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다. 언제부터인가 명절이면 차례 지내는 가정의 모습처럼 당연한 듯 다뤄지는 것이 바로 '서러운 또는 쓸쓸한' 한가위를 보내는 이들의 애린 마음이다. 모두가 모처럼 가족의 품에서 거친 세상살이의 피로를 녹이는 시간, 그들은 40m 고공의 농성장에서, 얼마 전까지 자신이 일하던 일터로 명절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 앞에서, 텅 빈 서울 여의도 한 가운데의 농성장에서 명절을 맞는다.
간혹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이들도 서럽기는 마찬가지다. 스스로 아무리 "내 얘기가 정당하다" 다짐해 보아도, 짧게는 300일에서 길게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리에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 가족과 친척들의 시선에는 고개가 자꾸 수그러든다.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이면 빠지지 않고 모든
언론들이 그런 그들의 삶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것도 그만큼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남 밀양의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계삼 선생님이 지난 8월 한 달을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담고 살았다면서 "생각해보면 참 뒤늦은 자각"이라고 고백한 것도 그래서다. 이계삼 선생님은 여름 방학을 이용해 밀양에서 서울을 수차례 오가며 그들을 만났다.
기륭전자, GM대우, 이랜드, 코스콤 등 "어느 날엔가 다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울고 있었을 한 아이"였을 그가 만난 이들은 어느덧 자라 "거친 세상의 비를 맞으며 울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만남을 적은 글이 <녹색평론> 9월호에 실렸다. 이계삼 선생님과 <녹색평론>의 동의를 얻어 그 글을 전제한다.
비록 불경기여도 마음만은 풍성하기를 모두가 바라는 한가위에도 그들은 그 곳에 있다. 이 글이 한가위를 즐기는 독자들에게 작은 '불편함'을 가져다주기를 바래본다. <편집자>
"니는 경주대 왕릉벌초학과나 가라" "울릉대 오징어심리학과도 몬 갈 기"
"니는 경주대 왕릉벌초학과나 가라, 고마~~!" 한 녀석이 대입 수시모집 안내 책자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친구의 뒤통수를 탁구 라켓으로 드라이브 걸듯 쎄려 올린다. 눈에 불꽃이 번쩍 튄 녀석은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울릉대 오징어심리학과도 몬 갈 기(것이)"라며 반격하지만 그 놈은 벌써 멀찌감치 내뺀 뒤다. 수시모집 원서 접수를 앞둔 우리 반 쉬는 시간 풍경이다.
대학 정원이 수험생 숫자보다 더 많은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대학은 누구든 갈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다. 등록금에 취업에 이런저런 거 따져보면 마땅히 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런 대학 학과 놀이가 유행하는지도 모르겠다. 순창대 고추장제조학과, 제주대 해녀잠수복디자인학과, 가야대 팔만대장경오타색출학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리즈를 주워섬기며 아이들은 낄낄대며 웃는다.
이런 장난질 뒤에 서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장사판으로, 취업학원으로 변해버린 오늘날 대학에 대한 야유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에 대한 '로망'이 깨져버린 데 대한 비애이기도 하다. 입학 정원 채우기에 급급한 신생 지방 사립대학들은 '취업 발전소', '공무원 사관학교' 따위의 노골적인 구호를 내건다. 제법 여유가 있는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들은 '글로벌 리더' '퍼스트&베스트' 따위의 헛폼이 잔뜩 들어간 추상적인 구호를 내건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 험난한 입시를 통과해서 기백만원씩의 등록금을 8학기동안 대가며 학자금 대출에, 아르바이트에, 토익 토플에, 어학연수까지 거치며 신용불량자 직전 수준까지 떨어져 겨우 사회 문턱으로 나와도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은 청년실업, 비정규직, 이런 살벌한 현실임을 모르지 않는다.
지난 8월 한 달 동안 나는 '비정규직' 네 글자를 담고 살았다. 술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건, 지금도 이어지는 우리 지역 촛불집회에서건, 그리고 보충수업을 하던 고3 교실에서 틈틈이 아이들에게건, 비정규직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면 참 뒤늦은 자각이었고, 그것은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읽은 두 개의 기사가 이끌어 주었다.
첫 번째 계기는 촛불항쟁이 한창이던 지난 6월 24일 파업 1주년을 맞은 이랜드 일반노조 김경욱 위원장의 인터뷰 기사였다. 그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광화문 뒤덮은 촛불 물결 보며 절망했다." 촛불의 열기에 흠뻑 젖어있던 나는 이 제목이 거북했지만 결국 끝까지 읽었다. 김경욱 위원장의 이야기는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전기가 끊겨 아이들이 촛불을 켜놓고 공부한다고 했다. 엄마한테 외려 그 아이들이 '엄마, 텔레비전도 안 나오고 컴퓨터도 안 되니깐 집중이 잘 돼'라고 했다고, 촛불을 보면 그 얘기가 떠올라 차마 촛불을 켤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찔린 듯 마음에 남았다.
