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권에 불자들은 믿음에 대해서 비교적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대승불교 권에서는 관세음 보살, 지장보살, 문수 보살등의 보살님과 아미타불, 비로자나 불, 약사여래불 등등의 믿어야 할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초기불교의 관점에서는 믿음을 강조하는 불교가 어색합니다.
붓다는 “와서 믿으라”가 아니고 “와서 보라” 라고 가르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사성제에서 '성스러운 괴로움의 소멸의 길'(도성제)에도 믿음의 조항은 없습니다. 도성제는 중도라고 설명되는 8정도를 그 내용으로 하는데 8정도에서는 첫 번째로 믿음이 아닌 正見을 이야기 합니다.
바른 이해를 제일 먼저 강조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 믿음은 어느 때 말해지고 있을까요?
초기불교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삿다(saddha)라고 합니다.
이 삿다(saddha)라는 단어가 경전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존이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법을 설하면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여래에 믿음을 가진다"
“그는 여래가 설한 법과 계율에 믿음을 가졌다.” 라는 문장들에서 나타납니다.
이 문장들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인데 특이한 것은 그냥 부처님을 믿었다가 아니고 법을 듣고나서 여래에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법과 율에 믿음을 가졌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고 나서, 듣고 나서 말하는 사람(佛)과 말하는 내용(法)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수따니빠따의 정진경(Stn.432)에는 정진하고 있는 붓다의 곁에 마라가 다가와
“당신이 죽지 않고 살 확률은 천의 하나이다. 그대여 사는 것이 더 낳다”라고 말하며 붓다의 정진을 방해 합니다.
그때 붓다는 말합니다.
“내게는 믿음이 있고 정진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스스로 애쓰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삶을 이야기 하는가?”라고.
이 싯달타의 믿음은 무엇을 향한 믿음일까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부처님은 '알라라깔라마'와 '웃따까라마뿟따'라는 스승을 만나기는 했었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을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우빠까'라는 다른 종파의 수행자에게 당당하게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싯달타가 말하는 '믿음'은 스승에 대한 믿음은 아닙니다. 싯달타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자신이 가고 있는 수행의 길에 대한 자신감,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이라고 보아야 겠지요.이것이 오근(信, 精進, 念 定, 慧)에서 말해지는 믿음(信)의 의미입니다.
마지마니까야 95번경에서 부처님은 믿음을 근거없는 믿음(amūlikā saddhā)과 근거 있는 믿음’(mūlikā saddhā)이라는 2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근거 없는 믿음이란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에 부응해서 생기는 믿음이고, 근거 있는 믿음이란 보고 듣고 경험하고나서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기는 믿음입니다. 근거없는 믿음(amūlikā saddhā)이란 "마치 봉사들이 줄을 섰는데,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고 설명합니다.
밀린다 왕문경에서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묻자 나가세나 스님은
청정하게 하는 것(sampasādana), 뛰어들게 하는 것(sapakkhandana) 이라고 대답합니다.
삼빠사다나(sampasādana)는 청정하게, 밝게, 기쁘게 하기 등의 뜻이 있습니다.
삼빠칸다나(sampakkhandana)는 뛰어들기, 열망하기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어서 비유를 들어 청정하게 하는 것(sampasādana)을 설명하는데 마니주라는 구슬이 더러운 물을 청정하게 하는 능력이 있듯이 이처럼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청정하게 하여 다섯가지 장애를 없애 준다고 설명합니다.
뛰어들게 하는 것(sampakkhandana)이란 큰비가 와서 강물을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어느 힘센 사람이 먼저 건너간다면 뒤에 머뭇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서 강을 건너가는 것과같이 이 세상에서 해탈한 자가 나타날 때 그를 보고 나도 해탈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수행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자신의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 그리고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지도론>에서 믿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佛法大海, 信爲能入, 智爲能度.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써 들어가며, 지혜로써 그것을 건넌다."
여기서는 불교를 바다라고 비유했는데 믿음이 그 바다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들어간다는 표현은 밀린다왕문경에서 말하는 뛰어드는 것(sampakkhandana)과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많은 깨달은 사람들을 보고 “이것이 가능한 것이구나!” “나도 할 수있겠구나!”라는 자신감으로 뛰어들어 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수행체계를 말할때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순서로 말하며 다음과 같이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도(道)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다(信爲道元功德母)
갖가지 선한 법을 자라나게 하며(增長一切諸善法)
갖가지 의혹을 모두 소멸케 하여(除滅一切諸疑惑)
위없는 도를 열어 보인다.(示現開發無上道)" (현수보살품)
위 게송도 밀린다왕문경에서 설명하는 믿음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갖가지 선한 법을 자라나게 하며(增長一切諸善法) 갖가지 의혹을 모두 소멸케 한다(除滅一切諸疑惑)는 것은 마음이 청정해져서 다섯가지 장애가 없어진다는 의미이고, 위없는 도를 열어 보인다.(示現開發無上道)는 것은 “나도 할 수있겠구나!”라는 자신감으로 뛰어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깔라마경에서 부처님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그대 깔라마인들이여,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 깔라마인들이여, 스스로 `이들은 유익한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 의해 칭찬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이롭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대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로 받아들여 살도록 하라."(AN.Ⅰ.188)
지식, 전통, 소문, 경전, 추측, 원칙, 추리, 견해, 능력등을 무조건 믿지 말고 이해하고 경험해 보아서 `이들은 유익한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 의해 칭찬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이롭고 행복하게 된다'고 알게 되면 그때 '믿고 따르라'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전적인 의미에서 믿음은 불법승 삼보를 믿는 것 이라고 설명합니다.
붓다가 살아계셨을 때에는 붓다의 모습과 행동과 신통력과 가르침을 보고도 붓다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가 가신지 오래된 지금 우리가 붓다를 알 수 있는 통로는 오로지 그가 남긴 가르침 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법을 공부 함으로서만 가능합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상관없이 존재했던 법(진리)을 발견하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던 내용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 우리가 귀의하는 법입니다. 그 법을 보고 깨달으면 부처(불보)이고 그 법을 보고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분들은 제자들(승보)입니다. 불보와 승보도 결국 법보를 근본으로 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보에 대한 믿음도 결국은 법에 대한 이해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붓다는 왁깔리 존자를 병문안 가셔서
“왁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 하느냐?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SN.Ⅲ.12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스스로 내면이 청정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상태를 믿음이 생겼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법은 이해하는 것이고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법을 이해하여 가슴속에 기쁨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청정해 집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가르침대로 살기를 열망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에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그러한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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