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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생애

[스크랩] 올바른 행위(正業. 정업)

'올바른 행위'는 불교도들의 행위 규범인 계학(戒學)을 구성하는 두 번째 요소이다. 이것은 세 가지 잘못된 행위인 살생, 도둑질, 부정한 성행위를 경계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자비,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갖는 것, 그리고 순수하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근본 오계의 첫 세 항목을 구성한다. 오계의 나머지 두 항목은 거짓말과
술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 계율을 이해하는데 과학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계율을 지키면서

개인들이 인격을 도야하는 동안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조화와 올바른 관계가 촉진된다.

그와 같은 도덕적 행위는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덜어 주고 안도와 평화를 가져다 준다. 완전한

도덕, 훌륭한 생활은 자애와 연민 즉 자비 위에서 구축된다.


이 두 가지 두드러진 자리을 갖지 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자애와

연민이 가미되지 않은 말과 행동은 훌륭하고 선한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훌륭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살생과 도둑질 따위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종종 잔인성, 탐욕, 무지에 물든 생각에 끌려 다닌다.


길들여 지지 않은 마음은 말이나 행동을 할 때 항상 악을 행할 구실을 찾아 내려 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수단을 계발해야 한다.


"생각이 다르려지지 않으면 육체적인 활동 또한 다스려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말과 지적 활동도
다스려지지 않는다." (증지부 261)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행위로 알 수 있다. 성인(聖人)도 마찬가지이다. 지혜는 행위로 밝게 빛난다.
다음의 세 가지 잘못을 가진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잘못된 육체적 행위,
잘못된 말, 잘못된 생각이 그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 세 가지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다음의 세 가지 자질을 갖춘 사람이 성인이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올바른 육체적 행위, 올바른 말,
올바른 생각이 그것이다. 성인이란 이 세 가지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비구들아, 그러므로 너희들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을 닦아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세 가지 자질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성인이 갖추고 있는 세 가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비구들아, 이와 같이 너희들은 스스로를 닦아야 한다." (증지부 102)


행위가 인격을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훌륭한 인격이라는 서눔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자가 생각하고, 반성하고, 조심하고, 노력하며, 주의 깊고 집중된 행동으로 스스로의 인격을

쌓아 가야 한다. 예술에 정통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듯이 훌륭하고 강한 인격으로 형셩되는

고귀한 행위라는 예술을 습득하는 데도 부지런해야 하고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월리엄

호즈(William Hawe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훌륭한 인격이란 어떤 경우이건 개인이 노력한 결실이다. 인격은 부무로부터 물려받는 것도 아니고

외부적인 유리함에 의해서 창조된 것도 아니며 출생에 필요한 부속물, 재산, 재능 또는 지위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노력한 결과이다."


진정한 인격을 형성하려면 게으름과 백일몽을 경계하라는 붓다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라." (장부 120)


인격을 도야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일은 자제력을 기르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에

자신을 내맡긴다면, 그의 훌륭한 행위와 인격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종교와

심리학의 지도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쾌락에 빠져 있고 스스로 즐기려는 충동에 휘말려 있는

사람들은 적절한 교육을 받고 나서야 자제력을 갖출 수 있다.


자제(自制)는 선행과, 선행이 가져다 주는 이점에 대한 깊은 생각을 통해서 온다. 사랑은 정신적인

생활의 자양분이기 때문에, 특히 젊은이들은 사랑의 미덕을 계발해야 한다. 자제되지 않은 마음은

경솔한 행동에 자신을 소모시킨다. 인격은 우리가 쌓아 올려야 하고 우리들의 결심을 통해서 서서히

계발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러나 계율은 결코 강압적인 율법이 아니다. 붓다는 독단적인 입법자가 아니다. 불교에는 강압이나

강제란 없다. 재가 신도나 비구들은 자발적으로 계율을 받아 들인다.


붓다가 그의 제자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 살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말 조련사인

케시(Kesi)가 붓다를 찾아갔다.