그 기사로부터 나는 조금씩 촛불의 그늘을 생각했고, 촛불의 그늘로써 촛불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촛불 이후 많은 이들이 KBS와 정연주 사장으로 옮겨갈 때, 나는 비정규직으로 옮겨갔다. 때마침 <경향신문>에서 '한국인 절반, 이렇게 산다-비정규직 800만 시대'라는 훌륭한 연재를 시작했고, 그 기사들을 공부하듯 밑줄 치며 읽었다.
그리고 여름방학 보충수업이 한창이던 지난 8월5일 다시 <프레시안>에서 장기 파업 중인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코스콤, 이랜드, KTX·새마을호 여승무원들에 대한 정신건강검진 결과를 다룬 한 기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 기사(☞바로 보기)는 보도 기사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학적 충격을 담고 있었다. 300일에서 900일까지, 거리에서 단식과 노숙, 고공 농성, 철거와 폭력으로 버텨온 그들의 나날들이 나에게로 육박해 왔던 것이다.
"3년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그런데 안 됐다. 될 듯 될 듯 하다가 안 됐다. 또 하자고 하면 조합원들 반응은 그거 해서 정말 되는 거야, 안 되면? …… 울고 싶어도 마땅히 울 공간도 없다. 자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면 울고, 샤워하다가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KTX 오미선 지부장의 증언이었다. 문득, 2년 전 한여름엔가 서울역에 내렸을 때 단식 18일째를 맞고 있던 이들의 농성장을 잠시 들렀던 기억이 났다. 한증막 같은 천막 안에서 링거를 꽂고 누워 있던 젊은 여성들, 어떤 이는 누워서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을 읽고 있었고, 다른 어떤 이는 <한국 사회의 이해>인가 하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감동을 간직하고 후원금 얼마를 전해주고 떠났지만, 그들은 그렇게 지난 2년 내내 거리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없는 녹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기사 내용.
"'조합원들 가운데 경제적 문제로 인해 이혼을 당하거나 아내가 갑자기 집을 나간 사람도 많다. 애초에 비정규직이었으니 저축해 놓은 돈도 별로 없었지만,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20평 아파트를 10평 남짓으로 줄여가면서 울었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이렇게 말하며 코스콤 정인열 부지부장은 울컥 쏟아지는 눈물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일에 주의 집중할 때 언제나 엄습하곤 하던 좌절감, 막막함, 이런 익숙한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나는 교무실을 나와 복도를 오락가락하며 보충수업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35~6도의 폭염, 그 불덩이 같은 기운을 에어컨 한대가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교실 속 아이들은 허여멀건하니 핏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 고된 나날들을 버텨내는 저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또한 비정규직이 아닌가. 십년 뒤, 저들 중에 정규직으로 살아남을 아이는 몇 명이 될 것인가.
그날 나는 오후 내내 '기륭전자, 코스콤, 이랜드, KTX 비정규직' 이런 단어들을 검색창에 넣어 엔터키를 두드려 보았다. 각각 수백개씩의 기사와 펌글, 동영상들이 쏟아졌다. 부끄럽지만 제대로 읽은 게 없었다. 세상의 아픔을 응시한다던 내 시선은 그러므로 얼마나 편의적인 것이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투쟁 현장들에 직접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어줍지는 않겠지만 무언가 써 보고 싶었다. 보충 수업 일정이 끝나고 나는 서울로 가는 보따리를 쌌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서울에서 사흘 동안 기륭전자, GM대우, 이랜드, KTX·새마을호,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났고, 이 글은 그 만남에 대한 기록이다.
기륭전자와의 만남
"강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삶에 희망이 없어서 싸우는 거예요"
8월 16일 서울에 도착한 나는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기륭전자로 갔다. 나는 가리봉동이라는 옛 이름이 정겨운데, 가리봉동은 어느 날 가산디지털단지가 되었다.
내가 갔던 그 날은 김소연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이 67일간의 단식 농성 끝에 병원으로 실려 간 뒤끝이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널찍한 골목길을 조금 따라가니 색색의 투쟁리본이 매달린 공장이 눈에 들어온다. 인터넷 기사에서 지나치듯 봤던 바로 그 기륭전자 공장이다.
