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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생애

[스크랩] 올바른 생각 (正思惟. 정사유)

팔정도의 두 번째 요소인 '올바른 생각'은 '올바른 견해'의 결과이다. 이 두가지는 팔정도를 삼학으로 분류할 때 지혜 즉 혜학(慧學)을 구성한다. 올바른 생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 결과로 생긴다. 생각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말과 행위는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로 말과 행동으로 바뀐다. 우리의 말이나 행위가 좋으냐 나쁘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사고 방식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비뚤어진 생각 대신에 올바른 생각을 배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자주 인용되지만 늘 새로운
담마파다 (Dhammapada.법구경)의 게송은 우리에게 생각의 중요성과 의미를 말해 준다.


모든 심리 상태는 마음을 따른다.
마음이 그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오염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모든 심리 상태는 마음을 따른다.
마음이 그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를 떠나지 않듯이.


붓다의 이런 말로 볼 때 우리의 말과 행위가 아름다우냐 추하냐는 우리 자신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생각으 ㄴ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그래서 생각은 바라는 대로 어디든지 방랑한다. 우리들과 외부 세계에 미치는 생각의 영향은 대단히 크다. 추하고 해롭고 비도덕적인 생각은 어느 것이나 다 인간의 마음을 오염 시키고 말할 수 없는 해를 가져올 수 있다. 나쁜 말이나 행위는 나쁜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만약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올바른 생각에 집중 한다면, 마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결과는 무한하다.


그러면 올바른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욕(無慾), 자애, 연민 즉 자비의 마음이다(중부17,117).그 반대는 감각적 욕마을 가진 마음이며, 악의 피해를 입히려는 마음이다(중부 78, 117). 두가지 생각에 대한 설법(중부 19. Dvedhavitakka-sutta)에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자신이 어떻게 두 가지 생각을 경험했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감각적 욕망, 악의, 해를 끼치려는 마음을 그는 한 범주로 묶었고 무욕, 자재, 연민을 또 다른 범주에 놓았다. 그는 감각적 욕망, 악의 해를 끼치려는 생각이 자신에게 일어 났을 때 그것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고, 직관적인 지혜를 방해하며, 고통을 가져오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러한 생각을 계속 제거하고 쫓아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했다. 


무욕, 자애, 연민의 생각이 그에게 일어났을 때 붓다는 이러한 것들은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직관적인 지혜를 계발하고, 고통을 가져오지 않고, 열반으로 인도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계속해서 붓다는 그가 숙고를 통해서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견고하게 했고, 고요하게 했으며, 명상의 대상에 망음을 집중할 수 있었는가를 설한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해서 악한 마음에서 벗어나 초선, 이선, 삼선, 사선에 들어가고 거기에 머물러서 마침내 있는 그대로 사성제를 이해하게 되었는가를 설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악의 세 가지 근원(三毒.삼독)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일이 어떻게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생각'에 달려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지의 또 다른 표현인 미혹은 앞에서 보았듯이 '올바른 견해'에 의해 제거된다.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올바른 생각에 의해 제거된다. 팔정도의 나머지 여섯 요소가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생각'을 도와준다.


이제 나쁜 생각을 버리는 일이 얼마큼 중요한지, 어떻게 그것을 버리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무욕, 자애, 연민을 바르게 닦음으로써 제거된다. 인간의 마음이 욕망이나 증오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사물을 분명하게 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반드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나쁜 생각들과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생각과 대면하여 그것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음을 압도하는지 보고 배워야 한다. 즉 그 나쁜 생각들의 본질을 연구해야 한다.


만약 마음이 계속해서 욕심과 증오의 생각을 일으키도록 허용하고, 그런 생각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생각들은 강력해져서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나쁜 생각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다면, 나쁜 생각들을 몰아 낼 좋은 생각들을 계발하려고 점차 노력할 것이고, 결국 마음은 깨끗해 질것이다.


예를 들면 보고 드는 것 따위로 성적인 욕망이 일어날 때 무욕은 그를 평화로룸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애, 연민은 악의, 성냄, 잔임함, 원한을 품은 마음을 완화 시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에는 대단 결단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욕망 즉 감각적 욕구는 자연스러운 충동이기 때문에 막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억지로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상의 경지에서 본다면 욕망이나 증오는 바로 생각 즉 정신 작용이다. 자신의 욕망을 제멋대로 내버려 두거나 그것을 억누르기 전에 어떤 편견도 없이 욕망이라는 생각 그 자체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그 생각의 시작 즉 원인만 보게 될 것이다.


욕망이 커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그것을 없애려는 것도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한편으로 감각 기관이 감각 대상을 만나거나 마음이 마음의 대상을 만났을 때, 그것이 불쾌한 것이면 성냄, 혐오감, 악의 증오의 원한이 되는 갈등이 일어난다.


이와같이 감각 기관에서 일어나는 자극을 통해서 미혹으로 인한 욕망과 증오와  다른 악한 생각들이 존재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외부 대상에 미혹되면 그의 내부에는 감각이 일어난다. 즉 그는 감각 대상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싫어하게 된다 (중부 38). 원자의 경우와 같이 끌어 들이거나 반발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인간 사회가 종종 이 두가지 강한 충동 즉 집착과 협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가니 이러한 번뇌에 영향을 받는 한 인생의 변화는 계속해서 그를 억누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뇌들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다스려지기다로 한다면, 그는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인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인생의 변화를 완벽하게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을 닦아서 이러한 변화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에 동요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다.


