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와 철학은 인간 자신들의 안녕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형태의
도덕이나 윤리를 내세운다. 이러한 윤리적 규칙들은 그 수준이나 범주가 동일하지 않고 다양하다.
어떤 사라들에게는 도덕적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한 사람은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도덕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말못된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때때로 세게의 다양한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지리, 경제, 사회적 조건들
이라는 배경에 달려 있다. 그래서 도덕 원리의 기준들이 서로 다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에 의해서 제정된 도덕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방탕한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주저없이 그들의 행동원리를 포기해 버린다. 그들은 새로운 행동양식을 채택하게
되고 뒤에 그것은 관습이 된다. 일단 그렇게 되면 아무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부색,
인종,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도덕적인 원리들이 많이 있다.
불교의 도덕 양식은 대단히 광대하고 다양하지만 불교도들의 행위 규범(계.戒)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적.육체적인 행위 즉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과 행동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출발한 모든 도덕들은 이 목적 즉 청정한 행위로
귀결된다. 그러나 계율은 선정을 돕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반면에 선정은
진정한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또한 이 지혜는 붓다가 설한 가르침의 최종 목표인 마음의
해탈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계율, 선정, 지혜에는 감정과 지성이 섞여 있다. 붓다는 제자들이 바로
이 목표를 향해 가도록 인도한다.
인생을 바라보는 붓다의 태도는 단순히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해탈과 동시에 윤리적인
완벽성까지 갖춘, 모든 면에서 좋은 실용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붓다가, 우리들이 좋은 감정을
계발하고 나쁜 감정을 버리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비록 감정적인 측면만으로는
최종적인 해탈에 이를 수 없다 할지라도 그것은 계발되어야 한다.
좋은 감정은 항상 '올바른 견해'와 섞여 있어야 한다. 계율, 선정, 지혜는 신중한 사람들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해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라고 해탈을 선언하도록 도와 주는 세 가지 방법이다.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순수한 삶과 올바른 견해를 통해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든 악
으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안내해 준다.
이 장(章)에서는 '올바른 말(正語.정어)'에 대해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의 두 장에서는
각각 올바른 행위(正業.정업)와 올바른 생활(正命.정명)을 다룰 것이다. 이들 세 가지는 앞에서
언급한 불교도들의 도덕 규범인 계학(戒學)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전에 설명된 대로 계율에
대해서 몇 마디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불교의 최종 목표인 마지막 해탈은 한꺼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며
점진적인 수행이다. 경전에 종종 언급되고 있듯이 정신적인 청정은 계행을 철저히 닦은 후에야
얻어진다. 정신적인 청정은 도덕적인 청정 없이 얻을 수 없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선정과 지혜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계행을 갖추라고 훈계한다. 그러므로 계행은 시작에서부터 필요한 것이다.
불교의 출발점은 계행이다. 이 토대가 확고해야 변덕스러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말과 몸을 통해서 짓는 나쁜 행위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언어 행위를
잘하고, 육체적인 행위를 잘 통제하며, 청정한 생계 수단을 강구함으로써 제자는 계행을 잘 갖추게
된다. 이와 같은이 그는 철저히 자신을 억제하는 필수적인 계율을 지키고 사소한 잘못도 위험하다고
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성실히 닦아 나간다 (중부 107). 그는 말과 행위에서 자신을 억제 하면서
감각의 문을 보호 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만약 감각을 통제하지 못하면 악한 생각이 마음을 채우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형상을
보고 소리를 듣는 따위의 일을 해도 그는 그와 같은 감각 대상들에 대해서 애착을 일으키지 않고
혐오하지도 않는다. 균형을 유지하며 좋아함과 싫어함을 초월한다.이것이 그가 열성적으로
수행하는 감각의 통제이다.