네비게이션, 위성 라디오를 만들어 수출하는 유망 중소기업, 한해 220억 흑자를 내면서 파견직 노동자들에게는 법정 최저임금보다 10원 더 많은 64만1850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임금을 지급했던 회사, 그래서 밤 10시, 11시 잔업에 휴일 특근으로 기절 직전까지 일해야 100만 원 남짓한 월급을 주던 회사, 문자 메시지를 써 본 적 없는 아주머니에게 문자로 해고를 통보해서 영문도 모르고 출근한 아주머니가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바로 그 회사였다. 얼마 전까지 단식장으로 쓰던 경비실 옥상에 올라 본다. 철조망, 관(棺), 만장, 캄캄한 상징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대여섯명의 조합원들과 금속노조 관계자들 틈에 섞여 인근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1100일 동안의 투쟁 기금은 어떻게 조달했는지 궁금해졌다. 금속노조로부터 생활보조비를 지급받은 1년 말고는 한 달에 5만 원부터 30만 원까지, 설날 추석 재정사업에 일일주점, CMS 모금으로 조달했다고 한다.
저녁이 되어 공장 앞 골목길에서 촛불문화제가 시작된다. 줄지어 앉은 이는 150여 명 남짓. 그래도 많은 숫자라고 한다. 단체 깃발에 속해 있지 않은 이른바 '촛불 시민'들이 훨씬 많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올라 온 김용우 비정규직 노동자가 말한다. "곰은 100일 만에 쑥하고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됐다는데, 1100일동안 투쟁했던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그 동안 신이 됐겠다"며 너스레를 떠니 사람들이 웃는다.
연설과 문화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이 낯선 골목길을 바라본다. 의식 속에서 아주 오래전에 지워버린 장면이 펼쳐져 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잿빛의 공장 골목길과 이곳에서 24시간 내내 불을 켜 놓은 공장들과 그 속에 갇힌 인간의 노동을, '계급'이라는 단어를 아주 오랫동안 지우고 살았다는 깨달음이 인다. '골리앗 투쟁'으로 상징되는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대한 신화가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막막한 공장 지대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삶은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동안의 나에게는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최은미·윤종희 조합원과 정문 앞 농성장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은미 씨는 기륭에 올 때 스물 두 살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 나와서 세 번 직장을 구했는데, 세 번 다 파견직이었다고 했다. 파견업체에서 봉고차를 타고 처음으로 라인에 투입됐는데, 하루 동안 아무도 자기한테 말을 걸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몇 달 뒤 휴식 시간 동안 노조 결성을 위한 집회를 했는데, 10분 만에 200명이 넘게 모여 조합원 가입원서를 썼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첫날에는 왜 그랬을까. 관리자한테 반말했다고 해고 되고, 끼리끼리 잡담했다고 해고 되고, 문자 메시지 한통으로 언제 잘릴지 모르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륭전자 파견직 노동자들끼리의 인간관계라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노동조합 결성은 지옥을 피와 살이 통하는 인간의 세상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싸움이 이제 1100일을 향해 간다.
"사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정말 많이 했어요. 연말까지 하고 그만두자. 그때 가면 상황 바뀌어 있고, 한 달만, 두 달만, 하다가 지금까지 온 거에요. 투쟁 사업장 생겼다 없어지는 거 많이 봤어요. 사실, 우리는 처음 하니깐 가능했던 거예요. 노동자들 투쟁은 이길 때까지 싸우면 승리한다고 하는데, 다 뻥이구요, 대부분 져요. 이겨도 꺾이는 거 많이 봤어요. 그런 거에 비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온 거는요, 사람들이 밝아요, 일단. 최악의 상황에서도 웃고 장난치고, 점거 농성을 했는데, 공권력이 들어오고 곧 잡혀가는 상황이었는데, 안에서 춤추고 놀았어요. 밖에서 온 분들이 장기 투쟁하는 데가 왜 이렇게 밝냐고 그러셔요."
그러나,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의 '강함', 그들의 '밝음'은 예외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우리나라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 3%만이 노조에 가입돼 있다. 그 3% 중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싸우고 있는 데가 바로 이곳 기륭전자다. 1100일이 넘는 시간동안 고공 농성, 용역 깡패들의 폭력, 삭발, 단식, 구속, 수백차례의 집회, 협상, 결렬, 캄캄한 단어들만으로 채색되는 나날들을 거쳐 오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이 열 명의 조합원들을 어떻게 '강하다'는 말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의구심을 이해한 듯 옆에 있던 윤종희 씨가 덧붙인다.
"강해서 투쟁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삶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희망이 단절된 삶이에요. 죽음의 삶이죠.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예보다 못한 일회용품이에요. 기륭 안에서의 과정이, 정말 '사람이 살아있다'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소외되고, 착취당하고, 일회용품 취급받는 삶을 살았고….