붓다는 체계적으로 법을 설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성제를 설하지는 않았다. 상대방이 심오한 교리를 이해할 만큼 성숙되지 못했다고 생각되면 그는 점진적인 먼저 좀더 쉬운 관점에서 법을 가르쳤다. 그는 보시, 지계, 천상의 세계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한 감각적인 즐거움의 불이익, 공허함, 더러움과, 무욕의 이점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붓다는 상대방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융통성이 있고, 장애가 없으며, 의기 양양하고, 즐거울 때만 자신이 발견한 법을 그에게 설했다. 그 법이란 그들에게는 독특한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것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만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인간의 마음은 최상의 진리를 얻을 수 있다. 그릐 마음이 그와 같은 생각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는 진리를 깨달아 올바른 견해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생각이 올바른 견해를 돕는가 알수 있다. 그들이 서로 의존하며 진정한 지혜를 일으킨다.


붓다는 소문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출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자신의 출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비구들아, 보살이었을 적에 나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슬퍼하고 번뇌에 물들기 쉬운 것들을
찾아 다녔다. 그때 내게 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슬퍼하고 번뇌에 물들기 쉬운 것을 찾는가
하는 생각 떠 올랐다. 그리고 그것들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열반을 찾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 했다.


비구들아, 나는 얼마 뒤 인생의 한창 나이, 빛나는 청년기에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가사를 입고
집 없는 생활을 시작했다(출가했다)." (중부 26.36)


이것이 숭고한 구도이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왕관을 포기하고 고독한 삶을 시작한 고타마의 출가를 묘사한 매우 감동적인 경전 (Suttanipata.  Pabbajja-sutta) 속에서도 나타난다. 경전에서 이야기 했듯이 어느날 그는 탁발하기 위해 라가하 시내로 들어갔다. 궁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빔비사라 (Bimbiara)왕은 발우를 들고 걷고 있는 고타마를 보았다. 그의 당당한 풍채에 감동을 받은 왕은 그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 머무는지 알아 보라고 신하들을 보넸다. 그리고 신하들의 보고를 받은 빔비사라 왕은
판다바 산으로 달려가 고타마를 만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젊고 한창 때이며 풍채가 훌륭 합니다. 그리고 그대는 크사트리야(카스트중  바라문의
다음의 계급인 즉 왕족이나 무사계급)출신 인것 같습니다."


"오, 대왕이시여, 나는 석가족 출신 입니다. 나는 그런것을 뒤에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나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의 위험을 알기 때문에 나는 (최상의
무욕인 열반을 향한) 노력의 길을 갑니다. 나의 마음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이 노력으로
기쁨을 느낍니다."


위에서 볼 때 우리는 출가와 감각적 즐거움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가의 목적은 육욕에 대한 생각과 감각 대상들에 대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출가는 진정한 자기 희생이다. 그래서 추가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려면 출가 하겠다는 생각이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출가는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세상의 매혹적이고 감각적인 생활을 뒤로 하고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수행자가 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집에서 집이 없는 곳으로의
출가는 어렵다.
출가중에 즐거움을 얻는 것 또한 어렵다 (법구경 302)


붓다는 제자들을 지도할 때. 더 이상 출가 생활이 어렵다고 생각해서 승가를 떠난 제자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거기에 강라든가 강압은 전혀 없었다. 세속 생활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붓다는 말했다.


"비구들아,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세속적인 생활의 행복과 출가의 행복 즉 관능적인 탐닉과
무욕의 행복이 그것이다.
비구들아, 이들 가운데 출가 즉 무욕의 행복이 더 뛰어나다 (증지부 80)."


이것은 붓다가 세속 생활을 경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는 단지 자신의 경험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는 두 가지 행복을 모두 즐겼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수행자들이건 재가 신자들이건 똑같은 길 즉 계율, 선정, 지혜를 닦는 '옛길'을 따라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출가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출가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나태하고 무가치하고 빌붙어 사는 사이비 수행자들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판단하는 사람들은 성급하게 출가가 일종의 현실 도피이며, 이기적인 생활 방식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수행자인 비구는 사회로부터 최소한의 것을 취하고 많은 것을 되돌려 주는 최상으 이타주의자이다.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꽃이나 꽃의 색깔, 향기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꿀을 취한 벌처럼 성자는 마을에서 그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법구경 49)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세속적인 즐거움을 포기한 진정한 비구는 비구 생활의 범위 내에서 사심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궁핍하고 완전히 금욕적인 생활을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비구들의 생활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지속적으로 명상만 하는 생활 방식과 일정한 시간에는 명상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교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생활 방식이 그것이다. 모든 비구들은 자신의 기질, 나이, 환경에 따라 의무적으로 이 두 가지 생활 방식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


수행자가 되는 출가의 문제가 거론될 때, 불교의 수행은 비구들을 위한 것이지 재가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붓다의 가르침인 팔정도는 남자건 여자건 재가 신자이건 수행자이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법을 단지 몇몇 수행자들에게만 한정 시킬 수 있겠는가?


수행자의 생활이 고생과 궁핍으로 가득 찬 세속 생활보다 명상 수행을 하고 악한 생각들을 버리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재가 생활을 하면서 '고귀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집안 걱정과 또 다른 세속적인 근심들로부터 자유로운 이상적인 수행자의 생활이 정신적인 평화를 닦는 데 훨씬 더 적합하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재가 신자는 결코 정신적인 청정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재가 생활을 하면서도 변덕스러운 마음을 길들일 수 있고, 육체적인 쾌락에 대한 탐닉, 성적인 욕망과 자극을 증대 시키지 않고 억제 할 수 있다면, 그도 또한 수행자들이 즐기는 정신적인 극치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완전한 청정과 해탈은 완전한 초연함과 무욕을 통해 온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모든 성취는 재가 신자이건 수행자이건 간에 그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도시의 혼란에서 벗어나 숲속에 산다 할지라도 마음이 집중되지 않고, 혼란스럽고, 사악한 생각들로 혼란스럽다면, 그는 그 숲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숲으로 들어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요해서 번뇌가 사라질 때에만 그는 그 숲속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사람들이 많은 마을에 살면서도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면 그의 마음이  오염된 채 숲속에 머무는 사람보다 낫다. (중부. Discourses 5,17)


이와 관련하여 메기야(Meghiya)의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13년 뒤에 메기야는 붓다의 시자로 붓다와 함께 차리카라는 언덕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망고 나무 숲에 매료당한 메기야는 붓다가 허락한다면 명상하러 그곳에 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붓다에게 자신의 희망을 이야기 했다.