"케시야, 그대는 말을 길들이는 조련사이다. 그대는 어떻게 말을 길들이느냐?"
"세존이시여, 저는 온화한 방법, 거친 방법, 혹은 둘 다를 겸한 방법으로 말을 길들입니다."
"케시야, 만약 길들여야 할 말이 그대를 따르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세존이시여, 그런 경우에 저는 말을 죽입니다. 왜냐하면 제 스스의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사라들을 길들이는 비할 데 없는 조련사 입니다.

세존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길들이십니까?"
"케시야, 나 또한 온화한 방법, 거친 방법, 둘 다를 겸한 방법으로 사람을 길들인다.
케시야, 그 가운데서 온화한 방법이란 몸을 행한 선한 행위, 몸으로 행한 선한 행위의 결과, 말로 행한
서한 행위, 말로 행한 선한 행위의 결과, 마음으로 행한 선한 행위, 마음으로 행한 선한 행위 결과이고,
신들과 인간이다(선한 행위를 하면 신이나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의미)
케시야, 그 가운데서 거친 방법이란 몸으로 행한 악한 행위, 몸으로 행한 악한 행위의 결과, 말로 행한
악한 행위, 말로 행한 악한 행위의 결과, 마음으로 행한 악한 행위, 마음으로 행한 악한 행위의

결과이고, 그것은 지옥과 짐승(축생)과 아귀의 경계(영역)이다(악한 행위를 하면 지옥과 짐승, 아귀에 태어난다는 의미).
케시야, 그 가운데서 온화하고 거친 것을 둘 다 겸한 방법이란..."
"세존이시여, 그러나 그가 세존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케시야, 그런 경우에 나는 그를 죽인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분명히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세존께서는 어찌

'케시야, 나는 그를 죽인다.'고 말씀하십니까?"
"케시야, 여래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온화한 방법,

거친 방법 그리고 둘 다를 겸한 방법으로도 훈련을 따르지 않으면 그때 여래는 현명한 그의 동료

비구들이 그에게 말을 걸 필요도 없고 훈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성자의 계율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바로 여래와 그의 동료 비구들이 그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고 훈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증지부 111)


이 대화는 붓다가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스스으로서 그들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지적 했다는 것을 명확히 말해 준다.


"나는 비구들아, 악을 버려라.'라고 말한다. 악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을 버리는 것이 불가능
하면 나는 악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에게

'비구들아, 악을 버려라.'라고 말한다.
만약 악을 버리는 일이 손해와 고통을 가져다 준다면 나는 '악을 버려라.'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아, 선을 닦아라. 선은 닦을 수 있다. 선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선을 닦으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닦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에게 '비구들아, 선을 닦아라.'라고 말한다.
만약 선을 닦는 일이 손해와 고통을 가져다 준다면 나는 '선을 닦아라.'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와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나는 '비구들아, 선을 닦아라.'라고 말한다."


자발적으로 지키기로 한 계율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노력은 각자에게 남겨진 몫이다. 만약 그가
무관심하고 게으르다면, 그에게 부과된 계율과 다른 사람들이 주는 교훈과 모범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 책임은 그에게 있다.


뿌린 씨앗에 따라 너희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듯이
선을 행한 자는 선을(모으고), 악을 행한 자는 악을(거두어 들인다).
씨앗을 잘 뿌리고 심었다면
너희들은 그 결실을 즐기리라. (상응부 227)


1. 살생을 금하고 모든 중생에게 자비심을 베풀도록 하는 첫 번째 계율에는 어떤 한계도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이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 즉 숨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한다. 생명은 모두에게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새명을 보존해서 연장시키고자 한다. 이 사실은 살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가장 작은

생명체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자신은 행복을 찾으면서 행복을 바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은 죽어서도 행복을 얻지 못하리." (법구경 131)라고 노래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 행복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행복의

근원인 생명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것은 대단히 잔인하고 무자비한 짓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증오심과 악의를 결국 자신들이 뒤집어 쓴다는

사실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는가?


