 같은 내용의 교설을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dva-dasa-anga-pratityasamut-pada) 또는 줄여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라고 부른다. 십이지(十二支)는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에 이르는 지분(支分,anga)이 열 둘이기 때문이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연(緣)하여(pratiya) 결합해서(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인데, 각 지분(支分)은 자기 앞의 지분에 연하여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온(蘊)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無明)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緣起)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부르고, 무명(無明)의 멸에서 생사(生死)의 괴로 움이 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부른다.

 

이 십이지연기설(十二緣起說)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죽음의 문제,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를 해명해 주는 데에 목적이 있음은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십이연기설은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은 진리(眞理)에 대한 자신의 무지(無知)에서 연기(緣起)한 것임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 실존(實存)은 얼마나 막막한 절망 속에 헤매게 될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죄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의 은총을 바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더욱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석존은 오랜 각고의 구도求道)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緣起)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가 석존의 이러한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주고 있을까. 연기(緣起)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이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석존이 이룬 깨달음(bodhi)의 내용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연기(緣起)의 법(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오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法)은 무상(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無明)이 멸하므로 행(行)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卷12>

 

석존뿐만 아니라 비바시불(Vipasi-buddha)을 비롯하여 과거에 출현했던 여러 부처님들도 모두가 보제수 아래서 십이연기 순(順)·역(逆)으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설해져 있다.<잡 아함 卷15> 순관(順觀)은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역관(逆觀)은 노사(老死)에서 무명(無明)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역(順逆) 두 관찰에서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먼저 역관(逆觀)에 의한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전에도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잡아함 卷12>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生死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역관(逆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순관(順觀)은 깨달음에 입각해서 生死의 발생과정을 밝혀 주는 설명적 교설이라고 보아도 좋다.

 

십이연기설은 중층적으로 심화되는 불교의 교리 조직 중에서,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이, "제가 보기에 연기는 그렇게 심심한 뜻이 없는 듯합니다." 라고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심심한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卷46>

 

십이연기설은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설해진 여러 가지 법문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형태임을 또한 보여 준다. 우선 그 지분의 조직만 보더 라도,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생사(生死) 등의 여러 가지 법이 그 속에 하나로 짜여져 있으며, 연기라는 발생법에는 인과(因果)· 인연(因緣)· 상의상관(相依相關) 등의 모든 불교적 개념이 포섭되어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십이연기설의 음미

 

십이연기설은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의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선 그 가치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감이 있다.

 

부파불교시대(B.C. 3세기 ∼ 1세기경)에는 십이연기설이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되었다. 즉 인간이 과거(無明· 行)· 현재(識· 名色· 六處· 觸· 受· 愛· 取· 有)· 미래(生· 老死)의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의 이러한 삼세양중인과설에 대 해 현대 불교학자들은 그 잘못을 지적하고, 그런 해석은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 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불교학의 큰 성과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십이연기설을 단순히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 연기관(緣起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는 십이연기설은 교리가 차츰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소위 후대 성립설을 주장하고도 있다. 이러한 해석들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십이연기설을 고찰하였는데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십이연기설을 도저히 그렇게 만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도설

 

불교는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적 입장을 갖고 있다. 인도 정통파 사상의 아트만(atman)을 부정하는 무아설(無我說)이라든가, 형이상학적 희론(prapanca)을 부정하는 무기설(無記說) 등 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기경전에 설해진 최상법문(最上法門)으로서의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불교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심오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먼저 무아설에서부터 살펴보자. 일체가 무아(無我)라는 판단은 앞서 삼법인설(三法印說)에서 소개한 바와 같 이 "일체는 무상(無常)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라는 근거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無常)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아설은 완전하고 철저한 무아설에 이른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면 앞서 삼법인의 무아설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卷10>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혹을 일으켰던 천타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해답이 베풀어지고 있다. "세간의 집(集: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 세간의 멸(滅)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가 없다. 여래는 그 두 끝을 떠나 중도(中道)에서 설한다."<잡아 함 卷10>고 한 다음, 곧 십이연기설이 설해지고 있다.

 

세간(世間,loka)이라는 말은 세계나 일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무아설(無我說)의 '아(我)'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러한 세간은 무명(無明)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왜 그러냐면 실재성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에서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滅)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세간의 멸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이 뜻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 무아설의 최승한 뜻(parama-artha)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타비구가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 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妄我)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有)와 무(無)의 두 끝을 떠난 중도(中道)적인 교설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곧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석존은 형이상학적인 희론(戱論)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계셨는데, 이것 또한 십이연기설에 최상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불교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희론의 조직적인 제시는 십사무기설(十四無記說)이다. 이것은 앞서 제1절에서 만동자의 질문을 통해 잠깐 언급한 일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열 네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다.

 

① 세계는 상(常)인가, 무상(無常)인가, 상(常)이며 무상(無常)인가,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닌가. ② 세계는 유한인가, 무한인가, 유한이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 아닌가. ③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④ 여래는 사후에 유(有)인가, 무(無)인가, 유이며 무인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석존은 의례 답변을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 '무기(無記,a-vyakarana)'는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열 네 가지 문제를 십사무기라고 하는데, 석존께서 이렇게 답변을 삼가신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가 본래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본적인 입장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만동자에게는 "열반과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수행상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에 대해 무지하 므로"<잡아함 卷34> 그런 희론과 집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한 이유는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발견된다. 앞서 무아설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中道)적인 입장이다. 그와 같이 단(斷)과 상(常)<잡아함 卷12>, 일(一)과 이(異)<잡아함 卷12>, 자작(自作)과 타작(他作)<잡아함 卷13> 등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열 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인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석존이 침묵을 지키 지 않을 수밖에 없었음은 이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문제에 올바른 답변을 한다면,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십이연기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십업설

 

해(解)와 행(行)

 

우주의 근본원리 또는 인간의 생사와 같은 문제를 해명해 주는 것을 종교사상이라고 부르고, 그에 입각한 실천행동을 종교행동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각각 해(解:이론)와 행(行:실천)이라는 말로 부른다. 종교행동은 종교사상에 의해서 행해지므로 전자의 목표와 방법은 후자의 가치내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

불교에서 종교사상에 해당되는 것은 앞 절에서 살펴본 연기론(緣起論)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연기론은 인간에게 생사의 괴로움이 있게 된 근본원인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종교사상이 이렇게 연기론이라면, 그의 실천적 교설이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떤 방법을 채택할 것인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연기론에 의하면 인간의 생사 괴로움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자기 마음속의 무명(無明)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무지의 타파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의 실천행동의 목표는 무명을 타파한 세계 즉 열반(涅槃)에 있고, 그 방법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명(無明) 번뇌를 멸하는 자력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연기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이러한 실천행동은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 실천행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의 실천행동에서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信仰)· 기도(祈禱)· 제사(祭祀) 등이 주축이 되고 신의 구제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종교적 목적이 달성된다. 그러나 불교의 자력적 수행에는 염불(念佛)·발원(發願)· 선정(禪定) 등이 중심이 되고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러 그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해(解)에 못지 않게 행(行)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된다.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와는 달리, 자신의 노력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를 구제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행이 없는 해는 한낱 희론에 불과하다고 경계됨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석존은 이론(解)에 해당되는 교설을 베푸실 때마다 그에 상응한 실천(行)을 반드시 함께 설해주고 계신다.

 

그리하여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斷)· 사신족(四神足)· 오력(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이상 三十七助道品> 등을 포함한 실천적 교설이 무수하게 설해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십업설(十業說)과 사제설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십업설은 세속적인 사회윤리에 관한 대표적인 교설이며, 사제설은 생사 괴로움의 근본적 멸진(滅盡)에 향하는 대표적 수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십업설의 내용

 

앞서불교의 연기사상을 소개하는 곳에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작용·반응이라는 인과관계가 성립함을 보았다. 불교의 십업설은 바로 이러한 인과율에 입각한 실천윤리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업(業,karma)이라는 술어는 '작위(作爲)'나 '일'을 나타내고, 보(報,vipaka)는 '이숙(異熟)'이라고도 번역되고 있듯이 '성숙함'을 나타낸다. 이 두 낱말은 불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계파(離繫派)에서도 중요한 교리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존은 그 두 술어를 특히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 채택하셨다.