붓다는 "에기야야, 우리 둘뿐이니 다른 비구들이 도착할 때 까지 잠시만 기다려라"라고 말했다. 붓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듭해서 붓다에게 간청했다. 그러자 붓다는 "메기야야, 네가 명상 하겠다고 하는데 내가 무슨 할말이 있겠느냐? 네 좋을 대로 하거라."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메기야는 명상하기 위해서 그 망고 숲으로 갔다. 거기에 있는 동안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생각, 악의, 해를 끼치려는 생각이 일어났다. 메기야는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다. 믿음을 가지고 출가한 내가 아직도 이런 악한 생각들에 사로잡히다니.'라고 의아해 했다. 그래서 그는 붓다에게 되돌아가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했다. 그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기야야, 성숙되지 못한 마음이 해탈할 수 있도록 그것을 성숙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1)좋은 친구, 2)수행에 필수적인 계율을 따르는 행위, 3)냉정, 고요, 지멸(止滅),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좋은 조언, 4)악한 생각을 버리고 선한 생각을 얻고자 하는 노력, 5)사물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이다."  (증지부 354, 감흥어 p.34)


감각적인 쾌락을 초월해 가는 것이 무욕의 특징이다. 무욕이란 바로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모든 것에 반대되는 것이다. 무욕이란 모든 마음을 자연스럽게 열반이라는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다.


붓다는 여러 설법에서 육욕의 특성, 위험성, 불이익에 대해 설해 왔다. 그의 첫 설법에서 붓다는 육욕에 빠지는 것은 저속하고, 천하고, 비열하며, 세속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감각적인 쾌락을 포기해야 할 필요성을 제자들에게 역설하면서, 붓다는 감각적인 쾌락을 해골, (마른) 뼈다귀, 한 점의 살, 불타는 건초, 달구어진 석탄 조각, 꿈, 빌린 물건, 과일 나무, 도살장, 칼과 도마, 화형대, 뱀의 머리에 비유했다. 이것들은 많은 고통과 실망을 안겨다 준다. 그리고 이것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은 매우 크다.


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아, 감각적인 쾌락은 무상하고, 공허하고, 거짓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환상이고,
탐욕, 악의, 싸움으로 이끈다. (중부 106)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과 철저한 유물론자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도덕에 대한 따분한 설교로 들릴지 몰라도 진실을 찾고, 냉철한 통찰력으로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이나 윤리 사상가들이 성(性)에 대한 심리를 면밀히 조사 하는 것은 2,500여 년 전에 붓다가 언급했던 것들 단지 다시 발견하는 것에 불과하다.

 

'올바른 생각'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소는 선의(善意)와,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생각이다. 그것들은 네 가지 지고한 마음의 상태(四無量心.사무량심)에 속하는 자애(慈.자.Metta), 연민(悲.비.karuna)과 일치한다. 자애와 연민은 성스러운 삶에 도움이 되는 두 가지 훌륭한 마음이다.

 

이것들은 이기심과 부조화를 멀리하고 이타주의, 조화, 형제애를 촉진시킨다.  자애와 연민은 종족, 계급, 피부색, 공동체, 교의, 동서양에 관계없이 모든 중생들을 향해 계발되어야 할 마음 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무한한 상태로 열려 있다. 제한이 없고 무한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중생들을 분리시키는 계층, 자질, 지위, 권력, 학식, 가치 들에 따른 불공평이나 차등을 두는 일 없이 그들 모두를 감싸 안는다. 이것들은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들에게 편안함을 가져다 준다.


경전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두 가지 미덕은 중생들을 향한 행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도 계발될 수 있다. 이 명상을 '지고한 상태'에 대한 명상이라 한다. 이 두 미덕은 진지하고 조직적으로 계발되었을 때, 이것들은 수행자를 선(禪) 즉 명상에의 몰두(전념)라고 하는 더 높은 정신적 발전의 단계로 인도한다.


붓다는 아들인 라훌라(Rahula)에게 훈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훌라야, 자애에 대해서 명상하라. 자애에 의해서 악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라훌라야, 연민에
대해서 명상하라. 연민에 의해서 해치려는 마음과 잔인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중부.
Maharahulovada-sutta)


이렇게 볼 때 자애와 연민은 악의와 잔인함에 각각 정반대가 도니다. 감각적 욕망과 같이 악의나 증오는 감각 대상에 접하는 감각 기능들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사람의 눈이 자기가 생각하기에 불쾌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시각 대상과 접촉했을 때, 올바르고 혀명하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강한 반감이 일어난다.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의식과 의식의 대상이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기분 좋은 것들(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조차도 혐오감과 악의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구애를 했지만 상대방이 자신과 똑같은 애정을 보이지 않거나 기대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갈등과 분노가 일어난다. 올바른 사유를 하지 않고 신중하지 못하다면 그는 어리석은 짓을 할지도 모르고, 그의 행동은 불행을 초래할지도 모르며, 심지어 살인자가 되거나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의 본질을 이해하고, 잘못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어떤 불이익을 겪는가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례가 된다. 이 경우 통제되지 않은 감각적인 욕망은 강한 악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 악의는 결국 죽음, 슬픔, 한탄으로 끝나게 되는 피해와 폭력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적이 적에게 어떤(악한) 짓을 하더라도
원수가 원수에게 어떤(악한) 짓을 하더라도
잘못 인도된 마음이(사람에게) 짓는 해가 오히려 더 크다. (법구경 42)


이와 관련하여 아랴데바(Aryadeva)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주목할만하다.