천일을 버틴 것은 실은 더 이상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다른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아서 떠났을 거예요. 중소, 영세, 여성 사업장, 어딜 가도 비정규직이 반복되고, 늘 한달, 3개월, 6개월 일자리를 구걸하면서 노예로 소모품으로 살아야 하고…. 끝장내고 싶었어요. 어차피 다른 데로 가도 결국 이런 현실일 거라는 걸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데, 다른 곳에 가서 또 못 견뎌서 투쟁해야 할 거면 여기서 살아남아야겠다, 여기서 희망을 만들어가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싸우는 거예요."
화장기 없는 갸름한 맨 얼굴의 윤종희 씨는 저렇게 말했다. 곁에 열 살배기쯤 돼 보이는 꼬마아이가 얼른 집에 가자고 보챈다. 아이를 잠시 쳐다보았다. 천일동안 저 아이는 어떻게 지나온 것일까. 그러나 더 긴 이야기는 묻지 않으려 한다.
GM대우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을 만나다
"그래서 하는 고공농성…100일을 해도 주어지는 것은…"
둘째 날, GM대우 부평 공장 앞에서 290일째 농성중인 GM대우 비정규직 해고자들의 천막으로 찾아간다. 일요일 아침인데, 천막은 벌써 후텁지근하다. 간밤까지 수련회 뒤풀이를 한다고 늦게 잠들었던 모양인지, 두 명의 남성 노동자가 부스스한 얼굴로 맞는다. 키가 훤칠하니 큰 호남형 인상의 부지회장 황호인 씨와 몹시 순한 인상의 남성노동자 한 명이 천막을 지키고 있다.
GM대우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은 이른바 100일 고공농성으로 유명했다. 부평구청 철탑 위에서 먹고 자면서 그 추운 겨울날 100일을 버텼다. "새들은 가장 안전한 공중에 집을 짓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가장 위험한 공중에 집을 짓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GM대우는 구조조정에 성공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도 하기 싫다. 2001년 그 악명 높은 구조조정 당시 부평 대우자동차 정문 앞에서 사측이 고용한 깡패들, 경찰들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때리고 짓밟았는지는 나뿐 아니라 온 국민이 텔레비전으로 지켜보았다. 그래서 대통령이 두 사람이나 공장을 다녀가며 성공사례로 추켜세워도, 미국인 CEO가 한국 노동자들과 환하게 덩더쿵하는 텔레비전 광고를 해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황호인 씨는 이렇게 말한다.
"GM이 대우 인수하면서 엄청 혜택을 받았어요. 법인세, 특소세 납부 유예 칠년이나 받고. 그 덕에 정상화 되면서 매년 30% 이상 성장을 해 왔는데 그러면서 작년부터 또 구조조정 시작했어요. 라인 재배치하고, 노동 강도 엄청 높아지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숨도 못 쉬게 탄압하고.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전혀 달라요."
그러면서 황호인 씨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한다. 같은 일이라도 정규직이 좀 더 편한 곳에서 일하고, 비정규직은 더 어려운 곳에서 일을 한다. 그런데 임금은 정규직의 딱 절반 수준. 무엇보다 투쟁하는 비정규직에게는 무시무시한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구사대의 폭력이 거의 치외 법권 수준이에요. 우리가 초기에 조립 공장 사거리 식당에서 선전전을 했어요. 원청 관리직, 하청 관리직들이 몰려와서 카메라 빼앗아서 부수고, 주먹으로 때리고, 노조 사무실 앞에까지 쫓아와서 때리고, 그래서 고막 파열되고 턱뼈 부러지고 안구 파열되고…. 그런데 걔네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형사 입건도 안 돼요. 회사 들어가서 플래카드 붙이면 와서 뜯고 또 때리고."
그래도 그들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한다. 이렇게 초장에 짓밟아 놓으니 현장에서는 어떤 사람들도 비정규직 관련해서 말을 못 꺼내게 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농성장 근처에 감시카메라 달아 놓고, 용변이 급해서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면 화장실도 못쓰게 가로막는다 한다. 이 말끝에 황호인 씨는 쓸쓸하게 되뇌인다. 그의 또박또박한 말투가 완연히 흐려진다.
"그래서 고공농성 100일씩 하는 거예요. 억울한 거 알릴 길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도 주어지는 건 아주 기본적인 것들뿐이에요. 근본적인 것은 해결이 안 돼요. 바뀌는 건 없고…."
신영복 선생의 강연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알래스카의 개썰매를 끄는 이는 병들고약한 개를 가까운 쪽에 매어 놓고 그놈에게만 집중적으로 채찍을 때린다고 한다. 그래서 그 비명소리에 질린 나머지 개들이 미친 듯 질주해서 속도를 낸다고 한다.