그는 적당히 그리고 잘 관찰하면서 먹는다. 자기 만족이나 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정한 수행을 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먹는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서 마음의 때를
씻어 낸다. 이러한 생활 양식은 비구들에게만 적용되고 재가 신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부지런히 주시(注視)함으로써 제자들은 머뭇거림 없이 진저을 이루어 보다 어려운 명상을 시작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질에 맞는 대상을 택해 멈추지 않고 계속 그것을 명상함으로써
적정(寂靜)을 얻게 된다. 그는 명상을 방해하는 장애들을 극복함으로써 점차 조금씩 순간순간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게 한다. 이와 같이 주의 깊게 노력하는 사람은 변하기 쉬운 마음을 통제
할 수 있게 된다. 말과 행동과 감각 기관을 정복하고 마으을 통제하게 됨으로써 그는 이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계행을 지키고 선정을 닦은 후에 그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진정한 지혜 즉
통찰력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모든 조건지어져
있고 합성되어 있는 사물들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임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명상하는 제자에게 '세계'란 외계(外界)즉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육체이다. 이것은 오온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바로 이것을 그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라고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붓다가 모가라자(Mogharaja)에게 "모가라자야, 항상 주의 깊게 관찰해서 세상을 빈 것으로 보아라.
자아라는 개념을 가지지 마라. 그래야 마라(Mara, 죽음)을 극복 할 수 있느니라." (숫타니파타)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몸과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다.
이제 각자가 스스로 지혜를 닦으면, "무상한 것은 어떤 것이든 기뻐할 가치도, 호감을 가질 가치도,
집착할 만한 가치도 없다." (중부 106)라고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그는 오온과 다섯 감각 기관과 거기에 상응하는 다섯 감각 대상을 나의 것이라든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붓다의 충고를 이해하게 된다.
"비구들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버려라. 이것을 버리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비구들아, 무엇이 자신의 것이 아닌가? 육체는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것을 버려라. 이것을 버리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감각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 지각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의지적 형성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의식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것을 버려라. 이것을 버리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안녕을 위하는 것이다." (상응부 32,81)
이와 같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오온의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그는 이 세상 - 유위(有爲)와
중생의 세상 - 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없이 살아간다 (Satipatthana-sutta 13). 그래서
최상의 행복인 열반의 기쁨을 맛보면서 살아가게 된다. 결국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렇게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해 간다.
독자들은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서 마지막 해탈을 얻기 위한 자기 정화와 자기 수행 속에는 외적인
존재에 의한 강제나 강압도 없고 이미 이루어진 행위와 하지 안고 남아 있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성한 물로 목욕 재계를 하지도 않고, 신에게 공양하지도 않으며,
신들이나 태양, 불에 대한 숭배도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깨끗함도 더러움도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외부적인 것들은 우리들에게 청정과 해탈을 줄 수도 없고
주지도 않는다.
"나체로 생활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씻지 않고, 단식을 하고, 땅위에 누워 있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쪼그리고 있는 따위의 행위도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 중생을 청정하게 하지 못한다."
(법구경 141)
이제 불교의 도덕 규율에 대한 매우 길고 포괄적인 설명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올바른 행위의 항목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불교 윤리의 기초인 오계이다. 이것은
재가 신도들을 위한 기본적인 행동 원리이다.
오계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숨쉬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죽이지 않겠다. (여기서는 자살하는 것도 포함된다)
2. 나는 (나에게)주어지지 않은 것을 갖지 않겠다.
3. 나는 부정한 성행위를 하지 않겠다.
4.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5. 나는 취하게 하고 무분별한 행동을 유발하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경은 오계에 대해서 [아시아의 빛. The Light of Asia)]이라는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살생을 금하라. 향상의 길을 걷고 있는
가장 미천한 것들을 가엾게 여겨라.
자유롭게 주고 받되
탐욕이나 강제, 사기로 남의 것을 취하지 말라.
본 것을 거짓으로 전하거나 중상하거나 거짓말하지 마라.
진실한 말은 내적인 청정을 가져다 누나니.
현자들의 비난을 받을 마약과 술을 경계하라.