"동일한 대상에 의해 한 사람에게는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는 증오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미혹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감각 대상은 어떤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악하고 나쁜 생각들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성긴 초가 지붕으로 비가 스며들듯이 욕망도 잘 계발되지 않은 마음에 스며든다." (법구경 13)


욕망이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눈먼 사람들의 욕망은 증와 다른 많은 괴로움을 가져온다.


"온 세상의 적은 욕망이다. 이 욕망을 통해 모든 악들이 생겨난다. 어떤 이유로 방해를 받게
되면 욕망은 분노로 바뀐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의 본성에 잠재해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선하고 올바른 생각을 계발하고 펼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요함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점검하고 다스려서 (중부 32),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고 그 지배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서이다. 마음을 닦는 그런 수행을 통해 사람들은 감각적 대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이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진리의 빛을 손에 넣은 성자가 때가 되어 죽고 나면, 그에 대해서 진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자신을 정복한 정복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법구경 103)


불교도들에게 메타(Metta.慈.자)는 친숙한 말이지만,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해 줄 우리말은 없다. 우정, 박애, 선의, 보편적인 사랑, 자애가 널리 쓰이는 번역어이다. 자애는 모든 중생들의 복지와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며 어떠한 구속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호의적인 친구와 같은 것이다. 자애가 직접적인 적은 악의(증오)이고, 반면에 간접적인 적 즉 숨어 있는 적은 자애와는 전혀 다른 세속적인 사랑 즉 이기적인 성적 욕구이다.


세속적인 사랑이 자애인 냥 가장했을 때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숨어 있는 적에 대해서 경계해야 한다. 종종 사람들은 세속적인 애착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것을 진정한 자애라고 착각하여 자신은 자애를 계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만약 어떤 사람이 냉정하게 그와 같은 생각들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생각들이 세속적인 애착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애의 감정이 애착과 집착의 직접적인 결과라면 그것은 진정한 자애가 아니다.


세속적인 사랑은 큰 고통, 슬픔, 비탄을 낳을 수 있는 갈망의 한 형태이다. 붓다는 설법에서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설하고 있다. [법구경]의 한 장(章)에서는 이 사실을 다섯 게송으로 강조하고 있다.


사랑으로부터 슬픔이 생기고
사랑으로부터 두려움이 일어난다.
사랑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는
슬픔도 두려움도 일어나지 않는다.


애착으로부터 슬픔이 생기고...
집착으로부터 슬픔이 생기고...
욕망으로부터 슬픔이 생기고...
갈애로부터 슬픔이 생기고...   (법구경 212-16)


알다시피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똑같이 당신을 사랑하면 둘 사이에 유대가 생기지만 그것이 짝사랑이거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이 식으면, 당신은 비참해져서 어리석은 짓을 할지도 모른다. 괴로움에 대해 설한 고성제(苦聖諦)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그러나 자애는 수은이 다른 것에 달라 붙을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마음에 있는 가장 순수하고 지고한 상태이다. 이것은 고요하며 독단적이지 않은. 미덕 가운데 가장 강한 완화제이다.


냉정하게 아무 집착도 없이,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어떤 이기심도 없이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나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어서, 이것과 저것 사이에 어떤 구별도 두지 않는 사랑, 사람 둘 사이에 벽을 만들지 않는 사랑, 그리고 무한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여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속적인 노력과 결단력을 통해 사람들은 점차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자애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무정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종종 어떤 사람이 관대하고 성실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려고 한다. 이런 일이 조장 되어서는 안된다. 이기주의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애를 부당하게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면 친절과 관용은 사회의 악과 고통을 감소시키기 보다 오히려 증가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한다.
그래서 사욕이 없는 친구를 찾기 어렵다.
단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은 추한 사람이니
홀로 걸어가라, 마치 무소의 뿔처럼. (Suttanipata 75)


붓다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불쾌한 사실이지만 그것을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자애는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육욕 즉 감각적인 집착에 덜 사로잡혀 있을 때 훨씬 더 계발하기 쉽다. 앞에서 보았듯이 감각적 즐거움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자애는 감각적인 집착이 없는 우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적 즐거움으로부터 떠나는 것과 자애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서로 도와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경전 중에서 우리는 자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몇몇 설법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자애에 대한 설법인 "메타 숫타(Metta sutta)"가 불교도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경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청정과 평화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획득해야 할 도덕적 행위의 표준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은 자애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미 행복한 사람과 평화 즉 열반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행동 해야한다.
그는 능력이 있고, 정직하고, 고결해야 하며, 좋은 조언을 따르고, 온화하며,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알아서 (남들이) 공야하기 쉬워야 하며, 할 일이 적고, 생활이 간소하며, 감관을
억제하고, 분별력 있고, 예의 바르며, 탐욕스럽게 세상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현자들의 질책을 살 민한 비천한 짓을 경계하라(그런 다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닦아야 할지니)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고 안전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행복한 마음을 갖기를!
살아 있는 중생이면 누구건, 수행자이건(아직 아라한이 되지 못한 사람들) 아라한이건(완전한
존재), 긴 것이건, 단단 것이건, 중간의 크기의 것이건, 짧은 것이건,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볼 수 있는 것이건 볼수 없는 것이건, 먼 곳에 사는 것이건 가까운 곳에 사는 것이건,
태어 나려고 하는 것이건 태어난 것이건, 모든 중생들이 행복한 마음을 갖기를!
어떤 식으로 어디에 있건 다름 사람을 속이거나 경멸하지 말지어다. 화가 나서든 악의에서든
다른 사람이 잘못 되기를 바라지 말지니.
마치 어머니가 외아들을 목숨을 바쳐 사랑하듯이, 모든 중생을 향해서 무한한 자비를 닦아라.
온 우주를 향해 위로도 아래로도 어느곳으로도 무한한 사랑을 닦아라.
장애도 미움도 증오도 없는 사랑을.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깨어 있는 한 이(자애의) 마음을 닦을 지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여기(붓다의 가르침)에서의 '고귀한 삶'이다.
잘못된 견해를 따르지 않고, 게율과 통찰력을 갖추었으며, 감각적 욕망을 버렸기에 그는 모태에
다시 들지 않으리라."