정규직도 알려진 것처럼 그리 고액연봉자는 아니란다. 12시간 맞교대에 잔업 철야, 휴일 특근까지 해야 어느 정도를 받아간다고 한다. GM대우가 언제 자본 철수를 할지 모르니 정규직들은 있는 동안에 잔업 특근 많이 해서 일단 벌어 놓고 보자는 의식이란다.
이런 생각이 든다. 몇 갈래로 차별해서 나눠주던 것을 정규직으로 똑같이 나눠준다 한들, 세계 경제의 위태로운 흐름 앞에서는 모두가 불안할 뿐이다. 최대한의 상식을 갖춘 인간적인 자본이 있다고 한들, 자본은 자본인 것이다. 며칠 전 다녀온 홍성 풀무학교 전공부가 생각난다. 산업 노예로부터 독립적 소농으로의 귀환.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지금 이곳이 너무 가파르고, 길은 멀다.
인사를 나누고 농성 천막을 나온다. 이 후텁하고 찌는 듯한 열기를 어떻게 견뎠을까. 이제 곧 1년이 된다. 찬바람이 불면 지내기가 좀 낫겠지. 나는 오늘 만난 저 두 분의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과의 만남
"솔직히 기대는 없어요. 마음으로는 하는데 큰 기대는 안 해요"
다시 서울로 간다. 삼화고속을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삼화고속 운전기사 아저씨, 월드컵 경기장 근처를 오가는 젊은이들, 잠시 들렀던 뚜레주르 빵집 일꾼들, 저들이 정규직일까 비정규직일까를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단순한 잣대로 나눠 보는 경험을 한다.
월드컵 경기장 입구 광장에 있는 농성 천막에 들어가 인사를 한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당번 두 분이 앉아 반갑게 맞아 준다. 작년 홈에버 상암점 점거가 생각난다. 수 백 명이 들어가 있는 농성장 입구를 철판으로 용접해버리던 경찰을 보았다. 계산원들의 립스틱 색깔까지 제가 좋아하던 빨간색으로 통일시킨 박성수라는 자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규직들의 '기도 모임'들, "우리 매장 1일 매출 4억을 올릴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적혀있는 기도 제목들.
아무래도 분위기가 서먹해서 이랜드 노동자들의 지난 1년간의 투쟁 기록과 인터뷰들을 모아 펴낸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권성현·김순천·진재, 후마니타스 펴냄, 이하 '우·소·꿈') 이야기를 했다. 한 분이 그 책에 사진과 인터뷰가 나온다며 표정이 단박에 밝아진다. 그들은 바쁠 때는 대여섯 시간 동안 화장실 한 번 못가서 방광염에 걸리도록 일을 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봉투 필요하십니까? 포인트 카드 있으십니까? 고객님, 얼마입니다. 얼마 받았습니다. 거스름돈은 여기 있습니다. 고객님,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이 인사말을 하나라도 빠뜨렸다가 손님 속에 '암약중인' 모니터링 요원한데 걸리면 지하 공간에 30명씩 가둬진 채 친절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버티면서도 정규직 전환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비정규직 보호법이 발효되기 직전 돌연 집단 해고라는 된서리를 맞았다. 그렇게 시작한 파업이었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파업은 200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비정규직 보호법의 허울과 서비스업 여성 노동자들의 저임금 잔혹 노동의 실태를 충분히 알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변한 건 없다. 그들의 '소박한 꿈'의 댓가는 참혹했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한 분은 이렇게 말한다.
"초등학생 딸이 있는데, 2학년이에요. 어느 날은 여기로 나오는 데 뒤에 대고 '엄마, 그냥 이마트 가서 일해.' 그러는 거예요. 그때 정말 헷갈렸어요. 비정규직 나쁜 거니깐 우리 애들한테는 절대로 물려주기 싫어서, 애들 위해서 한다고 하는 건데, 이게 뭔가 싶어서요. 신랑은 포기했어요. (웃음) 신랑은 처음에는 말을 안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그만해라.' 딱 한마디 하는데, 이거 더 하다가는 난리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신랑한테는 한 달간 여기 안 나간다고 하고 나왔는데, 그 사이 촛불의 영향을 받아선지 여기 나오는 거 알면서도 지금은 하지 말라고는 안 해요. 그래서, 촛불은 고마워하고 있어요."
사실이 그렇다. 정신건강검진 결과가 말해주듯, 그들은 경제 문제로부터 대인 관계, 가족 관계까지 지금 모든 게 뒤틀려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집안에서 엄마, 마누라, 며느리들이다. 전기가 끊기고 급식비를 못 내고, 오랫동안 청소를 못해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온다고 남편에게 욕먹고 흐느껴 울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1년간을 버텨온 것이다.