 

업(業)과 보(報)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동일성(同一性)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즉 업인(業因)이 선(善)이면 과보(果報)도 선(善)이고, 악(惡)이면 과보(果報)도 악(惡)의 성질을 띠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선업(善業)에는 즐거운 보(善報)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惡報)가 따른다." 고 설한다. 어떤 경우에는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흑보(黑業)에는 흑보(黑報)가 백업(白業)에는 백보(白報)가, 흑백업(黑白業)에는 흑백보(黑白報)가 따르고, 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에는 보가 없다."<중아함 卷27 달범행경> 불흑불백(不黑不白)의 업이란 의지가 작용된 것이 아니므로 보가 없다고 할 것은 물론이다. 왜 그러냐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만을 업으로 보고 있으므로 "의지가 작용되지 않은 업(不故作業)은 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중아함 卷3 사경>

 

이와 같이 선업에는 즐거운 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가 따른다면 우리의 행동방향은 마땅히 악을 여이고 선을 행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을 바라는 것이 사람의 상정인데, 즐거움을 초치하는 것은 자신의 선업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선업보다는 악업을 익혀 왔음이 사실이다. 행복하게 살 것을 바라면서도 불행을 가져오는 악업을 일삼아 왔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痴暗) 일인가? 괴로운 상황에서는 선보다 악을 행하기가 더 쉬워 일단 악에 빠지면 끝없는 악의 순환이 있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악업을 타파하는 일에서부터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석존은 먼저 악업부터 설명하고 계신다. "몸으로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운 보를 받나니, 그것은 곧 산목숨을 죽이는 것(殺生)· 도둑질(偸盜)· 삿된 음행(邪淫)이다. 입(言語)으로 네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운 보를 받나니, 그것은 곧 거짓말(妄語)· 두 가지 말(兩舌)· 욕지꺼리(惡口)· 꾸밈말(綺語)이다. 의지로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나니. 그것은 곧 욕심(貪慾)· 성냄(瞋恚)· 어리석음(痴暗)이다."<중아함 卷3 思經>

 

이상 열 가지를 십악업(十惡業)이라고 하는데, 십악업의 부정은 곧 십선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십선업은 따로 시설(施設)하지 않고, 십악업에 부정 접두사 '不'(a-)를 관(冠)하여 이를 표현함이 보통이다.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업은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이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선업은 불망어· 불양설· 불악구· 불기어이고, 의지로 짓는 세 가지 선업은 무탐· 무에· 정견(無痴)이다.<잡아함 卷28> 십선업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물론 없지 않다. 가령 불살생 은 방생(放生)으로, 불투도는 보시(布施)로. 그러나 십악업의 반대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몸으로 짓는 삼업(三業)과 입으로 짓는 사업(四業)과 의지로 짓는 삼업 가운데서, 근본이 되는 것은 의지로 짓는 삼업이다. 업은 본래 의지에서 발생하여 언어로, 또는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계파가 신벌(身罰)을 가장 중한 것으로 보는 데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의업을 최중(最重)한 것으로 본다.<중아함 卷32 우바리경> 어떤 경우에는 의업을 사업(思業, cetana-karma)이라 하고 구업· 신업을 사이업(思已業, cetayitva-karma)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의업이 근본이 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선·악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상과 같거니와,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윤리를 엿볼 수가 있다. 윤리학에서는 선악의 판별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불교의 업설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십업의 내용을 볼 때 그 중의 어느 하나라도 인간의 사회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이것은 선악의 판단은 각자의 의지에 맡겨져 있지만, 사회윤리적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른다는 것이므로 사회적 책임(報)이 또한 깊이 의식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매우 합리적인 사회윤리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실제적인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따금 이러한 불교의 업설이 문제성을 던져 줄 때가 있다. 업설의 합리적 인과율(因果律)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구체적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극악한 일을 저질렀는데도 잘 살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선한 일만 하는데도 일생을 불우하게 살다 가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십업설의 인과율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문제의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업보의 인과율로는 해명되기 어려운 이러한 '문제의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원리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유신론자는 신의 뜻에서, 운명론자는 운명에서, 우연론자는 우연에서 그 원인을 찾을 것이다. 그들의 설명은 매우 이해하기 쉬우므로 곧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현 재 우리 주변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크게 행해지게 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설명들은 문제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는 인간의 업인(業因)에 의한 것과, 그렇지 않은 원인(신·운명·우연)에 의한 것과의 두 가지 현상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 디까지가 인간이 한 일이며, 해야 할 일인가가 모호하게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성에서 만일 모든 현상을 신이나 운명·우연 등의 원인에서 오고 있다고 하면, 이번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나 욕심·노력 등이 있는, 또는 있어야 할 이유가 수긍할 만하게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 卷3 도경>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냉철한 현실관찰과 합리적인 사유를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그러한 현상도 업보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왜 그러냐면, 앞서 십이처설(十二處說)에서 분명히 다졌던 바와 같이 "일체 존재(현상)는 십이처에 들어가고, 그 이외의 경계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경우 불교의 업설은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로 전개된다. 문제의 현상을 분석해 보면, ① 현재 업인이 있는데,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와, ② 과보(果報)는 있는데 그 업인(業因)이 현재 발견되지 않을 경우의 둘로 갈라진다. 이러한 두 경우를 업설에 의해 합리적으로 설명한다면, ①의 경우는 그 과보가 현세의 이후에 즉 내세에 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②의 경우는 그 업인이 현세의 이전에 즉 숙세(宿世)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석존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來世)에 받을 때도 있다."<중아함 卷3 思經>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삼세 업보설로 전개되므로, 사후 내세에 가서 받을 업보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교의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 된다. 육도의 도(道, gati)는 '취(趣)'라고도 번역되는데, '가는 곳'을 가리킨다. 그런 취(趣)로서 천(天)· 인(人)· 수라(修羅)· 아귀(餓鬼)· 축생(畜生)· 지옥(地獄)의 여섯 가지를 시설(施設)한 것을 육도라고 한다. 아수라를 빼고 오취(五趣)를 헤아릴 경우도 있다. 육도에서 앞의 셋을 선업에 대한 선취(善趣)라 하고, 뒤의 셋을 악업에 대한 악취(惡趣)라고 한다.

 

업설의 평가

 

이상 소개한 것이 불교의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의 대강인데, 이것은 실천적 인간의 시야를 현세의 테두리를 벗어난 무한한 시공(時空) 속에 펼치게 하며, 악을 멸하고 선을 행하는 강력한 의지적 인간상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설은 종래 학계에서 올바른 이해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진정한 불교 교리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은 일도 있다.

 

업설에 대한 그러한 부정적 평가 중에 첫째로서 우리는 업설을 단순한 숙명론으로 보려는 견해를 들 수가 있다. 업설은 현세의 괴로움을 숙세(宿世)의 인연으로 돌리고 체념하라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현재 받고 있는 괴로움이 숙세의 업인에 의한 것도 없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교 업설의 목적은 그것을 체념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에 목적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의 업설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장하려는 '통속적인 교화 방편설'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업설이 불교의 무아설(無我說)과 모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업 설뿐만 아니라 무아설(無我說)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가 된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불교의 무아설은 앞서 십이연기설의 중도설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무명 망념에 실재하는 아(我)가 없다는 것이지 망념 그것까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생사윤회는 바로 그런 망념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업설과 무아설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만을 확실한 것으로 본다는데(十二處說), 이런 입장과 삼세업보설은 모순되지 않느냐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숙세나 내세와 같은 것은 보통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불교 교설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 해라고는 볼 수 가 없다. 석존이 각 종교의 진리성 주장에 대해서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현실세계의 관찰로부터 출발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에 시종하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다.

 

불교의 삼세업보설은 권위주의적 입장에서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인과를 관찰하면 누구나 그 필연성을 추단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업설은 단순히 인간의 합리적 사유의 소산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석존처럼 깨달음을 이루면 삼세업보의 실상이 직접 인식되는 숙명론이나 천안통(天眼通)과 같은 지혜도 발생한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의 삼세업보설에 대해 부정적 태도로 임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부터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이라고 하겠다. 불교의 계율은 업설에 입각한 것이며, 과거 칠불 또한 모두 다음과 같은 게송(七佛通戒偈)을 읊고 계신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하며 그 의지를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석존이 당시 인도사회의 사성제도를 비판하고 배격하신 것도 업설의 정신에 의했던 것이다. 사성(四姓)은 모두 선악업에 의해 상벌이 결정되는 것이니, 귀천은 업에 의한 것이지 종성(種姓)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잡아함 卷 20> 바라문교의 공희(供犧:邪盛大會)에 대해서도 수백 두의 소와 양 등을 살상하는 것은 반대하셨으니, 이것 역시 업설의 불살생에 의한 것이다.<잡아함 卷4>

불교 업설의 사회윤리적 성격은 오늘의 민주사회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받을 만하다.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 등이 민주시민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하는데, 업설에서의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능동적 행위이며, 보는 그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고 있다. 또 현대사회가 바라는 인간관은 현실 극복의 강인한 의지를 가진 창의적 인간이라고 보겠는데, 업설의 정신은 바로 그런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성제설

 

사제설의 내용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滅)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절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苦蘊)의 집(集)과 멸(滅)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四聖諦) 또는 줄여서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事實,fact)· 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諦)로서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四聖諦,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聖諦)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 가. 괴로움· 괴로움의 집(集)· 괴로움의 멸(滅)· 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도(道)의 네 가지 성제(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卷 15>

 