또 다른 설법(증지부 342)붓다는 자애의 수행자에게 있을 열한 가지의 축복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편안하게 자고 일어날 수 있으며, 나쁜 꿈을 꾸지 않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사랑을 받고, 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불, 독약, 무기가 그를 해치지 못하며, 마음이 매우
빨리 집중되며, 얼굴은 행복하고 평온하며, 마음의 동요 없이 죽는다. 만약 그가 최고로
청정한 경지인 아라한과를 곧 얻지 못한다면 그는 천상의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원한과 잔인함을 가진 사악한 생각들은 이러한 생각들을 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손해와 피해를 끼친다. 사람들이 화를 낼 때 몸과 마음 둘다 어떤 변화를 받게 된다. 육체와 정신이 흩어져 그의 심장은 더 빨리 뛴다. "화내지 마라. 화내면 늙는다."는 속담은 사실이다. 그렇다.


"화를 내면 그는 추해 보이고, 고통스러우며, 화가 그의 마음을 덮고 있어서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한다. 화난 사람은 의미를 알지 못하고, 생각을 보지 못하며, 마치 눈먼 사람처럼 어둠 속에 휩싸이게 된다".  (증지부 94)


이것이 화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화가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그것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자애는 스스로
화를 치료하는 가장 좋은 해독제이다. 자애는 우리들에게 화를 내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좋은 약이다. 자유롭고 넓디넓은 마음으로 이것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넓혀 가자.

 

설법 속에서 우리는 종종 붓다가 제자들을 만나자마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는 것을 본다.


"어떻게 지내느냐? 나는 너희들이 잘 지내고 음식이 부족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너희들이
서로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우유와 물이 섞이듯이 서로 화합해서 행복하고 사이 좋게 살아
가리라 믿는다." (중부31, 128, 증지부70)


붓다는 자애의 화신이었다. 그는 교훈과 모범으로써 자애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든 불경을 살펴보아도 붓다가 화를 내거나 누구에게, 심지어 반대자나 적에게조차도 불친절한 말을 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붓다는 그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논쟁을 할 때도 침착했고 동요하거나 화내지 않고 상대를 만났다. 논쟁을 즐기던 삿차카(Saccaka)는 붓다와의 토론 끝에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랄 만한 일입니다. 경이로운 일입니다. 훌륭한 고타마여! 그렇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비난의 말로 격렬하게 공격 당하면서도 고타마의 안색은 평온했고, 완전한 자,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분인 아라한의 얼굴처럼 행복 했습니다." (중부 36)


사람들이 상스러운 말로 공격하고, 강한 어조로 그를 비난 했어도 붓다는 결코 안색을 흐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미소 지었다."는 언급이 종종 나온다. 거 이야기와 관계된 [법구경]의 320번째 게송은 자못 흥미롭다.


붓다가 라자가하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붓다가 탁발을 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가자 한 사람이 악한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붓다를 욕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붓다에게 "너는 강도, 숙맥, 바보, 낙타, 황소, 당나귀다. 너는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할 희망이 없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듣고 붓다의 시자인 아난다는 몹시 슬퍼서 붓다에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들은 우리를 욕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서 탁발을 하는게 좋겠습니다."
"아난다야, 어디로 가겠느냐?"
"세존이시여, 다른 도시로 가시지요."
"아난다야, 거기서도 사람들이 우리를 욕한다면 어디로 가겠느냐?"
"그러면 또 다른 도시로 가지요, 세존이시여."
"그러나 거기서도 사람들이 욕하면 그때는 어디로 가겠느냐, 아난다야?"
"그러면 또 다른 도시로 가지요, 세존이시요."
"아난다야, 그래서는 안 된다. 소동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 소동이 가라앉을 때 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소동이 가라앉았을 때, 그때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전쟁터에 나선 코끼리가 날아 온
화살을 맞고 참아 내듯이 나는 악담들을 참아 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으로 심술궂으니라."


붓다가 제자들에게 자애를 닦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은 다음의 설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비구들아, 만약 산적들이 양날톱으로 자신의 손발을 자른다고 해서 악의를 품는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구들아,  다음과 같이 수행토록 하라.
'우리의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도록, 나쁜 말이 아니라 친절하고 자비로운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오도록, 항상 마음에 사랑을 품고  있어서 증오의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 (산적들)에게조차 사랑의 마음을 전해 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움이나 악의

없이 한없는 호의로 온 세상에 사랑을 퍼뜨릴 것이다.'
비구들아, 이것이 너희들이 할 수행 방법이다." (중부 21)


제자들에게 훈계하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아,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나나 나의 가르침이나 승가에 대해 비난 한다면 너희들은

그것에 대해 증오심이나 원한을 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걱정해서도 안 된다.
비구들아, 만약 너희들이 화내고 그들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신적 성장을 방해할
것이다. 너희들이 화를 내고 불쾌하게 느끼면 다른 사람의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별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아,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거나 나의 가르침이나 승가에 대해서 비난한다면, 너희들은
진실하지 않은 것을 해명해서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것이 거짓
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것은 진실이 아니며, 이것은 우리들의 교리가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장부 1)


붓다는 분노를 분노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하고 있다.