그들은 운동권 시각에서 볼 때는 정말 감격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감격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지친 마음들은 한 시간 남짓 이어지는 대화에서 완연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를 이야기 하다 보니 결국 어제 다녀온 기륭전자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 분들 무서워요. (웃음) 근데요, 거기 투쟁하는 거 보면 솔직히 기운 빠져요. 저렇게까지 했는데 안 되는 걸,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무서워져요. 막말로, 마트가 여기(홈에버) 밖에 없어서, 갈 데가 없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가 우리한테 잘해준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밖에 나가면 80만 원 받는 아줌마들의 투쟁 어쩌고 이야기는 하지만 솔직히 자랑은 아니거든요."
아주 솔직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분들은 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 것일까. 이야기들은 계속 이어진다. 어제 만난 기륭전자 분들과는 다른 차원의, 그러나 또한 솔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가 지금 그만두고 복귀해도 정규직이 될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 안 해요. 나라에서 2년 이상 비정규직 시켰으면 정규직 전환하라는 것도 우리하고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도 알아요. 우리는 정말 나름대로 했는데,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안 해주니깐 반발심이 생기는 거예요. 이대로 물러서기엔 지금까지 고생한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다른 유통업체가 우리 결과를 보고 있다네요. 우리가 관심을 못 받았으면 일찍 해결됐을 수도 있었어요. 선봉이다,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다, 이런 거 당사자한테는 좋은 게 아니잖아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좌절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박성수만의 몫인가, 아줌마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는 경찰, 구사대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 매장 점주들의 몫인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 명명백백한 일들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방관했던, 저들이 하고픈 대로 다 하도록 외면했던, 우리들 방관과 외면의 몫은 얼마나 될 것인가.
오늘 축구 경기가 있는 모양인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슬슬 늘어난다. 대화가 잠시 끊긴 사이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 끝에 쓸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솔직히, 기대는 없어요. 맘으로는 기대를 하는데, 큰 기대는 안 해요." 또 다시 침묵. 그렇다는 얘기다.
두 분 조합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랜드 농성장을 떠난다. 다른 약속을 위해 자리를 옮겨야할 시간이다. 택시를 타고 인사동으로 가는 길에 광화문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택시가 신호에 멈춰 광화문 입구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건국절' 행사를 치르고 난 뒤였을 것이다. 광화문 양 옆으로 엄청나게 커다란 무궁화 조형물이 붙어 있다. 잠시 비가 왔는지 무궁화는 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다. 그것은 수백개의 촉수를 뻗어내 순식간에 인간을 포박해 죽이는 식인(食人) 식물을 연상케 하는 기괴하고 역겨운 형상이다.
이틀간 투쟁 현장을 다니며 얻었던 분노, 슬픔이 폭발할 것처럼 뻗쳐오른다. 저 놈은 뭔가. 저 광화문의 초대형 무궁화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직한 상징이었다. 그것은 탐욕에 게걸 든 정권과 자본이 이끌어가는 나라, 피도 눈물도 없는 야만의 나라였다. 택시 의자에 기대어 나는 중얼거렸다. "이건 내 나라가 아니야."
KTX·새마을 농성장을 찾다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아요"
16일 밤부터 비가 왔다. 17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 있는 KTX 천막 농성장으로 간다. 바깥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장한 연설이 메아리치는데, 포장을 들치니 바닥에서 올라온 꿉꿉한 기운이 훅 하고 끼쳐 온다. 2년 만에 이 농성 천막에 다시 들어왔지만, 그 때의 열기는 어느새 이렇게 눅눅하게 젖어 있다. 오미선 지부장은 회의에 들어갔고,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KTX 여승무원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KTX가 개통될 때 굉장한 각광을 받았다. 136대 1의 경쟁률,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는 찬사까지. 그러나, 이들은 얼마 뒤 "비정규직 투쟁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900일이 흘렀다.
"승무원들은 누구나 최소 다섯 차례의 공권력 투입과 연행을 겪어야 했다.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 정리해고 및 계약해지,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 등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서 당하는 온갖 탄압을 잇따라 겪어야 했다. 이들의 생활이란 어떠했는가? 3년 가까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노동조합 회의실이나 사무실에서 사실상 노숙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다. 시멘트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노천 천막에서 소음과 먼지, 그리고 승무원 투쟁을 납득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매일처럼 시달렸다. 그러다가 다치고 병들어서 떠난 승무원들이 수 십 명에 이른다."(이철의 철도노조 비정규 조직국장의 글에서 인용).