"뭇 교설은 사성제(四聖諦)로 집약된다."<중아함 卷7 상적유경>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聖諦)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 늙고(老)·병들고(病)· 죽고(死)·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卷7 분별성제경>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三法印說)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다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生)· 노사(老死)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苦蘊: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聖諦)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직지하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 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탐애(愛貪,chanda-raga)' <잡아함 卷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 (punar-bha-vika)" 희탐(喜貪,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락착(樂着,abhinandin)하는 애(愛,trsna)"<잡아함 卷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色)은 희애(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受)·행(想)·행(行)은 촉(觸)이, 식(識)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 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卷2> 괴로움의 집(集)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苦聖諦)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 이다. 그러나 집(集)이라는 개념의 최승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samudaya) 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한다(udaya)'는 뜻으로서, '모은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緣起)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集)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둘째 번 성제(聖諦)는 괴로움은 연기(緣起) 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聖諦)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滅)이라는 성제(聖諦)는 집제(集諦)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滅諦)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 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聖諦)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 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八正道)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팔정도

 

먼저 이 팔정도의 각항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종교적 생활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견(正見,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를 닦을 때 "法을 잘 결택(決擇)하 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卷7 분별성체경> 정사유(正思惟,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思惟)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 할 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samyak-vac)와 정업(正業,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 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동상경 > 정어와 정업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正念,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心) 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 절 십이연기설에 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의식(凝視)하고(정견)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正思惟∼正念) 마음(心)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타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卷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samatha)와 관(觀,vipasyana)의 拄수(修)라든가, 정(定,samadhi)과 혜(慧,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正見), 정정(正定)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決擇)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四聖諦)'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존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존의 교설은 이제 이러한 신성성을 띠게 되었다. 석존이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것은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과(四果)

 

사제 팔정도는 행하는 사람의 인격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과 심성의 정화가 함께 행해지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그러한 종교적 체험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행자의 수행을 돕고 있으니, 예류(預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阿羅漢)의 사과설(四果說)이 곧 그것이다.

 

첫째의 예류(預流,srota-apanna)는 세 가지 결박의 번뇌(身見·戒取·疑)를 끊고 범속한 생활에서 성스런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가리킨다.<중아함 卷1 수유경> 일래(一來,sakrd-agamin)는 여기 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가지 결박의 번뇌뿐만 아니라 탐· 진· 치(三毒心)의 셋도 약화시켜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와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셋째의 불환(不還,an-agamin)은 다섯 가지 결박(五下分結)의 번뇌(身見· 戒取· 疑· 貪· 瞋)를 끊고 이 세상에 옴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아라한(arhat)은 일체의 번뇌(身見· 戒取· 疑· 瞋· 痴)를 끊고 현재의 법에서 그대로 해탈의 경계를 체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해탈과 열반

 

열반의 의미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로 부른다. 해탈(解脫, vimoksa, vimukti)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자유 등을 의미하고, 열반(涅槃, nirvana)은 '불어 끈다(吹滅)'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두 술어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계파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석존이 불교 수행의 궁극적 경지를 표현하는 술어로 채택한 것이다. 이것은 그 경지가 그러한 개념에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십업설과 사제설을 살펴보았다. 먼저 십업설에서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계라면 십악업이 단절된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십악업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세 가지 의업(意業) 즉 욕심(貪欲)· 성냄(瞋)· 어리석음(痴暗)의 소위 삼독심(三毒心)이다.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의업(意業)이 밖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십악업에서의 궁극의 경지는 탐(貪)· 진(瞋)· 치(痴)가 사라진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사제설에서도 팔정도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지는 탐·진·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사과설의 각 단계에서 단절되는 결박의 번뇌를 보면, 예류(預流)에서는 삼결(三結:有身· 戒取· 疑)이 끊어지고, 일래(一來)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탐· 진· 치가 박약해지며, 불환(不還)에서는 삼결(三結)과 탐· 진(五下分結)이 끊어지고, 아라한에 이르러 탐· 진은 물론 치(痴)까지도 끊어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열반(涅槃)은 그러한 탐·진·치가 영원히 끊어진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다. "열반이란 탐욕이 영진(永盡)하고 진에가 영진하고 치암이 영진한 것이니, 일체 번뇌가 영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잡아함 卷18> 따라서 열반이란 개념은 십업설과 사제설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궁극적 경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술어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두루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열반이란 개념이 갖는 본래의 뜻은 생사의 구속을 벗어난 해탈의 경지에 있다고 생각된다. 경전에 사용된 예를 보면 열반은 대부분이 사제설과 결합되어 있으며<잡아함 卷2>, 사제설이 지향하는 바는 무명(無明)의 망념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오온(五蘊)을 여실하게 아는 까닭에 오온(五蘊)에 불착(不着)한다. 오온에 불착하는 까닭에 해탈을 얻는다."<잡아함 卷15>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설해지고 있다. 혜해탈(慧解脫, prajna-vimukti)은 오온이나 십이연기에 실체가 본래 없는 것을 봄으로써 지적으로 해탈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연기한 것이 무아(無我)라는 것을 직관하는 것(正見)만으로는 마음의 번뇌가 완전히 멸하는 것이 아니다. 정정(正定)을 통해 마음에서 그것을 멸해야만 한다. 이것이 심해탈(心解脫, ceto-vimukti)이다. 열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질 때(俱分解脫)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열반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세계이다. 그 곳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은 없다. "유위(有爲)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지만 무위(無爲)에는 생주이멸이 없다. 이것을 모든 행(行)이 적멸한 열반이라고 한다."<잡아함 卷 12>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도 이런 경지를 표현하고 있 다. "모든 행은 무상하니 그것은 생멸의 법이다. 생멸을 멸해버리면 적멸(寂滅)은 즐거움이 된다."<잡아함 卷22>

 

불교에 있어서 열반(涅槃)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삼법인설(三法印說)에도 이 뜻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셋을 드는 경우가 그것이다.

 

열반의 바른 이해

 

열반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그 언어적 인상은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소극적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생의 맹목적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탐(貪)· 진(瞋)· 치(痴)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교에서는 열렬한 구도를 위해서 재가보다는 출가를 권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불교는 염세종교라든가 허무적멸의 도라는 평을 종종 들어 왔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과연 열반의 참다운 뜻을 이해한 것일까.

 

선과 악은 성질이 상반하므로 한 인간의 행위 위에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다. 악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선은 있을 수 없고, 선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악이 있을 수가 없다. 선과 악의 이러한 상반성은 악을 끊으면 곧 선이 되고, 선을 끊으면 곧 악이 된다는 판단을 끌어낸다.

 

그런데 불교의 열반은 탐· 진· 치라는 세 가지 악한 의업이 멸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 곳에는 무탐· 무에· 무치(정견)의 세 가지 선한 의업이 곧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열반의 언어적 표현은 비록 소극적이지만 사실은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열반의 적극적 의미에 관한 이러한 해명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선과 악의 중간상태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상태가 있을 수가 있으니, 열반은 바로 그러한 비활동적 중간상태가 아니겠느냐고. 이런 견해도 불교의 십업설에서 말하는 선악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러냐면 십업설에서는 선악의 중간상태를 시설(施設)함이 없이 선악을 완전히 상호대립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불교에서 십선업을 따로 시설함이 없이 십악업의 반대개념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데에서 엿볼 수가 있다. 즉 십선업은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양설· 불악구· 불기어· 불탐· 불에· 불치(정견)의 열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잡아함 卷15> 따라서 십악업의 멸은 곧 십선업의 발생을 의미한다.

 

열반의 이러한 적극적 의미를 우리는 사제 팔정도에서는 더욱 뚜렷이 할 수가 있다. 팔정도가 완성된 아라한의 경계에서는 탐· 진· 치의 일체 번뇌가 영진한다고 한다. 이것 또한 무탐·무에·정견의 발생을 의미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사제의 집제(集諦)와 멸제(滅諦)는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각각 해당되는데 십이연기의 최초에 위치하고 있는 무명(無明)은 명(明)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따라서 무명의 멸진은 곧 명의 발생으로 전환하며, 우주적인 대아(大我)의 눈부신 활동이 거기에 전개될 것이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낭요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석존은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내가 사제설에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을 함에, 눈이 생하고 지(智)가 생하고 명(明)이 생하고 각(覺)이 생하였다."<잡아함 卷15> 열반의 적극적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열반은 또 인간의 사후에야 실현되는 경계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경전에도 석존의 죽음을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 : 圓寂)이라고 한다. 반열반은 완전(pari-)한 열반이란 뜻이다. 사과(四果)를 얻은 사람의 죽음에도 그런 용어가 사용된 예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열반이라는 말이 이차적으로 전용된 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해주고 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십업설에서 선업은 선취(善趣)에, 악업은 악취(惡趣)에 수생(受生)한다고 설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러나 생사에 결박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단절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러한 사람에게 재생이 있다고는 못할 것이다. "내 생은 다했고 범행(梵行)은 섰으며, 할 바는 하였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을 것" 이라는 자증의 선언(記別)이 경전에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반열반은 바로 이런 도인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열반이 죽음을 가리킬 경우는 이차적 전용에 의한 것이요 그 본래의 뜻은 아니다. 열반의 참다운 뜻은 현재의 상태에서 생사로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라한은 현법에서 해탈한다고 설해져 있으며, 석존은 또 다음과 같은 교설을 베풀고 계신다.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함이란 어떤 것인가. 노병사(老病死)를 염리(厭離)하고 욕심을 버리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것을 이르되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을 얻었다고 한다."<잡아함 卷 15>

모든 악이 멸하면 일체는 선이 되고 모든 사(邪)가 파하면 일체는 정(正)이 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였던 일체는 곧바로 상(常)· 낙(樂)· 아(我)의 일체로 전환한다. 열반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전개, 생명의 약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일어남

 

대승불교의 일어남

 

석존의 교설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근본교설이다. 따라서 불멸후 곧 행해진 결집(結集:편찬회의) 때에도 계율(戒律)과 함께 그것이 제일 먼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한역으로 전해지는 사아함(agama)과, 남방불교에 팔리어(pali)로 전해지는 5니카야(nikaya)는 바로 이러한 교설을 결집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아함의 교설이라고 부른다.