증오는 결코 증오에 의해서
풀어지지 않는다.
증오는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풀어지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법구경 5)


넓은 자애에는 마음을 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와 같이 지고한 생각을 퍼트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마침내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붓다의 삶을 통해 보았듯이 자애의 힘은 그가 설한 많은 이야기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라족의 조라(Roja) 이야기도 가장 좋은 예들 가운데 하나이다. 말라족 사람들은 처음으로 붓다가 그들의 도시인 쿠시나라를 방문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붓다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러나 로자는 그들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동의하고 말았다. 그리고 붓다를 보기도 전에 송아지가 어미에게 끌리듯이 붓다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이것은 자애가 지닌 정신적인 힘의 한 예이다. (율장.Khandaka)


흉악한 아라바카(Alavaka)와 무자비한 강도 앙굴리말라(Angulimala)와 술 취한 코끼리 날라기라 (Nalagiri)를 길들인 일과 그 외 몇 가지 사건들은 붓다가 자애의 힘을 보여준 좋은 예들이다.


붓다와 같은 시대의 몇몇 사람들, 특히 외도들은 붓다를 몹시 두려워해서 자신들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개종할까봐 그들을 감히 붓다에게 보내거나 만나지 못하게 한 사실도 재미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어느때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 여섯 외도중 한명)는 붓다의 말을 논박하기 위해 유명한
재가 신자인 우팔리 (Upali)를 붓다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때 자이나교도인 디가타팟신 (Dighatapassin) 은 나타풋타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분이여, 저는 우팔리가 사문 고타마의 말을 논박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사문 고타마는 남을 속입니다. 그는 마범의 주문을 알고 그것으로 다른 종교의 제자달을 꾀어 냅니다." (중부 56, 장부 190)


그들은 아마 사람들이 붓다에게 끌리는 것은 바로 붓다의 자애, 즉 그의 커다란 사랑과 친절 때문이지
마음을 끄는 어떤 책략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행복의 토대를 쌓아 가고, 더 밝고, 더 고귀하고, 더 순수해 진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나은 훌륭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한다. 증오보다 더 나쁜 불운은 없고, 다른 사람들의 적개심에서 벗어나는 데는 증오심이 사라진 마음 즉 사랑보다 더 안전한 것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붙잡고 소유하려는 욕망을 제거해서 진정 위대한 사랑을 키웠다면, 그 깨끗하고 강한 사랑은 어떤 종류의 욕망에도 더럽혀지지 않고, 사랑의 행위에 대해 물질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사랑은 확고하나 욕심이 없고, 흔들리지 않으나 속박하지 않고, 온화하며, 변치 않고, 다이아몬드처럼 딱딱하고 날카롭지만 다치게 하지 않고, 도움을 주지만 간섭하지는 않고, 시원하고, 기운을 돋우고,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위엄이 있고,  거칠지 않고 보드랍다. 그와 같은 사랑은 그를 깨끗한 성취의 절정으로 이끌어 주고, 그러한 사람에게는 결코 악의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적극적인 힘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행위는 돕고, 구원하고, 격려해 주려는 순수한 마음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길을 더 쉽고 평탄하게 만들어서 슬픔을 이기고 훨씬 서 쉽게 최고의 축복을 얻게 해 준다.


사랑을 닦는 길은 증오의 해악과 증오하지 않는 마음의 이익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업에 따라, 세상에는 진실로 증오할 사람이 없고, 증오는 점점 더 어둠을 키워 가는 어리석은 사고 방식이며, '올바른 견해'를 방해한다고 숙고하는 것이 사랑을 닦는 방법이다. 증오심을 없애면 사람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증오는 후회를 가져오고, 사랑은 평화를 가져온다. 증오는 마음을 동요시키지만 사랑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잔잔하게 하며 고요하게 한다. 증오는 분열을 낳고 사랑은 결합(유대)을 낳는다. 증오는 딱딱하게 하고 사랑은 부드럽게 한다. 증오는 방해하고 사랑은 도와 준다. 이와 같이 증오의 영향과 사랑의 이익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이해함으로써 사람들은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한다. (Soma Thera and Piyadassi Thera, The Lamp of the Law)

올바른 생각의 세번째 측면은 카루나(Karuna)로써 이는 연민을 뜻한다. 팔리어와 산스크리트가 동일한 카루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착한 사람의 가슴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떨리고 흔들리게 되는 것',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목격했을 때 착한 사람의 내부에 연민을 일으키는 것'이 그것이다.


잔인함과 폭력은 연민의 직접적인 적이고, 반면에 속된 슬픔은 간적적인 즉 숨어 있는 적이다. 속된 슬픔이 비록 친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실한 연민이 아니라 가식적인 연민이다. 그러한 연민은 기만적으로 우리는 진실한 연민과 가식적인 연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그들을 억압하는 일을 경계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안심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준다.


붓다는 몸소 실천해 보인 연민이 많은 위대한 분이었다. 그는 모든 생명체에게 크나큰 연민을 퍼뜨렸다. 그의 행위는 결코 연민노가 분리되지 않았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연민이라는 이 지고함으로 뒤덮여 있다. 선(善)과 폭력은 공존할 수 없다. 선은 건설적인 반면 폭력은 파괴적이다.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연민을 닦을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연민이라는 순수한 생각으로 채워 다른 사람들을 돕고, 다름 사람들에게 봉사하길 바라는 사람은 바로 자기 희생적인 사람이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정한 봉사를 할 수 없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이기적이고 냉정하게 되면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없게 된다. 경직된 마음은 연민, 동정에 의해서 부드러워진다. 만약 붓다의 가르침에서 연민을 뺀다면 그것은 불교의 핵심을 제거하는 일이 된다. 모든 미덕, 선, 정의가 연민을 기초와 모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닦는 바라밀은 연민에서 시작된다. 연민은 마음 가운데 부드러운 쪽이고 반면에 이해 즉 지혜는 딱딱하고 예리한 쪽이다. 연민은 이해에 의해, 이해는 연민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이들은 손을 맞잡고 가야 하며, 이 두가지가 불교의 중추이다.