서글프지만 그들의 투쟁 조건은 기륭전자를 비롯한 다른 장기투쟁 사업장에 비하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론의 높은 관심을 받았고, 철도노조가 꾸준히 이들을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철도공사로부터 너무 심하게 당했다. 철도공사는 누가 봐도 명백한 결과를 예상했던 노동부의 불법 파견 조사를 대단한 수완으로 뒤집어 합법 도급 판정으로 이끌어냈다. 채용 당시 삼백여명 승무원들 앞에서 정규직 직접 고용에 항공사 승무원 이상의 대우를 분명히 약속했던 철도공사는 홍익회에서 철도유통으로 다시 철도관광레저로 이들을 내돌렸고, 임금은 자꾸 줄어들었고, 노동조건은 갈수록 나빠졌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파업했다.
기나긴 투쟁 끝에 철도공사는 그들에게 역무 계약직안을 내놓았다. 그들은 고통스러웠지만 결국 이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타결 직전 철도공사는 돌연 이 약속을 파기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외주회사 카페 식당차 판매원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 900일 동안 그들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나, 철도공사는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에 시작한 거 맞구요, 그런데 왜 아직 이러고 있냐 물으면……. 결국 나가 봤자 어디를 가든 여기서처럼 할 수밖에 없을 거니깐, 내가 일하고픈 데서 고쳐서 똑바로 하자, 그 맘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렇지만 이런 일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아요. 몇 번의 연행을 각오해야 하는지, 얼마나 힘들게 내부와 싸워야 할지 눈에 보이니깐.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이마저 잘못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회의적으로 될 것 같아요. 지금껏 버텨왔으니 이 정도면 이겼다고 보자, 마무리를 잘 짓자, 서로 미워하지 말고….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하고 나중에 이 투쟁을 함께 추억했을 때, 힘든 기억보다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래요. 그동안 내부적으로도 참 힘들었어요. 제게 작은 목표가 있다면, 사람이라도 얻고 끝내는 투쟁이 되었으면 하는 거예요."
고마운 이야기다. 이 사회는 부푼 기대를 안고 첫발을 내딛은 그들을 있는 대로 할퀴고 내팽개쳤지만, 그들은 자신을 향한 최대한의 긍정의 잠언을 길어 올린다.
'마무리'라는 말의 의미를 이 글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서울역 플랫폼 근처에 있는 조명탑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이제 '마지막'이라고,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기차가 지나다닐 때마다 조명탑이 부르르 흔들린다고 한다. 부디 이 투쟁이 승리하기를, 시민들이 그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주기를, 철도공사가 부디 단 한 번만이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도한다.
마지막 방문지 코스콤
"노조 가입했더니 '농민의 난'이래요…이렇게 안 하면 벗어날 수가 없어서"
서울역에서 전철을 타고 여의도로 간다. MBC 사옥을 지나 여의도 증권거래소 앞 인도에 기다랗게 노숙 천막들이 늘어서 있다. 바로 코스콤 비정규직 농성장이다.
기다랗게 늘어선 천막 안에는 누워 신문을 보는 분도 있고,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는 분들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들 때문에 증권거래소 방문을 취소했다고 한다. 대통령 취임식 날에는 이들이 무슨 짓을 할까 싶어 농성장에서 이중 삼중으로 전경들을 둘러싸고 원천봉쇄했다고 한다.
코스콤은 증권거래소에 소속된 공기업으로 증권사들의 전산망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정규직 평균 연봉은 공공기관 평균 연봉 3위에 해당하는 9200여 만 원이지만, 비정규직은 그들의 1/4~1/5 수준이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그들도 이랜드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2007년 7월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에 앞서 사측은 이들 비정규 계약직 노동자들을 돌연 도급화했다. 국회 환노위도, 노동부도 모두 코스콤의 불법 파견, 위장 도급을 인정했고, 법원은 코스콤의 사용자성을 인정했다. 이들은 숱하게 용역 깡패, 전경들과 맞서야 했다. 그리고 정규직 노조가 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사측이 합의한 것을 두 번씩이나 뒤엎은 것은 '천민' 비정규직들이 똑같은 자리로 올라와 자신들과 임금 경쟁하는 것을 원치 않는 정규직 노조였다.
나무 그늘 아래 소파에 앉아 미리 연락한 증권노조 이민정 교선실장과 함께 한 남성 노동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이 분은 생활이 일단 너무 어렵다고 호소했다. 처가에서는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는 것도 그렇고, 2주에 한번 집에 다녀오니 아이들이 아빠를 몹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거기다가 정규직들로부터 받았던 크나큰 상처가 있다.