맑은 마음과 깨끗한 몸에는 소마(식물의 이름이며 그 즙은 신들의 음료수로, 베다의 희생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즙이 필요 없나니.
이웃의 아내를 건드리지 말고
비합법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정욕의 죄를 범하지 마라.
이 계율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지켜지고 행해져야 할 것이지 단순한 암송이나 입에 발린 말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은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계율을 알고 있지만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은 등불이 비치는데 눈을 감고 있는 사람과 같다."
불교는 승가의 한 구성체인 모든 재가 신도들에게 계율을 준수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승려건 재가 신자이건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계율을 준수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삼보에
귀의하고 불교도가 된 사람은 적어도 수행의 출발점이 되는 오계를 준수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특별한 날이나 장소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 어디에서나 항상 실천해야 한다. 적어도
청정의 첫 번째 단계(예류과)에 도달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게율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계율을 범하고 난 뒤 자신의 나약함이나 결점에 대해 후회한다 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후회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드에게 어떤 이익이나 도움ㅇ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후회는 단지 자신의
마음만 어지럽게 할 뿐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종교적인)죄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죄라는 말이 없다. 붓다는 나쁜 짓을 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고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심판관이 아니기 때문에 '붓다의 법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일은 없다.
그러므로 죄로 인한 후회, 슬픔, 낙담도 없다. 행위를 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는 행위 결과로 괴로움을 당하거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건
파계를 하건 모두 자신의 문제이다. 또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행위가 반드시 과보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좋은 업이 나쁜 업을 압도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계율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듯이 강제적인 율법은 없다. 자발적으로 계율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거기에 강제나 강압은 없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켜야할 것을 위반 했다먼 그때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자신의 나약함을 고치기 위해 확고한
결심을 할 필요가 있다. 주의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계율을 지키는 유일한 목적이 자신의 충동 즉
나쁜 성향과 잘못된 행위들을 제어하도록 훈련해서 청정과 행복으로 가는 길을 포장하고, 사회의
안녕을 유지하며, 참된 마음을 촉진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우리는 이 계율을 준수하는 일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의 근원인 우리들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줄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살생을 금하는 첫 번째
계율에서, 살생은 증오심과 잔인한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범할 수 없다. 부정한 성행위를 금하는
세 번째 계율은 특히 욕망과 관계가 있고, 도둑질과 거짓말을 금하는 두 번째와 네 번째 계율은
탐욕과 증오 둘 다와 관계가 있다. 그리고 술을 금하는 다섯 번째 계율은 탐욕과 관계가 있다.
반면에 미혹은 오계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취하게 하는 술을 마시는 일이 미혹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술은 생각을 흐리게 하고,
이성의 힘을 감소 시키며, 나태하게 하며, 미치게 하며, 수많은 나쁜 행위의 원인이 된다. 술고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게 되어 어떠한 죄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게 되면
다른 모든 계율을 깨뜨릴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계하고 있다.
마음을 악용하게 하는
모든 악의 이 근원을 끊어라 (숫타니파타 399)
적당히 술을 마시면 해롭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먼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다음엔 술이 술을 마시며
그 다음엔 술이 사람을 마신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조절하며 마음을 고요히 하라."는 붓다의 훈계를 항상 명심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을 삶의 진실과 해탈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마약과 술을 멀리하자.
세 번째와 다 섯번째 계율은 유사성이 있는데 서로 상보적이며 둘 다 즐거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팔리 삼장에서는 팔정도에서 언급되는 도덕 규범처럼 다섯 번째 계율이 세 번째 계율에
포함되어 생략된다. 오계 다음에 초심자(沙彌.사미)들이 수습해야 할 십계가 있다. 십계는 이미
언급한 오계에 다섯 가지를 덧붙인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6. 나는 때 아닌 때에 먹지 않겠다.
7. 나는 춤과 노래를 즐기지 않겠다.
8. 나는 몸을 꾸미거나 향을 바르지 않겠다.