모든 것들은 벌을 두려워한다.
모든 것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자신을 다른 것들에게 견주어
다른 것들을 죽여서도, 죽게 해서도 안된다. (법구경 130)


내가 그렇듯이 그들도 그러하고
그들이 그렇듯이 나도 그러하다.
자신을 다른 것들에게 견주어
죽이지도 말고 죽게 하지도 마라. (숫타니파타 705)


모든 것들을 죽이지 않고,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불교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지면 사람들도 잔인하게 대하기 쉽다. 잔인한 생각은

자연히 병적인 잔혹성을 낳게 마련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살생하는 사람들은 이 생에서 종종 괴로움을 겪고 비참한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이 생이 끝난

뒤에는 그들의 무자비한 행위가 낳은 업 때문에 오랫동안 비참함을 겪게 될 것이다. 만약 그와 같은

생명의 파괴자들이 아름다움과 힘 그리고 그외 다른 좋은 육체적인 조건들을 갖고 태어난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업 때문에 일찍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을 보여 주고 살생을 경계하는 사람들은 좋은 조건을 갖추고 태어날

것이다. 만약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건강, 아름다움, 부, 권세, 지성 따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증지부 40, 중부 135 Cujakammavibhanga-sutta) 


올바른 행위는 바로 올바른 업이다. 업은 불교의 기본 교리 가운데 하나이다. 업이란 바로 우리 자신의
의지적인 행위를 말한다. 의지적인 행위의 작용과 결과를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자업자득하듯 '소의
발자국을 따르는 수레바퀴처럼 괴로움이 따르는' (법구경 1)악한 행위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년 동안 업과 윤회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지나 세르미나라(Gina Cerminara)양이 쓴 가장 흥미로운 두 책에서 믿음이 가는 많은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그녀의 [많은 저택(Many Mansions)]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케이시의 '삶 읽기(Life reading)'는 현재 인간의 고통과 취약점을 과거의 특별한 행위에서 캐
냄으로써 업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더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해명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육체적인 판독을 의뢰했다.... 네 번의 전생에 대한 윤곽이 드러났다.'''
그가 현재 눈이 멀게 된 정신적인 법칙(업의 법칙)은 바로 페르시아에서 시작 되었다. 그는
뜨겁게 달군 쇠로 적들의 눈을 멀게하는 미개한 종족의 일원이었고, 눈을 멀게 하는 것이 그의
직무였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불평등해 보인다. 동물의 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비참하게 태어나 심한 고통과 극도의 불행을 겪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풍족하고 행복하게 태어나
사치스런 생활을 즈기며 세상의 고뇌도 모르고 산다. 선택된 몇몇 사람들만이 날카로운 지력(知力)과
대단한 정신적 능력을 부여받은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무지에 싸여 있다. 우리들 가운데 몇몇은
건강과 아름다움과 친구들을 가지는 혜택을 누리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가엾은 약골이고 친구도
없는 것은 왜일까? 어떤 사람들은 장수를 누리는데 어떤 사람은 꽃다운 나이에 죽는 것은 왜일까?
왜 어떤 사람들은 유복하고 명성도 얻으며 인정을 받는데 어떤 사람들은 전적으로 무시 당할까?
이것들은 해결 되어야 할 문제들이다.


만약 우리가 자세히 조사한다면 이러한 다양한 차이점들은 외적인 존재 즉 초인간적인 존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위와 행위의 반작용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하고
악한 행위의 책임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자신의 업을 만든다.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피해를 입히지 않고 연민과 관용으로 가득 찬 무한한 마음을 계발하는 일은
이해심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건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건 모기나
벼룩을 죽이는 겨우처럼 건강을 위해서건 살생은 살생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좋은 이유 때문에
살생했다." 고 변명해도 소용없다. 사실 그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낫다. 만약 살생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시인하고 그것을 악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 살펴보면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있지 않다. 만약 특별히
자신을 위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을 보지도 듣지 못했거나 그럴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들었거나 그럴 거라고 생각되면 먹을 수 없다. 고기를 먹든
말든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나 수정된 계란을 먹으면 첫 번째 계율인
불상생계를 범하는 것이 된다.