우리는 연민을 슬픔에 대한 우울한 표현, 정신적인 고통의 느낌, 감상적인 생각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울지만 그것은 연민이 아니다. 만약 그와  같은 감정을 주의 깊게 분석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애정을 갖고 있는 내적인 생각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왜 우리는 슬픔을 느끼는가?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가 친척이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행복과 그와 그로부터 파생되었던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슬퍼한다.  우리는 이 모든 감정들이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문제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우리가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것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사리사욕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연민이나 동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우리의 친척이 아닌 사람들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죽어 갈 때는 친척들이 죽어 갈 때와 똑같은 슬픔을 느끼지 못할까?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 친숙하지 않고 상관이 없으며,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이미 향유하고 있는 즐거움이나 안락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우리들의 슬픈 감정이 우리 자신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것은 미묘한 심리 문제이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같은 단점,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은 감정들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마음을 고도로 단련한 사람들만이 연민을 가지고, 상황을 파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연민은 연약한 마음이 결코 아니다. 연민은 인내심이 강한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연민이란 떨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행동하도록 고무시키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구제하도록 자극하는 마음의 떨림이다. 그리고 이것은 강한 마음과 인내심과, 사무량심의 하나인 평등심을 필요로 한다. 연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연민은 부드러운 마음이기 때문에 미약한 표현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 아마 그들에게 강함을 나타내는 것은 박해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붓다의 과거 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쟈타카(Jataka)]는 보살(붓다가 되기 전의 수행자였던 시기를 말한다)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즉 절망적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했고, 어떻게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는가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생명은 모든 중생들에게 고귀한 것이지만 보살은 붓다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일들을 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과 생명까지 희생하기도 했다. 보살과 같은 위대한 사람들의 이기심 없는 보시와 자비에 대한 설명이 그 이야기들 속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지(四肢)를 보전하기 위해 재산을 버리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지를 버릴 것이다.
법(진실, 진리)을 생각하는 사람은
재산도 사지도 생명도 모두 버릴 것이다.


그와 같이 보살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도의 연민을 키웠다.


우리는 종종 갑작스러운 신음 소리를 듣거나 다른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우리는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그를 도우려고 한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를 구하기 위하여 가서 그를 구해 주고 그의 고통을 덜어 준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틈을 노려 그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진실한 연민이다. 우연히 보상을 받는다거나 인간애 때문에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단순히 공덕을 쌓기 위해서, 즉 많은 이익을 보상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돕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만약 그와 같은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접근 한다면 선행은 변색하게 된다. 선행의 결과에 대해서 너무 신경쓰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 결과는 우리들의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른다. 왜냐하면 작용은 반작용을 낳고, 씨앗은 열매를 맺게 하고, 원인은 결과를 낳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행위와 행위의 당연한 결과를 아는 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그러나 그 결과에 집착하게 되면 올바른 견해와 청정, 평화를 가로막는, 탐욕 즉 갈애를 불러들이게 된다.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했다고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거나 보상으로 좋은 수확을 거두어들이기를 기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불교도의 태도가 아니며, 사실 올바른 태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는 생각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마음의 불을 지필 연료를 보탤 뿐이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가 배고프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붓다가 말하듯이 배고픔은 가장 나쁜 우환이다. (법구경 203). 먹고 나서 그의 배고픔이 사라져, 그가 행복해 할 때 우리도 행복하고 즐겁다. 그와 같이 사심없는 행위는 우리들에게 순수한 기쁨을 가져다 준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기뻐하는 것, 이것이 무디타(mudita.喜.희)로 알려진 사무량심의 세 번째 상태이다. 이제 어떻게 사무량심이 서로 도우며 함께 작용하는가를 알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심 없는 보시에 의해 우리는 인색함이 사라지게 되고, 부(富) 뿐만 아니라 생각도 풍부해져서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 사상에서의 행위와 결과의 진정한 중요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의 행위가 열매를 맺게 되는지 알기 위해 행위의 좋고 나쁜 결과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과에 탐욕스럽게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 업의 법칙과, 업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행위가 바르게 되도록 자극받고 측은히 여기게 된다.


연민은 단순히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같은 물질적인 것들을 주거나 거지에게 동전 몇 닢을 주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순수한 동기에서 행해졌고 탐욕, 잘못된 견해, 자만이 없는 모든 행위들이 정말 친절한 행위로 간주된다. 문맹자들에게 지식을 전해 주는 일, 어리석은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을 바른 길로 안내해 주는 일, 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힘과  도덕적인 지지를 해 주는 일, 환자를 돌보는 일등이 자비로운 행위이다.

예를 들면 환자를 돌보는 붓다의 방법은 놀랍다. 그는 위대한 의사였다. 그는 우정의 마법으로 환자들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연민으로 그들을 치료했다. [법구경]의 주석서는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사밧티에 사는 한 젊은이가 붓다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한 믿음이 생겨 승가에 들어갔다. 그의 이름은 팃사(Tissa)였는데, 팃사는 얼마 후 병에 걸렸다. 처음에은 작은 돌기들이 몸에 돋아났다. 그리고 점점 커져서 터진 뒤 종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동료 비구들이 돌보기를 꺼려 그를 버리자 그는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붓다는 불을 지피는 곳으로 가서 물을 끓였다.