9. 나는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않겠다.
10. 나는 금과 은을 받지 않겠다.
또한 초하루와 보름의 특별한 날에 재가 신도들이 지키는 팔계가 있다. 이것은 오계에, 여섯 번째
계율과, 일곱 번째 계율과 여덟 번째 계율을 합친 하나와, 아홉 번째 계율을 더한 것이다.
붓다는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계율을 준수 하도록 고무시키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증지부 217)
팔정도의 '올바른 말'에는 경계해야 할 것이 네 가지 있다. 거짓말, 남을 헐뜯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잡담이 그것이다.
바로 이 계율들이 부정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불교의 행위 규범들이 단순한 금지 조항이라고만 생각
해서는 안된다. 씨를 뿌리기 전에는 먼저 잡초를 뽑고 밭을 갈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먼저 말과 육체적인 행위를 깨끗이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선행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마음이 악한 생각으로 더렵혀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마으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이라는 세 가지 불로 타고 있어서 악한 상태에 놓여 있다.
자연히 그런 악한 생각들이 말과 육체적인 행위로 나타날 때 그것들은 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잘못된 행동을 점검해서 느슨해진 행동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경계함으로써 사람들은 선해지고 말과
행동이 깨끗해진다.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들도 어떤 일은 경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때는 강한 마음의 힘 즉 노력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긍정적 미덕인 자비심 때문이며, 거짓말을 경계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붓다의 설법을 자세히 보면 붓다가 긍정적인 말로써 계율을 언급하기도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살생을 포기함으로써 어떠한 생명체의 생명을 빼앗는 이롣 경계한다. 막대기와 칼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온화하고 자비롭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치절과 연민을 가지고 살아간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일을 경계함으로서, (단지) 주어진 것만 취함으로써... 도박에서 벗어나 청정하게
살아간다. 남을 비방하는 일을 경계함으로써 ...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화해 시키고, 우호적인
사람들을 더 친하게 하며, 친하게 지내는 것을 기뻐하고 즐기며 살아간다. 거친 말을 경계함으로써
알맞은 때에 사실에 따라 요령있고 법과 계율에 부합하도록 말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 (마음속에)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 때에 알맞은 말, 적당한 말, 분별력이 있고 요령이 있는 말을 한다."
(중부 27,38,51. 장부 1)
이와 같이 우리는 붓다가 명백한 말로 어떻게 계율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청정의 길을 따라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생각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그는 스스로를 훈계하고 격려하면서 이정표를 따라 길을 간다." (장로니게 637)
붓다의 가르침에는 모호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악을 악으로 알고 선을 선으로 안다면, 왜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피하고 바른 길을 가는 데 주저 하겠는가. 만약 다음과 같은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불교들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계발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매우 중요한 이 게송이 보여 주듯이,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악을 그치는 일이 필수적이다.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해서 도덕적으로 되어야만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닦는 보다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도덕적인 배경없이 즉 행위에 대한 절제 없이 (계율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으려는
것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나 상상에 불과하다.
불교에서 팔정도는 청정을 얻을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행위(팔정도를 닦으려는 의지), 지혜(팔정도를 위한 지혜), 법(집중 즉 삼매를 의히), 고귀한 도덕적
생활, 중생들은 이것들로 청정해지지, 혈통이나 재산으로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상응부 34, 중부 143)
"악하고. 악과 관계되어 있고, 악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선하고,
선과 관계되어 있고, 선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증지부 11)
"마음 즉 생각이 다스려질 때, 육체적인 행위도, 언어 활동도 다스려진다.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을
때, 육체적인 행위도, 언어 활동도 다스려지지 않는다." (증지부 261, sutta 105))
"이 모든 행위(업)들의 근원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거나 무탐욕, 성내지 않음, 어리석지 않음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이루어진 행위들은 이익이 없고, 비난 받을 일이며, 고통을 가져온다.