 

불교 교단은 석존의 입멸후 약 100년간은 일미화합(一味和合)하여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100년쯤(B.C. 4세기) 되어서는 계율과 교리에 엇갈린 견해가 발생하여 교단은 마침내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 theravada)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 mahasanghika)로 분열한다. 이것을 근본이부(根本二部)의 분열이라고 하는데, 일단 이렇게 분열이 생기자 이로부터 다시 세부 분열이 뒤따라 먼저 대중부에서 8파, 계속해서 상좌부에서 10파가 갈려나가, B.C. 1세기경까지에는 총 20부파의 형성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시대(불멸후 100년경∼B.C. 1세기경)의 불교를 부파불교라고 부르고 그 이전을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부파불교 시대의 각 부파는 아함의 교법(dharma)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행하였다. 석존의 교설은 사람들의 근기를 살펴 그에 알맞은 법을 설해 갔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산만하고 단편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이제 그러한 교설을 분석하여 체계화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부파불교 시대의 그 러한 연구를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라고 부른다. '교법(敎法, dharma)에 대한 (abhi-)' 연구라는 뜻에서 '대법(對法)'이라고도 번역된다. 뿐만 아니라, 각 부파는 자신의 아비달마 교학의 성과를 결집하여, 경(sutra)·율(vinya)과 함께 성전으로서 간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경(經)·율(律)·론(論)의 삼장(三藏, tri-pitaka)이라고 하여, 부파불교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은 아함의 교설을 체계화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반면에 석존의 교설을 아함에 한정시키고 번쇄한 훈고학적 해석으로 그것을 더욱 난해하고 무미건조한 불교로 만들어 갔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위열반(無爲涅槃)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涅槃)을 증득하는 아라한(arhat)으로 인식되었다. 전문적으로 교학을 연구하여 철저하게 수행하는 출가승이 아니고는 이제 불교를 제대로 행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부파불교가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을 때, 교계의 한편에서는 석존이 뜻한 불교의 진정한 정신을 되찾으려는 사상운동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대승불교(mahayana)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재가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혁신적인 출가인(大衆部系統)의 지도층이 그 추진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으 로 생각된다. 그들은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의 길을 '소승(小乘, hinayana)'이라고 비판하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적인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하였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이제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불(成佛)에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석존이 베푼 교설의 진정한 뜻이라고 그들은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석존의 그러한 뜻을 담은 교설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소위 대승경전으로서 B.C. 1세기경부터 그러한 문헌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초기 대승경전으로 중요한 것은 반야경·법화경·십지경·무량수경·유마경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결집되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그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부파들이 정통파의 권위를 내세워 그러한 경전들을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배격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 나 대승불교는 급속도로 인도 사회에 퍼져 나갔고, 경전 또한 줄기차게 성립·유통·증광될 뿐이었다.

 

대승경전은 이렇게 성립이 모호하고, 소승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문제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전적으로 석존의 교설이 아니라고 배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상적 차원은 아함교설의 위에 있지만 그러한 차원의 이론적 근거는 역시 아함에 두고 있는 점으로 보아, 대승불교는 아함 교 리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석존의 교설은 원래 중생들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 가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하는 방편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대승경전의 원시부분만은 석존의 교설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종래는 대승불교를 소승불교와 확연히 구 별해서 소개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본서에서는 아함과 초기 대승경전의 교리를 하나로 묶어 불교의 근본교설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제법개공

 

아함에 설해진 열반(nirvana)은 절대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가 있다.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 실현된 그 곳은 모든 번뇌(貪· 瞋· 痴)와 무지가 사라져 생사의 괴로움을 멀리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소승불교는 그러한 열반을 불교의 궁극적 목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출세간(出世間)적인 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생사'라는 것은 우리 중생들의 현실세계에 해당되는데 열반은 그것을 부정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흔히 '사회윤리를 무시한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도'라고 비난함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열반관(涅槃觀)의 반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가 있다.

 

아함에 설해진 열반을 과연 그렇게 절대적인 존재라고 볼 수가 있을까? 생사와 열반,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라는 그 두 법을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두 법이 서로 연(緣)이 되고 과(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즉 생사가 있음으로써 열반이 있고 열반이 있음으로써 생사가 있다. 현대적 술어로 표현한다면, 생사와 열반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A, B 두 법이 이렇게 서로 연이 되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있다면, 그 두 법에는 독자적인 존재성 즉 자성(自性, svabhava)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상대방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존재성이 없다면 A, B 두 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법이라는 말이 된다. A는 곧 B요, B는 곧 A이다. 동시에 A, B라는 두 개의 존재는 하나의 본질적 존재(性)에 대한 일종의 존재양식(相)이 될 것이다.

 

여실하게 볼 때 이렇게 평등한 두 법에 대해서 누가 만일 그들의 독자적 존재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식별이요 분별(vikalpana)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분별은 두 법에 대한 실상을 보지 못한 것이므로 妄念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이런 망념이 있으면 이 무명망념(無明妄念)을 연하여 생사의 괴로움이 일어날 것이다(연기). 아함교설의 십이연기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있는 생사와 열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생사는 곧 열반이요, 열반은 곧 생사이다. 그런데도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그 중의 열반을 독자적 존재성을 지닌 것으로 절대시한다면, 이것을 과연 여실(如實)한 견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 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러한 분별망념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자각과 반성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초기경전 중에서도 성립이 빠른 것은 반야부 계통인데, 그 중의 하나인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니, 있는 바의 모든 중생의 무리를 내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하여 멸도(滅度)하리라. 이렇게 무량 무변 중생을 멸도하지만 실로 중생으로서 멸도(滅度)된 자는 없나니라. 왜 그러냐면 보살에게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라. <금강경>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절대적 존재로 보려는 견해를 배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별망념(分別妄念)에는 실체가 없다. 따라서 반야경에는 "모든 법은 자성(自性, svabhava)이 비었다(sunya)."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아함경에서 모든 법(一切)은 십이처·사대·오온 등의 유위법(有爲法)을 가리키고, 그들은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라고 설한다. 그러나 반야경에서 말하는 '모든 법(諸法)'은 그런 유위법은 물론 열반과 같은 무위법(無爲法)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자성이 공(空)하다고 한다. 자성이 공하다는 것은 아함경의 무아라는 말과 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더 철저한 개념이라는 것이 짐작될 것이다.

 

자성이 빈 법은 '공(空, sunyata)'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 공을 허공(akasa)이나 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허공은 물체가 없는 공간(space)을 의미하고, 무(無)는 있던 것이 없어졌을 때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공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 눈앞에 있는 존재 그것이 여실(如實)하게 보는 입장에서 바로 공인 것이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을 떠나 공이 없고 공을 떠나 색이 없다.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또한 그와 같다."고 반야심경은 설하고 있다.

 

모든 법이 이렇듯 공의 형상(空相)이라는 것을 더욱 철저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반야경은 여러 가지 미묘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모든 법은 생(生)한 일도 없고 멸(滅)한 일도 없다. 옴도 없고 감도 없다. 중생의 마음이 더럽고, 부처의 마음은 깨끗하다는 것도 없다. 중생은 본래부터 성불해 있는 것이다. "모든 法은 꿈과 같고 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금강경> 이러한 표현들은 초학자를 심히 당황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본의는 우리의 분별망념을 철저히 타파하려는 것이지 다른 뜻이 아니다.