"얼마 전까지 웃으며 일하던 동료였는데, 경찰하고 용역한테 맞아서 패대기쳐져 있어도 외면해요. 제가 해고되기 전에 노조 가입했다 하니 팀장님 표정이 바뀌어요. '농민의 난'이라나, 그런 소리들을 해요. 아랫것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거죠. 평소 우리 비정규직들을 그렇게 생각해온 거겠죠. 우리가 법원에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 내고 법적으로 들어가니깐 위에서는 팀장, 과장, 대리를 조지니 자기들도 힘들기도 했겠죠.
우리가 회사 망하게 할 놈들이라고 해요. 이렇게 말하는 정규직들이 있어요. '나는 너희들 죽어도 싫다, 회사가 망하더라도 너희들하고는 같이 안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겨서 다시 저기로 들어가 본들, 어떻게 될지 더 걱정이 돼요. 내 바로 윗사람들이 다 정규직인데, 결재 하나라도 정규직한테 맡아야 하는데, 버틸 수 있을까 싶어져요."
옆에 있던 증권노조 이민정 실장이 거든다. 인터넷 게시판에 이런 글들이 올라온다고 한다. "머리 검은 것들은 거둬들이는 게 아니라더니", "랜(LAN) 선이나 깔던 것들이", "억울하면 시험 쳐서 정규직으로 들어오든지." 너네들은 천민, 우리는 귀족이라는 거다.
허위의식이 강하게 지배하는 곳에서 폭력은 횡행하기 마련이다. 코스콤이 당했던 폭력은 엄청났다. 법원에 제기한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에서 법원이 비정규직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법원이 인정해준 대로 당당한 코스콤 노동자로서 회사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결국 경찰이 막아섰고, 싸움이 났다. 전경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그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몸서리가 쳐진다.
몸싸움하다 안 다친 조합원이 없고,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법도 없고 뭣도 없다. 자기네들 불법 파견 저지른 것은 벌금 몇백만원 내면 끝이다(이건 기륭이든 어디든 다 마찬가지다).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사측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내용과 형식이 닮았다. 이야기는 무르익어가지만, 옮기기 씁쓸한 이야기가 더 많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은지'를 물었다. 마무리 질문이다.
"제가 직접 들은 얘기예요. 어느 아주머니 한분이 우리 천막 앞을 지나가는데 아이가 '이거 뭐야' 물었어요. 그 아주머니 대답이 '너도 공부 안 하면 저 사람들처럼 된다'는 거였어요. 이제는 공부 잘하면 정규직 되고, 못하면 비정규직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이제는 웬만하면 비정규직밖에 없어요.
저도 이 비정규직 굴레를 벗어나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그런데요, 자격증을 아무리 많이 딴들, 정규직보다 인정을 받는들, 이 굴레를 벗을 수가 없어요. 정규직을 안 시켜줘요. 만약에 다시 1년 전 상황으로 되돌아간다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할 거예요. 이렇게 투쟁하지 않으면 이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 올 때 음료수 한 박스를 사 들고 왔는데, 그걸 보더니 이 분은 "이거 우리 선물 주는 거예요?" 라며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8000원짜리 선물 세트 하나에 피어나는 그 웃음이 너무나 천진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이 분과도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여의도전철역으로 걸어오다가 나는 잠시 뒤돌아서서 이 기다란 농성 천막을 바라보았다. 이제 사흘간의 일정이 끝났다. 피로가 몰려오는데, 머릿속이 하얗다. 뜬금없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눈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내가 사흘간 만났던 이들, 그들은 어느 날엔가는 다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울고 있었을 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랐고, 이제는 이 거친 세상의 비를 맞으며 울고 서 있다. 이제는 나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내내 잤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다섯 군데 투쟁 사업장들의 사이트를 가끔 방문하고 관련 소식들을 찾아본다. 그들은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고, 당할 수 있는 모든 모욕과 폭력을 겪었다. 그러나,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답은 어디에 있을까? 멋있는 수사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강력한 보이콧, 강력한 총파업, 시민 사회의 지지와 엄호." 이것은 밥을 위한 투쟁이지만, 이 야만의 땅에서 인간됨을 옹호하는 투쟁이다.
이제 나는 수업 시간에 비정규직에 대해 가르친다. 내가 서울에서 듣고 겪었던 이야기들을 전한다. 전교조는 비정규직 투쟁과 함께 해야 한다. 비정규직은 아이들의 미래를 에워싸고 있는 가장 강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97%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침묵할 때, 3%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었고, 그 중에서도 고통을 견디지 못했던 이들이 총대를 맸다. 1100일부터 300일까지 지금도 지속되는 이들의 고통과 여전히 암담한 전망들에 우리들 모두는 조금씩의 책임들을 나눠 갖고 있다. 기륭전자, GM대우, 이랜드, KTX·새마을호, 그리고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 그들을 지금 우리가 지켜주지 못한다면, 어느 날 우리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서 허덕이는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계삼/밀양 밀성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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