그리고 행위를 그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한 행위로 이끈다. 무탐욕, 성내지 않음, 어리석지
않음으로 이루어진 행위들은 이익을 가져오고, 칭찬받을 만한 것이며, 행복을 가져온다. 그리고
더 이상의 행위들이 소멸되어 행위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증지부 263 sutta 107,108)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정신적인 요인에 의해서 세 가지씩의 선과 악을 행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행위에 따른 결과나 반작용을 낳는다. 이 경우 마음은 물을 본래대로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저수지에 비유된다. 저수지 관리를 게을리 해서 물이 오염되면, 수도꼭지에서 이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한다. 물이 썩었다는 것을 알고 수도꼭지를 잠근다면 비록 저수지가
오염되었다 해도 괴로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 수도꼭지를 닫아 둘 수는 없기 때문에, 그는
저수지가 잘 관리되어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마실 수 있는지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
저수지처럼 인간의 마음도 말과 육체적 행동이라는 두 출구를 가지고 있다. 마음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
이 출구들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된다. 생각이 깨끗하다면 그 생각의 소유자는 좋은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생각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는 좋지 못한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두 출구를 통해
나오는 나쁜 생각들을 허용치 않는다면 말과 육체적 행위는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출구는
단단히 잠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즉 저수지가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
오염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명상 즉 선정이 필요하다. 비록 그의 마음이 이와 같이 집중
되고, 가라앉고, 보호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안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의 오염을
막기 위해 지혜화 통찰력과 인식이 필요하다. 일단 이것이 성취되면 그의 마음은 모든 더러움과 오염에
대해 면역이 생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비록 말과 육체적인 행위들을 통제하는 계행이 수행의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발전과 청정에 아주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도들의 도덕 규율에 대한 이런 간단한 일반적 소개와 더불어 이제 '올바른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말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단지 한 마디 말만으로도 인간의 모든 모습이 선하게도
악하게도 변해 릴 수 있다. 인간이 동물에게는 없는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과하다. 사람들이 좀더 사려 깊고 온화하게 말하고, 좀더 정확하게 진지하게 글을
쓰기만 해도 많은 통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은 대단한 가치를 지닌 선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을 통해 생각과 사로를 표현하고 그것들을
다른 람들과 공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뼈도 없는 세 치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둔다면 단히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웃간의 말다툼에서 국가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싸움과 괴로움이 말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혀를 다스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악한 생각 즉 탐욕, 성냄, 질투, 자만, 이기심 들이 마음을 지배 해서는 안된다. 말을 많이 하면
확실히 음의 고요와 올바른 생각이 방해받게 된다. 그리고 입이 가벼우면 올바르지 못한 말
네 가지를 모두 게 된다. 그래서 붓다는 "비구들아, 말이 많으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불이익과
위험이 따르느니라." 고 말한다.
1. 올바른 말과 관계된 첫번째 계율은 거짓말을 경계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메타 숫타
(Metta-sutta)" 는 정직한 사람, 아니 정말 진실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진지하고
고결하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명성을 얻거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진실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그는 격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두 번째가 없기 때문에 하나이다.
(숫타니파타 884) ".
"붓다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고 다음 날 또 저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Buddha-vamsa)". "그는
행한 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하기 때문에 여래(Tathagata)라고 불린다 (장부 135, sutta 29)".
붓다는 또한 '진실한 사람'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붓다는 거짓말이 나쁜 것임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곱 살 난 사미인 어린 라훌라에 대한
그의 첫 설법도 거짓말의 무익함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거짓말을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어느때 붓다는 어린 라훌라를 찾아갔다. 라훌라는 자리를 마련하고 발을 씻을 물을 준비했다.
붓다는 발을 씻고 자리에 앉았다. 어린 라훌라는 붓다에게 예를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러자
붓다는 그룻에 물을 약간 따른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훌라야, 그릇 속에 조금 있는 물이 보이느냐?"
"예, 세존이시여."