 

반야바라밀다

 

망념의 부정이 行(실천)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는다. 그러나 그런 경계에 집착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분별망념이다. 다시 망념의 부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行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境界)를 얻는다. 그리하여 무한한 자기 부정적 실천이 계속된다. 이러한 변증법적 공관(空觀)의 실천은 마침내 일체의 분별을 타파한 진여(眞如, tathata)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궁극적 실천의 경지를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일체의 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불가설 불가설의(不可說 不可思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석존은 "내가 성도하여 쿠시나가라에 이르도록 그 사이에 한 마디도 설한 것이 없다."고 설하고 계신다. 이 말은 그러한 뜻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라도 언어적인 표현을 시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야경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반야바라밀다 (prajnapamita)라는 술어는 그러한 언어적인 표현을 꾀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반야(prajna)는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함을 보고 그 실상을 직관 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일체의 분별을 떠난 것이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해석된다. 그리고 바라밀다(paramita)는 '피안(彼岸,para)에 이른(i) 상태(ta)'를 의미한다. 궁극적인 것, 완성된 것과도 통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 두 낱말이 합성된 '반야바라밀다'는 지혜가 피안에 이른 것(智度彼岸), 또는 지혜의 완성(perfection of wisdom)이라는 뜻이 된다.

 

반야바라밀다는 이렇게 생사의 피안으로부터 일체의 분별망념을 멸하여 궁극적인 피안에 도달한 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아함교설의 열반과 같이, 생사와 열반을 분별했을 때의 그러한 경계로 보아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아직도 분별의 세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관(空觀)의 실천에서는 "모든 법은 무변(無邊)이니 전제(前際)도 얻을 수 없고 중제(中際)도 얻을 수 없고 후제(後際)도 얻을 수 없다. 연(緣)이 무변(無邊)이기에 반야바라밀다도 무변인 것이다."<소품반야 卷1>

 

따라서 보살은 마땅히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해야 한다고 설하지만, 보살이라고 부를 만한 대상(法)이 없으며, 반야바라밀다라고 부를 만한 대상도 없다. 일체는 공이오, 공이라는 것도 또한 공(空亦復空)이다. 일체는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다는 것도 불가득(不可得)이다. 이런 경계를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절대적 부정은 곧 절대적 긍정이 된다는 주장도 있고,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보살과 실천

 

보살과 서원

 

어떻든 언사(言辭)가 사라지고(寂滅) 생각이 끊긴 경계는 그것을 직접 수행하는 사람만이 스스로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자내증(自內證)의 체험을 불교에서는 보리(菩提,bodhi)라고 한다. 깨달음(覺)이라는 우리말에 해당된다. 깨닫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경계요, 깨달은 뒤에는 너무나도 명백한 진실계이므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을 보리살타(菩提薩陀,bodhisattva), 또는 줄여서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보리는 깨달음을, 살타는 중생(또는 有情)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또는 깨달음 속에 있는 중생이라는 말이 된다.

 

보살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아라한(阿羅漢)이 열반을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세간(有爲法)과 열반(無爲法)을 분별하여 이 중에서 열반을 구하는 것이 아라한의 수행이므로 그것은 자연히 출세간적인 방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살은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나와 남 등의 모든 분별을 떠나 평등한 수행을 할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경계를 얻는 일도 없다. 따라서 보살의 수행은 아라한과는 달리 중생계에 회향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보살이 국토를 정화하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커다란 서원을 세움은 이 때문이다. 가령 불교의식에 흔히 사용되고 있는 사홍서원을 예로 들어보면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생이 가없어도 건지고야 말리라.(衆生無邊誓願度)

번뇌가 끝없어도 끊고야 말리라.(煩惱無盡誓願斷)

법문이 한없어도 배우고야 말리라.(法門無量誓願學)

불도가 위없어도 이루고야 말리라.(佛道無上誓願成)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보살의 지상과제이겠지만, 그보다도 먼저 중생을 제도하겠다 는 뜻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 보살의 수행을 흔히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에 대해 먼저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중생을 교화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곧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오,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곧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장보살과 같은 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고 있으며, 법장비구(아미타불의 前身)의 서원에는 자신이 비록 부처가 된다고 하더라고 괴로운 중생에게 깨달음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깨달음을 얻지 않겠노라는 뜻이 반복되고 있다.

 

육바라밀의 수행

 

보살은 이와 같이 사회와 중생을 망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그와 함께 보시(布施,dana)· 지계(持戒,sila)· 인욕(忍辱,ksanti)· 정진(精進,virya)· 선정(禪定,dhyana)의 5바라밀도 함께 행하게 된다. 이것을 보살이 닦아야 할 육바라밀이라고 한다.

 

① 보시바라밀(dana-paramita)은 자기 소유물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아함의 교설에서도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로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보시는 공덕을 바라고 남에게 시여(施與)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묾이(住) 없이 보시할지니, 소위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머묾이 없이 베풀어주어야 한다."고 설해져 있다. 베풀어주어도 준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보시에는 "세 가지가 청정하나니, 주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주는 물건(施物)의 셋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대품반야 卷 7>

② 지계바라밀(sila-paramita)은 계율을 잘 지니는 것을 뜻한다. 국가에는 법률이 있고 사회에는 도덕이 있다. 불교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로서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오계가 있고,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각각 250계, 348계라는 구족계(具足戒)가 있다. 지계바라밀은 이러한 법과 계율들을 잘 지키는 것인데, 이때도 계율을 지킨다는 부담감이나 자만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죄(罪)와 비죄(不罪)를 얻을 수가 없는 불가득(不可得)의 공관에서 자연스럽고 자율적인 준법생활이 이루어져야 한다.<대품반야 卷1>

③ 인욕바라밀(ksanti-paramita)은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安受苦忍)이다. 우리는 조금만 욕된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곧 좌절되기 쉽다. 그러나 보살은 그런 경우에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것이니, 제법이 본래 不生임을 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석존은 다음과 같은 전생담을 설하고 계신다. "옛날 가리(Kalinga) 왕이 내 몸을 마디마디 잘랐을 때 만일 내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진한(瞋恨)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러한 상이 없었나니라."

④ 정진바라밀(virya-paramita)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선법을 증장시키는 데에 정진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아함교설의 여러 가지 행법(三十七助道品)에는 정진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석존이 열반에 임하였을 때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 방일하지 말라. 불방일(不放逸)로써 나는 정각(正覺)에 이르렀으며 무량한 선을 낳는 것도 불방일이니라."고 유촉하고 계신다. 공관의 실천을 무사안일에 빠지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⑤ 선정바라밀(dhyana-paramita) : 선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靜慮)을 뜻한다. 신(God)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불교처럼 존재의 실상을 밝혀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무지를 타파하려는 종교에서 선은 특히 중요한 행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원시불교에서도 사선(四禪)의 행법이 설해져 있으며, 대승불교에서도 육바라밀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머물음이 없는 법(不住法)'속에서 행해져야 함은 물론이다.

⑥ 반야바라밀(prajna-paramita)에 대해서는 다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육바라밀에서의 반야바라밀은 보시에서 선정(禪定)에 이르는 다섯 바라밀의 주도자이며, 그들의 성립기반이 된다는 것 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섯 바라밀은 모두가 반야공관의 입장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지에 씨앗을 뿌리면 인연 화합하여 생장이 있게 되는데, 이 때 땅을 의지하지 않고는 생장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속에 머물러 증장함을 얻는다."<소품반야 卷2>

 

육바라밀은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중심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아낌없는 시여, 자율적인 준법생활, 끝없는 인내, 굽힐 줄 모르는 정진, 한없이 심오함 사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끼는 마음· 계를 범하는 마음(犯戒心)· 화내는 마음(瞋心)· 게으른 마음(懈怠心)· 산란한 마음(散亂心)· 지혜가 없는 마음(無智心)이 있을 때 큰 자비(maitri-karuna)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의 空에 상응하는 까닭에 능히 대자대비를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대품반야 卷1>

 

반야바라밀다는 이렇게 모든 분별망념을 초월하여 말할 수 없이 청정한 것이며, 모든 선법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며,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할 때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놀람이 없고 거꾸로 된 생각(顚倒)을 멀리 떠나 궁극적인 열반에 이른다."고 반야심경은 설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가 무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도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이다.<반야심경> 소승불교의 출세간적인 종교적 행위는 대승불교의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지극히 적극적인 종교적 행위로 지양된 것을 볼 수가 있다.

 

보살의 길

 

불교는 결국 인간의 마음(citta 心)에 대한 종교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부처에게 위대한 지덕(智德)이 있다면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이며, 중생에게 엄청난 사악함이 있다면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사악한 것이다. 모든 법의 근본은 실로 마음이니, 이 마음을 바로 알고 닦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마음은 미묘하여 파악하기 어렵다. 외계의 대상을 낱낱이 인식하고 기억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또 그렇게 객관화하는 힘이 있다. 선택하고 행동하는 무한한 자유가 있으며, 선의에 결합하여 선업을 짓고 악의에 결합하여 악업을 짓는다. 번뇌를 일으킬 수도 있고 멸할 수도 있으며, 번뇌를 일으켜 생사에 헤매고 번뇌를 멸하여 열반에 안주한다.