2. 올바른 행위에 속하는 두 번째 계율은 도둑질을 경계하고  단지 자신의 것만 정직하게

취하며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취하는 행위는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보다 덜

심각하지만 그 사람의 행복을 일부분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중대한 죄이다. 아무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길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남의 것을 취하는 일은 나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도둑질 하도록 시키는 일도 좋은 일이 아니다. 강도 행위는 폭력을 유발할 수 있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다.


도둑질을 금하는 이 계율은 특히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게율이다. 모든
종류의 사기와 협잡이 두 번째 계율을 어기는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훔칠 의도를 가지고
펜과 혀, 둘 다를 사용할 수도 있다. 항상 이웃을 속이고 훔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회에서는 평화와 행복이 있을 수 없다.


때로는 가난이 도둑질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진실이지만, 사람들이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 하거나 재능을 잘못 사용해도 가난해진다. 그러면 그들은 부자들을 강탈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도둑질이 화려한 생활을 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가한다. 그래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고 가난을 몰아 내야
한다.


도둑질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예를 들면 만약 노동자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임금은
다 받으면 그는 정말로 도둑이다. 그가 벌지 않은 돈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적당한 임금을 지불
하지 않았다면 고용주에게도 똑같은 일이 적용된다. 그래서 영구의 사상가이자 역사가였던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 스스로가 정직해져라.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악당이 줄어 들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3. 올바른 행위와 관계된 마지막 계율은 부정한 성행위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필요한 것은 설교나 책이 아니라 자제력이다. '올바른 생각'을 다룬 장에서 우리는 자제와 관계된

감각적 탐닉에 대해 상세히 거론했다. 여기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부정한 성행위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먼저 팔리 원전 가운데 하나인 앙굿타라 니카야(Anguttara-nikaya)

의 첫번째 경을 살펴보자.


"비구들아, 나는 여자의 모습(色.색)만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알지 못한자. 
여자의 모습이 남자의 마음을 채운다.
비구들아,  나는 여자의 소리(聲.성)만큼...소리를 알지 못한다.
비구들아,  나는 여자의 냄새(香.향)만큼...냄새를 알지 못한다.
비구들아,  나는 여자의 맛(味.미)만큼...맛을 알지 못한다.
비구들아,  나는 여자의 감촉(觸.촉)만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촉을 알지 못한다. 여자의 소리,
냄새, 맛, 감촉이 남자의 마음을 채운다.
비구들아, 나는 남자의 모습, 소리, 냄새, 맛, 감촉만큼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알지 못한다. 여자의 마음은 이런것들로 가측 차 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성에 대해서 분명한 어조로 설한 법이 있다. 이 설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붓다는 인간에게 가장 강한 충동은 성적인 충동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충동의 노예가 된

사람은 가장 강한 사람이라도 나약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성자조차도 높은 수준에서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 특히 젊은 시절의 성적 충동은 불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신중하고

자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


"성적인 욕망보다 더한 불길은 없다." (법구경 262) "애욕은 소멸되지 않는다. 모두 태워 버린다."


붓다는 실용주의적인 철학자였기 때문에 재가 신도들이 금욕적인 생활을 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붓다는 그들을 '감각적인 쾌락을 즉리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욕망과 충동을

잘 알았기 때문에 붓다는 비구들에게는 성행위를 금했지만 재가 평신도들에게는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으로 성적인 본능을 만족시키는 일은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게다가 부정한

성행위에 대해서 강조 하면서 재가 신도들에게도 포살의 날만은 팔계(성행위에 대한 금지가

들어 있다)를 준수하라고 권고 했다.


(수행을 위해)독신으로 살아 가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몸과 말과 생각이 순결하도록 진정으로

노력해야 한다. 독신을 남을 만큼 마음이 강하지 못하다면 결혼해도 좋다. 그러나 부정하고 해로운

성행위는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몰락'에 대한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숫타니파타.
Parabhava-sutta 16,18,20)


"만약에 여자한테 빠져 있고, 술고래이고, 도박꾼이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린다면 이것은
몰락의 원인이 된다."
"자신의 아내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매춘부나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이것은 몰락의 원인이 된다."
"한창때를 지난 사람이 십대의 소녀를 아래로 맞아 그녀의 사랑을 구하는 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몰락의 원인이 된다."