"라훌라야,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가진 사문으로서의
품성은 하챦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그 물을 버리고 라훌라에게 물었다.
"라훌라야, 물이 버려진 것을 보았느냐?"
"예, 세존이시여."
"라훌라야,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말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가진 사문으로서의
품성은 버려진 것이니라."
그리고 나서 붓다는 물 그릇을 뒤집어 엎고 라훌라에게 물었다.
"라훌라야, 물 그릇이 뒤집어진 것이 보이느냐?"
"예, 세존이시여."
"라훌라야,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가진 사문으로서의
품성은 뒤집어진 것이니라."
그리고 나서 붓다는 그릇을 바로 놓고 라훌라에게 물었다.
"라훌라야, 물 그릇이 비어 있는 것이 보이느냐?"
"예, 세존이시여."
"라훌라야,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가진 사문으로서의
품성은 빈 것이니라."
라훌라야, 거짓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짓지 못할 악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나는
장난으로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며 자신을 닦아야 한다 (중부 61)."
2. 말로 저지를 수 있는 두 번째 잘못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방 즉 이간하는 말
(pisunavaca)이다. 팔리어 피수나바차(pisunavaca)는 '친교를 깬다'는 의미이다. 남을 비방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명성에 해를 끼칠 의도를 가진 거짓말을 하게 하기 때문에 대단히 나쁜 일이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은 종종 동시에 두 가지 죄를 저지른다. 그의 말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고 또 뒤에서 험담을 하게 된다.
산스크리트 게송에서는 뒤에서 헐뜨는 사람을, 작지만 해로운 모기에 비유하고 있다. 모기는 노래를
부르며 사람에게 달려들어 피를 빨아먹는다. 그리고 그 모기가 암놈이라면 말라리아를 옮길 수도 있다.
또한 이간 하는 사람의 말은 꿀처럼 달콤할 수 있지만, 그의 마음은 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정을 깨트리는 이간하느 말고 헐뜯는 말을 경계하자. 괴로움을 만드는 말 대신에 평화와
화해를 가져오는 말을 하자( 중부 27,38). 불화의 씨앗을 뿌리는 대신에 불화와 증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우정을 가져다 주도록 하자. "다투지 말라고 화합하라."고 붓다는 말한다.
아소카 왕은 석주(石柱)에 "화합만이 칭찬할 만한 것이다."라고 새겼다. 우리는 다름 사람들에게 의존
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평화와 우정과 조화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그 다음은 거친 말을 경계하고 유쾌하고 예의 바른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이익이나 손실, 칭찬이나 비난, 좋은 평판이나 나쁜 평판, 행복이나 불행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 온화한 말은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도 녹일 수 있지만 거친 말은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낳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두 번 세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인격과
훌륭한 명성에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일이라면 약간 과장해도 문제가
안 된다. 이것은 불쾌감을 주거나 원한을 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문제에 대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인간의 입 속에는 도끼가 자라고 있어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으로 자신을 자른다.
나쁜 말을 입 밖에 내어 (상응부 41)
붓다 당시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바보들의 축제'라는 행사가 가끔 열렸다. 일 주일 동안
그들은 재와 소똥을 몸에 바르고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람들에게 상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돌아
다녔다. 친구, 친척, 은둔자, 비구들조차도 괴롭힘을 당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피하기 위하여 동전
몇 푼을 던져 주곤 했다. 어느때 붓다의 독실한 신자들이 그 축제가 끝날 때 까지 그 도시에 들어
가지 말도록 붓다에게 간청했다. 그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리석고 무지한 바보들은 그처럼 무례하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올바르게 주시해서 불사
(不死)를 얻는다." (법구경 256)
사람의 말은 종종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거친 말, 불쾌한 몸짓, 비웃으로 인해 마음 착한
사람이 죄인으로, 친구가 적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에게도 거친 말을 하지 마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앙갚음할 것이다.