 

그러기에 아함경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음이 더러운 까닭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한 까닭에 중생이 깨끗하다. 마치 화가가 하얀 바탕에 여러 가지 채색으로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듯이, 마음도 오온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생사에 묶이고 오온에 대한 여실지(如實知)로 해탈을 얻는다."<잡아함 卷10>

 

분별망집을 못 버려 소승을 행하는가 하면, 분별망집을 떠나 대승을 행한다. 깨달음을 못 열어 어두운 중생인가 하면, 깨달음을 열어 위대한 부처가 된다. 그러기에 화엄경은,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의 셋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설하고 있다.

 

중생의 마음은 이렇게 성불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불성(佛性)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불성은 지옥에서 천상에 이르는 모든 중생에게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 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불성이 있다고 해서 깨달음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생의 죄장(罪障)도 또한 무한히 두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중생은 중생으로서 남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심한 경우에는 불성을 갖고 있다는 말조차 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부처가 먼저 중생의 마음을 정화하는 삼승을 설함은 이 때문이다. 그런 뒤에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 곧 일불승(一佛乘)이다. 따라서 삼승을 행할 때 이미 일승에 들어서 있으며, 삼승은 한결같이 성불에 이르는 보살의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화엄경의 십지설(十地說)

 

일불승설(一佛乘說)에 의하면 육바라밀을 닦는 보살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제(四諦)를 닦는 성문(聲聞)도, 십이연기를 관하는 벽지불도 다같이 한 줄기 불승(佛乘) 속에 있다. 누구라도 삼보에 귀의하고 염불이라고 한 번 하는 순간 이미 보살의 길속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장난으로 불탑이나 불화를 그리거나, 산란한 마음으로 나무불(南無佛)을 한 번 하고서도 모두가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고 법화경은 설하고 있다.<법화경 卷1>

 

이런 견지에서 초기 화엄경(十地經)은 아함에서 대승에 이르는 전 불교교리를 망라하여 한 줄기 보살도를 조직하고 있으니, 소위 화엄십지설(華嚴十地說)이 곧 그것이다. 이것은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이라는 예비 단계를 거친 뒤에 다음과 같은 십지(十地,dasa-bhumi)의 수행 계위를 밟고 있다.

 

① 환희지(歡喜地,pramudita) --- 10 대원을 세움

② 이구지(離垢地,vimala) --- 십선도(十善道)를 행함

③ 발광지(發光地,prabhakari) --- 무상·고·무아 등을 관함

④ 염혜지(焰慧地,arcismati) --- 三十七助道品을 닦음

⑤ 난승지(難勝地,sudurjaya) --- 사제(四諦)를 닦음

⑥ 현전지(現前地,abhimukhi) --- 십이연기를 관함

⑦ 원행지(遠行地,duraagama) --- 십바라밀을 닦음

⑧ 부동지(不動地,acala) --- 무생법변(無生法邊)을 얻음

⑨ 선혜지(善慧地,sadhumati) --- 사무애지(四無碍智)를 얻음

⑩ 법운지(法雲地,dharmamegha) --- 대법우(大法雨)를 뿌림

 

이런 십지를 거친 뒤에 보살은 부처가 된다는 것이니, 계위의 수는 41위가 되는 셈이다.(영락본업 경은 십주 앞에 십신위(十信位)를 보태고, 불지(佛地)를 등각위(等覺位)와 묘각위(妙覺位)의 둘로 갈라 52위를 설하고 있음) 십지에서 닦는 행법을 볼 때 아함의 교설로부터 대승경의 반야·법화 교설에 이르는 모든 교법이 포함 되어 있다. 일불승설(一佛乘說)에 입각한 보살의 길이라는 것이 뚜렷하다.

 

 

불타와 자비

 

법화경의 일불승설

 

대개의 종교는 궁극적인 실재나 원리로부터 시작하여 세계와 인간을 설명해 내려오는 방법을 취한다. 그러나 불교는 이와는 정반대로 현실세계(一切)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인 원리나 실재를 탐구해 들어가 마침내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취한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의 인도는 여러 가지 종교가 난립하여 심한 사상적 혼란을 빚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종교가 설하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진위성 문제는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깨닫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고타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가 구도 시에 취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으 며, 진리를 깨달은 뒤에 사람들에게 전법(傳法)할 때도 바로 이 방법에 의했었다.

 

이러한 방법을 불교에서는 방편(upaya)이라고 하는데, 궁극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bodhi)을 향해 점진적으로 접근시켜 간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소개해 온 여러 가지 교리는 전부가 그러한 방편에 의해 시설된 것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삼법인설로부터 연기· 사성제· 육바라밀설에 이르는 여러 법문은 우리 현실세계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심화되어 간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러한 깨달음을 불교에서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anuttara-samyak-sambodhi)이라고 한다. 삼법인설로부터 육바라밀에 이르는 각 법문은 그 나름대로 각각 깨달음을 갖고 있다. 그렇게 심화되어 가는 깨달음에서 이제 그 '이상이 없는'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무상(無上,anuttara)'이라고 부르며, 이 깨달음이야말로 궁극적 진리에 대해 가장 '바르고 평등한 것'이라는 뜻에서 '정등각(正等覺,正遍覺,samyak-sambodhi)'이라고 부른다.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머문 모든 부처님이 이룬 깨달음은 바로 이 무상정등각이며, 그들이 세상에 나가 법을 설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중생들에게 바로 이 무상정등각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법화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불세존(諸佛世尊)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나니, 어떤 것을 일러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가. 제불 세존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 청정케 하 고자 세상에 출현하나니라.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이고자 세상에 출현하나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깨치게(悟)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나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의 길에 들게(入)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나니라.<법화경 권2>

 

그러나 부처님이 이룬 그 깨달음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부처가 이룬 법은 가장 희유하고 난해한 법이니,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제법의 실상을 구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르는 바 모든 법은 그러한(如是) 상(相), 그러한 성(性), 그러한 체(體), 그러한 힘, 그러한 작(作), 그러한 인(因), 그러한 연(緣), 그러한 과(果), 그러한 보(報), 그러한 본래구경(本來究竟等)이다.<법화경 권2>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모습(如是相)'이라고 시사하는 정도밖에.

 

더구나 모든 부처는 劫(kalpa)이 흐리고, 번뇌(aklesa)가 흐리고, 중생(sattva)이 흐리고, 견해 (drsti)가 흐리고, 삶(ajiva)이 흐린 오탁악세에 출현한다. 이러한 악세의 중생들은 마음의 때(垢)가 무겁고 아끼고 탐내는 마음(간탐)· 질투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다. 어찌 부처가 이룬 희유 난해한 법을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깨달음을 이룬 석존은 이런 문제로 해서 보리좌에서 깊은 사념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룬 법은 너무나도 심심(甚深)하여 애탐에 가린 중생들에게는 도저히 신수(信受)되지 않을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법(傳法)을 단념하려는 석존께 범천은 법륜을 굴려 줄 것을 지극한 마음으로 권청하였다고 한다.<장아함 권1> 이 때 그는 과거 부처님들은 어떤 방편을 쓰셨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들처럼 내가 얻은 법을 삼승으로 설하리라."<법화경 권2>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러한 확신이 선 다음 비로소 석존은 바라나시(Baranasi)를 향해 떠나셨다고 한다.

 

'승(乘,yana)'이라는 말은 '타고 가는 것'을 가리킨다. 삼승으로 설한다는 것은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一乘)을 셋으로 분별하여 삼승을 설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삼승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법일까? 법화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첫째는 성문승(聲聞乘,sravaka-yana)이니 사제 팔정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하는 길이다. 둘째는 벽지불승(pratyeka-buddha-yana)이니, 십이연기를 닦아 모든 법의 인연을 잘 아는 길이오, 셋째는 보살승(bodhisattva-yana또는 大乘)이니 육바라밀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는 길이다.