여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한다.


"부정(不貞)한 행위는 부인의 더러움이다." (법구경 242) "아내들 가운데 최고의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하는 아내이다." (상응부 p 7) "아내가 가장 좋은 친구이다." (상응부 i 37)


또 올리버 골드스미스(Oliver goldsmi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완전한 아내가 여성 철학자들이나 으시대는 여걸들, 표독스런 여왕보다도 훨씬 더 쓸모가 있다.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여인은 매혹적인 몸매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소설 속의 숙녀들

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실라차라(Silacara)비구는 오계의 세 번째 계율인 불사음계(不邪淫戒)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매순간 바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인격을 만든다. 성(性) 문제에서 마음은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한다.
바로 이 문제에서 우리가 마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다른 문제에서는 경계를 거의 하지 않아도
되거나 아예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성 문제에 대한 자제력의 부족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기꺼이 '하등 동물'이라 부르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것들의 성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진정 어느 쪽이 하등한가? 인간인간 동물인가? 성행위에서

어느 쪽이 정상적인 방법을 취하는가? 그리고 어느 쪽이 부정하고 뒤바뀐 쪽으로 탈선하고 있는가?

바로 하등 동물쪽이 오히려 고등동물이고 인간은 하등 동물이다. 왜 그럴까? 인간은 바르게 사용하면 자신의 성적인 충동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동물보다도 더 자신을

성적인 노예로 만드는 당치도 않은 열정에 그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Bhikkhu Silacara,

The Five Precepts)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aya)의 41번째 경과 또 다른 곳에서 설한 세 번째 계율에 대한 붓다의

설법은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하다. 이 설법은 열 가지 선한 행위(十善業.십선업)와 열 가지 악한 행위

(十惡業.십악업)를 모두 다루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본문의 내용을 약간 축약시킨 것이다.


왜 죽은 뒤에 어떤 중생들은 좋은 곳에 태어나고 어떤 중생들은 나쁜곳에 태어나는가를 묻는 살라의

바라문 가장들이 던진 질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장자들아, 어떤 중생들은 법에 의한 삶 즉 정의롭고 조화로운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뒤에

비참한 곳으로 간다."


그런데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바라문들이 좀더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 했다.


"장자들아, 어떤 사람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에 대해 잔인하고 무자비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들을 가진다.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나 아버지, 부모 형제, 친척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처녀들)과 성관계를 맺거나 남편이 있는 유부녀들, (성적으로) 이용하면 벌을 받게
되는사람들, 심지어는 약혼한 사람들과도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지나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


장자들아, 이와 같은 것들이 세 가지 비법(非法) 즉 몸과 관계된 정의롭지도 조화롭지도 못한 삶을

사는 것이다."


계속해서 붓다는 말과 관계된 네 가지 비법인 거짓말, 중상, 거친 말, 쓸데없는 말에 대해서 설했다.


"장자들아, 어떤 사람들은 탐욕스럽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탐내어 '저것들이 내 것
이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악의를 지니고 마음이 오염되어서 '이것들은 죽어
버려라. 살해당해라, 도살되어라, 못 살게 되어라.'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견해와
비뚤어진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보시(의 결과)는 없다, 잘 하고 못한 행위의 결과도 없고,
이 세계도, 초월적인 세계도 없다(초월적인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초월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좋거나

나쁜 행위의 결과)도 없고, 저절로 생긴 존재도 없고(이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선행을

하고 바르게 살아서 초월적인 지혜를 얻었다고 이 세계와 초월적인 세계에 선언하는 수행자와

바라문도 없다 (이것은 붓다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장자들아, 이와 같은 것들이 세 가지 비법 즉 생각과 관계된 정의롭지도 조화롭지도 못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계속해서 위에서 언급된 모든 것들과 반대되는, 몸과 말과 생가과 관계된 세 가지
법의 실천 즉 정의와 조화의 실천에 대해 설했다.


