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라마 경」(A3:65)
세상에는 서로 다른 여러 종교가 있고 서로 다른 여러 철학이 있고 서로 다른 여러 계율 규범이나 생활 규범이 있고 또 서로 다른 여러 관습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의 종교나 철학이나 규범이나 관습만을 평생 접하고 산다면 어쩌면 인간에게 큰 혼란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더 큰 미망에 빠져 지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미디어나 고도로 발달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영향 하에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종교, 다양한 철학, 다양한 규범, 다양한 관습을 접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러한 다양한 체계를 접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무엇일까? 무엇에 근거해서 어떤 체계는 받아들여야 하고 무엇에 바탕해서 어떤 체계는 거부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깔라마 경」이다. 이런 의미에서「셋의 모음」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경은 뭐라 해도「깔라마 경」일 것이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가르침을 설하자 그것을 접하여 혼란스러웠던 께사뿟따의 깔라마 인들은 세존께서 그들의 마을에 도착하시자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많이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하나하나 문답을 통해서 어떤 가르침이 나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증장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행해서 나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증장한다면 그 가르침은 따르지 말라고 하시고 반대로 해소가 된다면 그런 가르침은 따르라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존께서는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네 가지 위안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존의 말씀을 인용해본다.
“만약 다음 세상이 있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과 과보가 있다면 나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만약 다음 세상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과 과보도 없다면 나는 금생에 원한 없고 악의 없고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행하면서 나쁜 행을 하더라도 내가 다른 이에게 악을 저지르도록 교사하지 않았고 내 스스로도 악업을 짓지 않았거늘 어떻게 내가 고통과 마주치겠는가?
만약 어떤 이가 행하면서 나쁜 행을 하지 않으면 나는 양면으로 청정한 나를 볼 것이다.”
네 번째 위안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양면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내가 악을 저지르지 않고 또 어떤 이가 행하면서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양면으로 청정하다.”(AA.ii.306)
한편 이러한 세존의 가르침은 본서 제2권「밧디야 경」(A4:193)에도 나타나는데 세존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밧디야는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개종시키는 요술’이라고 경탄해마지 않는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여러 종교가 있고 서로 다른 여러 철학이 있고 서로 다른 여러 계율 규범이나 생활 규범이 있고 또 서로 다른 여러 관습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의 종교나 철학이나 규범이나 관습만을 평생 접하고 산다면 어쩌면 인간에게 큰 혼란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더 큰 미망에 빠져 지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미디어나 고도로 발달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영향 하에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종교, 다양한 철학, 다양한 규범, 다양한 관습을 접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러한 다양한 체계를 접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무엇일까? 무엇에 근거해서 어떤 체계는 받아들여야 하고 무엇에 바탕해서 어떤 체계는 거부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깔라마 경」이다. 이런 의미에서「셋의 모음」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경은 뭐라 해도「깔라마 경」일 것이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가르침을 설하자 그것을 접하여 혼란스러웠던 께사뿟따의 깔라마 인들은 세존께서 그들의 마을에 도착하시자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많이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하나하나 문답을 통해서 어떤 가르침이 나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증장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행해서 나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증장한다면 그 가르침은 따르지 말라고 하시고 반대로 해소가 된다면 그런 가르침은 따르라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존께서는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네 가지 위안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존의 말씀을 인용해본다.
“만약 다음 세상이 있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과 과보가 있다면 나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만약 다음 세상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과 과보도 없다면 나는 금생에 원한 없고 악의 없고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행하면서 나쁜 행을 하더라도 내가 다른 이에게 악을 저지르도록 교사하지 않았고 내 스스로도 악업을 짓지 않았거늘 어떻게 내가 고통과 마주치겠는가?
만약 어떤 이가 행하면서 나쁜 행을 하지 않으면 나는 양면으로 청정한 나를 볼 것이다.”
네 번째 위안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양면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내가 악을 저지르지 않고 또 어떤 이가 행하면서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양면으로 청정하다.”(AA.ii.306)
한편 이러한 세존의 가르침은 본서 제2권「밧디야 경」(A4:193)에도 나타나는데 세존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밧디야는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개종시키는 요술’이라고 경탄해마지 않는다.
출처 : 초기불전연구원
글쓴이 : 초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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