 

지금까지 소개해 온 여러 가지 교리가 그대로 삼승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십이연기· 사제· 육바라밀의 순서로 서술하여, 법화경의 순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서술의 편의상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삼승 중에서 성문승과 벽지불승은 소승에 해당되고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된다. 이 두 승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소승은 열반과 생사를 분별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가 없으며, 대승은 열반과 생사를 분별해서는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교리체계는 처음부터 하나로 결합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불교 경전이 결집되는 과정에서도 아함경(소승)은 불멸직후에 열린 제일결집 때 편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에 대승경전이 결집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뒤 부파불교를 거치는 동안 대승경전이 편찬되는데,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그것을 비불설(非佛說) 이라고 배격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승과 소승은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에서 모든 부처는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을 설할 뿐, 이 하나의 불승에서 방편으로 삼승을 설한 것이니, 삼승은 방편(權)이오, 일승은 진실(實)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승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화경은 대승과 소승이 심한 대립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출현한 경전이 라는 해석이 있다. 그렇게 볼 만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단순히 교단의 분열·대립을 지양하기 위해 출현한 경전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게만은 해석할 수 없는 근본적인 면이 있다. 대승 반야사상이 아함의 교설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분별망집을 부정하는 그 논리적 근거는 아함의 인연· 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제5절), 아함의 입장에서는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등은 뚜렷하게 분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두 법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면 그들은 서로 연이 되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독자적 존재성(自性)은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승의 반야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중론·대지도론 등의 저술을 남긴 용수(龍樹,Nagarjuna A.D. 150∼250)도, 반야개공(般若皆空)의 논리적 근거를 아함의 연기 중도설(緣起 中道說)에서 찾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즉 그는 "유위법(生死)이 있음으로써 무위법(涅槃)이 있다."<중론 권1>고 말하고, "여러 인연으로 생한 법(緣起)은 공(空)이오 가명(假名)이오 중도(中道)라."<중론 권4>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의 반야개공설이 이렇게 아함의 인연·연기설에 논리적 근거를 둔 것이라면, 아함의 교설은 조금만 입장을 바꾸면 곧 대승의 반야교설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화경의 '삼승은 곧 일불승'이라는 교설은 단순히 대소승의 교단적 분열·대립을 지양하기 위해 출현한 것에 불 과하다기 보다는, 석존이 옛날 전법에 나섰을 때의 본회(本懷)를 서술한 것이오, 대소승의 분별은 그런 본원(本願)에 입각한 방편시설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야 어떻든 간에 적어도 법화경만은 이러한 뜻을 우리에게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불자의 사명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이렇게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획득에 있다면, 다시 말해서 성불에 있다면 모든 불자는 마땅히 그러한 뜻을 향해 발심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임을 자처하면서, 모든 부처가 오로지 보살을 교화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는 불자가 아니며, 또 스스로 이르기를 구경열반을 얻었다고 하면서 무상정등각을 다시 지구(志求)하지 않는다면 이 야말로 증상만자(增上慢者)인 것이다."<법화경 권2> 오늘날 서구학자 중에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열반에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견해 또는 시정되어야 할 것이 명백하다.

 

일불승설의 뜻을 더욱 뚜렷이 하기 위해 석존은 다음과 같은 화택(火宅)의 비유를 들고 계신다.

부유한 노년의 한 장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자기 저택을 바라보니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자기 아들들이 그런 줄도 모르고 유희에 빠져 있다. 집에는 좁은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 유희에 탐착한 아이들은 불이 났다고 해도 믿으려고 하 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장자는 방편으로 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양이 끄는 수레(羊車)· 사슴이 끄는 수레 (鹿車)· 소가 끄는 수레(牛車)와 같은 진기한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속히 나오너라. 바라는 대로 주겠다." 완구를 좋아하는 애들인지라 서로 밀치면서 모두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 때 장자는 애들이 모두 불난 집(火宅)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뒤 그들에게 다 같이 흰 소(白牛)를 맨 커다란 수레(白牛車)를 나눠준다.<법화경 권3>

 

이 화택유(火宅喩)에서 양이 끄는 수레(羊車)· 사슴이 끄는 수레 (鹿車)· 소가 끄는 수레(牛車)는 각각 성문승· 벽지불승· 보살승에 해당되고, 흰 소가 끄는 수레(白牛車)는 일불승(佛乘)에 해당된다. 처음에 삼승으로 유인하여(方便) 뒤에 다같이 일불승(一佛乘)에 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석존은 이렇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성불에 있음을 설한 다음, 제자들에게 무상정등각의 기(記,vyakarana)를 주고 계신다. 제자 가운데서 가장 지혜가 뛰어난 사리불(Sariputta)에게 수기(授記)한 것을 예로 들어 보자.

 

그대 사리불은 미래 무량겁에 무수한 부처를 공양하고 정법을 봉지(奉持)하여 보살행을 갖춘 뒤에 부처가 되리니, 이름을 화광여래(華光如來)· 응공(應供)·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라 할 것이다. 국명은 이구(離垢)요, 겁명(劫名)은 대보장엄(大寶莊嚴)이요, 불수(佛壽)는 이십소겁(十二小劫)이며, 정법주세(正法住世)는 32소겁(三十二小劫)이오, 상법주세(像法住世) 또한 32소겁이리라.<법화경 권3>

 

불명(佛名)· 국명(國名)· 겁명(劫名) 등을 낱낱이 분별해주고 있으며, 불멸후에 법화경을 읽고 발심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수기가 행해지는 것이라고 설해져 있다.

'기(記,vyakarana)'라는 말은 분석·대답·문법 등의 뜻을 가진 말인데, 여기에서는 장차 그런 일이 있을 것을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서구학자들은 이 술어를 예언(prophecy)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불자에게 성불에 대한 그러한 기를 주는 까닭은 무엇 일까? 수기설에 대한 의미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뜻은 글자 그대로 불교를 신수(信受)하는 사람은 누구나 장차 부처가 될 것이며, 또 마땅히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처가 된 사람은 불국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기의 내용에 불명과 국명이 밝혀져 있는 데 에서 그런 뜻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劫名이 명기되어 있는 데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법화경은 반야경이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달 리, 불국토건설· 중생교화를 二大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불국토 건설은 불토정화(佛土淨化)라고도 말해지는데, 사회를 정화하여 정법이 행해지는 이상적인 복지국가 를 건설하는 것을 뜻한다. 사리불의 수기에는 "그 땅은 평등하고 청정엄식(淸淨嚴飾)하며 안온풍락(安隱豊樂)하여 천신과 인류가 치성하며 유리로 땅이 되고 입교(入交)의 길이 있으며 황금의 줄이 그 경계를 표시하여 길가에는 칠보로 된 가로수가 있어 항상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법화경 권3>고 묘사되고 있다.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와 미래불 미륵의 용화세계도 이런 불토의 일종이다.

 

중생교화는 괴로움으로부터 중생을 제도하여 요익안락(饒益安樂)케 하는 것을 뜻한다. 지옥으로부터 천신에 이르는 모든 중생류는 생·로·병·사의 무량(無量)한 괴로움 속에 헤매고 있으므로, 선한 일은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마음속에는 탐(貪)· 진(瞋)· 치(痴)의 불길이 꺼질 날이 없고, 입으로 몸으로 갖은 악행을 범하고 있다. 이러한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불보살은 그들에게 먼저 삼승을 설하여 괴로움으로부터 제도한 다음, 일불승으로써 무상의 깨달 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교화라고 한다.

 

 

불타의 위신력

 

불타의 위력

 

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이러한 불타(buddha)는 어떠한 존재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무상정등각을 얻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 곧 불타(buddha)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오탁악세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몸을 바치므로, 그에게는 다음과 같이 좀 더 자세히 수식하는 이름이 붙는다.

 

ⓐ 여래(如來,tathagata) --- 그렇게 온

ⓑ 응공(應供,arhat) --- 동등한

ⓒ 정변지(samyak-sampuddha) ---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 명행족(明行足,vidya-carana-sampanna) --- 明에의 行을 완성한

ⓔ 선서(善逝,sugata) --- 잘 간

ⓕ 세간해(世間解,loka-vid) ---세간을 아는

ⓖ 무상사(無上士,an-uttara) --- 더 이상 없는

ⓗ 조어장부(調御丈夫,purusa-damya-sarathin) --- 사람을 길들이는

ⓘ 천인사(天人師,deva-manusanam sastr) --- 천신과 인간의 스승인

ⓙ 불세존(佛世尊,buddha-bhagavat) --- 깨달은 어른

 

이것을 여래십호라고 하는데, 그 말뜻은 위에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러한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는 개론서의 범위를 넘는다고 생각되므로 설명을 생략코자 한다. 다만 그 중에서 맨 앞의 여래(그렇게 온 자)는 부처의 특히 중요한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왜 그러냐면 그 개념은 보살의 반야바라밀다(智到彼岸)와 방향상의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반야바라밀이 아직도 '피안'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데에 대해서 여래는 피안에 회향하는 방향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간해(世間解)·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 등은 모두가 중생교화의 활동을 뜻하는 표현들이다. 여래십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가 어렴풋이나마 느껴질 것이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부처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전 인도 카필라(Kapila)성 정반왕(Suddhodana)의 태자로 태어나 출가수도하여 깨달음을 이룬 '고타마 붇다(Gotama Buddha)', 또는 '사캬무니(Sakyamuni)'를 가리킨다. 그러나 누구든 보살의 길을 걸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므로, 부처는 석존 한 사람에 한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처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에도 광대한 우주의 어느 세계에서 부처가 설법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아함경에는 과거칠불과 미래불로서의 미륵불이 서술되고, 불전문학에는 훨씬 더 많은 수의 과거불이 등장하고 있다. 대승경전에 이르면 부처님의 수는 '시방삼세무량제불(十方三世無量諸佛)'로 확대되어 연 등·미타·아촉·약사 등을 포함한 많은 부처가 자세하게 소개된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옛날 무량겁 전에 연등불의 수기를 받아 현겁(賢劫)의 사바세계(sahaloka)에 성불한 부처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부처들은 신(God)이 아닌 인간이지만, 무량한 겁에 선업을 닦고 번뇌를 멸하고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깨달은 것이므로, 범부중생이나 다른 종교사상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지덕을 갖추고 있다. 부처만이 갖는 그러한 능력을 경전은 여러 가지로 설해주 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astadasaavenika-buddha-dharma)이다. '불공법(不共法)'이라는 말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이나 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 특유의 법이란 뜻으로서,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삼염주(三念住)· 대비(大悲)의 18을 포함한다.