종교의 지도자로서 붓다는 윤리와 도덕에서 옳고 그름과 비도덕적이고 좋지 못한 행위의 나쁜 결과에
대해서 인도인들에게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성과 관계된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간섭하지 않았고
또한 정책이나 제도 문제에 대해서도 참견하지 않았다. 그러한 일들은 정부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가에 대해서는 태도를 달리했다. 붓다는 때때로 제자들에게 엄격했다. 안내자이자 스승으로서
종종 그는 승가의 구성원들에게 사소한 잘못도 두려워하고 선행을 하라고 충고했다. 또한 예의 바르고
조용하고 온화한 가운데 불쾌한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고 이미 유쾌한 사라들의 행복을 더 커지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Vinaya)


수행 생활을 하기 위해 승가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붓다는 특별한 훈계를 내렸다. 비구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성행위도 금지 시켰다. 그러나 비구 생활이 너무나 견디기 어렵고 출가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비구는 가사를 벗고 자유로이 세속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붓다는
자상한 아버지처럼 충고해 주고 필요한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희망과 거리가 먼 출가 생활을
계속하라고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은 심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붓다가 승가의

구성원 들에게 권장한 명상과 다른 형태의 수행들이 가져다 주는 이익 가운데 하는 승화(昇華)였다.

그것은 감각에 대한 탐닉을 경계하는 결과로 생길지도 모르는 병적인 상태를 제거해 주는 것이다.


[법구경]의 두 게송(246, 247)은 오계를 열거하면서 한 마디로 파계의 나쁜 결과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살생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주지도 않은 것을 취하고
남의 아내를 범하고


취하게 하는
술에 빠진 사람은
누구라도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안녕과 행복)를 파헤치는 자이다.


이 장과 바로 앞장에서 우리는 부다와 법과 승가 즉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교도가 된 재가 신도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인 오계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 보았다. 끝으로 붓다가 자신의 아들

이었던 어린 사미 라훌라에게 했던 충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라훌라야, 거울은 무엇을 위해 있느냐?"
"세존이시여, 사물을 비추어 보기 위해 있습니다."
"라훌라야, 그와 마찬가지로 거듭 비추어(반성해) 본 뒤에 행동하고 거듭 비추어 본 뒤에 말하고

생각하라."


그리고 나서 계속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잘 생각한 뒤에 자신의 행위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피해를 주며 선하지 않고 고통을 가져다 준다고

여겨지면 결코 그것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만약 잘 생각해 본 뒤에 자신의 행위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하고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해야 한다. 자신의 말과 생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속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훌라야, 아득한 옛날에는 수행자이건 바라문이건 자신의 행위와 말과 생각을 정화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성하고 반성해 본 뒤에 그렇게 했다. 아득한 미래에도 수행자건 바라문이건 자신의 행위,

말, 생각을 정화 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반성하고 반성해 본 뒤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수행자건 바라문이건 자신의 행위, 말, 생각을 정화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성하고 반성해 본 뒤에

그렇게 한다.


라훌라야, 그러므로 너는 다음과 같이 너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들은 반성하고 반성해 본 뒤에 행위를 정화해야겠다. 우리들은 반성하고 반성해 본뒤에 말을

정화 해야겠다. 우리들은 반성하고 반성해 본 뒤에 생각을 정화해야 겠다.'


라훌라야, 너는 이과 같이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중부 22)


주의 깊은 독자라면 설법을 요약해서 설명한 위의 내용에서 붓다가 어떻게 인간 행위의 심리적

중요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불교이건 아니건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행위란 의지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채택해야 할 판단의 기준은 '내가 그러하듯 그들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 갈망, 습성에 잘 무너진다. 그러면서도 거의 매번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그러므로 그 행동의 결과는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되고 만다. 이 설법에서 붓다는 명상에서
일어나는 생각인 '숙고(반성적 고찰)'를 강조한다. 사미인 라훌라에게 했던 충고는 비록 2,500여 년
전의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 것이다. 영원한 진리로 구체화된 훌륭한 조언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출처 : 홍사성의 불교사랑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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