그이 보복의 말은 고통스러우며
그대고 그처럼 상처받을 것이다. (법구경 133)
붓다의 전생 즉 그가 보살이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나 살펴보자. 그는 훌륭하지만 말이 거친 자신의
어머니가 그 말이 거칠다는 것을 그만두게 했다. 그의 어머니는 무례하고 거칠었다. 보살은 어머니의
말이 거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말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날, 당시 베나레스의 왕이었던 보살은 어머니와 신하들과 함께 공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어치 한 마리가 시끄럽게 울어대자 모두 귀를 막고 "제기랄, 귀청 찢어지겠네.! 두번
다시 들을까봐 겁나는군."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얼마 후 보살이 어머니와 신하들과 함께 즐겁게
거닐고 있을 때, 뻐꾸기 한 마리가 달콤하게 지저귀자 사람들은 즐거워 했고 그 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했다.
보살은 바로 이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님, 어치의 소리에 소름이 끼쳐 우리는 모두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친 말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록 검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뻐꾸기는 유쾌한 소리로
우리들의 사랑과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도 상냥하고 조심스럽고, 평화로우며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아들의 충고를 들은 어머니는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게 되었다. (Jataka 269)
유쾌하고 예의바른 말은 주목을 끌며 사회의 (공공) 재산이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무례한 말들로
인해 손상되는 일이 너무나 흔하다.
"마음으로 하는 말, 즉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항상 간단하고 우아하며 힘이 넘친다."
(D.N. Boveee, Wisdom of the Ages, p.374)
4. 올바른 말과 관계된 네 번째이자 마지막 계율은 누구에게도, 어느곳에도 이익을 가져다
주지 않는 시시한 이야기 즉 잡담을 경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잡담과 다른 사람을 헐뜯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잡담 내용은 쓸데없는 것들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잡담 속에 빠져든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해 가면서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J.L.홀라드(Hollar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잡담은 자신이 항상 적의를 품고 있다거나 어리석다는 고백이다. 잡담은 저속하고 경솔하다. 그래서
이것은 이웃들을 자주 인생의 적으로 만드는 더러운 일이다."
붓다도 황금같은 충고를 한다. "비구들아, 너희들이 함께 모였을 때 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고귀한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중부 26, 감흥어 p.31)
잡담, 스캔들, 소문은 고요함과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에 붓다는 이것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의미 없는 천 마디 말보다 들으면 마음이 고요히 가라낮는 한 마디 말이 낫다." (법구경 100)
팔리어에서는 성자를 무니(mini)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침묵은
금이다.' 그러므로 침묵보다 낫다고 확실할 수 없으면 말하지 마라.
많은 말은 위험의 근원이니
침묵을 통해 불행을 피한다.
말 많은 앵무새는 새장 속에 갇혀 있고
말 못하는 새들은 자유롭게 날아 다닌다
"단지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법구경 258) 그뿐만 아니라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불법에 정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법구경 259) 또한 성자의 침묵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붓다는 "침묵을 지킨다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가 성인이 될 수는 없다."
(법구경 268)고 말한다.
끝으로 '좋은 말'에 대한 다음의 설법을 들어 보자. (숫타니파타. Subbasita-sutta)
(1) 훌륭하게 설한 것만 말하고 잘못 설해진 것은 말하지 마라.
(2) 법만 말하고 비법(非法)은 말하지 마라(여기서 법이란 의미있는 말을 뜻하고 비법이란 의미 없고
쓸데없는 말을 뜻한다)
(3) 유쾌한 것만 말하고 불쾌한 것은 말하지 마라
(4) 진실만을 말하고 거짓은 말하지 마라
후회를 낳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말만 하라
이것이 참으로 좋은 말이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 말이며, 이것은 고대의 (영원한) 법칙이다.
성자들은 진실과 행복과 법 속에 안주한다.
열반으로 인도하고, 괴로움의 끝으로 인도하는 평화로운 붓다의 말씀,
그 말씀이 진실로 좋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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