 

부처의 십력(十力,dasa-bala)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힘을 말한다.

ⓐ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변별하는 지력

ⓑ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력

ⓒ 선정해탈지력(禪定解脫智力) ---사선(四禪)·팔해탈(八解脫)·삼삼매(三三昧)·팔등지(八等持) 등을 여실히 아는 지력

ⓓ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 중생 근기의 고하 우열을 여실히 아는 지력

ⓔ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경향을 여실히 아는 지력

ⓕ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력

ⓖ 편취행지력(遍趣行智力) --- 어떤 수행에 의해 어떤 도에 나가는 가를 여실히 아는 지력

ⓗ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 중생의 숙명을 여실히 아는 지력(宿命通)

ⓘ 사생지력(死生智力) ---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력(天眼通)

ⓙ 누진지력(漏盡智力) --- 일체의 번뇌(漏)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력(漏盡通)

 

다시 말하면 부처는 중생심의 갖가지 번뇌·성향·수행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지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부처에게는 이렇게 十力이 있으므로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데, 그러한 무소외(無所畏)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catur-vaisaradya)가 있다.

ⓐ 일체지무소외(一切智無所畏) --- 일체지자로서의 자신(自信)

ⓑ 누진무소외(漏盡無所畏) --- 일체의 번뇌(漏)를 극복하였다는 自信

ⓒ 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 --- 수행에 장애되는 길을 설할 수 있는 자신

ⓓ 설진고도무소외(說盡苦道無所畏) ---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설할 수 있는 자신

 

석존이 사문·바라문·천신·마·인간 등의 가운데서 능히 법륜을 굴리고 사자후를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무소외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중생을 자식처럼 여기고 구제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모든 중생이 반드시 그러한 뜻에 응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신수(信受)하지 않을 때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비방·가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부처는 정염정지(正念正知)에 머물러 흔들림이 없으니, 이것을 염주(念住)라고 하고 다음과 같은 셋(tri-smrtyupasthana)을 든다.

 

ⓐ 제일염주(第一念住) --- 중생이 부처를 신봉하여도 희심(喜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뭄

ⓑ 제이염주(第二念住) --- 중생이 부처를 불신하여도 우심(憂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뭄

ⓒ 제삼염주(第三念住) --- 중생이 부처를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희심과 우심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뭄.

 

부처의 대비(大悲,maha-karuna)에 대해서는 뒤에 3항에서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부처의 지력과 자신·심정 등의 비범한 속성을 표현하는 이러한 정신적인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외에 다시 부처의 육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그 수승함을 표현하는 삼십이상(三十二相)·팔십종호(八十種好) 등의 설이 있다. 대승경전에 이르면 부처의 그러한 위력은 더욱 강조되어 현대 학자들이 '부처의 신격화'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한다. 아미타불은 그렇게 신격화된 부처의 하나로 평해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는 결코 신이 아니다. 깨달음을 이룬 인간인 것이다. 깨달음은 인간에게 그렇게 위대한 힘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

 

대자대비(大慈大悲)

 

불교는 제법(諸法)을 있는 그대로(如實히) 알아내는 지혜(般若)를 매우 존중한다. 그러한 지혜가 있음으로써 올바른 종교적 행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믿음(信)만 있고 앎(解)이 없으면 미신에 흐르기 쉽고, 앎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오만하게 되기 쉽다.<화엄경> 불교도 종교인만큼 믿음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한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함께 이지(理智)의 중요성을 또한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는 매우 지(智)적인 종교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정의(情意)적인 면을 전혀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지(智)를 강조하면 정(情)은 약해진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약해지는 정은 무지에서 발생했던 이기적인 정이었지, 순수 하고 뜨거운 인정은 아니다. 순수하고 뜨거운 인정은 오히려 이기적인 아집(情)이 사라질 때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솟아오를 수가 있다. 그러기에 반야경은 "보살이 공(空)을 익힐 때 능히 대자대비 가 발생하나니 범계심(犯戒心)· 진심(瞋心)· 해태심(懈怠心)· 난심(亂心)· 무지심(無智心)이 생하지 않기 때문이다."<대품반야 권1>고 밝혀 주고 있다.

 

지혜를 바탕으로 발생하는 이러한 인간애를 불교에서는 자비(慈悲,maitrikaruna)라고 한다. 자(慈,maitri) 는 어원적으로 '우인(友人,mitra)'이라는 말에서 파생한 말로, 진실한 우정·순수한 친애의 마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 비(悲,karuna)는 애련·동정 등의 뜻으로써 보통 쓰이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자비는 '남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慈, 與樂) 불이익과 고통을 덜어 주려는(悲, 拔苦)' 인간애를 의미한다.

 

자비는 아함에서부터 강조되고 있다. 그 곳에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는 교설이 있는데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네 마음을 일체 중생에 대해서 무한히 가지라는 것이다. 자(慈)와 비(悲)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희(喜)는 남이 즐거움을 얻었을 때 그것을 흔연히 기뻐해 주는 것이며 사(捨)는 다른 사람에게 애증원친(愛憎怨親)의 마음을 갖지 않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 이르면 지혜의 심화와 함께 자비도 더욱 강열해진다. 보살이 무상의 깨달음을 구함은 아라한이 열반을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보살의 서원(誓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제5절 참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깨달음을 구하는 일을 보류하고서라도 중생제도에 나아간다. 육바라밀의 최초에 보시바라밀이 있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상의 깨달음을 이룬 부처에게 있어서 자비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깨달음을 이루었으니, 그의 모든 공덕은 오로지 중생에게 회향될 수밖에 없다. 법화경의 이대주제는 불국토 건설과 중생교화라는 말을 하였다. 이것은 부처의 그러한 자비의 실천이라고 볼 수가 있다. "너희는 모두 나의 아들이요 나는 너희 아버지이니, 너희는 무수한 겁에 한없는 괴로움을 겪고 있노라. 내 너희를 모두 건져 삼계를 벗어나게 하리라."<법화경 권2>

 

이러한 부처의 인간애를 우리는 고타마 붓다에게서 볼 수가 있다. 깨달음을 이룬 뒤 그는 중생 속에 몸을 던져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간 한시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 속에서 눈을 뜨고 감사하였는가. 그러나 그를 비방하고 가해하려는 자도 없지 않았다. 그의 사촌 동생 데바닷타(Devadatta)를 예로 들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사람도 용서하고 성불의 기(記)까지 주고 있는 것이다.<법화경 권4>

 

그런데 불· 보살이 이렇게 무한한 자비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고통 받고 있는 형제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는 비록 시름과 괴로움을 여이었다고 하더라도, 무수한 중생들이 죽어가는 저 슬픈 울음을 어찌 듣고만 있겠는가.

"지자(智者)는 일체 중생이 생사의 고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건지고자 하므로 슬픔을 일으킨다. 사도(邪道)에 헤매는데도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오욕의 진 수렁에 빠져 나올 수 없으면서도 방일(放逸)하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재물과 처자에 얽매여 빠져 나오지 못함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또 중생들이 악업을 짓고 고계(苦界)를 받으면서도 탐착(耽着)을 하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오욕을 갈구함이 마치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음을 보기에 슬픔을 일으키고, 행복을 구하면서도 그 원인을 닦지 않고, 괴로움을 싫어하면서도 애써 그 원인을 닦으며, 천상에 나고자 하면서도 계를 지키지 않기에 슬픔을 일으키고, 또 중생들이 '나(我)'가 없는 데에서 '나'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슬픔을 일으키고, 생(生)·노(老)·사(死)를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그 업을 짓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지혜의 등불을 밝힐 줄 모르니 슬픔을 일으키고, 번뇌의 불길에 타면서도 삼매의 물을 구할 줄을 모르니 슬픔을 일으키고, 오욕의 즐거움 때문에 무량한 악을 지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오욕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이것을 구해 쉴 줄을 모름이 마치 배고픈 자가 독이 든 밥을 먹는 것과 같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또 중생들이 부처의 출세(出世)를 만나 감로(甘露)의 법을 듣고도 수지(受持)할 줄 모르니 슬픔을 일으키고, 나쁜 벗을 믿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에 슬픔을 일으키고,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눠줄 줄 모름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장사를 하는 것을 볼 때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 슬픔을 일으키고, 부모· 형제· 처자· 노비· 권속·종실들이 서로 사랑할 줄을 모름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우바새계경>

 

불· 보살의 자비는 참으로 크고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괴로움을 여이고 깨달음을 열어 남 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람에게 그 큰 사랑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출처 : 호암산방
글쓴이 : 관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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