그리고 팃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가 누워 있는 침대의 모퉁이를 잡았다. 붓다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비구들은 침대와 환자를 불을 지피는 곳으로 옮겼다. 거기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팃사의 가사를 빨아서 말리게 했다. 환자는 아주 기분이 상쾌해져 평온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 법을 설했다. 팃사는 침착한 마음으로 법을 들었고 설법이 끝날 무렵 성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아라한과를 얻고 입적했다. 법도대로 장례식이 거행 되었고 붓다는 그의 유골들을 탑 속에 안치 하도록 했다.


(알렉산더 커닝험 장군은 그의 Archaeological Report(1862-63)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제타바나 승원의 북동쪽에는 붓다가 병든 비구의 손과 발을 씻어 주였다는 곳에 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제타바나 승원으로부터 168M 떨어진 곳에는 여전히 탑의 잔존물이 딱딱한 벽돌 구조물의
덩어리 속에 남아 있다. 높이가 7.5M 정도 되는 잔존물은 전체 61x25x9CM 의 큰 벽돌로 지어져
있다. 이것은 이것이 고대 유적임을 입증해 주는 충분한 증거이다.)


인간성은 특별한 종교, 국가, 종족이나 문화가 가져다 주는 특권이 아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우정, 동정, 관대함의 모든 해위들을 보편적인 인간성으로 안식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릇된 길로 인도되면 사람들은 '정의로운 전쟁'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획한다. 심지어 '신성한 전쟁'이라고도 한다. 정의롭건 신성하건 전쟁은 전쟁이다. 전쟁은 결코 평화가 아니며 모든 전쟁은 야만스러운 행위이다.


몇몇 경전에서는 붓다가 전쟁터로 가야만 했던 한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사카족과 로히니족이
강물 때문에 막 전쟁을 하려는 찰날였다. 미리 이 전쟁의 참화를 예견한 붓다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과 인간의 피 가운데 어느것이 더 귀중한지 물었다. 그들은 인간의 피가 더 귀중하다고 인정했고 붓다의 중재로 전쟁은 일촉즉발의 순간에 중단 되었다. (증지부 341, 숫타니파타 357)


붓다는 몽둥이를 놓게 하는 사람(무기를 놓게 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굴복시키는 유일한 무기는 자비였다. 그는 진리와 자비로 자신을 무장했다. 알라바카와 앙굴리말라
같은 흉악한 사람들과 술 취한 코끼리 날라기리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 했던 많은 사람들을 그는 자비의 힘으로 교화시켰다. 교화된 앙굴리말라는 붓다의 제자가 되었고. 아라한이 된 뒤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어떤 사람들은 몽둥이에 의해
회초리에 의해, 채찍에 의해 길들여진다.
(그러나) 나는  몽둥이도 무기도 아닌
확고부동하신 분에 의해서 길들여졌다. (장로니게 878)


붓다의 제자들은 붓다의 권유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강압적인 개종도 요구하지 않은 채 법을 전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떠났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민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 모든 중생 심지어 사람들의 발 아래 기어다니는 가장 조그만 미물도 포함하고 있다. 불교의 생명관은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자애와 연민의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는 인간, 동물, 곤충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또한 신분의 높낮이에 의해서, 빈부에 의해서, 강하고 약함에 의해서, 현명함과 어리석음에 의해서, 피부색에 의해서, 계급에 의해서, 또는 종교의 차이에 의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자비는 무한한데, 그런 잘못돤 기초위에서 사람들을 구별하려 하면 곧 분리의 감정이 일어나서 자비의 무한함이 제한되고 이것은 자비의 미덕을 설한 붓다의 이상과도 반대되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 이도의 위대한 불교도 왕이었던 아소카(Asoka)왕의 심금을 울린 것도 바로 붓다가 설한
자비의 정신이었다. 불교도가 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Bindusara)와 할아버지(Candragupta)처럼 전쟁을 좋아하는 군주였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칼링가를 침공해서 점령했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붓다가 설한 자비의 교의를 따르게 되었을 때, 그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대학살을 되돌아보고 슬픔을 느꼈다. 그래서 전쟁을 그만 두기로 했다. 그는 역사상 승리를 하고서도 전쟁에 의한 정복을 포기하고 법(정의)에 의한 정복을 다시 시작한 유일한 군주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마애법칙(磨崖法勅) 제 13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다시는 칼을 뽑지 않기 위해 칼을 칼집에 꽂았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로
했다."


동양에 붓다가 설한 자비의 교리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주로 아소카 왕의 진취적인 기상과 지칠줄 모르는 노력 덕분이다. 불교는 아시아를 온화하고 비공격적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전히 오늘날에도 아시아 국가들이 온화하고 비공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미심쩍게 여길 것이다.


왜 그럴까? 현대 문명이 아시아 대륙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문화는 널리 인정되고 있던 가치를 저버리고 나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현대 과학의 등장과 더불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데 물질적이고 외향적인 이 모든 변화와 개선은 인간성을 돌보지 않고 의도적으로 무시한 결과, 사람들을 점점 더 세속적이고 감각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몰인정 해졌다.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해서 그것이 인간의 사고와 생활 방식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감각에 속박되어 있고 물질적인 세계에서 배타적으로 살고 있어서 선(善)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약동하는 자비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할 때에만 우리는 오늘날 의심, 공포, 질투, 거만, 탐욕, 증오, 미혹으로 둘러싸인 이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심, 공포, 질투들은 이 세계를 점점 더 전쟁터로 만들고 우리들을 끊임ㅇ벗이 종말로 몰아 가고 있다.


종교적인 인생관이란 완전한 정신적인 조화와 행복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자비와 이해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때보다도 오늘날이 법의 등불 즉 진리의 등불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 : 홍사성의 불교사랑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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